[백성호의 궁궁통통]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 간디도 감탄한 ‘산상수훈’
#궁궁통1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도의 전통 종교인 힌두교 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유학한 간디는 기독교의 성경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 신자이면서도 기독교 성경을 가까이 두고 읽었다. 중앙포토
특히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설한 산상수훈은
종교 중의 종교다.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다.”
이유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에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하나 되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서 마지막, 여덟 번째 복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입니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체다카는 무엇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신의 속성, 하늘나라의 속성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의로움’에 담긴 깊은 뜻입니다.
#궁궁통 2
의로움과 박해라는 단어 때문일까요.
이 구절을 처음 읽는 순간,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사자의 밥이 되는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을 떠올리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차동엽 신부는 인터뷰에서
의로움과 박해는 그런 식으로
피 흘리는 이미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 차동엽 신부는 “산상수훈의 팔복 중 마지막 복의 핵심은 순교가 아니라 사랑이다”고 강조했다. 중앙포토
오히려
의로움과 박해는 사랑의 이미지라고 답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걸 먼저 물었습니다.
“여덟 번째 복은
‘순교’를 말하는 게
아닌가?”
차 신부는
검정 안경테를 손으로 잠시 만졌습니다.
그리고 답했습니다.
“이 구절은
팔복의 절정에 해당한다.
여기서 핵심은
순교가 아니라 사랑이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왜 가능한가.
그건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없다면
팔복의 마지막 복은
성립될 수가 없다.”
저는 다시 물음을 던졌습니다.
“박해를 받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그것이 의로움 때문이라면 더 억울하다.
그러니 고통도 배가되지 않겠나.
그런데도
박해를 받는 사람이 왜 행복한가?”
차 신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이건 역설적인
행복의 비밀이다.”
행복의 비밀이라,
대체 여기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 걸까.
#궁궁통3
차 신부는
박해받음의 가장 큰 상징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그리고 기독교인의 반응은
제각기 다 달랐다.”
예수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자 유대인들은 “돌팔이 메시아”라고 조롱했다.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에 있는 십자가 예수상. 백성호 기자
유대인은 당연히 유대교의 눈으로 봤겠지요.
철학이 발달했던 그리스인은
또 그런 눈으로 봤을 겁니다.
물론 기독교인은예수의 메시지를 통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봤을 겁니다.
“유대인은
‘돌팔이 메시아’라고 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올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의 독립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골고다 언덕에서 무기력하게 십가자형을 당한
예수는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범주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그저 ‘돌팔이 메시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차 신부는 답을 이어갔습니다.
“그리스인은
지혜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철학이 발달했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은 예수가
그저 어리석게만 보였다.
지혜가 있으면 강한데,지혜가 없으니 약하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달랐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십자가에 매달인 예수를 통해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강함을 보았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그저 죽음만 상징하는 사형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십자가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부활을 상징했습니다.
#궁궁통4
십자가의 힘,
그건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차 신부에게
그걸 물었습니다.
십자가의 뿌리 말입니다.
“그 힘은
몰아(沒我)적인 사랑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죽음도 이기는 힘이다.
결국 시련과 고통 그리고 박해를 이기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그것도 몰아적인 사랑 말이다.”
갈릴리 호수에 노을이 지고 있다. 그 위를 새들이 자유롭게 날고 있다.
2000년 전 예수 역시 저런 풍경을 숱하게 보지 않았을까. 백성호 기자
저는 그 말을 듣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도 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 불교는 자비를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오는 몰아적인 사랑이듯이
불교에서는 내가 본래 비었음을 깨닫는 무아(無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본질적인 대자비(大慈悲)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왜 행복한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물음이 하나 남았더군요.
“하늘나라가
왜 그들의 것이 되나?”
이 물음에
차 신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 있다.
그중에
왜 사랑이 제일인가.
믿음과 소망은
완성된 후에 사라진다.
사랑은 다르다.
완성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된다.
결국
셋 중에서
사랑만 남는다.
사랑은
하늘나라의 속성이다.”
기름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진다고
바다의 속성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둘은 섞이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속성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내면이 사랑으로 출렁일 때
하늘나라와 하나로 섞일 수 있겠지요.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면,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기름 한 방울처럼 둥둥 떠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하늘나라의 속성과 나의 속성이
서로 통할 때, 예수의 말씀도 이루어지겠지요.
행복하여라,
사랑으로 출렁이는 사람들!
그들은 하늘나라와 하나로 섞일 것이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예전 모습. 예수 당시에도 갈릴리는 그림 속 풍경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백성호 기자
읽고, 또 읽어도 참 놀랍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하늘나라로 가는
여덟 개의 징검다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