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독일 작곡가인 윤이상 교수, 재 프랑스 화가인 이응로를 비롯한 예술가, 학자, 유학생, 지식인들이 간첩의 누명을 쓰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하여 서독에서 납치되었던 사건이 있다.
그들이 북한 또는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인 양 조작했다.
1967년 7월 8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들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고 반정부 간첩단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이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다.
중앙정보부(김형욱 부장)가 동백림 사건을 부풀렸다는 의혹은 이미 그 당시부터 나돌았었다. 1967년 7월은 박 정권이 위기를 맞고 있을 때였다. 6월8일 총선에서 3선 개헌선인 3분지 2 지지선을 확보하기 위해 박 정권은 대규모 부정선거를 치러야했으며 이런 이유로 전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번져갔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발표로 전국은 당장 삼엄한 분위기로 얼어붙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던 박 정권 타도 외침도 언론에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연일 보도하자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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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대충 공식적인 '동백림 사건'의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한 옛날 사건의 전말을 다시 파헤치려는 건 아니다. 그 당시 독일에서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던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아는 분 중에 1963년 주머니에 단 돈 10 달러를 넣고, 한 달 반 동안 배를 타고 국비장학생으로 독일에 오신 분이 계시다. 그 10 달러는 그 분 고향의 군수를 비롯한 온 동네사람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미래의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기차역에서 전송을 하며 주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고향분들의 금의환향꿈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분은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모교대학에 교수로 재직하시다 2년 전에 정년퇴임하셨다. 아마 계속 이곳에서 사실 것이다.
한 번은 그 분 집에 초대를 받았다. 옛날에 서당을 다니셨는지 나만 보면 늘 공자, 맹자, 논어, 또 삼국지, 삼국유사 등등의 얘기를 하셔서 흥미롭기는 하나 대화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강의>다.
그 날은 맥주를 드셔서 그런지 다른 이야기를 하셨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밝은 대낮에 거리에서 그렇게 심한 공포를 느낀 적은 그 때 뿐이었다고 하셨다.
그 때가'동백림 사건' 무렵이다.
그 당시 독일 대학가에는 한국 중앙정보부요원들(태권도 10단 정도의 힘세고 우람한 보디가드같은 남자들이었다고 함)이 진을 치고 있었고, 엄연히 법이 있고 인권이 있는 남의 나라에서 소수민족의 무법천지,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의심쩍어 납치 당하면 그 즉시 한국으로 압송되는 것이다. 학교 갔다 집에 다시 돌아 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분의 신상을 걱정한 독일친구들 2~3명이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그 분이 다니시던 Bonn 대학 근처에 한국사람이 중국 식당(분식점!)을 개업했다는 말을 듣고 한국음식을 무척이나 그리워 하던 유학생들은(그 당시는 한국식료품을 거의 구입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은 다 있음) 중국식 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고 한다. 식당주인도 서비스가 넉넉했고 학생들은 자주 이곳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며 향수병을 달랬고, 당연히 그 당시 한국정치에 대해서도 토론했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있는 먼 타국이니 더 솔직히 비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그 식당주인이 그들의 대화내용을 몰래 전부 녹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비판적, 좌익발언을 했던 유학생들이 어떻게 되었을 지는 상상에 맡기자.
천만다행! 내가 아는 그 분은 그런 일을 예감하셨던지, 운이 좋으셨던지 그 식당에 왠지 가기가 싫어 친구들의 권유에도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니 이 분은 그 때의 살벌한 분위기로 인한 공포, 불안을 절실히 체험하시긴 했지만 납치되어 고문을 받은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흥분하셨고 그 당시에 느꼈던 심리적 압박감이 완전히 사라지신 것 같지는 않다.
또 그 당시 베를린대학에서 유학중이시던 한 친구의 아버님도 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받으셨다고 했다. 어쩌면 신체적 고문보다 정신적 고문이 더 고통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조사를 받는 방 창으로 보이는 뒷마당에 그 <간첩 유학생들>의 숫자만큼 땅을 파놓고 각각 ' OOO의 묘' 라고 쓰인 나무판이 꽂힌 것을 보며 고문 당하는 심정이란....
인간의 근본본능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리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런 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평생 겪어야 할 정신적 외상이란 상상할 수 없다.
윤이상 교수의 경우는 더 잔인하다. 납치도 아니었고 조국에 기여한 댓가로 <무궁화 훈장>을 수여한다는 미명아래 초대 받아 가서 붙잡혀 고문 당한 것이니 할 말이 없다.
다행히 독일변호사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독일공항에 내렸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나는 이제 돌아갈 조국이 없다.>
독일정부는 그가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그에게 즉시 독일국적을 주었고, 윤이상 교수는 <그것>을 받았다. (독일정부가 미리 그 내막을 알고도 눈 감아버린 것에 대한 사과인지 아니면 앞으로 다시 발생할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공식적으로 <독일인>이 되었고, 독일인으로 살다, 독일 땅에 묻혔다. 조국에 대한 심한 배신감으로 죽는 날까지 한 번도 한국땅을 밟지 않았던 그였지만, 한 독일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의 고향에 가고 싶다' 고 했다.
마음의 고향에서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납치, 고문, 배신, 추방할 수 없다.
첫댓글 온 몸이 피곤합니다. 독일이라는 땅이 또 어떤 곳 입니까? _()_
저는 법해님 꼬리글을 이해 못했습니다. 독일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한국처럼... 법해님이 왜 피곤 하신지도 모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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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의 많은 법문을 듣지 않았다면,,전 분명 이 글을 읽으면서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근대사의 피비린내나는 격동기의 피해자로서 고통받으며 살아오신 선배님들을 생각하면서 분노와 원망의 마음이 일렁이었을 겁니다..어렴풋이 보일 듯하는... 인연의 끈질긴 고리의 사슬을 이젠 조금씩 뭔지 모를 알 수.....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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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돌아갈 조국이 없다,~~~가슴이 저립니다, 돌아가신분을 위해 잠시 기도 드립니다,암울했던시대의 옛이야기입니다, 그시대엔 술집에서 정부 비판했다간 소리없이 잡혀가서 며칠씩 소식이 없다가 불구자가 되여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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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경제발전이 되고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억울함이 희생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남북분단의 현실에서 발생되는 많은분들의 억울한 희생에 대하여, 누구한사람이라도 알아주고 위로와 보상을 해드렸음 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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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님의 글을 읽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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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님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마음의 고향에서 그 누구도 해칠 수 없음을 잘 알아야겠습니다.고맙습니다.
북한을 구경하고 돌아왔다면,그당시엔 북한을 다녀온 사람이 잘못이다.옛말에 오얏나무아레에서는 갓도 고쳐매지말라는 말이있다 괜히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지 말란뜻일것이다. 마찬가지로 왜 북한을 여행하던지 혹은 그냥 발만 살짝 건드리고오던지 오해살만한 행동을 하지않았으면 그런일도 없을텐데.인과응보임다..
관공님의 생각은 독재정권에서 적용했던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극소수의 예술가들이었고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던 유학생들은 북한을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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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사건"에 대해선 잘 몰랐었던 내용이었었는데 무위자님 덕분에 소상히 알게되었습니다.후진국 국민으로 슬픈과거사입니다. 향후 30 ~40년후에 또다시 오늘을 회상했을때 그런 슬픈 과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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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조국은 없어도 가고 싶은 고향은 있는 곳, 마음이 아픕니다.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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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을 생각케 하는 글입니다...큰스님의 법문을 깊이 가슴에 새겨 선연을 이어 가야 겠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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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상이 꼭 옳게만 흘러가고 정의만이 판치는 세상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과거에 나븐것을 파헤쳐서 옳게 만들어 보겠다는 것도 좋지만 이런것은 정치하는사람들(정확히 해서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우리내들은 그저 범위를 좁혀서 생각하고 셍활하는게 이로울겁니다 시시콜콜 세상사 다 연관지어 정의감에 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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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견하며 사는세상도 좋겠지만 더 좋은것은 나 주위.내 주변의 일을 우선시하고 공부하는것이 더 옳은방법일겁니다 남들이야 전봇대로 피리를 불던 나는 나의 길(불자로서 수행을)을 굳건히 가며 오늘도 수행에 한발 ,하나 자기의 고집이나 관점을 털어내고 갑시다 짐이 너무 많으면 수레가 무거워 전진하기 힘듭니다 ^.^
피해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는 것도 불교수행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힙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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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의 가슴아픈 사건입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누가 그 아픔의 깊이를 알겠읍니까? 차원은 다르겠지만 지금 이싯점에서도 권력자가 힘의 원리로 유사한 일들을 발생시키지아니 하도록 우리모두 경계하여야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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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돌아갈 조국이 없단 말이 귓전에 맴돕니다_()_ 많은 생각을 되짚게 하는글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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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님, 동백림 사건은 우리들이 너무 어렸을때의 일이라 잘 몰랐던 부분인데 늦게나마 이렇게 알게 되는군요..돌아갈 조국은 없어도 어린 시절의 고향은 가고싶다 는 희생자의 그 당시의 심정이 전해 오는것 같아 가슴이 아프군요.다시는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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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지상에서 동백림사건 이야기가 실려서 어떤사건이였는지 궁금했어요. 고맙습니다. 마음이 아프네요.고인들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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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대강 알고 있는 이야기를 여기서 또다른 창을 통해, 생생하게 듣다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저려옵니다. 한국의 베토벤, 윤이상선생을 비롯해 많은 분들의 삶이 분명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과거를 잊어버린자 또다시 되풀이하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다시 없어야 할 뼈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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