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 103년 8월 4일 – 대산종사법어 법훈편
설법: 보산 김제원 교무님
초벌: 노현종 / 완성: 이하은
자, 질문 받겠습니다. 아니면 감상도 좋습니다.
읽어보신 분은 교훈편 재밌었을 거예요. 심플하고, 대산 종사님 다시 보인 분도 계셨을 거예요. 역시 아무나 종법사 하는 거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법훈편은 대종경으로 말하면 요훈품, 정산종사법어로 말하면 교훈품에 해당합니다. 요훈, 법훈, 교훈인데 훈이 된다는 의미이죠. 짧게, 짧게 새길 수 있는 법문들을 모아 놓은 것이고 아마 원불교를 처음 만나신 분은 법훈편이 참 재밌었을 거예요. 요훈품도 마찬가지이고. 사실은 대산종사 법문집 3집을 보면서 잠자는 시간하고, 밥 먹고 화장실 간 시간 빼고는 눈을 못 뗐어요. 그 정도로 좋았고, 그 법문들이 재밌고, 호쾌하고, 당당하고, 쉽고, 디테일하면서 섬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대산 종사 법어는 그 정도로 좋은 법들을 다 빼서 한 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5권의 법문집을 요악한 것이죠. 대산종사님 법문 말씀 모아 놓은 것만 두꺼운 책으로 아주 많습니다. 32년 동안 종법사로 계시면서 설법 하신 거기 때문에 이 대산종사 법어는 그 많은 설법들을 축약하고, 축약하고, 축약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읽으면서 ‘나는 이 법문이 제일 좋았다.’부터 하겠습니다. 1-2개씩만 뽑으세요. 제가 지나가면 저요 하세요.
류서현 교우: 감정에 휩쓸리는 성격인데, 외부의 경계보다 제 마음 때문에 괴로운 적이 많아서 이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무님: 사실은 이 교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고 하면 3장입니다. 부처님의 법문 핵심을 말하자고 하면 일체유심이에요. 그 일체유심조를 더 구체적으로 말한 게 이 용심법입니다. 자기마음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 심신작용을 어떻게 할 것이냐. 심신작용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이 문제잖아요. 아무리 학식, 학벌, 재산, 인물이 있어도, 마음 하나 잘 못쓰면 다 날아가고. 마음 하나 잘 쓰면 가난해도 다시 살아나는 이치가 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원리를 아는 것이 연구, 마음을 경계 속에서 지키는 것이 수양, 그 마음을 실제 경계 속에서 은혜가 되게 쓰는 것이 취사이고, 가장 좋은 취사는 사은 사요에 보은 하는 겁니다.
신대룡 교우: 항상 원불교 교리대로 살려고 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 중인데 정말 이 법문이 딱 그것인 것 같습니다.
양도인 교우: 임팩트가 아주 강했습니다. 천하가 부수려 해도 부수지 못할 것이다. 진리만 토대 삼고 나아가라는 이 문구가 저한테는 강하게 와 다 왔습니다.
교무님: 6장은 하느님만 믿으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일신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그것을 마음으로 까지 보고, 인과의 진리로 까지 보느냐 이것의 차이이죠. 진리라는 말은 진실된 도리라는 말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참되고 실한 것입니다. 진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는 진리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참 진리는 마음이요. 그것을 두 개로 쪼개면 인과와 불생불멸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한때 인기 있었던 진리는 시간이 지나고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을 알면 사정없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밟아도, 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것은 진리이고, 그것이 사필귀정이라고 말할 수 있죠.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간다. 그래서 사필귀정의 정을 바를 정이지만 정할 정이라고도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참 도가 없다면 온갖 짜가들이 설치고 다니겠죠. 계략, 권모술수, 음해가 넘쳐나죠. 그러나 그곳에는 분명히 인과의 진리와 영생의 진리가 들어있다. 참의 도를 밑에 7장에서는 열한가지로 설명하고 있죠.
이하은 교우: 진짜로 성불제중이 둘이 아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무님: 8장, 9장, 10장은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8장은 성불제중, 9장은 대각과 복, 10장은 복과 혜에 대한 설명이죠. 그래서 복혜구족, 성불제중, 복혜쌍전, 복혜양족, 복족족 혜족족은 다 비슷한 의미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보자면,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대타관계에서는 사은에 보은해야 복이 됩니다. 보은 불공을 해서 복을 지어야 복이 된다는 것이에요. 근데 복을 짓고 싶은데 지혜가 없어, 마음의 힘이 없어. 그러면 복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계문을 어긴다든지 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혜는 복의 근본이요. 복은 지혜의 근본이다. 지혜가 좀 부족해도, 복이 있으면 지혜로운 스승님을 초청해버려. 복이 없으면 초청해도 오지도 않죠. 결국 우리의 최종 목표는 복혜쌍전이지만 행복이여. 우리가 지금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원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마음이 행복을 만들고, 그 복이 있으면 또 지혜를 불러들이면서 서로 맞물리게 되어 있어요.
[완성] 원기 103년 8월 4일 대산종사법어 제 11 교훈편.hwp
12장
이초현 교우: 한국 속담에 보면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도 있을 정도이고,
기독교와 불교도 본질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한국에만 오면 기복신앙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12장 내용을 보면, 조상에게 탓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으니깐 자력을 키워서 남 탓을 하지 말고 자력을 길러서 자기가 해낼 수 있다는 내용이라서 긍정적이게 느껴졌습니다.
교무님: 우리 법문 중에 조물주가 누구냐? 또는 조물주가 어디에 있느냐는 법문이 있어요. 우리는 그 동안 조물주라고 하면 하느님, 부처님, 조상, 어떤 신이 나를 만들었다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알고 봤더니 내 심신작용이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왜 앉아 있어요? 단장이 오라고 해서? 하지만 백날 단장이 오라고, 오라고 해봤자 결국은 자기가 최종 결정해서 온 것입니다. 여주가 친구한테 가자고 했는데, 친구가 안 가고 싶으면 안 가겠지, 여주가 가자고했는데 동의하니까 왔겠지. 결국 누가 최종결정 한 거죠? 친구가 결정한 것이다. 사실은 내가 어디 가서 왕따냐. 어디 가서 환영 받느냐. 사실은 내 하기에 따라 달렸다. 어디에 가서 대우 받고 못 받는 것은 결국 내가 하기에 따라 달렸다.
누가 지었어? 나라가? 대통령이? 그것은 연의 관계야. 인은 결국 내 마음에 있더라.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했고, 조물주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마음에, 내 몸에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바르면, 결국은 인과의 인치에 따라서 복이 막 와. 그러니까 정당한 것을 죽기로써 하라는 것은 이 사회를 정당하게 꾸미라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정당하다고 생각한, 내 양심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번 해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내 습관이나 업력이나 욕심이나 에고에 속지 말고, 참 마음이 주인이 돼서 해보라는 의미입니다.
29장
김종도 교우: 저는 이 법문을 보고, 요새 이렇게 하니깐 좋아졌다는 걸 깨닫고 있는데, 법문처럼 나를 위해서 살다가 남을 위해 사는 것으로 바꾸니까 제 일도 더 잘 되는 것을 느껴서 많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박진원 교우: 저는 이 법문을 보고 반성 하게 되어서 손을 들었는데요, 처음 졸업하고 처음 직장에 갔을 때와, 처음 중앙을 맡았을 때는 남이 잘 되게 하자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몇 년이 지나고 보니깐. 조금 많이 나태해진 것 같습니다.
교무님: 행복에 관해서 책도 많이 나오고 온갖 강의도 많이 나오는데, 간단히 말하면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면 됩니다. 많은 사람은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나를 사랑하되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성불이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제중이여.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내가 어떤 사람을 도와주고 위해주면, 먹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나를 좋게 보고, 도와주려하는 좋은 인연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크고 넓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그게 인과의 이치인겁니다. 우리가 뭘 해주면 다시 돌아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이 이치인데, 우리는 받으려고만 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만 해주게 하라. 나는 행복 하고 싶지 않아도 자동으로 행복해져버린다. 이게 인과의 이치라는 것이다.
제일 멍청한 놈이 이기심 있는 놈이야. 자기 주체성이 있는 것은 좋아. 이것은 나라도 마찬가지이죠, 우리의 정체성, 주체성이 있는 것은 좋지만 국수주의를 할 때마다 망해. 옛날에 중국이 세계 제일이었지만,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영국한테 창피를 당했죠.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도 대원군께서 국수주의로 다른 문물들 들어올 길을 막아버린 것이야. 일본은 어땠죠? 일본은 네덜란드에게 포르투갈에게, 미국한테 오픈하게 되고 순간적으로 동양의 제일이 되어 버렸죠. 여러분 일본이 하와이를 왜 쳤죠? 일본은 중국을 통해서 동남아 중에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필리핀을 먹고 싶었어. 그래서 미국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보니까 미국 비행기가 하와이에서 기름을 넣고 가는 거지. 일본 생각에 하와이를 먹어버리면 미국이 필리핀을 줄 테고, 그 당시에 미국이 2차 대전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안 했기 때문에 본인들과 전쟁을 안 하리라고 오판을 했죠. 일본이 한국, 중국, 필리핀 여기저기를 다 찔러보고 다녔어요. 그렇게 분산시키다가 다 망한 거죠. 독일도 마찬가집니다. 오픈하자는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2차 대전 당시에 태평양 전쟁을 할 때 세계 제일의 군함을 가지고 있는 곳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2대, 미국은 1대 가지고 있었던 것마저도 작았습니다. 그래서 독일을 잡기 위해서 만든 원자탄을 일본에 터뜨린 거죠. 독일은 5월에 항복을 해 버렸지만, 일본은 8월까지 버텼어요. 일본은 절대 항복할 생각이 없었어요. 항복할 바에는 차라리 할복을 한다는 거야. 그래서 하나를 터뜨렸는데 항복을 안 하고, 두 개를 터뜨리고 나서야 마지못해 8월 달에 항복을 했죠. 말이 8월이지만 9월 달까지 계속 버텼죠. 어쨌든 일본이 오픈함으로써, 국을 트임으로써 잘 살게 되었죠. 지금은 동시대고, 밝아진 시대고, 평등시대고, 개벽시대가 되었단 말이에요. 이때는 마음을 터야해. 이기주의로 사는 사람이 제일 멍청해.
30장
전희진 교우: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만나면 판단을 빠르게 해서 어떻게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 하면 소유하려고 하고, 그게 아니면 쉽게 내팽겨 치는 편인데, 사람도 어떤 사람이 맘에 안 든다, 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한다하면 그 사람하고 멀리하기 쉽고 그런데, 살다 보니깐 그 물건이 다시 필요할 때가 있고. 배척했던 사람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이걸 읽으면서 제가 했던 행동들을 다시 생각해봐서 좋았어요.
이초현 교우: 제가 대학 다니면서 동아리를 할 때, 그 동아리 임원진 중 하나였는데, 거기에 조현병을 앓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티를 내고 다니지도 않았던 것을 다른 한 명이 알아서 저 친구 조현병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닌 거예요. 나중에 임원진들도 알게 되고, 조현병이 있는 사람은 결국 나중에 해를 입힐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 배척시키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은근히 따를 시켰는데, 제가 주동자는 아니었어도 방관자였으니까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 친구도 장점이 많은 친구였는데, 내가 그렇게 해야 했을까. 장점도 많고 동아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였는데. 그래서 이 법문을 보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교무님: 물건도 사실은 언젠가 두면 쓸 일이 있거든요, 대종사님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어. 그래서 편지도 오면 다시 반대편으로도 쓰시고 재활용 하시고. 성자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근면 하시고 절약하세요. 아끼지 않은 것이 없어요. 인과의 이치를 생각해봐도 그렇고 자연으로 생각을 해 봐도 함부로 생각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신앙하는 일원상의 진리는 우주 만유 전체인데, 여기서 함부로 할 대상이 있습니까? 물건하나도 그렇습니다. 나중에는 다 바뀌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물건이 지금은 쓸모없지만 나중에 쓸모 있어지고, 사람은 지금은 약자지만 나중에 강자가 될 수 있죠.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지, 우의 차이가 있고, 능력과 성과의 차이는 있어요. 그러나 인격과 권리는 동등하다. 진짜 자비는 약자를 어떻게 잘 챙길 거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집단에서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격리 시키지 않고 지켜야한다고 말하면 결국 대중에게 은혜가 되지 않죠. 전염병은 격리 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조현병 같은 경우에는 좋은 의료진을 소개시켜주는 것이 좋죠. 그냥 왕따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 사람에게 어떻게 내 힘의 맞게 도움을 줄 것인가. 이 세상에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엄청 많은데 다 쫒아 다닐 수 없으니 내 상황과 내 힘에 맞게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지혜야
31장
이도심 교우: 제가 이 법문이 좋았던 이유는, 우리가 진리라고 하면 엄청 대단한 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유형화된 것이 큰 진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넝쿨장미까지도 진리라고 생각을 하셔서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진리를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생활 속에 진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정말 내 주변에 사소한 것도 무시할 수 없고 다 공경하고, 아끼고 진리라고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생활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무님: 넝쿨장미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지대를 세워서 거기서 꽃이 피면 사람들이 좋아하잖아요. 풀 한포기 하나도 이름이 안 붙여졌을 뿐이지 아무 가치 없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듯이 내 마음 가꾸는 것도, 사람을 관리하는 것도, 물건을 가꾸는 것도 처처불상 신앙에 바탕을 해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옛날에 영광 군남 교당에 교회 애들이 불을 질러서 다 타 죽어 버렸어. 목사님이 악마들이 다니는 곳이라고 해서 말이죠. 여기 교당에는 가끔 거지 부처님이 오십니다. 거지 부처님이 화나면 얼마든지 죄복의 권능이 있죠. 죄복의 권능과 위력이 부처님만 있는 게 아니야. 열 받으면 유리창에 돌 던져서 깨버릴 수도 있고, 저녁에 불 질러버릴 수도 있잖아요. 어떤 사람도 함부로 할 사람이 없다. 지, 우의 성과의 차이는 있지만 인격의 차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판단해야 하고, 우리의 신앙은 대(大)자리의 정화신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차별이 있고, 아직 마음을 잘 못 쓰는 소(小) 자리의 편화신불도 부처님이라는 전체 신앙이고, 이것이 바로 처처불상이지요. 어떤 것이나 내가 관리를 잘하면 다 쓸모가 있어.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30년 된 건물을 부순다는 것은 조롱거리입니다. 저기는 기본적으로 100년이 넘어갑니다. 우리나라 30년만 되면 필요 없다고 다 부셔버립니다. 이 말은 허술하게 지었고, 허술하게 관리했고, 감리도 지을 때 대충 속였고, 재료도 대충 속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수대교도 폭삭, 삼풍백화점도 폭삭 주저앉았죠. 제가 특히 젊은이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새 거 살 때는 기분 좋죠? 근데 전자제품이든지, 가구든지 더 중요한 것은 관리입니다. 만약 저에게 차를 줘서 나 혼자만 탄다면 아마 100년도 더 탈거에요. 저는 원리를 배워서 알거든요, 그러니까 그거에 맞춰서 타면 돼. 자동차의 수명은 15년이다? 아니에요. 제가 독일에 갔을 때 보니까 독일은 퇴임자들이 tv 새로운 것 나왔다고 탁 새 걸로 사버리지 않고 10년, 20년 아껴서 씁니다. 그렇게 돈을 아껴서 박물관 지을 때 쓰고, 국가에 헌납해요. 그렇게 해서 국가 자산이 0.3%가 늘어요.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것 나왔다고 하면 금방 갈아버리죠. 저는 구두사면 20년, 제가 입던 몸빼 바지는 30년을 입었던 것입니다.
지금 원불교 박물관 가보면 대종사님이나,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 쓰신 물건들을 보면 정말 깔끔해요. 패션으로써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알고 꾸며야죠. 수수하고, 미를 모르는 사람이 근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검절약하는 사람이 멋을 알아서 꾸밀 때는 꾸며, 그래서 파티에 갈 때나 경사에서는 꾸미고, 쓰는 거예요. 정말 예쁜 것을 사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절약된 것을 보다 생산적으로 돈을 쓸 수 있고, 약자를 도와줄 수도 있고 자선이나 복지나 교화에 돈을 낼 수 있는 것이죠. 뭣도 모르는 사람이 검소하다는 말도 잘못된 말입니다. 백제문화는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은근하면서 기가 막히게 기품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사는 옷이나, 가방이나, 신발이나, 가구나 이런 거에 백제 문화 같은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보면 불수록 기품이 있고, 품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대각전에 있는 무늬는 제가 백제 문양을 넣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다 자기 취향에 맞게 하지만, 보다 좀 근검하면서도 충분히 멋도 내고. 자기가 디자이너나 예술가 계통이면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보통사람은 그랬으면 좋겠어요.
35장
심현승 교우: 하루하루가 쌓여서 1년이 되고, 그 1년이 쌓여서 일생이 되고, 일생이 쌓여서 영생이 될 텐데, 요즘 상시일기를 대충 쓰는 것 같아 반성이 되었습니다.
교무님 : 2장에도 그렇고 하나와 관련된 법문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대종사님께서 성성이 법문을 해 준 것이 있어요. 성성이라는 오랑우탄 같은 것을 잡으려고 술을 놔두었는데, 그 성성이가 “에이~나 잡으려고?”하면서 웃고 지나가다가 쓱 와서 “에이 한 잔이면 어떻겠어” 하고 먹었는데 그 술이 맛있어. 그래서 또 “한 잔 더 먹어도 괜찮겠네.” 라면서 마시다가 취해, 그러다 잡혀서 뒤져. 이게 바로 처음부터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그만 구멍 하나 때문에 큰 둑이 무너지는 거예요.
이번에 SK에서 건설해준 라오스 댐이 무너져서 벌써 실종인원이 100명이 넘고, 사망자도 2-30명 됩니다. 그걸 지금 우리나라에서 들어와서 같이 검사하자고 하고 있는 거예요. 아마 제대로 물어 주면, 한 사람 앞에 6만 얼마를 그 나라 돈으로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고 있어요. 근데 돈도 돈이지만 그 많은 생명들이 죽었잖아요. 비가 오는 줄을 아는데, 왜 방심해? 1주일 전에 알아서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어요. ‘괜찮겠지.’ 그 생각이 망한 거예요.
한 잔쯤, 한 번쯤, 하나쯤 그러다가 가는 거예요. 아무리 큰 산도 조그만 먼지에서 온 것이에요. 이게 바로 이소성대이고 천리의 원칙이죠. 어떤 큰 것도 다 작은 것이 모여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디테일해야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 토론자들이 한번 토론을 하면 그냥 말로만 하죠. 그러나 선진국들은 달라요. 그 일을 분석을 하고, 양식을 짜고, 장점과 단점을 찾아내고, 데이터를 빼서 정확하게 설명을 해요, 그러면 눈에 톡 들어와. 대강대강 말로 때우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디테일하게 합니다. 디테일할수록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듬성듬성 대강대강은 그냥 대강 인생이 돼요. 대강이 성공할 수가 없죠.
결국은 죄복도 순간순간 하나가 쌓여서 그런 것이다. 무형의 마음이 쌓이는 것이에요. 여러분들 수양을 하거나 또는 참회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마다 다양한 반응이 나와요. 그것이 바로 무형의 세계에 축적된 업력 또는 업식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완전히 나와야지 비로소 그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업력을 가볍게 한다는 것이 수양, 참회로써 내보내는 것이죠. 근데 업력이 언제부터 있었느냐하면 그것은 원래 없던 것이에요. 하나하나 켜켜이 쌓여서 누적이 되어요. 그래서 진짜 마음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지금 이 순간 이 마음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게 가장 큰 공부요, 가장 중요한 시점이요, 가장 소중한 대상입니다. 이 순간순간을 놓치고 다음다음, 아니면 나중에, 아니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은 버려야 합니다. 요것만 알아가도 오늘 법회 때 정말 큰 은혜가 됩니다.
45장
양도인 교우: 제가 좋아서 오늘 사회 보면서 함께 봉독할 법문으로 넣었었는데, 6월까지는 수행을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고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했었는데, 7월에 굉장히 바빠진 뒤에 상시일기장을 보니까 제가 마음을 되게 못 챙기며 살았더라고요. 바쁘고, 일이 많다고 해서 챙기지 못하면서, 꾸준히 쉼 없이 하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이라는 것을 제 상시일기장을 보면서 자각을 했어요. 그래서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무님: 이 법문의 핵심은, 부처는 씨가 없다는 것입니다. 왕후장상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는 핑계대지 않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하냐면 씨가 좋아서, 인물이 좋아서, 집안이 좋아서, 또는 좋은 학교 나와서 어떻다고 이렇게 착각을 하더라는 겁니다. 사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정성이지만 누구나 하기 어려운 것도 정성이더라. 그래서 성자는 정성스러운 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즉성이고, 성즉신입니다. 신이 누구냐? 정성스런 사람이 신인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정성을 들이다 보면, 그 속에서 묘하게 나중에 탁 조화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물이 어느 정도 끓다보면 기체로 변하고, 불을 만들기 위해서 나뭇가지를 열심히 막 비비다 보면 어느새 연기가 나죠. 툭 하면서 조화가 나와요. 여러분들 마음은 원래 공, 원, 정이라는 기가 막힌 원만 구족하게 갖추어진 것이 있기 때문에, 공을 들이다 보면 그 마음이 발현되게 되어있어. 그래서 먼저 그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멍청한 놈이 아니다, 하면 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야하죠. 그래서 놓지 않고 꾸준히 하다가 어느 순간에 타이밍이 맞으면 능력과 조화가 나오더라. 하지만 자력으로 하다보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타력을 힘입어서, 자타력 병진으로 꾸준히 해보라는 것입니다. 교법의 타력, 스승의 타력, 진리의 타력, 회상 동지의 타력에 힘을 입어보라는 말씀입니다.
48장
강혜지 교우: 사실 제대로 된 서원을 세우는 것이 저의 목표이긴 한데, 제가 유무념을 잡거나, 서원 비슷한 것을 잡고 갔을 때 자꾸 그것을 까먹고, 제가 외부의 환경에, 경계에 따라서 휘둘리는 것을 봤어요. 그럴 때마다 변해가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내가 잡은 서원이나 유무념을 자꾸 잠깐잠깐 까먹는 것을 봐서, 이 법문처럼 나도 어떤 난경과 곤경을 당할지라도 서원과 맞바꾸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하다보면, 그 서원을 잊지 않고 가져갈 수 있겠다고 느꼈고, 이 법문이 저한테 필요한 법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하은 교우: 저도 혜지교우님처럼 저한테 필요한 법문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 48장을 보면 서원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결하게 설명해주시잖아요, 그리고 이 법문을 서원이 흔들릴 때마다 상기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너도 할 수 있다는 힘 같은 것을 주는 느낌을 받아서 그랬어요.
교무님: 서원과 반대는 작은 욕심이에요. 서원은 큰 욕심입니다. 서원은 너무너무 크기 때문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는 겁니다. 서원은 꾸준하게 가지고 가는 것이고, 이 서원에게 갖다 들이대면 애지간한 작은 욕심은 다 녹게 되어있어. 사람들이 왜 중간에 하다가 그만두죠? 욕심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서원은 챙겨서 반조하는 것이에요. 왜? 욕심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들어옵니다. “야야야”하면서 계속 꼬시죠. 욕심이 꼬실 때마다 큰 욕심인 서원을 대조해보면 그것은 녹아버립니다.
서원과 신심하고 욕심을 바꾼 놈이 제일 멍청한 놈이에요. 너 때문에 내가 나간다하고 가는 놈이 제일 멍청해요. 아무리 지가 더 잘했어도, 결국엔 더 못 하더라도 안 나간 놈이 잘한 놈입니다. 이 서원과 신심하고는 바꿀 것이 없습니다. 바꾸지 마요. 제일 멍청한 놈이 서원을 놔 버리고, 믿음의 세계를 놓아 버리는 놈이에요. 지가 성질나면 성질 난 거지, 왜 서원을 놔 버리고 욕심 세계로 가고, 왜 신심을 놔 버리고 불신의 세계로 가? 여러분들에게는 온갖 경계가 와요. 안 올 수는 없잖아. 대신 여러분들이 그 때마다 내가 여래가 되겠다는, 부처님이 되겠다는, 불보살 성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불보살 성자는 복과 혜가 구족한 가장 행복한 존재예요, 그런 성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죠. 그것이 진정한 고집이고, 진정한 남자고, 진정한 여자지.
설사 다른 것 좀 못해도 돼, 내가 정말 부처가 될 마음과는 어떤 것도 바꿀 것이 없다. 아무리 경계가 와서 성질이 나도, 누가 옆에서 뭐라 해도, 결국 서원을 놔 버리면 나만 손해다. 그래서 핑계를 대지 않고 쭉 가지고 가야해. 서원 대조 같이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가볍게 문턱 넘듯이 넘어가는 것이 바로 서원대조에요. 그러니까 서원이 불분명하면, 대조할 수가 없죠. 서원은 여러 가지여, 성불제중, 제생의세, 일원상, 여래 등의 말로 불리죠. 저 같은 경우에는 처음 출가할 때, 영생의 행복자가 되자는 것이 제 서원이었어요. 눈 감을 때 후회하는 것 말고.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고, 다음 생에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서원이죠. 인과와 영생의 이치를 포함한 말이 서원입니다. 한 때 좋고, 한 때 안 좋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까 참 (진)자를 쓰는 진리처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때 비로소 든든하고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이죠.
49장
김유진 교우: 저는 조복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천하를 제도할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조복이라는 말을 찾아봤는데, 신, 구, 의의 삼업을 조화롭게 사용해서 악행을 제도한다는 뜻이더라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나를 잘 사용하는 사람이 천하를 제도할 수 있다는 말이 좋아서 와 닿았습니다.
교무님 : 이 법문이 짧지만 진짜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에요. 여기서 몸은 아닌 나를 뜻해요. 조복은 고를(조)자를 써서 항복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갖 하기 싫은 마음, 더 먹고 싶은 마음,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을 먹고 싶은 마음, 또 이성적으로 당기는 마음, 쾌락을 향하는 마음 등 온갖 것들이 나오지요. 이 몸 좀 편안하게 해주려고, 이 몸 좀 빛나게 해주려고, 이 몸 좀 더 멋지게 보이려고, 온갖 것들을 다 하는데,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주인이 돼서 몸을 쓰느냐. 몸이 주인이 돼서 마음을 부려먹느냐. 거기에 따라서 법위 등급이 나누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신심을 원불교에 바칠 때가 특신급이고, 신심이 과거의 욕심, 습관, 업력과 뒤지게 싸워, 그것이 신심교전이고, 법마상전급이죠. 여기 아직 법마상전급 한명도 없어요. 여기서 더 들어가면 신심이 조복을 받는 것이야. 최소한 항마위가 되어야 비로소 내 몸을 조복받아요. 쉽게 말해서 내 신심이 욕심을 이길 수 있고, 마음이 몸을 이길 수 있어야 해.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백전백승이야. 그래야 천하사를 할 수 있어.
50장
김종도 교우: 저는 아까 29장 때 말했던 것처럼, 이 법문이 제 상황과 공감이 되어서 손 들었습니다.
윤은형 교우: 이 법문을 읽자마자, 제가 지금 취업준비생이라서 남이 잘 되기를 겉으로는 잘 하는데 속으로는 진심으로 저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제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까. 저희 회사에 저 포함해서 인턴이 4명이 있는데, 다들 8월에 계약이 만료가 돼요. 그래서 다들 다음 직장을 구하는 상황인데, 넷이서 으쌰 으쌰 하면서 서로 취업준비를 도와주고. 한 명씩 통과를 하는 좋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요. 내 취업만 작게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4명이 다 같이 합심을 해서 하니 서로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법문 말씀을 최근에 경험하게 되어서 더욱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박진경 교우: 딱 저를 위한 법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제가 일하면서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정말 이 사람 꼴불견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속으로 되게 미워하고, 잘못되라 이런 적이 있었는데, 철이 없었다는 생각도 들면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짓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마음을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무님: 나와 남의 관계는 자타불이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타가 구분되어있어. 그래서 상대심이 나고,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거야.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우주만유의 본원으로써, 대자리에서는 다 하나야. 하나이면서 둘이다. 그리고 둘이면서 하나야. 이걸 아셔야해. 그래서 대이면서 소고, 소이면서 대여. 이해가 돼? 많은 사람이 상대와 나를 구분만 할 줄 알지? 그래서 상대심에 속아. 안과 밖이 둘이 아니고, 하나야. 일본사람들이 살갑게 인사를 해주지만 그런데 마음은 아니라고. 우리와 일본이 개인적으로 친하지만 국가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죠. 독일에 유태인들을 기리는 곳에 가 봤는데, 그 곳에 일본사람들이 한 명도 없어. 왜? 국가에서 못 가게 해. 독일은 일본이랑 다르게 엄청나게 참회해. 아마 독일이 이만큼으로 유태인들에게 지원을 안 했다면 미국보다 더 잘 살았을 겁니다. 그 만큼 많은 참회를 하면서 지원을 했어요. 지금도 독일은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유태인 학살한 장소에 가서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않겠다는 교육을 해요. 일본은 철저하게 국가적으로 외면하죠. 그리고 이중적이야. 겉으로는 웃는데 속은 안 웃었어. 하지만 그렇게 살면 손해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둘이 안 된 것이야. 하나만 생각하면 안 돼. 때로는 대 자리에 대해서 진리불공하고, 때로는 소 자리에 대해서 사실불공을 해야 하는 거지.
54장 55장
박진원 교우님 : 저는 54장, 55장 법문을 보면서 아까와 비슷하긴 한데, 애들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제가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인데, 가르치는 것도 범위가 얕지만 많고,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있으면 판단을 해서 훈육을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저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애들에게 훈육을 하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애들이 놀고 나서 정리가 안 돼서 막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데, 막상 제 자리를 보니까 제 자리도 너무 지저분한 거예요. 그래서 제 자리 치우면서 애들도 같이 치우게 하기도 했고. 그래서 나도 애들한테 좀 더 모범이 되는 교사가 되려면 나 먼저 실천하고 나 먼저 노력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1학기 때는 그래도 공부를 좀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막상 방학이 되니깐 또 놀고 싶어서 마음이 잘 안 챙겨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법문 보니깐 또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교무님: 옛날에 어떤 교무님이 출가를 해서, 예비 교무, 부교무 거쳐서 주임 교무 발령을 받았어. 근데 일찍 출가해서 나이가 좀 어린거야. 그니까 깝깝하지. 그래서 걱정이 돼서 종법사님한테 갔더니 종법사님이 “너 상시 응용주의 사항이랑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 배웠냐? 그대로 해라 그러면.” 또 한 번은 향산 안이정 선진님이 “교당을 가려니 어떻게 할까요?” 이랬더니 이신선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먼저 몸으로서 앞에 나가서 솔선수범하라는 뜻이에요. 또 어떤 사람이 “저는 실력이 없어서요.” 라고 말한 데에는 “정성이 실력이다. 교법대로 해봐라. 몸으로 먼저 솔선해라, 정성을 해봐라.”라는 말씀을 해 주셨지요. 그래서 결국은 나만큼 교화를 할 수가 있어요. 나만큼 가르치고, 내 그릇만큼 교화할 수 있는 거예요.
62장
윤성권 교우: 많은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일 텐데, 미팅 같은 것을 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최대한 안 하려고, 빠지려고 하고, 나한테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법문을 보면서 그러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긴 하는데, 막상 월요일에 회의를 하면 또 숨어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노력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초현 교우: 제가 요새 하는 일이 실험만 해보면 되고, 실적을 못 낸다고 해서 잘리는 것도 아니어서, 쉴 때는, 꿀이나 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하고 같이 일을 하면 내가 빠져도 일은 진행이 되니까 좀 빠져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일을 안 하다 보니 일을 배울 기회가 없고, 나중에 일을 할 때에도 주도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한 달 전부터 열심히 노력중입니다.
교무님: 초현 교우 요새 공부를 잘 하고 있는데. 누가 편한 게 좋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누군가가 해야 된다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서 대산종사님께서 네가 안하면 복은 다른 사람한테 간다고 얼마나 쉽게 표현을 하고 계세요. 인과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다른 점이 뭐냐면, 천당에도 지옥에도 긴 숟가락이 있어. 근데 지옥은 자기가 긴 숟가락을 자기 입으로 넣으려고 하니까 서로 못 먹어, 천당은 서로 떠먹여주니까 서로 행복해. 어떤 거 선택할래요?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남에게 미루면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나는 손님이라는 것이죠. 배울 기회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보면, 팀으로 발표하라고 하면 서로 떠밀죠? 단에서도 일기 써오라고 하면 안 하려고 하고. 중생들은 그래요, 근데 그 마음은 경계 따라 누구나 들 수 있는 마음이에요. 근데 그 마음을 서원의 힘으로, 교법에 대한 믿음의 힘으로, 공부심으로, 공부 삼아 해 보자고 돌리는 거예요. 하기 싫지만 “에잇~”하면서 해보는 거지. 이 말이 용기 있게 해보자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마음이 묘하게 힘을 타요. 그리고 하고 나니깐 이렇게 좋구나 하면서 체험이 생기는 거지. 내가 만약 초현이 상사야, 그러면 초현이 마음 알 것 같아 모를 것 같아? 다 알죠. 아랫사람 보면 키워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안 키워주고 싶은 사람이 있죠. 누가 그렇게 만들었죠?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죠.
옛날에 미군들이 우리나라 왔을 때도 미군들한테 잘 한 사람 있어요. 그 사람들은 다 미국으로 데려가서 다 교육받아서 유명한 박사가 돼서 우리나라 와서 장관되고 그런 사람 많아요. 근데, 적당히 눈치 보면서 적당히 잘해준 사람은 누가 데려다가 키워주고 싶을까요? 결국 내가 안 하면 내 복은 없고, 대신 저 사람이 하면 복은 저 사람이 가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권을 상실하지. 많은 사람은 이익은 받고, 권리는 부리고 싶지만 의무는 안 하려고 해. 그러면 권리를 박탈당하는 거예요. 완도에 있을 때 우리 선배하고 같이 근무했는데, 일을 잘 안 해, 그러다보니까 선배가 내 지시를 받아야 해. 비록 선배지만 일을 안 하면 결정권을 박탈당하는 거예요. 편한 돼지가 되실래요? 아니면 부지런한 부처님 되실래요? 선택하시라.
68장
정예성 교우님: 가장 간단명료하지만, 마음에 와 닿았어요. 몸은 낮게라는 말이 어르신들을 대하면서 저를 볼 때 목이 아프시니깐 몸을 낮춰서 대하려고 하거든요. 근데 법문에도 이런 말이 나오니깐 새롭게 와 닿았고, 라임도 좋고, 되게 좋은 말씀인 것 같아요.
이도심 교우님: 저는 써서 붙여놓고 살고 싶을 정도로 정말 이렇게 살면 부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것을 표준으로 살아가 봐도 될 것 같아요.
교무님 : 몸을 낮게 하냐, 뻣뻣하게 목에 힘줄 것이냐, 아니면 마음을 넓게 쓸 것이냐, 쫌팽이 같이 좁게 쓸 것이냐, 즐거움을 나만 차지할 것이냐, 함께 동거동락할 것이냐. 이거죠? 법문 보시면 몸을 낮게 하는 것 옆에는 평등무아라고 되어 있어요. 왜 몸을 낮게 할 수 밖에 없느냐? 근원적으로 나오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성품은 본래 평등하고, 잘난 나도, 못난 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몸을 낮출 수 있고, 고개 숙일 수 있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안 되니까 잘못해놓고서도 뻣뻣해져. 그러니까 상대는 더 성질이 나지. 얼마든지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고개를 숙일 수 있어. 자존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고개를 못 숙이고 드는 거야. 고개를 빳빳하게 들수록 못난 놈인 겁니다. 나는 잘난 놈이라고 하면 고개를 숙이는 사람인겁니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지. 원불교 공부하다보면 내가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반대되는 것이 정말 많을 겁니다. 누가 존경받아? 돈 있는 사람? 아니야. 하심 하는 사람이 존경 받아. 누가 겸손할 수 있어?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이 겸손할 수 있어요. 흔히 이 법문을 공부하지 않으면,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갔는데, 알고 보면 더 힘든 자리로 찾아가는 예가 참 많아요. 그래서 공부를 하고 볼일이다.
오늘 73장까지 짧게, 짧게 진행했습니다. 이제 질문 있으면 하시죠.
김종도 교우: 66장에 참사람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게 정확하게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교무님: 참사람은 진인을 말합니다. 참 (진)자에 사람 (인)자를 써서. 참사람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어요. 하나는 우리의 수행을 잘한 무등등한 대각도인, 하나는 우리의 신앙을 잘해서 무상의 대봉공인. 이 사람들이 진인이라고 했어. 법문에 있어요. 쉽게 말해서 수행을 잘해서 대각을 하신 도인, 신앙을 잘해서 무아봉공을 하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깨닫지도 못하고 큰소리치고, 뭐 좀 하면 상내고 그러죠? 그게 아니고 내가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 참 사람이다. 자기 애쓴 것을 알아줘, 알아줘하는 사람은 참 사람이 아니죠.
자 또 질문?
이도심 교우 : 아까 자타불의라고 하셨는데, 제 참된 성품 자리를 보는 것이 견성이잖아요. 그러면 견성을 하게 돼도 자기의 지난 습관과 업력이 있어서, 그것들이 잘 고쳐지지 않는 것도 있는데, 만약에 견성 이 전에 남과 나를 구분 짓는 습관이 있었다면 견성을 해도 자타불의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무님: 아니죠. 견성을 안 한 놈한테 말하기는 그렇다마는, 견성은 자타가 불의라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성품 자리를 대조하면, 즉 자성 반조죠. 자성의 지혜가 솟아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녹아나는 겁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어떤 상대심이 드는 것은 그 동안 해 왔던 업력의 탄력에 의해서 1차적으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경계 따라 있어지는 것은 당연해요. 그렇지만 그 때 멈춰서 ‘에이~ 내가 또 속을 뻔했네, 차별심에 속으려고 했네, 아닌 마음에 속으려고 했네. 에이 원래 차별이 없는데.’하면서 한 순간에 돌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견성을 했다고 해서 습관이 한 번에 고쳐지거나, 한 방에 뭐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더라. 그래서 견성 다음에 있는 숙제가 성불이에요. 성불이라는 것은 계속 정기, 상시 훈련을 통해서 내가 아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계 속에서 내 마음을 교법으로, 체질화 될 때까지, 자동이 될 때까지 반복 단련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음 주에 정기 훈련 절대로 빠지지 마시라. 그래서 내가 더 나아가서는 성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중으로 가는 것이죠. 그래서 견성-성불-제중이고, 이것을 삼학으로 말하면 연구-수양-취사인 것입니다.
18장
류서현 교우: 인류 헌장표어와 성직자 표어를 구분한 이유와 각각 무슨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무님: 인류 헌장은 어떤 공통분모로써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성직자는 이제 모범이 되어서 솔선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차이가 조금 생기는 것인데, 인류가 보편타당하게 할 것과, 그 인류를 인도하는 지도자로써 가져야 할 것이 약간 다른 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질문 더 없죠? 그러면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현종, 하은 교우님!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