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참 무덥습디다....더위가 일찍 찾아온 5.31, 문경 이강년의병진 진군로 답사를 문경시청 황용건님과 다녀왔습니다.
황용건님이 나를 안내해서 데려간 곳은 산양중학교 뒷편 금천강변길 둑길입니다...여기서 안내한 내용은 동학란때 산양에서 일어났던 접주들과 동학도들의 활약...그리고 향촌의 대응과 경과 등에 관한 내용이엇습니다.
문경 장수황씨종택입니다.문경 가볼만한곳.솟을대문이 있고 왼쪽으로 2칸,오른쪽으로는 1칸을 내어 방을 꾸민 행랑채입니다.종손께서 어릴 때는 8칸의 행랑채였다고 증언합니다.들어가면 정면에 사랑채,좌측으로 사당인 숙청사가 있고 우측으로는 중문채와 그 안쪽으로 안채가 있다.
이곳은 문경 장수 황씨 사정공파 후손들이 400년 이상 터를 잡고 살고있는 곳으로... 황희정승의 둘째아들인 황보신이 상주에서 살았는데(상주출신 홍여강의 딸과 결혼)...상주에서 문경 산북면 으로 들어온 사람은 황보신의 손자 황정(사정공,司正公)으로 황정(黃珽)은 삼척부사를 지낸 아들 황사웅에게 재산상속과 관련한 분재기 내용등을 전해주었다고 하는군요...그 분재기에서 증조부인 방촌(尨村)선생께서 손수 쓰시던 유물을 특별히 부탁하셨죠.그래서 방촌선생이 스시던 유물은 손자들이나 증손자들이 몇개씩을 나누어 가졌으나 전국에서 이곳 한두리 장수황씨종택만 유물이 보관돼있고,황희정승 영정을 모신 숙청사(肅淸祠)에서 해마다 생신일(음력 2월 10일)에 후손들과 지방유림들이 모여 다례행사(茶禮行事)하는데 제향(祭享)을 올일 때와 비슷하다고한다 ....내년에는 황희정승 다례행사에 참석해보고자 합니다.나는 마누라가 예기안해주면...잊어 먹는데...클낫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과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현감을 지낸 칠봉(七峯) 황시간(黃時幹, 1588~1642)이 35세때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그래서 세거는 500년이상,고택을 지은것이 400년이상되었다고 하는군요.탱자나무도 400년이상...도천사 (道川詞)자리에 있는 반송(盤松)도 400년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청백리 황희(黃喜`1363~1452) 정승은 성군 세종대왕을 잘 보필해 세종(世宗)이 선정을 펼치는 데 크게 기여했던 분이다.고려 공민왕12년(1366년 2월 10일) 개성 가조리 출생.문종 2년(1452년 2월 8일 )90세로 逝去하였다.
2월12일 세종 묘정에 배향.6조판서 3정승을 모두역임햇다.이조판서 3번,형조와 예조판서는 2번역임.정승자리에만 24년 그 중 영의정(領議政)자리에만 18년 재임.역사상 가장 뒤언 재상이자 淸白吏의 표상이다.위대한 名君 世宗과 만나서 역사상 국운이 가장 융성(隆盛)한 時代를 이룩했다.이것을 역사는 하나도 모르는,말하기 좋아하는 멍청한 사람들은 황희정승이 세종한테 아마도 뇌물을 썼을 것이란 소리들을 할수도 있겠다.세종께서....뇌물을 먹었을까?안먹었을까?
종손인 황규욱선생님은 문경에서 유명한 서예의 대가이시죠...서예학원도 운영하고 계시고...문경문화원 부원장님이시고...서예대전 심사위원도 하시는 분입니다...문경지역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솔선수범하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종택의 사랑채에 걸린 편액들(현판)...도촌유거(道村幽居).....도촌(道村),大道村(학덕 높은 선비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품위와 예술..철학과 담론이 담겨있습니다
‘오래도록 사모하는 큰 집’이란 뜻의 영모(永慕)와 돈서(敦敍)편액은 담당 송우용( 澹堂 宋友用 1863~1941,충북 영동 출신) 선생의 필치다.
경상북도 기념물 125호인 장수황씨 종택의 탱자나무-두그루가 나란히 자랐는데...마치 한그루 같다...400년이상된 고목이다.
장수황씨 종택안 사랑채 뒤란의 암각서...집안의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랑채의 천장은 무게중심을 나누기 위해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아마도 우리나라에서 한옥구조에서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할수있겠다.
문경 장수황씨종택의 황규욱 종손과 함께한 개털기사
황희정승의 영정을 모신 숙청사를 담너머로 찍은 것
숙청사 안 마당에 있는 연리지.두 줄기가 하나의 줄기로 합쳐졌다.....참 신기하다...
사당인 숙청사
위는 중간채인데...좌측부분은 화마가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의 천장은 무게중심을 나누기 위해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아마도 우리나라에서 한옥구조에서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할수있겠다.
안채전경....안채는 뒤로 돌아가면서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 서울서 오신 손님이 호산춘 술을 사갑니다...
호산춘 전수장학생 항수상 (차종손)과 함께한 개털기사.
술에 붙은 이름이 주(酒)가 아니라 봄, 여자를 뜻하는 춘(春)이라니. 알고 보니 당대부터 술 이름에 흔히 춘자가 쓰였다고 하는데 황실이나 사대부가에서 특별히 빚거나 소주를 내려 먹던 고급 특주에 사용하는 별칭이란다. 격식과 품격이 다르며 술 마실 때 예절 자체가 다른, 고매한 술이라는 뜻이다.
이곡(배나무정이)이다.아래사진은 이곡을 지나치면서 우측으로 보면 고개뒤로 멀리보이는 공덕산과 천주봉이 보인다.
운강 이강년 의병진은 1907년 정미의병때 재창의하여 제천으로 부터출진하여 충주성을 공격한뒤,제천-단양-예천 명봉사-문경 적성(동로면 소재지)을 거쳐 공덕산과 천주봉의 사이길 고개를 통과하여 이정으로 온것이다.김용사가는 입구의 이곳인 이정(이곡,배나무정이)을 거쳐서 본진은 김용사로 갓고..이강년의진의 별동대는 장수황씨종택이 있는 한두리마을로 진군했다.그리고 한두리 마을에 강학당을 열은 신식학교(도천소학교)를 불질렀다.종택만 빼고는 한 마을 전체를 불 지른 것이다. 일진회에 가담한 친일인사가 일본인 교사를 초빙하여 개화교육을 시키는 것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구국(救國)을 향한 개화와 (개명)과 위정척사의 충돌(衝突)이었다고 생각된다.
신식학교를 의병진이 공격한 예가 몇군데 있다.민긍호 의병진이 제천의 신식학교를 공격햇고,신돌석의병진이 울진의 신식학교를 공격했고...예천과 영주에서 활동하던 최성천의병진이 안동 내앞마을의 협동학교를 공격했다.협동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4명을 살상했다...그래서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은 백주에 안동 '협동학교'를 공격해서 살인을 한 무도한 의병(폭도)를 잡으라고 사설을 실었다.
겨우 100여년전의 살아있는 역사인데...우리는 100년전 역사를 다 잊어 먹은(배고파서) ...친일파보다 나쁜 무관심속에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