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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교대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에 전직 시청직원이었던 다쿠마 마모루(37)가 침입, 수업 중이던 1·2년생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마구 흉기를 휘두른 것은 오전 10시 15분경이었다. 승용차로 학교 담 바로 앞에까지 접근한 범인은 1층 교실 창문으로 침입, 길이 30cm의 흉기를 휘두르며 칠판에 가까운 앞쪽 자리에서부터 차례로 아이들을 찔렀다. 1층의 3개 교실을 옮겨 다니며 약 15분간 난동을 부리던 범인은 교사 2명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아이들은 범인을 피해 학교에서 도망나와 인근 상점 등으로 대피하는 등 주변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정신분열증을 앓아온 범인은 과거 3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사고 전 퇴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에 전 일본 열도는 경악했고, 일본 언론들은 "학교 내에서 벌어진 사상 최악의 엽기적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모든 방송사들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일제히 `특집보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조사결과 범인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정신이상자 행세를 했고, 가족들을 망신주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다시 일본 전역을 들끓게 했다./조선
[2000년]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장 탄성 스님 입적
←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탄성 스님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탄성 스님(70)이 2000년 6월 8일 충북 괴산 공림사 감인선원에서 참선 중 입적했다. 탄성 스님은 청계사-법주사 주지를 역임했고 지난 1994년 불교개혁 때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을 맡았다. 탄성 스님은 1990년대 두 차례의 조계종 개혁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지난 1994년 서의현 전 총무원장의 3선 시도로 조계종이 분규에 싸였을 때 젊은 승려들에 의해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으로 추대돼 개혁 과정을 이끌었다. 1994년 말 송월주 총무원장이 선출되자 산으로 돌아갔던 탄성 스님은 1998년 말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정화개혁회의’가 총무원을 점거하자 전국승려대회 대회장을 맡아 다시 전면에 나섰다.
탄성 스님은 1945년 3월 계룡산 갑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세상을 떠난 월산 전 불국사조실과 월주 전 총무원장, 월탄 전 법주사주지, 설조 전 불국사주지 등이 그와 절 집안 형제로 조계종의 대표적인 문중 중 하나이다. 탄성 스님은 지난 1981년 폐사나 다름없던 괴산 공림사에 선원을 재건한 후 주로 이곳에 머물며 수행에 몰두했다. 그는 1997년 조계종 원로의원이 됐으며 1999년 혜암 원로회의의장이 종정으로 추대되자 그 후임으로 선임됐다./조선
[1997년] 시인 박재삼(朴在森)씨 별세
← 시인 박재삼씨
1933년 4월 10일 ~ 1997년 6월 8일
‘20세기 한국의 마지막 서정시인’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찬사가 아닐 서정의 시인이었던 시인 박재삼씨가 근 30년의 투병생활 끝에 1997년 6월 8일 새벽,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시인은 4살부터 스무살 무렵까지 삼천포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광주리 이고 멍게장사를 하고 아버지는 지게 지고 노동했다. 고려대 국문과 중퇴 후 신문 등에 바둑관전평을 쓰는 일 말고는 평생을 다른 직업 갖는 일 없이 살았던 이 자유인에게 대신 가혹한 가난과 병마가 덮친 것은 35세였다. 고혈압으로 처음 쓰러진 후 그는 임종시까지 만성 신부전증과 심근경색, 창으로 투병해왔다.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 ‘정적’으로 등단한 박씨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서를 담은 `천년의 바람` 등 모두 15권의 시집을 갖고 있다. 박재삼 시인의 타계소식을 들은 문단인사들은 "문단의 든든한 어른이자 후배시인들의 귀감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1995년 가을 백일장 심사도중 신부전증으로 갑자기 쓰러진 시인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를 내는 등 창작욕을 불태웠다.
‘춘향이 마음’ 등의 대표작에서도 보듯 그의 작품은 소월과 미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향토적 서정과 한의 세계를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 고향 삼천포 앞바다의 반짝이는 파도에 대한 기억과 생선장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을 추억의 공간으로 삼은 시인은 슬픔과 가난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을 토속적 가락에 담았다./조선
[1994년] 구총독부건물 해체결정
국립박물관으로 쓰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1993년 김영삼정부 출범과 함께 정해진 일로 그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93년 당시 정부가 고려한 안은 ① 건물 자체를 완전해체하는 방안, ② 건물축소모형을 만들어 별도 장소에 보존하는 방안, ③ 별도 장소에 그대로 이전하는 방안이 있었다. 그 당시 처리반안에 대한 논란은 대통령이 건물 해체를 지시8)로 일단락이 지워지지만 성급한 결정이라서 2-3년후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게 된다.
총독부 철거문제가 본격 제기됐을 때만 해도 총독부 철거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양상은 '이전-복원론'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는 가운데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이 각각 역사학계와 고고-건축학계의 주장으로 제기됐었다. 그러나 '이전-복원론'은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채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총독부 건물을 독립기념관에 이전하여 독립기념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연구 기능을 보강하자는 案이 제기 되었지만, 철거된 총독부 건물의 자재를 전시한 공원이 98년 8월 11일 개원하였다. /Google
그리고 마침내 1995년 8월 15일 광복 반세기를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10여 년 동안 둥지를 틀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전격적으로 해체ㆍ철거되기에 이른다. /Google
[1990년] 제14회 월드컵 이탈리아서 개막
제14회 월드컵축구대회(The 14th FIFA World Cup)는 2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90년 6월 8일부터 7월 8일까지 31일간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총회에서 이탈리아는 6개국을 제치고 제2회대회(1934)에 이어 56년만에 개최지로 선정되었고, 멕시코와 함께 대회를 두 번 유치한 나라가 되었다.
112개국이 지역예선에 참가하였는데, 개최국인 이탈리아와 전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하여 24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대회는 로마·밀라노·바리·나폴리 등 12개도시에서 열렸으며, 경기방식은 4개팀씩 6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 1·2위팀 12개팀과 각조 3위팀 6개팀 가운데 상위 성적 4개팀을 포함하여 총 16개팀이 2회전에 오른 후 토너먼트로 우승을 가렸다.
마테우스 로타르(Matthaus Lothar)를 중심으로 한 서독(지금의 독일)은 브라질·이탈리아에 이어 3회 우승한 3번째 나라가 되었고, 감독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우승하였다. 아르헨티나가 준우승, 이탈리아가 3위를 차지하였다. 52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251만 7348명, 평균관중은 4만 8411명, 총득점은 115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2.21점이다.
한국은 지난 대회에 이어 본선에 연속 진출하였으나 3패로 조별 리그전에서 탈락하였다. 강압수비 위주의 '압박축구'로 인하여 대회 사상 최소득점을 기록하였으며, 결승전 승부가 대회 사상 최초로 페널티킥으로 결정되는 등 대회 내내 지나친 수비 위주의 경기흐름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38세의 로저 밀라(Roger Milla)가 활약한 카메룬은 아르헨티나·루마니아·콜롬비아를 물리치고 8강까지 진출하면서 '아프리카 돌풍'을 일으켰다. 칠레는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골키퍼가 부상을 위장함으로써 몰수패와 함께 다음 대회의 지역예선 참가가 금지되었다. /naver
[1986년] 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
← 발트하임(1971)
1986년 6월 8일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인 쿠르트 발트하임이 오스트리아 대통령 결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다. 발트하임은 제4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으로 취임해 1972~81년 2차례에 걸쳐서 사무총장직을 역임한 외교관이었다. 사무총장 역임 당시 발트하임은 방글라데시·니카라과·과테말라 등지에서 구조작업을 효과적으로 펼쳤으며, 키프로스·남북예멘·앙골라 등지의 평화유지작전을 성공적으로 이행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1982년 UN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1986년 인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당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후보자격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발트하임은 과거에 대해 솔직하지 않았음은 시인했으나 잔학행위에 가담한 사실은 부정했다./브리태니커
[1984년] 일본 법원, 지문날인을 거부한 한국인과 미국인에 유죄판결
← 재일외국인에 대한 일본의 지문날인 제도가 국제인권규약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동경 지방법원이 1984년 6월 8일 외국인등록법이 정한 지문날인을 거부한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요코하마 지방법원도 6월 14일 지문날인을 거부한 미국 국적의 대학강사에 벌금 1만엔의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문을 날인하는 것은 개인의 존엄을 인정한 헌법 13조에 위배되며, 범죄용의자처럼 지문을 채취하는 것은 국제인권규약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지문날인은 1952년에 공포-시행된 외국인등록법에 근거하고 있다. 그 법은 1년 이상 체류하는 16세 이상의 재일외국인에게 외국인등록증을 휴대케 하고 5년마다 교체토록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만엔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조선
[1972년]베트남 소녀 킴 푹 양, 미군 네이팜탄에 전신 3도 화상
← 1972년 6월 8일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탄에 의해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달아나던 9세 소녀 킴 푹 양(가운데)의 울부짖는 모습
1972년 6월 8일,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사이공 근교 트랑 방 마을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쓰러졌고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그때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달아나던 벌거숭이의 한 소녀가 카메라 앵글에 포착됐다. 사진은 전 세계에 전송돼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절절히 전했다. 소녀의 이름은 판 티 킴 푹이었고 당시 9세였다. 네이팜탄에 등과 목덜미, 왼팔을 부상당한 소녀는 사이공 인근 코레이 병원으로 후송돼 17번에 걸친 피부이식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날 미군이 네이팜탄을 무차별 투하한 배경은 이랬다. 전날 밤 12시경 베트공 `해방전선` 병사들이 트랑 방 마을을 급습, 점거하자 베트남 정부군과 베트공 사이에 마을 쟁탈전이 벌어졌다. 정부군은 중화기로 마을을 포격했고 베트공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전투가 길어지자 오후 4시 정부군의 레반투 여단장이 마을을 폭격하기로 결정하자 미군은 함상 공격기 스카이 레이더기를 동원했다. 폭격은 시작됐고 마을은 불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당국은 소녀가 공포에 질려 걸었던 고난의 길을 `식민지 보유국`인 미국을 상대로 싸운 영웅적 행위로 추켜세우며 소녀를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로 유학을 보냈다.
킴 푹은 1994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캐나다로 망명했고 1999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네이팜탄 화염을 피해 알몸으로 달아나던 킴 푹 양의 사진을 찍은 당시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는 `전쟁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조선
[1969년] 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 사망
← 영화 ‘애수’에서 비비안 리와 함께한 로버트 테일러
1911년 8월 5일 ~ 1969년 6월 8일
1969년 6월 8일 영화배우 비비안리(Vivien Leigh, 1913-1967)와의 열연으로 많은 관객을 울린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가 사망했다. 57세였다. 전세계 여성관객을 매료한 그의 멋진 얼굴, 우렁찬 목소리가 스크린으로부터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춘희’ ‘애수’ ‘쿼바디스’ 등 우리나라 공개히트작품도 많은 테일러는 모두 60편의 영화에 주연했고, 180cm 키, 77kg의 체중, 물결치는 듯한 검은머리, 반짝이는 흰 이를 자랑하며 헐리우드의 가장 대표적인 스타 여배우들 그레타 가르보, 진 할로우, 에봐 가드너, 엘리자베스 테일러, 게더린 헵번, 그레어 가슨과의 공연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했다. 로버트 테일러는 MGM영화사에만 27년 동안이나 전속으로 있어 헐리우드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로버트 테일러는 1939년 바브라 스탠위크와 결혼, 1951년 이혼했고 1954년 어술라 디스와 재혼하여 아들, 딸 한명씩을 두었다.
프로급의 첼로솜씨와 전시중 비행기조종 교관도 지낸 로버트 테일러는 의젓한 인품과 변함 없는 외모로 오랫동안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조선
[1968년] 킹 2세(Martin Luther King Jr. ) 암살범 체포
1968년 6월 8일 영국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암살 용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가 체포되었다. 레이는 주유소와 상점을 터는 좀도둑으로 일리노이에서 1번, 미주리에서 2번 복역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67년 4월 23일 미주리 주립교도소를 탈옥한 뒤, 1968년 4월 4일 테네시 멤피스에서 킹이 묵고 있던 모텔 옆 민박집 창문을 통해 모텔 방에 있는 킹을 쏘았다. 체포된 뒤 자신의 유죄를 시인해 99년형을 선고받았던 레이는 1977년 테네시에 있는 브러시마운틴 교도소에서 탈옥해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레이는 복역 중 1998년 4월 23일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1958년] 제6회 월드컵 스웨덴서 개막
제6회 월드컵축구대회(The 6th FIFA World Cup)는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8년 6월 8일부터 29일까지 22일간 개최되었다. 제5회대회의 스위스에 이어 역시 중립국인 스웨덴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지역예선에는 역대 최대인 53개국이 참가하였고, 개최국인 스웨덴와 전 대회 우승국인 서독(지금의 독일)을 포함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경기는 스톡홀름·말뫼·헬싱보리·할름스타드 등 12개도시에서 열렸으며, 4개국씩 4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에서 1·2위를 차지한 8개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렸다. 우승은 브라질이 차지하였고, 스웨덴이 준우승, 프랑스가 3위를 차지하였다. 35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86만 8000명, 평균관중은 2만 4800명, 총득점은 126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3.60점이다.
제2회대회(1934) 이후 출전을 거부하다가 24년만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제16회 올림픽경기대회(1956)에서 우승한 소련 등 축구강국들이 고루 출전하였으며, 축구왕 펠레가 17세 나이로 월드컵축구대회에 데뷔하였다. 브라질은 월드컵축구대회 사상 유럽대륙에서 우승한 유일한 타대륙 국가가 되었으며,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축구황금기를 이어나갔다. 이 대회부터 월드컵축구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중계되기 시작하였다. /naver
[1955년] 월드와이드웹(WWW)을 창안한 영국의 컴퓨터 공학자 버너스 리(Berners-Lee, Tim) 출생
← 버너스 리 [Berners-Lee, Tim, 1955.6.8~] 월드와이드웹의 아버지로 불린다. 1955년 6월 8일 런던의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스칼리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플레시 텔레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여러 업체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운영체계 연구원 등으로 일하였다. 1980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몸담아, 같은 해 최초의 월드와이드웹(WWW) 아이디어인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엔콰이어(Enquire)' 시스템을 제안하였다.
1989년에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 사이에 정보 공유를 쉽게 하기 위해 글로벌 하이퍼텍스트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이 개념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월드와이드웹이다. 이듬해 자신이 만든 웹 브라우저의 이름을 월드와이드웹으로 정하고, 기술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믿음 아래 1991년 월드와이드웹 아이디어를 공개하였다.
버너스리의 아이디어 공개를 통해 전 세계 인터넷 시대의 문이 열렸고, 이후 월드와이드웹은 인터넷 주소 체계인 URL 등으로 발전하였다. 1994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월드와이드웹컨소시엄(W3C)과 컴퓨터과학 및 인공지능연구소(CSAIL)를 세우고, 2005년 현재까지 W3C 소장으로 있으면서 인터넷 발전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 밖에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영국왕립학회·영국컴퓨터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위빙 더 웹 Weaving the Web》(1999),《스피닝 더 시맨틱 Spinning the Semantic》(2005)이 있다.
2004년 대영제국 기사 작위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나이트 커맨더'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핀란드 정부가 제정한 제1회 밀레니엄기술상(상금 14억원)을 받았다. 2005년 1월에는 '2004년 위대한 영국인'에 선정되었다. /naver
[1953년] 한국전쟁 포로문제에 관한 협정 타결
포로교환문제는 1951년 12월부터 다뤄지기 시작하여 1년여를 끌었다. 합동소위원회에서 쌍방의 포로명부를 교환하게 됨으로서 같은 해 말 현재로 공산군측이 억류하고 있던 유엔군 측의 포로가 1만1천여 명으로 밝혀졌다.
1952년 4월 30일 공산군 측이 포로교환 교섭 재개를 요청함에 유엔군측은 이에 응하여 회담을 재개했으나, 핵심문제가 전혀 진전되지 않아 다시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 다음 해인 초에 크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상병포로의 선행교환을 공산측에 요구함으로서 3월 30일부터 회담이 재개되었다.
이때 주은래 중국 수상이 새로운 제안을 내 놓은 것이다. 그 동안 주장해 온 전 포로의 강제송환 요구를 포기하고 본국송환을 희망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으로 이송함을 승인하는 자유송환원칙을 수락함으로서 포로교환문제가 급진전된 것이다.
이 같은 회담 진전은 다분히 스타린의 사망, 미국의 수폭실험 성공 ,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종전공약 그리고 중공군의 피해 급증 등이 배후에 깔려 있었기에 순기능을 한 것이다. 1953년 4월 3일 김일성은 포로문제에 관한 주은래의 제안이 북한과 중국이 합의한 바라고 공식 표명함으로서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되었다.
그 후 포로에 관한 회담이 급진전되어 5월 30일까지 송환이 끝났다. 그리고 공산 측은 본국 송환거부 포로는 중립국으로 보내고 귀환희망자는 송환 후 30일 내에 군사적 관리를 해제하기로 유엔군 측과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53년 6월 8일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7월 27일 드디어 회담 시작 2년여만에 158회의 회담 끝에 휴전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다. 그 당시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여 휴전을 결사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시위를 주요도시에서 계속하게 하고, 휴전회담 한국군 대표이던 최덕신 장군에게 협정 서명을 거부토록 명령했으며, 2만7천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등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①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② 200만 달러의 장기경제원조제공 ③ 한국군 증강 ④ 휴전협정에 의한 정치회담 이전에 한미고위급회담 개최란 전후 보장 5개항에 동의함으로서 더 이상 미국과 등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Google
[1949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Nineteen Eighty Four> 출판
← British first edition cover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Orwell, George, 1903~1950)의 역유토피아 소설 <1984년 /Nineteen Eighty Four>은 1949년 간행되었는데, 1984년, 가공의 초대국(超大國) 오세아니아에서 자행되는 전체주의적 지배의 양상을 묘사한 저자 만년의 작품이다. 권력집중이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한 당(黨)에 의한 대중(프롤레타리아계급)지배, 지배수단으로서 항상적(恒常的)인 전쟁상태의 유지, 거의 신격화한 지도자 빅 브러더에 대한 숭배, 개인생활의 감시,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한 언어의 간략화, 당의 무류성(無謬性)을 증명하기 위한 역사의 개서(改書) 등 모든 지배기구가 내포하는 위험성이 미래소설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제도에서 소재를 인용한 이 작품은 때마침 냉전(冷戰) 분위기를 타, 출판 후 1년 사이에 영국 ·미국에서만 약 40만 부가 팔렸으며, 세계 각국에서 잇달아 번역 출판되었다. 반공(反共)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체제를 불문하고 당시의 사회 및 그 연장으로서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전체주의적 정신풍토를 경고(警告)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naver
[1921년]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하르토(Suharto) 출생
← 수하르토 [Suharto(Soeharto), 1921.6.8~2008.1.27]
중부 자바의 욕야카르타에서 태어났다. 하급 중학교 및 이슬람 학교를 마친 후에 인도네시아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43년 일본군 보호 아래 인도네시아 육군장교가 되어, 1945∼1950년 욕야카르타에서 대대장·연대장을 지내고, 1953년 중부 자바의 연대장, 1960년 준장으로 진급, 1960~1965년 육군참모차장을 지냈다. 1965년 9월 30일 쿠데타 때 당시 국방장관 나수리온과 협력하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육군사령관이 되어 치안회복을 실현하였다.
1966년 3월 대통령 수카르노에게서 치안 대권을 위양받고, 7월에는 총리·국방치안장관·육군장관·육군총사령관을 겸임하였으며, 1967∼1968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국민협의회에서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3년 3월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78년 3월에는 3선(選)저지운동을 탄압하고 3선(選)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11월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이 일어나고, 1980년 4월 전국에서 반(反)중국인 폭동이 발생한 데 이어, 5월 퇴역장성과 정치가 50명이 대통령비판성명을 발표하는 등 한때 정정(政情)이 불안했다. 하지만 1982년 5월의 총선에서도 수하르토를 정점으로 하는 골카르(Golkar) 조직이 압승함으로써 4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 뒤에도 두 번의 재선을 했지만 1998년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몰락하고 말았다.
외교면에서 수하르토 정권은 수카르노 시대의 반제국주의 ·비동맹노선에서 180도 선회하여 미국 등 서방 여러 나라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신체제’라고 일컫는다. /naver
[1845년]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사망
← 서부 출신 최초의 대통령 앤드류 잭슨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아 온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1845년 6월 8일 사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왁스호에서 출생해 변호사 생활을 거쳐 1798년 테네시주 최고재판소 판사로 활동했다. 18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J.애덤스에게 패하여 낙선했으나, 1828년 재도전해 당선됐다.
서부 출신 최초의 대통령으로 재임 중 구습을 타파하는 청신한 정책을 취해 서부의 농민, 동부와 북부의 노동자, 남부의 농업경영자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1832년 재선됐다. 그는 직선적이고 야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관세문제나 미합중국은행 재인가 문제 등에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지만, 여론을 중시하는 대중 중심의 정치를 펴 인기가 높았다.
또한 선거권의 확대, 대통령 선거제도의 개선, 전국당대회제의 채택, 교육의 보급 등으로 일반 대중의 정치참여 기회를 증대시킨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확립한 새로운 개념의 민주주의는 `잭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초반까지 국민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조선
[1810년] 독일 작곡가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출생
1810년 6월 8일 태어남 / 1856년 7월 29일 죽음
←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 J. Hofelich가 제작한 석판화
"작곡을 하기 위해서는 아직 누구에게도 떠오르지 않은 멜로디 하나만 기억해 내면 된다. "- 로베르트 슈만
슈만은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문학적으로는 잔 파울 리히터, 음악적으로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작곡과 피아노 즉흥 연주를 하는 데 보냈다. 20세에 당시 유명한 피아노 선생이자 훗날 슈만의 아내가 된 클라라의 아버지이기도 한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정식으로 음악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24세 때 오른쪽 손가락 하나를 다침으로써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꿈을 접고 작곡에 전념했고, 음악 비평가로서도 활동했다. 쇼팽이나 브람스의 음악을 소개하는 데도 힘썼다. <라인 교향곡> 등 여러 유명한 가곡과 교향곡을 작곡한 슈만은 1854년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브리태니커
[632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사망
← 마호메트의 기도하는 모습.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632년 6월 8일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부친이 일찍 죽어 조부와 숙부 밑에서 자랐다. 청년시절 대상을 따라 시리아 등지를 왕래하며 만난 유력한 상인의 미망인인 하디자와 결혼, 3남 4녀를 낳았다.
40세가 되던 610년 경, 세속적인 생활을 중단하고 메카 교외의 히라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명상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은 `코란` 제9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계속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자 그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것을 결심, 부인 하디자를 최초의 신도로 받아들였다. 신도는 점차 증가했으나, 이제까지의 다신교를 부정하고 유일신 알라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 메카 지배층의 이익과 배치되어 613년경부터는 집권세력으로부터 견제와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박해를 피해 아비시니아로 피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마호메트 자신은 전부터 정해 둔 메디나로의 이주를 준비했다. 마침내 622년 9월 24일 신도 70여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를 헤지라(聖遷)라고 하며 이 해가 이슬람력의 기원이 된다.
당시 메디나의 내분을 틈타 마호메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했다. 메카세력과의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630년 10월 메카를 점령한 마호메트는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을 속속 이슬람교로 개종해 교단을 완성해 나갔다. 그 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632년 6월 8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조선
그밖에
2004년 130년 만의 우주쇼, 금성 ‘미니 일식’
1990년 이츠하크 샤미르가 주도하는 리쿠드당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우익연정 구성
1989년 소련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 작품, 15년 만에 소련에서 해금
1985년 헝가리에서 최초의 복수입후보제에 의한 의회선거
1982년 이스라엘군 베이루트이남 전해안 장악
1981년 이스라엘기, 이라크 원전 폭파
1979년 이란 전은행을 국유화
1976년 한국 신무용이 형성되는데 많은 영향을 준 무용가 조택원 사망
1971년 미국 스탠퍼드대서 중성자보다 작은 새입자 파르촌 발견
1971년 칠레, 국가비상사태 선포(아옌데 대통령)
1969년 닉슨-티우 대통령 미드웨이회담 개회
1965년 성업공사 발족
1964년 공수단 장교 8명 동아일보사 난입
1962년 제네바서 미국 소련이 우주의 평화적 공동연구 합의
1956년 이기붕 국회의장 피선, 조경규-황성수 부의장 피선
1952년 휴전회담 가조인
1948년 일본, 독도 영유권 운운 파문
1941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 시리아와 레바논 진격
1937년 국제포경신협정 조인
1935년 파리에서 최초의 자동차 박람회 개막
1932년 한국-중국 연합토일군. 일본나남부대를 전멸
1925년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설치
1913년 베를린에 ‘독일스타디움’ 개설
1906년 일본, 남만주 철도주식회사 설립 칙령 공시
1901년 러시아군 만주철군 개시
1896년 프랑스 천문학자 디스란드 보르 성층권 발견
1876년 프랑스 여류소설가 상드 사망
1814년 영국 작가 리드 출생
1809년 미국의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 사망
1720년 숙종 사망
1689년 송시열 사망
1456년 사육신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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