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진 wrote:
대중음악 뛰어넘은 ‘전방위 울트라맨’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서 막강 영향력 과시 … 기성문화에 대한 ‘전복’
의 에너지 발산
구미에서는 비틀즈가 활약한 1960년대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물론 비틀즈를 추앙한 젊은이들이었다. 비틀즈는 기자
회견을 통해 베트남 전쟁 반대를 선언했고 음악과 각종 사회활동을 통해
무조건의 사랑과 평화를 역설했다. 이들의 주장은 곧바로 당시 젊은이들
의 행동강령이 되었고, 비틀즈라는 이름은 가장 강력한 ‘60년대적 상
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에게도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가수들이 있다. 40년간 국
민의 심금을 울려온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작은 거인’ 조용필, 그리고 90년대의 서태지와 2000년대의 god까
지…. 이 이름들 중에서 서태지가 특별한 건 ‘문화 대통령’이란 별명에
서 알 수 있듯, 그가 ‘뛰어난 가수’를 넘어 한 시대의 상징이자 문화
적 아이콘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음악적으로 볼 때 가요계는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모든
것이 바뀌었다. “80년대 초에 나온 조용필이 그때까지 트로트 일색이던
가요계를 팝으로 전환시킨 것처럼, 90년대 초 서태지는 랩으로 신세대 음
악패션을 주도하기 시작했다.”(팝 칼럼니스트 이효영)
서태지는 당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장르라고 여겨졌던 랩뮤직을 한국적
으로 소화하는 데 성공, 이후 각종 음악 관련 차트에 트로트 가수가 발
을 못 붙이게 했음은 물론, 발라드와 트로트가 지배하던 한국 대중음악계
에서 댄스뮤직을 주류로 끌어올렸다.
그가 처음 선보인 랩과 힙합 댄스는 신세대들의 새로운 감성과 욕망에 정
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서태지의 음악은 그때까지 수동적인 음악 청취
층이던 10대를 능동적인 음반 구매층으로 변화시켰다. 이후 10대가 음반
시장의 주력으로 자리잡은 것을 비롯해 신세대가 모든 문화와 소비행태
의 주도권을 쥐면서 사회 전반이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커다란 변화
를 가져왔다. 한국의 신세대론은 서태지 데뷔 이듬해인 93년부터 홍수를
이루게 되는데, 이와 함께 이들을 상대로 한 마케팅 또한 지금껏 식을
줄 모르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은퇴 이후 10대 아이들 스타 난립
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서태지의 음악과 춤 그리고 패션은 장안의 화제
가 됐다. 서태지는 음악뿐 아니라 패션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힙합패션·치마바지·스노보드룩·빨간머리 염색 등으로 바뀌어간 그의
스타일은 신세대들이 가장 모방하고 싶어하는 유행 형식의 원본에 해당되
었다. 심지어는 은퇴 선언 후 5년 만에 돌아온 서태지가 입었던, 검은 바
탕에 흰색 Y자 무늬가 새겨진 구치 스웨터가 동대문표 ‘짜가’까지 만들
어내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 는 서태지에 대해 “하나의 대
중음악인을 뛰어넘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
사한 전방위 파워맨”이라고 평가한다. 서태지는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
래하는 가수가 동시에 가장 강력한 파급력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투사이
자 아티스트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시대가 ‘재미’와
‘사상’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는 대중문화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고했
다. 저항적 대중음악으로서의 ‘록’을 대중화했고, 사회 비판적인 노래
를 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손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확실한 수요층을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사람이 바로 서태지였다.
서태지의 이런 음악적 경향은 이제 TV 가요의 주류 경향으로까지 자리잡
았다. 잠적과 깜짝 컴백, 견고한 컨셉트의 뮤직비디오 제작, 신비주의 전
략 등 서태지가 시작한 마케팅 방식 또한 업계의 규범으로 정착된 지 오
래다. 그러나 주류적 상업주의와 저항적 록 정신을 동시에 견지하고자 했
던 서태지가 사라진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그가 남겨놓은 두 개의 화
두 가운데 앞의 것만이 활개치는 아수라판으로 달려갔다.
“서태지 은퇴 이후 한국 가요계는 철저한 기획 위주의 10대 아이들
(Idol) 스타의 난립으로 점철되었다. 신세대의 실험성과 참신함은 서태지
의 은퇴와 함께 날개를 접었다.”(음악평론가 강헌)
90년대 서태지로 상징되는 신세대 문화는 그 자체의 모순과 한계를 동시
에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기성문화에 대한 ‘전복’의 에너지는
결국 기성사회가 만들어놓은 소비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런 의미에서 미디어평론가 변정수씨는 “90년대는 없다”고까지 진단한
다.
“신세대 스타일을 통한 저항과 그 저항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서태지가
90년대 대중문화의 한 상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속엔 ‘저항성’과
‘상업주의’라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런 이중성은 2000년대 대중문화
로 이어지고 있다. 옛것은 갔는데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까. 그
런 의미에서 서태지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서태지 등장 후
10대 마케팅 시대 본격 점화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한국 역대 최고 히트상품’ 1위는 바
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이었다. ‘파격적인 춤과 패션으로 X세대
문화를 선도한 시장 개척의 성공사례’라는 것이 그 이유. 이 연구소는
별도로 ‘서태지와 아이들’과 기업경영’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는
데, 이 보고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종전까지 음반 판매에 별다른 영
향을 미치지 못하던 10대를 직접 겨냥해 신규 수요를 창출했다면서, 기업
들도 새로운 시장과 고객을 적극적으로 창출하는 경영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함께 대중문화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10
대 문화 소비자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화산업을 떠받치는 강력한 기
둥으로 서 있다. 대중음악, 영화, 게임 등 각종 대중문화 상품의 최대 고
객은 바로 10대들. 음반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37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음반시장에서 10대가 차지한 비중은 전체 음반시장의 47%에 이
르고, 게임종합지원센터 조사를 보면 3조4000억원에 이르는 게임시장의
경우 10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39%에 이른다. 이제 10대가 ‘철없는 아이
들’이 아니라 기업의 성패마저 뒤흔들어놓는 무서운 구매 계층으로 등장
했다는 얘기다.
지금의 10대를 설명하는 문화 키워드로 ‘인터넷’ ‘휴대전화’ ‘힙
합’ 등을 들 수 있는데, 원래 음악용어인 ‘힙합’은 패션, 댄스, 나아
가 의식까지도 지배하는 문화로 자리잡았다. 198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
기 시작한 힙합문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통해 보급
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스타를 따라 하고 싶어하는 10대들의 심리를 이용, 방송가나 업
계의 ‘스타 마케팅’ 역시 치열해졌다.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10대들을 잡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를 전면에 내세
우는 마케팅 전략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기성세대에선 10대에 의지한 문화산업 전반의 가벼움을 우려하는 목소리
가 큰 것도 사실. 그러나 10대가 문화상품의 주 소비자로 등장하면서 10
대의 마니아적 성격이 문화적 다양성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긍정적 시각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전문가’로 불
릴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10대들이 문화상품의 주 소비자로 올라서면
서 다양한 분야의 문화상품들이 재생산의 기반을 확보하게 됐다는 것이
다.
이어서..4.주류와 타협없는 '그만의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