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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9:1-22
▣ 십자가에서의 충성-요한복음 19장-
1. 조롱당하신 그리스도(19:1-22)
빌라도는 불법적이기는 하나 예수님을 채찍질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풀어 주려 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굳어져서(12:40),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빌라도가 그 군병들에게 모욕적인 가짜 왕관과 자색 옷과 왕홀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조롱하도록 허용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이 장면을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과 비교해 보라. 거기서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영광의 관을 쓰고, 철장을 가지고 다스리러 오신다. 그때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려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율법을 범하였다고 고소하였다(10:33). 이미 그리스도는 그의 멧세지와 기적들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다. 그러나, 완악한 죄인은 그 증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멸망시키는데에 참여하였다.
9절에서의 빌라도의 질문에 왜 그리스도는 대답지 않으셨는가? 그 한 가지 이유는 빌라도가 이미 받은 계시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이미 주신 것들에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는 더 많은 계시를 주지 않으신다. 10절에서의 빌라도의 장담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었다 ! 만약 그가 그리스도를 놓아 줄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며(19:4), 그렇게 행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빌라도를 논박하셨다(롬13:1-/잠 8:15-16).
빌라도는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었으며,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눅 22:22). 11절의 “나를 네게 넘겨준 자“란 유다가 아니라 가야바에 대한 언급이다.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 외친다. 6장 15절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고, 12장 13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찬양하였으나, 이제 그들이 그를 거절하고 있다 ! 이것은 요한복음에서의 세번째 위기이다.첫번째 위기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 함 길
(6:15) -더이상 그를 따르지 않음(6:66)
두번째 위기 그리스도를 왕으로 찬양함 진리
(12:13) -그를 믿지 않음(12:37)
세번째 위기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인 거부 생명
(19:15) -십자가에 못박음
빌라도는 재판의 최종적인 결론을 맺고는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제를 붙였다. 관습적으로 죄수는 그의 목에 죄패를 걸었다가 그후 그것을 십자가에 걸어 놓았다. 그리스도의 “죄명“은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
죄패는 히브리어(종교), 헬라어(철학과 문화), 라틴어(법과 정치)의 세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우주적인 죄를 말해 준다. 세상의 이 세 정부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문화와 법률, 종교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또한 이것은 우주적인 사랑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은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적인 구원을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헬라인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로마인에게는 하나님의 권세이고, 유대인에게는 모든 종교 의식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유대 여인 루디아와 헬라의 여종과, 로마의 간수가 모두 구원된 것을 본다. 회개한 도둑은 이 죄패를 읽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에서“ 그를 기억하실 것을 믿었다."
요 19:23-30
2. 못박히신 그리스도(19:23-30)
요한은 그리스도의 가상 칠언 중 세 가지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솔기가 없는 옷을 제비뽑으며(시 22:18), 신포도주를 주는 것(시 69:21), 어떠한 뼈도 꺾이지 않고 옆구리를 찔린 것(시 34:20/출 12:46/슥 12:10)에 대한 성경의 성취를 주의깊게 주목한다. 그러나 37절은 스가랴 12장 10절을 성취하였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에 유의하자. 오히려 스가랴 12장 10절은 그가 찔리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장차 영광 중에 돌아오실 때 그를 볼 것이다(계 1:7). 십자가형에 대한 모든 세심한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조심스럽게 수행되었다.
요한과 마리아를 서로에게 건네 줌으로써 그리스도는 지상에 있어서의 가족 관계를 최종적으로 끊으셨다. 그 일들을 조정한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셨다. 우리는 십자가로 온 마리아의 헌신에 감탄한다. 그녀의 침묵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 한 마디는 예수님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육체적이며 영적인 고통을 나타내신 것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결코 목마르지 않게 하시려고 친히 목마르셨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 “테텔레스타이“로서, 상인들간에 “가격이 모두 지불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졌다. 목자들은 그들이 완전한 양을 발견했을 때에 그 말을 사용하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벽한 어린 양으로 죽으셨다. 일을 완전히 마친 종들이 주인에게 보고할 때에 이 말을 사용하는데, 순종한 종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마치셨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자원하여 자기 생명을 포기하셨으며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
요 19:31-42
3. 장사되신 그리스도(19:31-42)
유대인들은 동정이나 또는 그들의 죄에 대한 두려움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그들의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지키려 하였다. 군병들이 그리스도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죽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생명의 주의 존전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지 않으셨다면 두 강도들은 결코 죽을 수 없었을 것이다.
피와 물은 구원의 양면성을 설명해 준다. 피는 죄책을 속죄하며, 물은 죄의 얼룩을 씻어 준다. 또는, 피는 십자가의 하나님 편에서의 칭의를 말해 주며, 물은 인간 편에서의 성화를 뜻한다. 이 두 가지는 항상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피가 그를 구원한다고 믿는 어느 누구이든지 사람들 앞에서 정결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35절에서 요한은 마리아를 그의 집에 모셔 놓은 후 다시 십자가로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마리아보다 더 중요하였다 ! 요한복음에서 마리아가 처음 발견되는 때는 그녀가 혼인 잔치에 있을 때였는데(2:1-11), 그녀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장례식에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장사하기 위해 산헤드린의 두 회원인 니고데모와 요셉을 예비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예루살렘 밖의 “쓰레기더미“인 게헨나에 던져졌을 것이다. 이사야 53장 9절은 그의 무덤이 부자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의 니고데모에 대한 세번째이자 마지막 언급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가 고백의 밝은 빛으로 나아오는 것을 본다(요 3장 참조).
니고데모와 요셉은 구약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지를 알았다. 그들은 아마도 향유와 함께 이미 무덤을 준비해 두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계신 동안 무덤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이 무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마련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느 부자도 죄인들이 못박힌 장소의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재빨리 쉽게 돌볼 수 있도록 갈보리 근처의 토지를 구입하였다.
우리는 확실히 요셉이 두려워하는 제자이기 때문에 칭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위해 이것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의 믿음이 공개적인 것이었다면, 공회는 그가 예수님을 돌보는 일에 대해 방해하였을 것이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만졌을 때 그들은 스스로 유월절에 대해 더럽힌 것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분을 믿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대조해 보기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빈곤하게 태어나 부자로 장사되었고, 강보에 싸여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탄생은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장사는 공적인 것이었다. 그의 탄생시에는 사람들이 경배하러 왔었으나, 그의 장례 때에는 그들이 그를 버렸거나 또는 조롱하였다."
요 20:1-18
▣ 그리스도의 부활-요한복음 20장-
이 장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 세 번 나타나심을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나타나심은 관련된 사람들의 삶에 다른 결과를 가져 왔다.
1. 마리아에게 보이심(20:1-18)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셨고(눅 8:2),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전형적인 “여성 특유의 스타일“로 그녀는 결론으로 비약하여, 누군가 그리스도의 몸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갔는데, 그들은 다음 차례로 무덤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왜 요한이 베드로보다 앞서 달려갔는가?(4절) 여기에는 신체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요한은 베드로보다 젊었다. 그러나 또한, 영적인 의미도 있다. 베드로는 아직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헌신을 재확인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영적인 힘“은 저조하였다. 이사야 40장 31절에서는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뛰어도 피곤치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보다 앞서 달리면서 불순종하였다. 베드로의 죄는 그의 발(요 20:4)과 눈(요 21:7), 입술(주님을 부인함)과 그의 체온(요 18:18/눅 24:32)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무덤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은 몸의 형체대로 수의(감긴 세마포)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몸은 없었다! 수의는 마치 빈 누에고치 같았다. 얼굴을 덮었던 수건은 조심스럽게 개켜져서 그대로 놓여져 있었는데, 이것은 도굴된 모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도둑들도 수의를 찢지 않고 물건들을 흐트려 놓지도 않은 채 몸을 가져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수의와 바위 무덤을 통과하셨다. 8절은 그들이 본 것들을 증거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다고 말해 준다. 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났고 또한 성경 때문에도 믿게 되었다.
여기에 영적인 문제들에 봉착할 때에 의지할 수 있는 증거의 세 가지 전형이 있다. 곧,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들과 하나님의 말씀, 개인적인 체험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실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증거를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읽을 수도 있고, 그가 만약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개인적으로 그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10절에서, 그들이 집에 돌아간 후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지적인 증거만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선뜻 떠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기다림이 몇 배의 보상을 받았던가!(잠 8:17 참조) 그녀는 무덤 안에서 두 천사를 보았으나(눅 24:4 / “두 사람“), 너무나 큰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그들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12절에서의 천사에 대한 설명은 구약의 “시은좌“를 상기시킨다(출 25:17-19).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시은좌에 앉아 계신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찾기 위하여 천사로부터 돌아섰다. 그녀는 천사들을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시신을 원하였다. 그 때 그녀가 본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이셨으나, 분명히 그녀의 눈은 가리워져서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15절에서의 “... 줄을 알고“는 그녀의 슬픔을 전부 설명해 준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 “...인 줄로 아는“ 비참함에 빠져 있는가? 예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 그녀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시며(요 10:3-4),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사 43:1).
17절은 부활의 아침 일찍, 아버지께 그의 마치신 일을 보고하러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승천은 안식일 다음 날 곡식 단을 흔드는 레위기 23장 1-14절에 주어진 모형을 성취하였다. 그리스도는 첫열매이시다(고전 15:23). 마리아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녀를 선교사로 만들었다!"
요 20:19-25
2. 제자들에게 보이심(20:19-25)
“안식 후 첫날“이 두 번 언급되었다(20:1/20:19). 이 날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며 일한 후에 쉬게 되는 것을 설명한다(율법주의). 주일은 주님의 날로서, 한 주의 첫날이며 일하기 전의 생명과 쉼을 말해 준다(은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화로운 몸으로 잠긴 문을 통과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평화를 두 번 언급하셨음에 유의하자(19, 21절). 첫번째 “평강“은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평화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 두번째 “평강“은 우리와 함께 거하심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평화이다(빌 4장).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사의 직무를 행하도록 위임하셨다(요 17:15-18).
그들에게 숨을 내쉰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신 것(창 2:7)을 상기시키는데,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의 “하나님의 영감“이란 “하나님이 숨을 내쉬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것으로서그들에게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영적인 힘과 분별력을 주는 것이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봉사와 전도에 있어서 그들을 단결시키며 강하게 하였다.
23절에서의 “죄 사하는 권세“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죄들을 보류하거나 용서하는 의미 이외에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의 어느 곳에도 사도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경우가 없다. 베드로(행 10:43)와 바울(행 13:38)은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 제자들에게는 특전이 있었다. 특히 사도행전의 앞 장들에서 그러한데,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이 사도적 특권은 오늘날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다."
요 20:26-31
3. 도마에게 보이심(20:26-31)
도마는 처음 모임에는 참석하지 알았다. 성도의 모임에 불참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는가 ! 도마가 “만일... 하지 않으면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을 눈여겨보자. 그는 “쌍동이“라는 뜻의 “디두모“라고 불리워졌는데, 도마는 오늘날에도 많은 쌍동이들을 갖는다.
그 다음 주일(主日)에 제자들이 다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과 도마에게 나타나셨다. 여기서 보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 도마는 주님을 보고는 그가 요구했던 증거들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렸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외치는 그의 간증은 우리를 전율케한다. 그리스도의 상처를 보이심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가 이와 똑같은 축복을 소유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지만 믿는 이들 가운데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났던 이 세 경우를 다시 검토하면 각기 다른 결과들을 볼 수가 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의 논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다. 그녀는 그를 잃어버리고 그의 몸을 찾고자 하였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소망이었다. 그들 모두의 소망은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들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두려워하며 모여 있었다. 도마에게 있어서는 믿음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는 증거를 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은혜,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 계시므로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은 헛것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한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벧전 1:3). 고린도전서 15장 19절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해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보지 못하나 사랑한다(벧전 1:8).30-31절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요한복음의 목적으로 진술한다. 이 책을 읽으면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은 많은 사람들, 예컨대 나다나엘(1:50)과 제자들(2:11), 사마리아인들(4:39), 왕의 신하(4:50), 소경(9:38), 마르다(11:27), 그리고 나사로를 본 유대인들(12:11)과 도마(20:28)처럼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나는 믿는다 !“고 동일한 증언을 하였다."
요 21:1-3
▣ 요한복음의 맺음말-요한복음 21장-
이 마지막 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섬길 주인이시며 죄인들의 친구이심을 보여 준다. 이 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의 불순종이 실제로 다루어졌는지 어떤지의 여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 실패의 밤(21:1-3).
베드로는 그의 고기잡는 일로 되돌아가는 데에 명령도 없이 행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렸었다(눅 5:1-11). 그러나, 이제 그는 옛생활로 되돌아 갔다.
이 장면에 대한 모든 것이 실패임을 말해 준다. 첫째로, 때는 밤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빛 가운데서 행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둘째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시적인 말씀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세째로 그들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네째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영적인 시각이 희미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성급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다른 여섯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다.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없이는 너희가 아무 일도 할 수없으리라.“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의미로 시작하여 비성경적인 일들을 행하나, 다만 시간과 재물, 힘만을 낭비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성급함에 대해서는 주의하자. 주님께서 인도하시기를 기다리고, 그로 하여금 축복하시게 하는 편이 우리 자신의 많은 육신적인 행위들을 갖는 것보다 낫다."
요 21:4-17
2. 결단의 아침(21:4-17)
그리스도께서 이 장면에 나타나시자,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는 해변에서 그들에게 지시하셨는데, 그들은 대단히 많은 고기를 잡았다 ! 주님께서 조정하시는 잠깐 동안의 일이 온 밤을 지새우는 육신적인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였다. 이 기적을 누가복음 5장에서의 베드로의 경력이 시작되는 한 때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누가복음 5장 요한복음 21장
실패의 밤을 지낸후 실패의 밤을 지낸 후
수를 셀 수 없이 잡힘 153마리의 고기를 잡음(11절)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함 그물이 찢어지지 않음
그리스도께서 배에서 지시하심 그리스도께서 해변에서 지시하심
어떤 이는 이것을 오늘날의 교회(눅 5장)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말세의 교회(요 21장)의 상징으로 본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의 그물을 던지지만 종종 그물이 찢어지고, 실패처럼 보이며, 실제로 얼마 만큼의 영혼을 구원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 오실 때에는 정확한 수를 알 수 있으며, 잃어버리는 자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많은 배와 어부들이 일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한 교회와, 복음의 그물에 구속된 모든 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장에는 사실상 고기를 잡은 것 이외에도 몇 가지 기적들이 있다. 베드로는 일곱 사람이 함께 해도 끌어 올릴 수 없었던 그물을 끌어 올리는 기적적인 힘을 받았다(6, 11절).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숯불과 조반 역시 기적적인 공급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전 상황은 베드로의 양심을 깨우고 그의 눈을 열게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고기를 잡은 일은 그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던 과거의 결심을 상기시켰을 것이며, 숯불은 그리스도를 부인했던(요 18:18)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었다. 갈릴리해는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체험했던 갖가지 일들, 예컨대 5,000명을 먹이신 일과 물 위를 걸었던 일, 동전을 삼킨 고기를 잡았던 것, 풍랑을 잔잔케 한 일 등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부인하였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공적으로 바로잡아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죄를 다루시기 전에 그를 먹이신 것에 유의하자. 우리를 축복하시고 나서 우리를 다루시는 주님을 어떻게 닮을 수 있을까 !
논제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실제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 생활이 헌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새로운 명령에 주목하자.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일 뿐아니라 이제는 목자(목회자)이다(벧전 5장). 그는 이제 양들을 치는 목자이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인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영혼 구원자)가 되고자 하지만, 그중 몇몇이 양떼를 먹이는 특별한 사역을 위해 소명을 받는다. 만약 그들이 먹이고돌보아야 할 곳에 교회가 없다면 잃어버린 자들을 구하기에 얼마나 좋은 곳인가!
요 21:18-25
3. 헌신의 낮(21:18-25)
여기에 아들됨(구원받음)과 제자됨(주님을 따름)간의 차이점이 나타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제자인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범죄하였을 때 그의 아들의 신분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제자로서의 상태를 벗어났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를 따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십자가를 직면하여(18절) 어느 때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것을 시사하신다(벧후 1:12-14).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부터 지키려고 하였던 일을 회고해 보면, 이 명령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마 16:21-28).
이제 베드로는 다시 주님께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보는 비극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 경우는 요한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우리는 오직 그에게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히 12:1-2). 그리스도께서 그의 다른 일꾼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로마서 14장에는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우리에게 이 세상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유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킴으로 그의 복음서를 끝맺고 있다. 사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각기 다른 그리스도의 초상화로서, 각각의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요한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생애를 완전하게 기록하기란 불가능하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죄를 고백하고 그의 사랑을 확고히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를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행전에서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을 축복하시며 사용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