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16:1~9)
'아하스는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그대로 따라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혐오스러운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까지 했습니다.'(3절)
지리하고 독하게 여겨질 정도로
북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채로
왕권을 찬탈하고 그 일이 계속 이어진다.
오늘 본문에서,
요담의 아들 아하즈가 유대의 왕으로 계승되는데
그는 여러 악한 왕들보다 더욱 부각되는 악한이다.
아들을 제물로 죽이기까지 한다. 괴물이다.
첫단추를 잘못 꿰니 그 다음 모든 단추가 잘못 꿰어지듯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상식의 기준과는 동떨어진
잔인하고 추악하고, 공포스러운 일들이다.
혹, 열심히 단추를 꿰는 모습에
열정적인 에너지를 칭찬하는 이가 있을까?
요즘 세대의 가치관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니, 그것이 대세이다.
뿌리와 같은 가치관이 흔들리니
현상에 국한해서 가치관을 얹어 넣는다.
열심히 하면 미덕이다.
그것이 악한 일인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모호한 채로.
그리고
아하즈 왕에게도 논리는 있다.
경쟁국인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으로 자신의 유다를
위협하고 있었고, 강대국 앗시리아는 항상 부담스러운 존재였으므로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다.
정치적인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가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혼란한 논리의 경쟁 속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원리, 진리를 따르는가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진지를 따르지 않는 것은
결국은 내밀한 곳으로부터(또는 드러내 놓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문자로는 그것이 그렇게 위중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허다한 죄 중의 하나?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빗나갔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결국 그 일의 결과, 열매로 드러난다.
잘못된 길이 처음에는 정상적인 길과 별 차이 없어 보이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도저히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간극이 벌어지는 상황을
상정해 보면 된다.
아하즈는 자식을 인신제물로 드릴 정도의 괴물이 되었다.
그가 가는 곳, 하는 일마다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욕망과 증오의 열매, 죽음으로 연결지어지는 일들만 있을 뿐이다.
악한 영혼이 자리 잡은 그로서는
어려운 일, 갈등을 앞에 두고
앗시리아에 부여 잡을 수밖에 없다.
앗시리아에게 만큼은 온갖 재물을 모아 바치고,
부탁하고, 힘을 결탁하기 위해 그의 얼굴에 없을 것같은
부드러운 이미지를 마구 발산한다.
한국의 리더십이 자꾸 연상되는 것이 매우 피곤하다.
"하나님, 오늘 묵상에세이에서
뮤추얼 펀드 비유를 통해 결정적 손해를 대비해서
여러 곳으로 분산 투자하는 것처럼
한 발로는 하나님을, 다른 한 발로는 세상의 어떤 것에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제 모습입니다. 내밀한 곳에
여전히 나의 살 길을 위해 자구책을 강구합니다.
그러니 걱정과 근심이 멈추질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적인 것입니다. 전적이지 않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성에 얼마만큼 베팅하는 것 정도입니다.
제가 믿음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
갈 길은 요원하고 격차가 심하지만
어떻게든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 치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분투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양정환 회복의 기간, 함께 해 주십시오.
무난하게 극복하고 하나님 위해 헌신하는 귀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양소영 건강 지켜 주십시오.
감사 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