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네 형제가 전쟁에 참가했는데 위로 세 형제가 죽고 막내인 라이언 일병만 생존했습니다.
밀러 대위를 포함한 여덟 명의 군인이 그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전쟁놀이가 아닙니다.
전시 상황입니다.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임무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 영화 줄거리에는 상당한 갈등이 나옵니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이 간다는 것이 이치적으로 합당합니까?
하지만 갈등은 갈등이고 임무는 임무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이유로 임무를 외면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자기들이 군인이고 자기들에게 명령이 내려진 이상 그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중략)…
결국 신앙이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대신 해주는 것이 신앙인 줄로 오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를 예로 들면, 밀러 대위를 포함한 여덟 명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고 지휘 본부에 명령을 내리고는 그 명령이 어느 만큼 잘 이행되는지 확인한다는 뜻이 됩니다.
신앙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간섭을 받는 정도가 곧 그 사람의 신앙 수준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간섭에 순종하는 것이 한꺼번에 되지 않습니다.
상당 기간 동안 꾸준히 훈련되어야 합니다.
영어로 훈련을 discipline이라고 하고 제자를 disciple이라고 합니다.
제자는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훈련 받지 않으면 제자가 아닙니다.
훈련에는 물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학생이 있습니다.
성적표가 나왔는데 지난달보다 많이 떨어졌습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마음잡고 공부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저녁 먹고 시계를 보니 6시 40분입니다.
7시부터 공부하기로 하고 시간 가기를 기다립니다.
7시가 되었습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려니 책상이 너저분합니다.
먼저 책상 청소를 합니다.
그다음에는 계획표를 짭니다.
형광팬으로 색깔을 입혀가면서 예쁘게 짭니다.
그 계획표대로만 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속이 출출합니다.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밥까지 말아서 맛있게 먹습니다.
배가 부르니까 슬슬 졸립니다.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첫 날인데 라면만 끓여 먹고 바로 이부자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책상 위에 엎드려서 잡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다가 밤중에 깨어서 시계를 보면 새벽 두 시입니다.
그러면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에 들어갑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하는 결심이 부족해서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결심은 분명히 있습니다.
공부 할 수 있는 책상도 있고, 공부방도 있고, 심지어는 공부하다가 밤중에 먹을 야식도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는데 딱 하나 “실제로 공부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결심만 하면 그것이 곧 자기 실력인 줄 착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 몸에 밴 경건 습관이 없는데도 그걸 모를 수 있습니다.
어금니만 앙다물면 그것이 신앙인 줄 압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태권도 도장 1년 다닌 사람과 10년 다닌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테니스 1년 친 사람과 10년 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 다닌 지 1년 된 사람과 10년 된 사람은 구별이 안 될까요?
면허로 치면 죄다 ‘장롱면허’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운전을 해본 적이 없으니 1년 전에 면허 딴 사람이나 10년 전에 면허 딴 사람이나 운전 못하기는 매일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