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등반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고산등반-. 장봉완(47·張奉完)씨는 그 죽음의 지대에서 무려 27차례나 살아나온 산악인이다.
틸리초피크(7,134m)에서는 정상에서 내려오다 추락해 발목 골절상을 입고, 알프스 마터호른(4,478m) 북벽과 에베레스트(8,848m)에서는 등반 도중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위경련을 겪는 등, 시커먼 벽과 하얀 눈만이 있는 고산에서 어려운 상황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는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며 그 때마다 위기에서 벗어났다.
틸리초피크에서 부러진 다리로 하산
83년 12월3일, 장봉완은 윤대표(47·악우회)씨와 함께 틸리초피크에 올랐다. 크레바스 안에서 하룻밤 비박한 뒤 오른 정상이었다. 엄청난 바람과 추위가 몰아쳤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고봉이 눈앞에 펼쳐지자 기쁘기만 했다. 운명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산길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윤대표씨의 뒤를 따르던 그는 갑자기 미끄러지면서 2,000m 아래 빙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은 윤대표씨도 곧 같은 신세가 되었다. 한 사람이 피켈 피크로 설사면을 찍으면 속도가 죽다가 또다시 충격을 받으면 다시 떨어지기를 여러 차례. 어느 순간인가 두 사람 모두 추락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윤대표씨는 멀쩡했지만, 그의 발목은 이상했다. 왼쪽 발목에 금이 간 것.
겨우 겨우 제3캠프로 내려와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 다친 발목은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신발에 발을 집어넣자니 너무나도 아팠다. 비명소리가 절로 나오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신발을 신었다. C2로 내려가는 그 날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전날에는 암벽 구간이라 그래도 나았다. 이 날은 가파른 설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픈 다리로는 아이젠을 벽에 찍을 수 없었다. 확보를 받은 상태에서 오른발 아이젠 앞 이빨로 설벽을 찍고 왼쪽 무릎을 설벽에 대면서 겨우 겨우 균형을 유지하며 내려왔다.
텐트 두 동이 설치된 제2캠프에서 대원들을 만났다. 그런데 텐트에 짐을 집어넣고 옆 텐트에서 저녁밥을 먹는 사이 그의 텐트가 사라져 버렸다. 비좁은 2인용 텐트에서 4명이 하룻밤 지낸 것도 고통이었다. 이튿날 아침 하산하기 전 주변을 살피다 캠프 아래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사라진 텐트에는 장비뿐 아니라 정상사진이 담긴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텐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저 아래 절벽의 쿨와르에 걸려 있었다.
동료들이 절벽으로 내려가 장비를 수습해왔다. 잠시나마 기쁜 마음으로 하산길에 들어섰으나, 발목이 점점 더 아파왔다. 날카로운 설릉 구간은 말을 타듯 한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왔다. 대원들과 거리가 멀어지자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저 아래로 뛰어내려 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고통의 막바지에 겁을 집어먹어 눈에 초점을 잃은 막내 대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자 막내를 어렵게 키운 홀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꼭 살려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용기를 냈다.
전진베이스캠프인 틸리초호(湖)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앞서간 대원 두 명은 건너편의 해발 6,000m대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후배와 함께 하룻밤 지내고 이튿날 고개 위에 올라서자 후배에게 먼저 베이스캠프로 내려가 대원들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이후 그가 겪은 고통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었다. 베이스캠프가 보이는 위치에 이르자 ‘이제 살았다’ 싶은 기쁜 마음에 눈밭에 드러누워 또 다시 펑펑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런데 사력을 다해 내려선 베이스캠프에는 사람은커녕 캠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도 없이 알파인스타일로 등반에 나섰던 대원들에게서 연락이 없자 정부연락관과 쿡이 대원들 모두 죽었으리라 짐작하고, 짐을 몽땅 싸가지고 하산해 버렸고, 먼저 내려간 대원들도 베이스캠프에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마을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는 물이 흐르는 곳으로 다가가 신발을 벗고 발을 닦았다. 열 발가락 모두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동상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싶은 절망감이 들면서 또다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란 노래는 다 불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을 신고 왼발을 끌다시피 하며 조금씩 조금씩 내려갔다.
‘재운아! 네 몫까지 산을 올라주마’
그후 마지막 마을에서 동료 대원들이 보내준 말을 타고 내려가는 등,우여곡절 끝에 대원들을 만나 귀국 후 병원에 입원하자 의사는 그에게 발목과 발가락 동상보다는 영양실조에 걸린 몸을 추스르는 게 더 급한 일이라며, 혈액만 해도 링거병으로 10여 병 수혈케 했다. 한 달쯤 입원 치료를 받은 다음에서야 발목 깁스를 할 수 있었다.
서울 명륜동 출신인 장봉완씨는 어린 시절 의리를 가장 소중히 생각하며 커왔다. 그런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교 시절 그는 믿었던 담임선생과 친구로부터 배신감을 느꼈다. 사소한 패싸움으로 상대방 학생이 크게 다치면서 문제가 커지자 담임선생이 “너 혼자 책임지면 나중에 아무 일 없도록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건만 결과는 보름간의 정학이었다.
담임선생과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에 마음속 깊이 상처를 입고,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질타에 분노를 느낀 그는 집을 나와 강원도 어느 산인가에서 몇 달을 지냈다. 그 결과 중학교를 옮겨야 했지만 그때부터 산의 포근한 포용력에 깊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69년, 고교 1년 때 어느 날 그는 북한산을 올랐다. 인수봉 밑에서 자일을 어깨에 메고 있는 어른들을 졸랐다. 그 날 처음 인수봉 정상에 올랐다. 이후 그의 머릿속에는 바위 외에는 없었다. 후에 그를 더욱 산으로 밀어들인 전재운과 산꾼으로서 깊은 사이가 된다.
70년 재운과 함께 거리회에 입회하면서 그의 화려한 암벽등반 시대가 열린다. 인수봉을 처음 오른 17세 때부터 군 입대 직전인 22세 때까지 그는 인수봉을 1천회 이상 오른다. 아마 지금도 ‘인수봉 최단기간 최다등반’일지도 모를 이 기록을 그는 일기를 통해 확인하면서 스스로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72년 인수봉 거룡길을 개척하기도 한 그는 73년 가을 처음으로 바위에서 사고를 당한다. 당시 30여 개에 불과했던 인수봉의 루트에 식상,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그는 미등 루트였던 궁형크랙에 도전했다. 그런데 루트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균형을 잃으면서 50여m나 추락했다. 다행히 그는 찰과상 정도 입는 것으로 끝났지만, 확보를 보아주던 전재운은 손바닥살이 자일에 묻어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 사고는 두 사람을 더욱 끈끈하게 묶어 주었다. 그는 전재운에게 빚을 졌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군에 입대해 두번째 휴가를 나온 76년 전재운이 사망했다. 에베레스트 훈련대원으로 설악산에서 적설기 훈련중 눈사태에 묻힌 것이다. 서둘러 설악동으로 갔지만,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선배들은 그를 사고현장에 가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악우의 차디찬 시신과 함께 벽제화장터로 갔다. 그리고 뼈를 받아내 직접 절구에 넣고 빻아 인수봉이 잘 보이는 쪽두리봉 아래 능선에 묻었다. 비석을 세우면서 그는 눈물을 쏟았다. 그러다 인수봉을 바라보며 가슴속 깊이 다짐했다.
‘재운아, 네 몫까지 산에 다녀주마.’
그의 등반은 더욱 치열해졌다. 인수봉과 선인봉에서 설악산으로, 무게가 40~50kg이나 나가는 배낭을 멘 채 능선을 타고, 계곡을 파고들었다. 멋진 바위가 나타나면 거침없이 올랐다. 범봉 ‘거룡2’를 개척한 다음 울산암으로 옮겨 숭실OB, 마운틴빌라 회원들과 함께 번개길을 뚫기도 하고, 적벽도 올랐다.
79년 일본 북알프스의 병풍암과 다니가와다케에서 암벽등반에 관해 더욱 자신을 얻은 그는 그 해 겨울 알프스 3대 북벽 동계 등반에 나선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너무나도 나약한 자신을 발견했다. 영하 30℃ 이하로 떨어지는 추위와 강풍이 몰아치는 북벽에서 그의 존재는 미물에 불과했다.
81년 또다시 도전했다. 역시 참패로 끝났다. 더욱이 마터호른 북벽에서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위급한 상황을 맞았다. 벽에 매달려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위경련이 일어났다. 벽 아래로 뛰어내릴 생각도 들었지만 이때도 재운과의 약속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북벽 등반보다 더 어렵다는 훼른리대피소까지 겨우 벽을 가로질러 탈출해 무전기로 헬기 구조를 요청해 살아나올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알프스 등반과 틸리초피크 등반이 그를 지금까지 27번의 고산등반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준 것이다. 86년 11명의 세계 유명 산악인들을 삼킨 K2(8,611m) 정상을 밟고 살아 돌아온 것도, 88년 에베레스트(8,848m)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악전고투의 생환 경험이 뒷받침된 것이다.
84년에는 거리회 선배인 김인식씨(전 서울시산악연맹 회장)와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를 오른 다음 그에게는 인생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우연히 만난 교포가 아르헨티나 이민을 권한 것이다. 82년 진선미씨(40)와 결혼한 후 별다른 돈벌이 없이 지내오던 그로서는 반가운 제의였다. 하지만 산 때문에 무산되었다. 아내에게 이민 신청 서류를 보내달라 부탁해놓고 일을 배우는 도중 K2 등반 제의가 온 것이다.
잠시 갈등을 느끼기는 했지만, K2는 그가 아르헨티나에 안주하도록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85년 대산련 K2-브로드피크(8,047m) 시등대 일원으로 카라코룸에 들어선 그는 K2와 브로드피크를 각각 제2캠프까지 등반한 다음 자신감을 얻었고, 이듬해 ‘죽음의 산’ K2 정상에 부대장으로서 대원 두 명과 함께 올라섰다.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36세로 조로현상이 있던 우리 산악계의 분위기상 고산 등반은 그만둘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등반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해가 바뀔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89년 코뮤니즘(7,495m)·안나푸르나(8,091m) 동계등반, 90년 코뮤니즘 등정, 91년 시샤팡마(8,027m)-초오유(8,201m) 등반, 93년 매킨리(6,194m) 등정, 94년 매킨리-헌터 등반, 95년 가셔브룸1봉(8,068m) 등반, 96년 아콩카구아 등정(두번째 등정), 96년 옥주봉(6,178m), 충모강리(7,048m)-릉보강리(7,095m) 등반 등 하얀 산에 대한 도전은 그칠 줄 모른다.
88년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 도중 해발 8,050m대에서 또 심한 위경련으로 곤욕을 치렀던 장봉완씨는 그 후 등정보다는 대원들의 안전에 신경쓰면서 등반했다. 원정 때마다 대장이나 등반대장을 맡았던 그는 대원들에게 모든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요구했고, 그로 인해 카리스마가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글쎄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합리적인 카리스마라 생각합니다. 대원들과 함께 등반하면서 산의 상황을 확인해 대원들을 안전하게 운행케 하고, 또한 대원들의 능력과 건강 상태를 확인해 가장 적합한 대원을 공격조로 선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등반했는데도 대원 한 명의 욕심 또는 실수로 원정대 전체가 위험한 상황에 몰린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그 때문에 대원들에게 명령에 따라주기를 당부하는 겁니다. 사실 고산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수직의 행위에서 실수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산은 정말 다니면 다닐수록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이 더해갑니다.”
등정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
장봉완씨와 함께 등반해본 후배들은 그가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 간혹 속이 상할 적이 있다고 말한다. 88년 에베레스트와 89년 동계 안나푸르나를 그와 함께 등반한 송열헌씨(41)는 “하지만 장 대장이 대장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는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 누구보다도 더 술을 좋아하고 후배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선배지만, 일단 등반이 시작되면 180도 달라집니다. 금주는 물론이고 명령에 절대 복종케 하며 매우 엄격해지죠. 참견도 매우 심합니다. 하지만 여느 대장처럼 베이스캠프에 가만히 앉아 지시만 하고 있지 않아요. 봉완이 형은 대원들보다 늘 한 발짝 앞서 등반합니다. 89년 동계 안나푸르나를 등반할 때입니다. 위험한 구간을 모두 끝낸 다음 정상공격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정상부에 돌풍이 불고 몇 가지 나쁜 조짐이 보이자 위험하다고 판단해 등반을 끝내자고 말하지 뭡니까. 대원들이 계속 등반하자고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끝내 형은 꿈쩍도 하지 않더군요. 등정보다는 대원들이 다시 집까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더욱 신경을 썼던 거죠. 아마 대원들의 위험을 감수하고 등반했더라면 형은 물론 형이 대장이나 부대장을 맡았던 원정대는 몇 번 더 등정했을 겁니다.”
장봉완씨는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은 눈밭에 길을 내는 즐거움 때문에 고산등반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등정주의보다는 등로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능력도 안되는 사람에게 고난도 거벽등반 같은 등로주의를 추구하라 강요하는 것은 간접살인이나 다름없는 무책임한 언동”이라 말한다.
“몇 개 팀이 몰려 있을 때와 단독 팀이 등반할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75년 영국 보닝턴 대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초등을 일례로 들어봅시다. 당시 셰르파가 50명 넘게 동원됐습니다. 그런 등반을 성공했다 해서 등반성 있고 가치 있는 등반이라고 추켜세울 수 있을까요? 저는 그보다는 노멀루트일지라도 단일 팀이 셰르파의 도움 없이 대원들의 힘만으로 아이스폴을 뚫고 눈길도 헤쳐 정상까지 오른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씨는 그런 면에서 외국의 유명 등반기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 “물론 등반기를 통해 꿈과 희망을 키우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등반기에 나온 산을 갔다가 그 내용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무슨 수를 쓰든 자신의 등정을 확인시키려고 노력하는 외국 산악인들의 자세는 분명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년에 인도 히말라야의 무크트파르밧 동봉(7,130m) 등반에 나설 계획이다. 무크트파르밧 동봉은 지난해 서울시연맹 구조대 원정대(대장 홍옥선)가 등반, 세계 초등이라 발표했지만, 올해 이 봉을 다시 등반한 인도팀이 진짜 정상에 올랐다고 반론을 제기한 봉이다.
“우리가 올라간 봉이 진짜 정상이라면 그 사실을 인도팀에게 확인시켜 주어야죠. 만약 인도팀이 오른 봉이 정상이라면 기꺼이 인정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말입니다.”
장봉완씨는 산에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부터 한국등산학교 강사로 지내왔고, 7년간이나 서울시연맹 산악구조대장을 맡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강사로서 후배 산악인들이 올바르게 등반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최선을 다하고, 또한 구조대원으로서 산악인들이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친구 전재운에 대한 약속도 지켜왔고, 또 멋진 등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랄 수 있다. 그러나 아쉬움도 많다. 등반에 몰입해 지내느라 20대에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했고 30대에 들어서 알파인 프로가이드협회 창립멤버로서 등반과 사회생활을 접목시키려 했으나, 그것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대학로에서 술집도 해보고, 성균관대 앞에서 레스토랑도 운영해 보았다. 9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등산의류 제조업에도 손대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때 번창하는 듯하다 동일 품목을 생산하는 큰 업체에 밀려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산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산’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금만 더 절제된 생활을 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산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자신 있는 게 산이다 보니 늘 산쪽으로 치우친 것 같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배들에게 늘 산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죠. 아직도 40대니까요.”
첫댓글 우리 거리산악회 카페에서 가져왓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