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규 군수는 "이제는 선열의 정신을 실천해야할 때로
문화와 예술 그리고 교육의 중심도시로 꽃피워 가자”고 강조
제90주년 금마리 만세운동 기념식을 겸한 3.1절 기념행사가 2009년 3월1일 오전 10시 월군 주천면 금마리 독립만세기념상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독립만세운동으로 고통을 겪은 17인의 선열을 상징하는 17개의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유가족과 주천면민, 박선규 군수, 장경제 군의회의장과 의원, 기관 사회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선조님들의 희생정신을 되새기면서 오늘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하는 자리가 되었다.
박선규 군수는 기념사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면서, 이제는 선열의 정신을 실천해야할 때로 군민 모두가 한마음 되어 새 희망 미래를 개척하는 태양광 신소재산업의 메카로서 문화와 예술 그리고 교육의 중심도시로 꽃피워 가자”고 강조했다.
기념식을 마친 후에 90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기위해 마을까지 약 500여 미터를 주천고등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했으나, 뒤를 따르는 어른들의 행열이 흩어지면서 동행인이 적어 매우 섭섭한 표정이었다.
주천면 금마리 마을은 1919년 4월21일 주민들과 장꾼 등 300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역사의 현장으로, 만세운동을 저지하기위해 방문했던 당시 영월군수 석명선에게 만세연명부에 서명토록 한 후 태극기를 손에 들려 같이 만세를 불렀었으며, 이일로 69명이 붙잡혀 17명이 일본법정에 재판을 받는 등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다.
다음은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사 요약 기록]이다.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은 충절의지로 무장한 우리지역 선열들이 일제치하의 굴욕으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고, 우리나라가 자주국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69명이 일제에 붙잡혔고, 이 중 17명이 옥고를 치르고 한 분이 옥사한 의거로, 우리나라 항일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지로 만세운동이 번져나갈 무렵, 영월에서는 천도교인들을 주축으로 하여 독립만세운동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를 주도하던 인물이 천도교 상주선도사 천선재 선생과 양변면장을 지낸 유학자 박수창 선생이었다.
박수창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분연히 면장 자리를 물러나 고향 금마리에서 울분을 삭이고 있던 중이었으며, 1919년 고종황제가 붕어하자 천선재 선생과 함께 서울로 가서 국장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입수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즉시 독립만세운동 준비에 착수하여 박수창 선생의 장남 박광훈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총지휘 역할을 맡겨 태극기를 만들게 하고, 친척인 박수경 외 8인에게는 마을을 다니면서 만세운동에 가담할 주민들의 연명부를 작성하게 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주천 장날인 4월 11일 거사하기로 하고 모든 계획이 잘 진행되어 가던 4월 8일, 금마리를 다녀간 천선재 선생이 수주면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계획에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으나 박수창 선생의 독립만세운동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주천장터에서는 감시가 너무 심해 독립만세를 부를 수 없는 형편이 되어 고심하던 중, 당시 영월군수 석명선이 소위 민심지도라는 미명하에 만세운동을 저지하고자 주천장날인 4월 21일 금마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 마을사람들과 장꾼들을 모아 거사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마침내 4월 21일, 말을 탄 군수 석명선이 수행원 2명을 앞세우고 금마리에 도착하여, 주민에게『독립만세 반대자 연명부』에 서명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자 박수창 선생 외 만세운동 가담자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군수일행을 에워싸면서 “왜놈의 앞잡이 노릇은 그만두고 우리와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부르자“고 하였다.
이어 박광훈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수 석명선 일행에게 태극기를 쥐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도록 종용하자 위협을 느낀 군수는 어쩔 수 없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이어 박광훈이 군수에게 함께 만세를 불렀으니 『만세 연명부』에 서명하라고 하여 억지로 서명까지 하게 된 군수는 300여명이 부르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들으며 군중들 틈을 빠져나갔다.
저녁나절 쯤 되어 파견대장 나까무라가 완전무장한 헌병과 보병 7명을 대동하고 금마리에 들이닥쳐 박수창 선생 외 68명이 검거되어 주천 헌병주재소에 잡혀가 8일간이나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그 중 17명이 경성으로 잡혀가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 중 탁원근 선생은 그 해 11월 고문의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된 후 1980년대 후반까지도 금마리 독립운동은 안타깝게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다. 그 후 1987년에, 만세운동 당시 옥고를 치른 박수영 선생의 손자인 박만희씨가 선친의 역사에 대하여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증빙자료를 관계기관에 제출하여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의 독립만세운동사에 공식 기록되게 되었다.
또한 박충훈씨는 (이곳 금마리가 고향이며 한국문인협회 회원) 금마리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박만희씨로부터 자료 열람과 증언을 바탕으로 1990년 시사월간에 '금마리 3.1독립운동사'를 발표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박만희씨와 박충훈씨를 계기로 영월군과 영월문화원, 국회의원,기관 사회단체 등의 노력으로 1992년 7월 이곳 금마리에 독립만세운동 기념비인 만세상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2001년 3.1절부터는 이곳에서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금마리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군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영월군의 정신문화제로 승화시켜 계승하기 위해 2007년부터 영월군행사로 격상시켜 기념식과 재현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요약 기록 참고자료 :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3.1운동사] 발행자 : 이교헌, 시사시보출판국.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 3.1운동편]발행자 : 일본외무성 육해군성문서.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Ⅰ)] 발행처 : 광복회 강원도지부.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중 3권] 발행처 : 광복회 강원도지부.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독립운동사 제1권 ~10권 중 제2권 3.1운동사(상)] 발행 : 독립유공자 사업기금 운용위원회.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 1집 ~14집 중 제 5집 3.1 운동 재판기록]발행자 : 독립운동 편찬위원회.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자료내용 : 1919년부터 1921년 사이 기소판시 된 3.1운동관계 형사사건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