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문 목사의 가족 사랑 이야기
바보가 되고 싶은 아버지
고 최진실, 박용하 등 유명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을 접하면서 조하문 목사는 한국 사회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올해 캐나다 이민자 목회를 내려놓고 아내 최지원 씨와 함께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이들 부부의 모습은 고요하면서도 강해보였다.
취재 글 김문영(편집부) 사진 김기현(편집부) 자료 제공 홍성사
프롤로그
조하문 목사(53세)는 대한민국의 록 뮤지션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였다. 1980년「MBC대학가요제」에서 자작곡 ‘해야’로 은상을 받으며 실력은 물론이고 수려한 외모까지 두루 갖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이 밤을 다시 한 번’,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등이 대히트를 치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의 아내 최지원 씨(53세)는 MBC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드라마「갈채」,「조선왕조실록」에 출연한 바 있다. 이들 선남선녀 커플의 결혼식은 시기 어린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가수 조하문이 나이 마흔에 ‘목사’로 변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며 궁금해했다. 올해 5월, 한국에 돌아온 그는「조하문의 회복일기」를 펴내고 ‘북 콘서트’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생명사랑모임)’ 집회 등 여기저기서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아버지 인생의 행로는 그 자신만의 사사로운 길이 아니다. 가족이 모두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그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따랐을까?
귀국을 환영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계기와 오랜만에 오신 소감, 근황을 말씀해주십시오.
캐나다 토론토의 이민교회와 장애인공동체를 섬기며 목사로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새벽마다 일어나 말씀을 들고 단상에 설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설렐 수가 없더군요. 아내와 애들도 총동원되어 교회의 여러 일을 감당했지요. 서른여덟에 예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강도 높은 훈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옛 습관이나 취향들을 내다버리고 거듭난 인생으로 살아가는 획기적인 시간들이었죠. 그 가운데 변화되어가는 내 모습과 활기 넘치는 가족의 일상은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향수병을 앓는 것처럼 울적해하며 외로워하던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남자가 나이 오십에 살던 터전을 다 내려놓고 또 다시 떠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으면서 기도했지요. 그렇게 해서 돌아왔는데 제가 오기 한 달 전에 임동진 목사님과 전 MBC제작본부장 유수열 장로님, 백성기 목사님께서 잇따른 문화예술인들의 자살을 예방하고자 생명사랑모임을 만들어 저를 책임목사로 앉혀 놓으셨습니다. 사실 고 최진실 씨의 비보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연예인들이 겪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는 ‘사는 이야기’보다 ‘죽는 이야기’가 유행처럼 번져 있는 것 같습니다. 눈만 조금 뜨게 해주면 극단적으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텐데, 이 땅에 ‘생명을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가득하다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어떤 이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의연하게 대처하며 고통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어떤 이는 자그마한 시련이라도 다가오면 바로 넘어질 태세로 겨우 살아갑니다. ‘의지’의 문제거든요. 생명을 선택하겠다는 의지가 자신이 처한 현실과 감정적 반응, 비뚤어진 생각의 고삐를 붙들고 있어야 해요. 요즘 생명사랑모임 집회를 주일마다 열고, 다양한 형식의 콘서트를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중순, KBS 2TV 토크쇼「여유만만」에 출연한 방송이 나간 직후, 100여 건의 전화가 물밀듯 쏟아져 오더군요. 우울증의 고통을 토로하는 분들이 대다수였지요.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생명을 갈구하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니 119 구조대가 출동하듯이 힘써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겠지요.
가수에서 목사로 파격적인 인생 반전을 이루면서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깨닫기 전까지 제 모든 행위는 처절한 절규와 몸부림이었습니다.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조하문 2집, 1989)’라는 곡도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서러움에 북받쳐 울부짖으며 만든 너무나 인간적인 노래였죠. 이 노래는 앞에 ‘If(만약에)’가 생략된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이라는 조건절이 붙은 것이지요. 이전에 음악은 내 인생의 전부였죠. 목숨이라도 걸라면 걸 수 있을 만큼 음악을 의지하고 살았어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시간도 보냈죠. 하지만, 벼랑 끝에 선 황량한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죽겠다고 결심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분은 말로 할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그토록 추구했던 세상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쾌감도 주지 못했습니다. 분노를 폭발시켜야 할 이유도, 끝도 보이지 않는 고뇌도 사라졌기 때문이었죠. 더 이상 절망의 노래는 부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제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간다고 하자, 박수를 치며 좋아하더라고요. 불규칙적인 가수생활보다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신학을 통해 믿음도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막상 목사 안수를 받겠다고 하자 적잖은 충격을 받더군요. 남편의 변화된 모습에 감사하면서도 목사의 아내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들이 목사 안수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흐르는 것을 몸이 떨릴 정도로 경험하면서 순종하기로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목사님이 되면 너희도 그에 따른 각오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가르쳐주더군요. 당시 큰애가 초등학교 6학년(조태관), 둘째가 2학년(조경관)이었는데 목사가 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면서 그저 무섭기만 하던 아빠가 달라지는 것을 마냥 좋아했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갑작스러운 변화였겠지만, 사실 과정 없는 변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서서히 저부터 시작해서 아내와 아이들까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준비를 해나갔지요. 늘 동행하며 격려해주는 아내가 있어 든든하고, 믿고 따라주는 아들들이 있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특히 아내의 현명한 보살핌과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에 가족이 하나가 되어 목회생활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제게 약간의 공황장애와 심장병이 가시처럼 남아있습니다. 두 가시 때문에 자만에 빠지지 않고 몸을 낮추게 되었으니, 저의 연약함은 오히려 복의 통로로 쓰이고 있는 셈이지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으며, 두 아들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 저는 아버지보다 늘 부드럽게 품어주시는 어머니 편이었죠. 아버지의 단호한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무조건 싫었습니다.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옳지 못한 일은 단호하게 거절하셨고 자녀들에게 바르게 살 것을 훈계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식사 때는 물론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예의를 지킬 것을 가르치셨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런 아버지의 엄중한 규칙이 부담스러웠고 내가 속할 수 없는 아버지의 세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해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아버지를 멀리하고 미워했던 것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꽤 되어서도 아버지에 대한 비뚤어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그 감정조차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모범적인 큰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영 탐탁지 않더군요. 문득 아들 나이 때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고약한 짓 많이 하고 다녔던 나를 아버지가 얼마나 참아주셨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죠. 그제야 아버지의 큰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냐오냐하며 다 받아주어야 사랑인줄 알았던 철부지 시절이 후회되었고 아버지의 큰사랑 안에 있는 엄격한 법을 깨달았지요.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원망했던 제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고, 굳었던 마음이 녹아지고 풀어지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내 감정에 따라 왔다갔다 했던 아빠의 행동을 용서해라. 내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전에 깨달았다면 너희들에게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용서해다오.” 하고 아이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적이 있습니다. 최근 4년 전부터 비로소 아이들이 아버지를 진정 신뢰하며 따르더군요. 자녀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법을 깊이 신뢰할 수 있어야 삶에 질서가 생기고 활기가 넘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아버지가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펼쳐갈 인생의 계획과 목회 비전을 말씀해주십시오.
비전 없는 것이 비전입니다. 굳이 인간 조하문이 바라는 걸 얘기하라면 300명 정도의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면서 조용하고 점잖게 목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세우는 어떤 비전이나 계획은 열에 아홉은 현명하지도 않고 그저 그런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내 스스로 비전을 세우는 것 자체가 교만이지요. 이리로 와라 하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라 하면 저리로 가는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철저히 수동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지요. 너무 소극적인 태도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만 하기로 결단하면 ‘큰 능동 안에 사는 수동의 삶’이 되는 거지요. 그런 삶은 아주 역동적이어서 그 영향력이 우리 생각을 넘어섭니다. 이것이 핵심이에요. 14년 동안 ‘오늘은 무슨 일을 할까요?’ 하나님께 물어보던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고 그 일의 열매를 보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MBC에서 창사 50주년 특별기획「코이카(KOICA)의 꿈」을 준비하면서 저희 부부도 함께 따라가서 봉사자들의 멘토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더군요. 방송에 나가서 주목받는 걸 원하지 않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쪽으로 인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우리 사회에 영향력이 큰 문화와 예술, 연예계에 하나님이 전하시려는 생명의 메시지가 분명 있는데, 그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제 임무인 것 같습니다.
에필로그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라는 노래를 좋아해서 가끔 힘든 일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는 기자의 말에, 조하문 목사가 노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이야기보다 ‘하나님’ 이야기만 하고 싶다던 그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행복해 보였다. 최지원 사모도 그런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먼 이국땅에서 아내가 외로워할 때면 고 서영춘, 이주일 씨 흉내를 내며 아내를 웃게 했다는 조하문 목사. 그는 이제 자신의 아픔보다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가족과 이웃의 고통을 위로하며, 참된 평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바보’가 되어도 좋겠다고 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마태복음 7장 12절의 말씀을 지켜나가고 싶은 조하문 목사는 사랑하는 가족의 손을 잡고 험한 세상을 비추는 한줄기 빛으로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