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0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14주[교회연합주일] -
갈등을 성숙의 과정으로
{ 마태복음 18 : 15~20 }
Ⅰ. Story. 「 상대방의 입장에서 」
불의로 사고로 오른손을 잃은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친구들의 놀림으로 인해 울기도 했습니다. 보다 못한 아이의 아버지는 학교선생님을 찾아가서 아이가 친구들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수업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끈을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뒤로 돌려 허리띠에 끈으로 묶으라고 했습니다.
호기심으로 재미있어 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다시 말했습니다. “이번 수업이 끝날 때까지 오른손을 쓰지 않고서도 공부를 잘할 수 있는지 체험해 볼 거예요.”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묶었던 끈을 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반 아이들은 모두 사고로 오른손을 잃은 그 친구를 찾아가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네가 그렇게 불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너는 오른손을 안 쓰고도 어떻게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니?”
그러면서 아이들은 “그동안 그것도 모르고 놀려서 정말 미안해!”라고 말하며 사과했습니다. 사실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조금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편견으로 바라보기보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편견의 늪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배려할 때, 사랑의 온도는 조금씩 올라갈 것입니다. 교회는 크든 작든 참 다양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갈등(葛藤)이라는 말은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식물은 스스로 줄기를 세우지 못하고 다른 식물이나 물체에 지탱하여 위로 자랍니다. 칡은 왼쪽으로 감싸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싸 올라가기에 칡과 등나무가 함께 자라게 되면, 서로 뒤엉키게 되어 결국에는 둘 다 더 이상 자라지 못해 고사(枯死)합니다. 하지만 대처하기에 따라서 갈등이 오히려 공동체를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고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Ⅱ.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비교적 사이좋아 보이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로또 같은 사람이야!” 그러자 남편이 말합니다. “으응 내가? 정말?” 함박웃음을 짓더니, 다음 대답에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응. 어쩌면 이렇게도 안 맞는지 몰라~” “오잉?!” 남들이 볼 때 ‘잉꼬부부’라고 불리는 부부들도 없잖아 있지만, 부부지간에도 맞지 않는 것이 참 많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로 불리는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를 ‘인간시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시장에 가면 다양한 물건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신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경제력도 다릅니다. 공통점을 찾으라면 ‘신앙인’이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만 받는다면, 갈등의 소지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때때로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15a)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죄는 갈등을 유발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처음 아담에게 하와를 보여주자, 아담은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다.”(창 2:23). 무슨 말입니까? 유행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그대 없이는 못살아. 나 혼자서는 못살아.’ 바로 그 말입니다. 내 뼈가 없으면 내가 어찌 살겠습니까? 내 살이 없으면 어떻게 내가 존재할 수 있겠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너는 너가 아니라, 너는 나고, 나는 또한 나만이 아니라 내가 곧 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언제 그랬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불려나왔을 때입니다. 아담은 내 뼈 중의 뼈라고 했던 여자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난 별로 책임이 없고, 오직 바로 저 여자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타인도 보이지 않게 합니다.
Α. 갈등은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합니다(15).
갈등이 생기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 죄는 하나님께도 죄가 되지만, 인간관계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밝혀진 것입니다. 관계라는 말은 상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 인간들은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태어난 아들들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형제가 무엇입니까? ‘피를 나눴다’고 표현합니다. 한 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혈연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나가서 쳐 죽였습니다. 형제간에도 문제가 생겼지만, 부모자식 간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갈등관계가 된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방황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노아의 가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홍수 이후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어서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너무 많이 마셨는지, 술에 취해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러다 부지중에 옷을 걷어찼는지 알몸을 들러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갈등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세 아들 셈 함 야벳 중에 함은 아버지를 비난했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었습니다. 노아는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함을 저주하고, 셈과 야벳을 축복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삶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관계로 얽힐 수 있습니다. 갈등이 생기지 않으면 좋지만, 갈등관계라고 하여 관계를 깨는 것은 조심해야합니다. 오늘말씀은 갈등을 피하여 관계를 깰 것이 아니라, 갈등관계를 형성하게 된 당사자와 직면하여 갈등문제를 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갈등을 직면하므로 풀린다면, 형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되도록 관계를 깨지 말고 유지해야 합니다.
Β. 공동체의 갈등은 공동으로 대면해야 합니다(16-17).
갈등관계를 풀려고 무던 애를 써 보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등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그런 상태입니다.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15) 풀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막무가내입니다. 이럴 경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대부분 이런 경우 포기해버리고 관계를 단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공동대응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일대 일로 되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대동하여 함께 가서 설득해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여 공식적으로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 여기에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유대인은 선민(選民)입니다. 천국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지옥의 땔감입니다. 이방인처럼 여긴다는 것은 출교시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출교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출교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설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령 개인의 말은 물론이고, 공동체인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할지라도 감정을 배제(排除)하고 순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출교한다는 것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출교가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겠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괸당”문화가 엄청 강합니다. 제주도는 씨족사회입니다. 괸당에 속한 어떤 사람이 큰 잘못을 하면 괸당에서 쫓아내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제주도에 살지 못합니다.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갈등은 공동으로 대면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Γ. 갈등은 분열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합니다(18-20).
갈등이 발생하면 자칫 분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작은 균열이 축대를 붕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한참 전에 남측 방조제 길을 달리는데, 도로를 정비하는 사람들이 주전자를 들고 길에 무언가를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궁금하여 살펴보니까, 아스팔트도로에 작은 균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포장하기는 좀 그렇고,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랬는지 주전자에 담아서 균열부위에 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균열부위가 작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바로 그 부분 때문에 도로가 파손될 수 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의 파손을 미리 예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등관계가 지속되면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그것을 그냥 두면 나중에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갈등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관계의 회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들의 깨어진 관계를 붙이는 매우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초강력 순간접착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순간에 회복되는 것입니다. 강력접착제를 잘 활용하면 부서진 것도 고쳐서 쓸 수 있습니다. 공동대응이 왜 중요할까요? 2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하면 주님도 그곳에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든지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여 예외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갈등구조를 탓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노력하면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형제를 처음의 자리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Ⅲ.
1970년 세계 역도 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역도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역도선수들에겐 절대 넘지 못하는 벽이 존재했습니다. 그 어떤 선수도 500파운드, 약 227kg의 무게를 넘지 못했고, 사람들은 인간이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게라고 불렀습니다. 대회당일, 우승후보였던 ‘바실리 알렉세예프’가 결승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외치며 역기를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사람들의 입에선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500파운드에 부담감을 느낀 알렉세예프 선수가 499파운드를 들어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내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주최 측의 실수로 역기의 무게가 잘못 측정되었고, 알렉세예프 선수가 힘들게 들어 올린 역기는 501.5파운드라고 정정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장내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드디어 ‘인간의 한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리고 알렉세예프 선수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간의 한계’로 여겨졌던 500파운드를 들어 올린 사람이 그 해에만 6명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계’라는 단어의 무서운 힘입니다. 알렉세예프 선수 이전에 500파운드를 들어 올린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500파운드가 진짜 인간의 한계여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한계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을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세상이 정한 한계’는 없습니다. 그저 한계라고 믿는 자기 자신과 사람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갈등이 풀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갈등을 풀고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과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사이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화목하게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 안에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祝福)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