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묵상 글 >
사랑하는 영혼들아... !
사랑하는 영혼들아 !

나의 성심을 바라보아라...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 너희 정원에서
찬란히 피어나기를
너희들이 진정 원한다면
너희들의 정원 관리를 나에게 맡기고
내가 그 땅을 일구고 가꾸게 하여다오.
내가 원하는 꽃과 과일이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는 뿌리
너희가 뽑아내려고 해도
힘이 없어 뽑지 못하는 그 뿌리를
내가 직접 뽑아주마.
나는 너희 취향과 취미에 맞고
너희 성향에 적합하다고 여기고 있는
잡초들을 뽑아 버리고
사랑과 인내, 그리고 희생의 꽃과 열매가
너희 정원에서 자라게 하겠다.
열성과 순명 그리고 극기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일은
내가 원하는 꽃과 과일 나무를 자라게 하고
그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임을 명심하여라.
이 꽃과 과일은 너희에게 광명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요세피나 수녀의 예수성심의 메시지’중에서 -
+++++++++++++++++++++++++++++++++++++++
<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예수성심의 영성과 공경(恭敬), 위로(慰勞)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요한 19,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골고타 산에서 임종하신 후, 어떻게 당신의 가슴 옆구리에서 피의 사람이 되심, 수난, 죽음, 성체성사를 통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1) 예수성심 공경의 의미, 목적
교회의 전통 안에서 교부들은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물 (요한 19,34)은 우리의 인간과 세상을 살리는 구원(救援)의 생수(生水)로 보았는데, 이 예수님의 마음을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성심의 공경의 목적은 우리 인간의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예수성심과 합하여 사랑으로 보답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 6,5),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태 22,37-38; 마르 12,29-30)는 첫째 계명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성심 공경은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삶과 생명을 내어주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가슴의 피와 물을 쏟듯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자신들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뜻을 우리의 믿음, 소망, 신뢰, 충성, 사랑으로 따를 수 있을 때, 또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입게 되지요... 우리는 예수성심공경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끝없는 사랑, 십자가의 사랑, 구원의 사랑에 응답하면서 사랑의 기도, 희생, 보속, 실천 등으로 살고 보답하고자 하려는 것입니다.
2) 예수성심 공경의 역사적 배경, 유래
요한복음(7,37-39, 19,33-37)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늑방 옆구리에서 구원의 생명수가 계속하여 온 세상으로 흘러내릴 것을 약속합니다. 교부들은 예수의 마음에서 흘러내리는 세상을 위한 구원의 생명수를, 성령과 함께 예수성심을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도 아담의 늑방 옆구리에서 하와인 이브가 나올 수 있었듯이,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늑방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중세기에(1100-1350)는 예수의 심장(마음)을 은총의 샘으로 보는 교부들의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공경대상으로 삼는 경향으로 커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성심 공경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널리 보급하게 된 것은, 프랑스 방문회의 수녀인 마리아말가리다알라콕에게 내리신 예수성심의 메시지 덕분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 말가리다 수녀에게 1673년부터 1675년까지 만 2년 동안 70회나 발현하시어 메시지를 주시었습니다.
< 마리아 말가리다 알라콕 수녀에게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 >
① 예수성심은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며 모든 이가 사랑으로 동화되기를 바라신다.
② 예수성심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또한 인간의 보답하는 사랑을 바라고 갈망하신다.
③ 세상의 죄와 악을 배상(賠償)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영성체와 성시간을 바치어라.
④ 성체성혈대축일 후 다음 금요일을 예수성심대축일로 제정하고, 성시간과 영성체를 하라.
드디어 1856년에 교황 비오 9세는 예수성심축일을 정하였고, 1899년 교황 레오 13세는 전 세계를 예수성심께 봉헌할 것을 선포했으며, 그 후 비오 10세는 해마다 예수성심께의 봉헌을 갱신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1888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백주교에 의하여, 한국교회를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한편, 마리아 말가리다 알라콕 수녀에게 1675년 6월 16일에서 20일 사이에 발현하신 네 번째 내용에 따라서, 교회는 성체성혈 후 다음 금요일은 예수성심대축일로 정하였는데, 이는 예수성심이 성체성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후, 예수성심대축일을 교회축일로 설정한지 만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56년에 비오 12세는, 예수성심 공경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회칙인 “물을 퍼낼지어다.”(Haurietis Aauas)를 반포하면서 예수성심공경은 더욱 권장되어 갔습니다.
3). 예수성심의 메시지
“나는 사랑이다. 내 성심은 그침 없이 타는 불을 제어하지 못한다. 나는 영혼을 위하여 살고 영혼을 사랑한다.” (예수성심의 메시지)
위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친히 요세파(Josef Menendez) 수녀에게 들려주신 말씀인데, 교황 비오 12세는 요세파 수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예수 성심께서는 당신의 극히 겸손한 종 요세파 수녀에게 은총으로 감오(感悟)시켜 주신 예수성심 메시지의 이 책을 펴내 널리 알리게 된 것을 기뻐하실 줄로 의심치 않습니다. 이 책이 많은 영혼에게 유익을 주고, 누구나 가련한 죄인인 우리 모든 이가 천주성심인 예수성심께 신뢰를 더욱 가지게 될 것입니다.”
4). 예수성심께 공경과 위로인 성시간, 영성체 등의 신심행사
1674년 7월 2일(?)의 발현에서 예수께서는 마리아 말가리다 성녀에게 살아 움직이는 당신의 예수성심을 보이시면서 보속의 방법으로 자주 영성체 (특히 매달 첫 금요일)하고 성시간의 기도를 바치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첫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내가 겪은 극심한 슬픔에 (성 목요일) 너를 참여시키겠다.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는 일어나 한 시간 동안 나와서, 성부의 의노(義怒)를 풀어드리고 죄인들의 구원(救援)을 위하여 보속(補贖)하며 성시간을 가져라. ”
우리 모두는 압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얼마나 많이 죄(罪)와 악(惡)에 기울어지고, 생명경시 풍조(風調)가 만연되어 있으며, 물질숭배, 물질만능 사조(思潮)가 퍼져 있다는 것을... 이 세상 곳곳에,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의 마음속에도...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
주님 승천 대축일 / 홍보 주일
2019. 6. 2
루카 24, 46ㄴ ~ 53
♠ 복음 공부 : 예수사명
☞ 길잡이 : 루카는 복음서를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 중 유일하게 주님의 승천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가시적인 승천기를 복음서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 서두에 거듭 소개함으로써 에수님의 승천이 부활과 연관된 영광스러운 사건임을 전하고, 부활에 이어 승천하심을 전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강조한다.
* 46~49절 : 예수님께서는 엠마오 도상에서 한 것처럼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신다. 그의 지상 선교 활동기간 동안 한 말을 회상시켜 주며, 그의 운명에 관한 성경 내용은 당신을 두고 한 것이라고 해석해 준다. 이것은 루카의 주된 관심사로, 메시아에 관한 성경 예언이 강조되고, 이제는 복음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며, 그곳이 증언이 시작되는 곳이며, 세계복음화가 시작되는 출발 점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준다.(48절) 루카가 밝히는 제자들의 사명은 다른 복음서와는 차이가 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삼는데 있다고 전하는 한편, 루카는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선포자는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이면에 증인은 말한 바를 생활로써 그 증거를 보여야 한다. ‘복음을 선포한다’ 는 것은 ‘예수님의 사건을 증거하며 이 사건의 의미대로 산다’ 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말씀을 산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증언을 하는 데 필요한 힘을,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받는다. 그래서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기다려야만 했다.
* 50~53절 : 예수님의 승천 ; 루카에 있어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과 승천이 같은 날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되고 아주 간략하게 서술한다. 승천은 이어지는 제2편 사도행전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기뻐하고 경배하는 모습을 남겨두는 것으로 만족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축복으로 기쁨 안에 끝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일종의 예견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적’인 기능을 가진다.
♠ 복음 요약 :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할 때 복음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복음적 삶이란 하느님의 나라를 약속의 선물로서 받아들이고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증거, 즉 복음선교를 수반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교회의 지상 명령이다. 그런데 세상에 하느님이 없다는 사람이 많아지고 권력과 돈이 최고이며 행복의 원천인 듯, 물질만능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만연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면 손해인 것처럼 느껴진다. 불행해질 것 같은 두려움도 있다. 점점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가는 늪에서 구출될 수 있는 진짜 증인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믿어서 행복한 이 시대의 증인이 필요함을 가르친다.
♠ 대화 방향 : 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의 사명을 비교해 봅시다. (마태28.16-20 ; 마르16.14-19 ; 요한21.1-25 ; 사도1.1-11)
② 승천은 제자들이 마주한 또 다른 이별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뻐하는데 왜 그럴까요? 나에게도 그런 확신과 희망이 있는지요?
♠ 참고 문헌 : ▪ 거룩한 독서 쉽게 따라하기 ( 김인호 지음 / 대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
+++++++++++++++++++++++++++++++++++++++++++++++++++++++++++++++++++++++++
성령 강림 대축일
2019. 6. 9
요한 20, 19 ~ 23
♠ 복음 연구 :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 길잡이 : 교회전승은 예수님의 발현을 두 가지로 보고한다. 하나는 여인들에게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이다. 요한 복음은 마리아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과 토마스가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토마스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들을 위로하시고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시는 내용이다
* 19-21절 :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있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고 계신다. 이는 14장 27절의 고별담화 중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평화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그 평화와 기쁨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 22-23절 : 예수님께서는 7.38-39절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죄의 용서에 권한과 함께 사목직을 부여하고 계신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은 예수님 승천 후에 강림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한은 22절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직접 주셨다고 기록할 만큼 예수님과 성령이 제자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 복음요약 : 오늘 전반부에서 제자들의 모습은 꼴불견이다. 그처럼 오랫동안 동고동락 했건 만은 유대인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떨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이 이렇게 밖에 되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비록 무서워서 그랬지만 ‘함께 모여 있던 상황에서 기도를 드리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위로하던 중이였을 것이다. 그곳에 예수님이 오시어 제자들 사이에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시며 무서워 문 안에 있던 제자들을 문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 행위가 하느님의 인간창조를 연상시키며, 성령을 받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전과는 다른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 대화방향 : ① 제자들이 무서워 문을 잠가놓은 나의 닫힌 문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 문을 어떻게 통과하시는지요?
② 복음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성령)은 어떤 분이신가요? 특히 다가오는 모습은?
♠ 참고문헌 : ▪ 요한복음 (한남성서 연구소 정태현 지음/바오로의 딸)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2019. 6. 16
요한 16, 12 ~ 15
♠ 복음 공부 :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 묵상 도움글
* 1.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을 당신 아드님의 형제가 되게 하셨고, 당신 자녀들을 공동체로 모으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선포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습니다.
* 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우리는 늘 성호경으로 기도하며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고백하고 찬미 드립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께서 사랑과 뜻이 온전히 하나됨을 고백합니다. 가진 것과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계획이 하나입니다. 이 완전한 일치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 삼위일체란...?
삼위일체 교리는 신약성경에 보다 명확히 계시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고 다가올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세례를 주장하였다. 즉 그의 설교는 삼위일체론 적인 것이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소리,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한 성령의 3인격으로 구별되었다(루까복음 3:21-22). 성령의 인격과 직무는 예수의 일이 끝나는 단계에 보다 명확히 제시되었다(요한복음 15-16장). 예수는 자신이 보내는 성령(구세주)과 아버지가 보내는 성령이라는 이중의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는 하느님의 아들에 의하여 계시되었듯이 속죄의 행위 안에 드러나 있다. 즉 아버지는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파견하였고, 아버지와 아들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구원을 적용하기 위하여 성령을 파견하는 것이다.
* 참고로 성령에 대한 문제로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명목상 갈라지게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로마제국이 동서로마로 분열하게 된 계기가 같을 것이라 여겨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수도를 이스탄풀로 옮겨 그 도시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한 이후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 대화방향 : ① 삼위일체가 나에게 무슨 영향을 주는가?
② 지금은 ‘재림 예수님’ 을 기다리는 ‘성령시대’ 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와 우리 공동체에서 ‘성령’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시는지요? 우리는 생활 중에서 성령과의 친교는 어떻게 되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나눠봅시다.
☞ 묵상나눔에서 2가지 제안 사항
* 1단계는 내 생활 안에서 하느님말씀대로 살아갈려는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 2단계는 내 생활 중에서 하느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는가? 내 삶이 하느님과 함께 하였는가?
함께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를 고백하고 다짐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보득솔 ( 청년성서모임 )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19. 6. 23
루카 9, 11ㄴ ~ 17
♠ 복음 공부
* 11~12절 : 예수님은 사도들을 데리고 ‘벳사이다’ 라는 고을로 따로 데리고 가셨는데 군중들이 그것을 알고 뒤따라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고 하느님나라에 관하여 말씀해주시며,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날이 저물자 사도들은 주님께 군중들을 주변 마을로 가서 숙식을 각자 해결하게 건의를 한다.
* 13~14절 : 군중들의 수는 장정들만도 5000명가량이었으며,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합하면 3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당시나 지금이나 성당에는 자매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제자들 대다수는 불가능합니다. 저희가 무슨 수로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우리는 마음속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 15~17절 :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신 다음,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 복음 요약 : 빵의 기적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묵상 글로 정리했다. "하느님께서 땅을 통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 세 가지는 ‘빵’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 (시편 104편)이다.
빵은 ‘창조주가 선하시고 피조물이 좋다’ 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단순한 일상생활의 소박함’ 을 상징한다. 갈릴레아에서 벌인 예수의 활동이 끝나갈 무렵 그분께서 이루신 빵의 기적은 그분의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보여주는 탁월한 표징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분 활동의 갈림길이 되기도 했으며, 그때부터 그분의 활동은 뚜렷하게 십자가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빵의 기적이 이뤄진 끝에,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으로 모시기에 앞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을 순전히 물질적으로만,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인간을 그런 존재로 축소시키고 아울러 하느님을 사실상 완전히 제외시켜 버렸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먹여 살리는 선물은 그보다 더 위대하고 다른 수준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 말씀을 양식으로 삼을 수 있다(요한 4,34 참조).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뒷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율법은 '그림자'일 뿐이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것은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이뤄진다. 이 말씀에는 육화, 곧 말씀이 사람이 되신 행위가 최종 목표에 이르게 되었으며 최종적인 완성이라는 사실이 암시된다. 그것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예수의 자기 헌신과 십자가의 신비다. 무엇보다 성체성사의 근본이 되는 예수의 제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하신 빵의 담화에서는 육화에서 부활에 이르는 길을 거치면서 성체성사를 향해 방향을 잡는다. 그리하여 성찬례는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나자렛 예수」 1권, 390~402쪽 참고) 빵의 기적 장소가 ‘타브가’라는 증거는 교회 전승에서 찾을 수 있다. 타브가는 초대 교회 때부터 순례의 중심지였다. 350년께 예수께서 빵을 얹으셨다고 하는 바위를 제대로 하는 성당이 세워졌고, 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방문해 바위의 작은 돌들을 가져갔다. 또 450년께에는 비잔틴 양식의 새 성당이 세워졌고, 그때 설치한 모자이크를 지금도 볼 수 있다. 타브가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군과 637년 무슬림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된 후 130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32년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됐다. 지금의 ‘타브가 성당’ 은 독일 가톨릭교회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1982년 봉헌된 이 성당은 성 베네딕도회 예루살렘의 성모승천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성당 주변 성지는 '독일 성지회' 소유다. 넓은 정원을 지나 성당으로 들어서면 제대 주변으로 5세기 비잔틴 성당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바닥 모자이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는 바위 바로 위에 제대가 있고, 바위 밑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4개가 들어있는 성합이 모자이크 돼 있다. 빵 4개만이 모자이크가 돼 있는 까닭은 매일 미사를 통해 행해지는 성체성사가 나머지 하나의 빵이기 때문이다.
♠ 대화 방향 : 타브가 성당 모자이크에 빵 4개만이 모자이크가 돼 있는 까닭은 매일 미사를 통해 행해지는 성체성사가 나머지 하나의 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은총의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생명의 빵, 주님의 몸을 모시게 됩니다...... 각자가 느낀 점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 가톨릭 평화신문 )
+++++++++++++++++++++++++++++++++++++++++++++++++++++++++++++++++++++++
연중 제13주일 / 교황 주일
2019. 6. 30
루카 9, 51 ~ 62
♠ 복음 공부
* 51-53절 :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이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었듯이, 예루살렘 여행 이야기도 예수님이 사마리아인들에게 배척당하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 54-56절 : 제자들은 사마리아인들의 행위가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화를 내며 그에 맞는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꾸짖으시며, 제자들에게 감정을 자제하라고 요구하신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사마리아인들보다도 나그네에게 문을 닫아거는 사람들의 죄가 더 크다. <열왕기하권 1,10-12>에서 예언자 엘리아가 취하는 행동을 예수님이 거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을 엘리야와 같게 보는 것을 거부하신다. 또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혼동해서 개인적인 보복을 하는데 그 능력을 써서는 안 된다.
* 57-58절 : 인간의 연약함에 대하여 항상 이해심이 많은 예수님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서 보게 되는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엄격함과 무조건적인 순종을 말씀하신다.
* 59-60절 : 이 제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지내야 한다는 뜻이겠지만, 아마도 아버지를 장사 지낼 때까지 연로한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다른 모든 일에 우선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더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다급하면 만사를 제쳐 놓을 수 있어야 한다.
* 61-62절 : 세 번째 제자는 작별인사를 고할 때 집안 식구들이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붙들고 늘어지리라 은근히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좋은 뜻은 저버리지 않는 폭이 될 것이기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나 주위 환경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부잣집의 아들로 살다가 자기 마을에서 빵을 구걸하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생각해 보자.
♠ 복음 요약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 안정된 보금자리가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될 자세를 갖추어야 하고 자기 가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고, 모든 안전장치를 포기해야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에 몸 바쳐야하고, 뒤를 돌아다보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전적인 순응을 요구하신다. 또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려운 점은 선과 악의 양자택일에 있지 않고, 좋은 것의 양자택일에 있다.
♠ 대화 방향 : ①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무도 유다인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듯이 선교활동 중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웃들을 만날 때 어떠했는지?
②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선택하고 세속의 여러 가지 도전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참고문헌 : ▪ 해설판 공동번역 (신약성서) ▪ 주석성경 (성요셉출판사) ▪ 200주년 기념 (성경주해집)
+++++++++++++++++++++++++++++++++++++++++++++++++++++++++++++++++++++++
< 회원 기고 >
50주년을 준비하면서... 연수회와 묵상회란...?
안산 원곡본당 FB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
성서형제회의 가장 큰 행사는 성령 강림 대축일 무렵에 하는 ‘큰모임’과 성모마리아 승천 대축일인 8.15일 무렵의 ‘연수회’와 성모 마리아 탄생일인 12월8일 무렵의 ‘묵상회’ 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는 늘 ‘수련회’ 라고 불리는 ‘연수회’는 전국 단위로 해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지구 단위로 하는 묵상회를 전국 단위로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수련회라는 불리는 ‘연수회’와 ‘묵상회’를 교본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펴보자.
성서형제회의 실천규범 제4장 ‘성서형제회 잔치의 원칙들’ 12절을 읽어보면,
[ 성서형제회의 영성생활을 위하여 회원이 전국규모의 ‘연수회’와 말씀선포자들의 모임 ‘묵상회’, 그리고 ‘지구 묵상회’, ‘코이노니아 묵상회’ 에 참여하는 것은 큰 은총의 기회를 받게 되고, 이런 영적 잔치를 통해서 성서형제회의 정신을 본받아 보다 충실한 예수님의 친구로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전국규모의 연수회는 년 1~2회 정도로 할 것이며, 주로 성서형제회 회원으로서의 수련기간이 되면 좋을 것이다. 묵상회는 피정형식을 따를 것이며, 몇 시간에서부터 며칠간의 신축성 있는 기간을 통해 회원의 생명력 넘치는 영성생활과 성서형제회의 영적성장을 기할 것이다. ] 라고 되어있다
물론 이러한 교본의 규정은 코이노니아 단위가 기본적으로 교구단위로 형성되고, 지구가 활성화된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대체적으로 코이노니아가 가장 기본적인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코이노니아 단위의 활동이나 교육 및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지구 단위의 월례회의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다른 교구회원인 전국조정이 참석하고, 때로는 수원교구인 안산본당에서 하는 등... 실제적으로는 축소된 전국 단위 월례회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지난번 큰모임의 일정과 장소를 그 회의 때에 의결한 것으로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몇 몇 전주교구회원이 참석하기도 하지만, 전주공동체 대표봉사자 등 봉사자들이 참여하지 않기에 그들의 의견을 표시하지 않는 단절된 전국회의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난 차기봉사자가 조정이 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변고 때문에 미처 차기봉사자가 준비 없이 바로 받아야만 했던 어려움과 어수선함은 예견된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현 전주교구장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도 우리에게는 가장 큰 영향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런 환경이 평신도 공동체가 이끄는 단체 활동에 큰 영향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회원들의 활동이 부실하거나 봉사자들이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지난 ‘큰모임’에 참여한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은 미사 때에 봉사자들 간의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신부님의 이러한 말씀 안에는 여러 가지의 큰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느님의 사랑’, ‘이웃사랑’이 우리에게 근본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우리는 이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
++++++++++++++++++++++++++++++++++++++++++++++++++++++++++++++++++++++++
< 복음 주제 발표 >
부활 대축일 < 요한복음 20. 1 ~ 9 >
임 젤뚜르다 (성자)
서울 이문동 일반팀 FB
부활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 첫 번째 면은 소극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주 죽고 만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념비나 세워 주어야 할, 돌아가신 이름 있는 인사가 아닙니다. 빈 무덤이 예수님께서 죽음에 갇혀 계시지 않으심을 보여 줍니다.
* 부활의 두 번째 면은 긍정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는 그 사실을 제대로 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검을 빼돌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행동은 생명과 사랑을 잘못 찾고 있는 공동체의 수고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베드로가 마리아 막달레나의 전갈을 받자마자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사랑받던 제자는 예수님의 주검이 도둑맞은 것이 아님을 눈치 챕니다. 왜냐하면 도둑을 맞았다면 수건이 잘 개켜져 따로 놓여 있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또 거기에는 수의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부족하여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간 첫째 날 아침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죽음의 올가미에 묶여 계시지 않습니다. 살아계시고 생명을 온전히 누리고 계십니다.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으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일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라자로가 닫힌 무덤에서 빠져나왔으나 인간 존재가 갖는 생명의 한계를 고스란히 지닌 채 살아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끝없는 생명으로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온전한 생명이시며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21세기 해설집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기에 부활에 대한 그분의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남’‘다시 깨어남’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가 예수님 부활사건 후에야 예수님의 예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밝혀준 사건입니다. 희망이신 주님! 저희에게 부활의 찬란한 빛을 비추시어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참아 내며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묵상 내용 : “예수님은 어디 가신 것일까?”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진득하게 한 곳에 계시지 않고, 어딜 그렇게 바쁘게 다니셨을까? 제자들을 만났으면 그냥 함께 계실 것이지, 금방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도대체 어디를 가신 것일까? 성경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걸 생각하다가 문득 한 자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을 보면 부활 전과 부활 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활 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시작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 또는 어떤 뭔가를 요청하기 위해서 계속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7) 그렇게 찾아 다녔으면서도,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제자들도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예수님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바오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처럼, 승천 후에도 그런 방식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부활 전에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거나, 믿음을 갖지 못했거나 믿음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비로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게 된 것은 부활 후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했을 때에는 예수님을 찾아다녔지만, 믿음을 갖게 된 후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만이 방황하듯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발췌 인용 자료 : 송 모세(영진) 신부]
+++++++++++++++++++++++++++++++++++++++++++++++++++++++++++++++++++++++
< FB 큰모임 스케치 >
복음서대로 5천명의 기적을 따라간 큰잔치
FㆍB 전국 서기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자, 군중들은 육로로 그분을 따라갔다고 '오천 명을 먹이시다' 라는 타이틀로 복음사가는 이를 기록하고 있다.
5월 26일(일) 10시경,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의 성언 농원.
각 처에 몰려든 이들이 갖고 왔는지 준비했는지, 여러 음식이 테이블에 놓여있고, 누구랄 것이 없이 이들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먹이고 있었다.
잠시 어느 정도 인원이 형성되자, 어느 모내기를 준비할 법하는 빈 논 옆으로 우리를 모으셨다.
그곳에서 오늘 행사 ‘큰모임’에 대한 설명을 박 팜필로 형제님으로 부터 들은 후, ‘성경 암송’과 ‘복음생활 체험담’을 몇몇이 나와서 이어간다.
아마도 수도회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서 모두가 가운데를 중심으로 빙둘러 앉았다.
‘성경암송’은 대부분이 평소 알고 있는 듯한 짧은 구절이 대부분이었고, 진솔된 ‘복음생활 체험담’이 이어졌고, 그 내용을 필자는 받아 적었지만, 여기 경험담 중에는 개인적으로 예민한 내용도 있고 해서 참석한 자들만의 몫으로 여겨 기록하지 않기로 한다.
진행을 미카엘 형제님이 하셨는데, 종전과 달리 몇 단락으로 짤라서 제법 긴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연결해나간다.
갈릴리아 호숫가에 제자들과 군중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모연 앉은 모양새를 이루듯이 각자가 주님의 말씀과 삶을 가슴에 안고 가운데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5천여 명을 먹이신 기적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고급렌즈는 어떻게 기록될 지는 모르지만, 제가 갖고 있는 렌즈로는 얼굴이 까맣게 역광이 들어나서 예쁜 얼굴은 잘 들어나지 않지만, 주님에 대한 열정은 우리 마음들을 다 흔들고 있었다.
시간이 언제 흘렀냐 듯이 중식시간은 ‘거룩한 말씀의 수도원’ 에서 준비하는 성찬으로 꾸며졌다. 뷔폐식으로 풍성하게, 그 누구도 모자람 없이 식사를 하고, 식사 사이에 여유시간을 가져서 아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물찾기 시간을 가졌다.
얼마나 많은 선물이 준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몇몇이서 대부분의 보물을 찾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누구라고 말하기 이전에 그들의 손에 쥐어진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이후 몇몇이서 십자가의 길로 향했다.
그 사이에 파견미사를 집전해주시고 귀한 영적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실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이 오셨다.
미처 준비된 프로그램을 다 할 사이도 없이 파견미사와 파견식 후 각자의 터전으로 파견되었다.
미사시간에 신부님은 봉사자들 간에 충분한 대화를 주문하셨다.
모인 우리들은 자연이 주는 모든 선물을 가지고 돌아갔으리라 여긴다.
주님의 여러 가지의 모습들을 각자의 모습으로 들어낸 하루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다만 이들을 세상에 나아가서 실천할 일만 남아있으리라 몇 번이나 다짐하면서 생활의 터전으로 나아간다.



























++++++++++++++++++++++++++++++++++++++++++++++++++++++++++++++++++++
<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9년 4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