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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2일 수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뜻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현실에서 이 말을 실천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문제는 죄와 사람을 따로 생각하지 않으면 회개 자체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회개하여 변화한다.’라는 말은 사람이 죄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는 모습은 그 사람과 더러운 영을 떨어뜨리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죄와 떨어져 다시는 같은 죄를 마주하지 않게 회개하고 변화하도록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죄와 떼어 놓으시려고 애쓰십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그렇게 애쓰기를 바라십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거나 죄 때문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시며,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에서 멀어지도록 노력할 힘과 기회를 얻습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렇게 되도록 사랑으로 감싸안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는 먼저 죄의 자리를 걷어 버리고, 그 자리에 성찰과 용서가 자리 잡을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왕태언 요셉 신부)
항상 길 떠나시던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의 소임 이동으로 항상 마음이 무겁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도회법적 기한이 정해져 있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동시켜야 할 상황이 생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발령을 내기 위한 물밑작업을 시작하면, 어느새 분위기를 눈치챈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우리 신부님 절대로 떠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수사님 1년만 더 있게 해주세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발 빨리 교체해주시라고 졸라대는 게 아니라 떠나서는 안된다고 졸라대니, 참 잘 사셨구나, 하는 마음에 부럽기도 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복음 선포 사업의 전초기지라고 볼수 있는 카파르나움이었습니다. 신선한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하던 카파르나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지상천국을 맛보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그분 옆에서 그분과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자 불안해진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 나섰습니다. 외딴곳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을 찾아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은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느끼셨던 안쓰러움, 안타까움, 미안한 마음...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하시는 말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않으시고 항상 길을 떠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크신 분이십니다. 작은 고을, 작은 인연에 연연하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한 지방, 한 민족, 한 국가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셨습니다.
아쉽고 안타깝고 서운하지만, 우리 역시 스승 예수님을 따라 수시로 길을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예! 하고 일어나 정든 곳, 익숙했던 곳을 떠나 낯선 곳,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가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중에 ‘최강 1교시’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의 제목은 서양의 고전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였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일리아드’는 동양의 고전인 ‘삼국지’와 비슷한 면이 있고, ‘오디세이’는 ‘서유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리아드’와 ‘삼국지’는 전쟁과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힘과 욕망, 명예와 죽음을 보여 줍니다.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는 누구보다 강한 영웅이지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삼국지’의 영웅들도 충성과 의리를 말하지만, 천하를 차지하려는 욕망과 자존심 때문에 갈등과 비극을 겪습니다. 성서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임금은 뛰어난 능력과 권력을 지녔지만,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너졌습니다. 반면 다윗은 큰 죄와 실수가 있었지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고전과 성서는 모두 힘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다스리고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마음이 인간을 참으로 위대하게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오디세이’와 ‘서유기’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긴 여정을 다룹니다.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유혹과 시련을 이겨 냅니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도 불경을 구하기 위해 서천으로 가면서 끊임없는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 여정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여행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목적을 잃지 않는 성장의 과정이었습니다. 성서에도 이러한 여정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익숙한 고향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갔습니다. 그 여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믿음을 배우고, 욕망을 내려놓으며,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영적인 여정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을 잊지 않았고 삼장법사 일행이 목적지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길에서 병과 실패, 상처와 이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은 흔들릴 수는 있어도 길을 잃지는 않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육적인 사람은 몸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과 질투, 자존심과 분노에 끌려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인정받느냐, 누구의 편이냐를 따지면서 갈라지고 싸우는 사람이 육적인 사람입니다. 코린토 신자들은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라고 말하며 서로 편을 갈랐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뛰어난 복음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협력자일 뿐이었습니다.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세상의 영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킬레우스도, 오디세우스도, 유비와 관우와 제갈량도, 삼장법사와 손오공도 시대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역사의 주인은 아닙니다. 성서의 모세와 다윗, 베드로와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불림 받은 협력자였습니다.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했고, 다윗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고,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함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뒤에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이른 아침에는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에 머물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기와 기대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파견된 목적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기도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그 뜻에 따라 다시 길을 떠나셨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내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일리아드’와 ‘삼국지’가 인간의 분노와 욕망, 명예와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 준다면, ‘오디세이’와 ‘서유기’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인내와 성장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든 여정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세상의 영웅은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얻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영웅은 자신을 이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참된 승리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참된 귀환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협력자입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줄 뿐입니다. 결과를 이루시고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기하고 다투기보다 서로 협력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느님을 드러내며, 육적인 욕망보다 영적인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서로 오가는 우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믿음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희망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사랑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기쁨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품음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스밈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돌봄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섬김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살림입니다
너에게 가는 나
나에게 오는 너
서로 오가는 우리
모두 하나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라헬 (Rachel)
활동년도 :
신분 : 야곱의 둘째아내
지역 : 이스라엘
같은이름 : 레이첼
라헬은 '암양'이란 뜻이다.
1) 야곱의 애처로 요셉과 베냐민의 모친이다(창세 30,22-25). 2)
가나안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여브랏 부근에서 베냐민을 낳고 난산 끝에 죽어서 그곳에 장사되었다(창세 35,16-20).
◇ 야곱의 둘째 아내 - 불신앙으로 슬피우는 어미의 표상 라헬은 라반의 둘째 딸로서 근친혼과 일부다처가 허용되었던 고대 근동지방의 풍속을 따라 야곱의 둘째 아내가 되었다.
소녀 시절 어느 날, 메소포타미아 하란 지방 어느 광야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먹이고 있을 때 고종사촌 오라버니인 야곱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야곱은 외사촌 누이동생인 라헬의 아릿다움에 반하여 무려 14년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라반에게 봉사했다.
[그로부터 야곱은 라헬에게 장가들 생각으로 일을 했다.
칠 년이라는 세월도 며칠밖에 안 되듯 지나갔다. 그만큼 그는 라헬을 좋아했던 것이다](창세 29,20) 이 글귀를 보아 그 누구보다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아하고 현명한 라헬이 이스라엘 족장의 아내로서 부족했던 점은
시조모인 사라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앞서 불신앙적 수단 방법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계속하여 루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출산하자 심히 시기하여 어느 날 밤 남편을 자신의 여종 빌하의 방에 들여보내어 아들을 낳도록 했다.
[그러자 라헬이 말하였다. "저에게 몸종 빌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방에 드셔요. 빌하가 혹시 아기를 낳아 제 무릎에 안겨 줄지 압니까? 빌하의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창세 30,3).
빌하를 통하여 얻은 아들이 단 납달리이며, 이들은 훗날 레아의 시녀 실바가 낳은 아들 갓 아셀과 함께 북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비로소 라헬의 태에서 예정과 섭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하느님께서는 라헬도 돌보시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마침내 라헬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 하면서 아기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고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하나 더 점지해 주셨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하였다.](창세 30,22-24). 여기에서도 우리는 인위적 잉태와 신앙적 잉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며, 그리고 하느님께선 신중하게 구원사의 매듭을 풀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라헬의 결정적 과오는 하란을 떠날 때 그녀의 아버지의 우상 드라빔을 훔친 일이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훗날 라헬의 후손들이 망하고 북방민족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녀는 애곡하는 어머니의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
라헬은 "암양"이라는 뜻입니다.
라반의 둘째 딸이요 레아의 동생이었습니다. 레아도 함께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라헬은 미모가 드러나게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야곱이 하란 근교 우물가에서 외삼촌 집으로 피신해 가다가 라헬을 처음 대했을 때 야곱이 그를 사랑할 만큼 그 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할 때 수일같이 여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의 애정을 측정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라헬은 명랑하고 쾌활했고 사교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이기적이고 질투심도 많았으며 감정 표현을 거침없이 할만큼 대담한 여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이 라헬에게 시달렸으며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남편을 독점하면서도 언니 레아를 불편하게 만든 여자입니다. 라헬이 자기 고향을 떠날 때 친정집에서 드라빔을 훔쳐 자기 몸에 숨겨 가지고 나온 것은 대단한 욕심이었습니다(창세 31,19).
드라빔은 데라빔이라고도 하는데 사람 모양으로 세워놓은 작은 우상이었습니다.
가정을 지켜주며 아기 가진 여인들의 행운을 빌어준다는 우상이었습니다.
라헬은 이 드라빔을 하체에 숨겨 끝까지 아버지를 속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에서 라헬의 간교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교훈과 적용]첫째, 미모와 많은 자질을 갖추었으면서도 후덕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둘째, 미신적인 드라빔을 도적질해 나온 것은 위험한 혼합신앙이었습니다. 믿음은 순수해야 합니다.
성 브로카르도 (Brocard)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카르멜산(Mount Carmel)
활동연도 : +1231년경
같은이름 : 브로카드, 브로카르두스, 브로카르드
프랑스 태생인 성 브로카르두스(Brocardus, 또는 브로카르도)는 카르멜산에 있던 프랑스 출신 은수자들의 원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1195년경 카르멜산의 은수자 공동체를 이끌던 성 베르톨드(Berthold, 3월 29일) 원장의 선종 이후 그를 계승해 공동체를 이끄는 원장이 되었다.
카르멜산의 은수자들은 특별한 창설자 없이 이미 6세기부터 은수자들이 모여 생활해왔다.
그래서 이들 은수자들에게는 특별한 규칙서가 없었는데, 성 브로카르두스는 당시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이자 교황대사였던 성 알베르투스(Albertus, 9월 17일)에게 교육을 부탁했다.
1209년경 성 알베르투스는 카르멜산의 은수자들을 위해 규칙서를 만들어줬는데, 이는 특별히 성 알베르투스의 카르멜회 규칙으로 불린다.
이 첫 회칙은 기존 은수자들의 삶과 정신을 간단하고 엄격하게 정리한 것으로, 124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에 의해 이 규칙을 따르는 이들이 탁발(托鉢) 수도회로 인준받았다.
• 성 알베르투스의 규칙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은수자들은 단독 움막에서 지내되 매일 성무일도와 다른 기도를 바치고, 육체적 노동을 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
또 청빈과 절제를 지키고 거의 온종일 침묵 속에서 지내야 한다.
카르멜산의 은수자들은 성 브로카르두스가 통해 전달받은 이 규칙을 받아들여 실천했다.
한편 제4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는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금지하는 칙서를 통과시켰지만, 성 브로카르두스는 자신의 덕과 지혜로써 모든 난국을 극복하고 은수자들이 마음 놓고 수덕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편 성 알베르투스 주교는 성경에 정통한 성 브로카르두스를 라테라노 공의회에 데려갈 계획을 세웠으나, 공의회가 열리기 전 살해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브로카르드 또는 브로카드(Brocard)로도 불린다.
복녀 마르가리타 (Margaret)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루뱅(Louvain)
활동연도 : 1207-1225년?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그녀는 루벵에서 태어났으나, 친척인 오베르란 사람의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사람은 매우 훌륭하고 또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그녀 역시 이런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므로써, "사랑스러운 마르가리따"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1225년경, 오베르와 그의 아내가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재산을 팔았을 때, 어떤 손님이 왔으므로 마르가리따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술을 가지러 간 사이에 그 부부는 살해되고, 그녀 역시 납치되었다.
강도들은 이 사건의 증인을 죽이려 하였으나, 한 사람이 자기와 결혼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지만, 그녀는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강도들은 그녀의 혀를 자르고 옆구리를 찔러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후일 그녀의 유해가 발견되어 루벵의 성당에 모셔졌는데, 수많은 기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그녀의 높은 덕을 증거하였다.
그녀는 한마디로 지극히 단순하고 무죄한 영혼으로 한생을 살았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한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