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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역사] 발표자료 [후기 조선왕조] 동학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 울림 모둠 (신정섭)
11신정섭 추천 0 조회 140 11.11.02 12:19 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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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03 11:26

    첫댓글 * 다음 발표에 대한 내용이 없다면 발표자료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11.11.03 19:57

    * 다음 발표 : 1) 발표 제목 : 동학농민봉기는 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나? -> 동학농민봉기는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나?
    >> * 발표 제목, 다시 정하세요.

  • 11.11.05 14:46

    동학은 서학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서학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서학의 인간 평등사상을 동학 역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평등사상이 많은 민중을 끌어당긴 요소였기 때문에 동학 역시 인내천 사상을 기반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적대 세력이지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합리주의적 사고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닌 현대인에게 필요한 요소입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고 무조건 헐뜯는 정치인들은 이러한 동학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 11.11.03 20:05

    * 송지은 : 1) 그러나 서학을 반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학의 인간 평등사상을 동학 역시 담고 있습니다. ->> * 비문입니다. 2) 비록 적대 세력이지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취지가 현대로써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 11.11.05 14:46

    수정하였습니다.

  • 11.11.06 22:50

    1880년대 후반의 상황은 일본의 경제침탈, 청의 간섭의 심화, 러시아와 영국 등 서구 열강들의 침탈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조선 정부는 적절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집권층은 이러한 책임을 농민층에게 떠넘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층은 자신을 괴롭히는 옛 질서도 침탈을 반복하는 외국의 세력도 싫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 변화의 욕구는 커져만 갔을 것입니다. 이러 시대적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것이 동학이었습니다.

  • 11.11.06 22:52

    동학의 반봉건. 반침략 성격은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개념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또한,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런 동학 사상 위에 민속신앙을 가미하여 하층민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하층민의 단결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씨앗이 적당한 양분과 햇빛으로 인해 커다란 나무로 성장할 수 있듯이 동학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종교집단이었을지 몰라도 제도정비와 꾸준한 교화를 통해 훗날에는 대한민국의 혼을 유지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 11.11.06 18:56

    * 임소연 : 그러한 성격의 동학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공동 삶의 원리를 하나라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세요. 1) 이러한 국제 정세의 긴박성에서도 조선 정부는 적절한 대응책을 세우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 * 비문입니다. 2) 그중에서도 안팎으로 괴로움을 짊어지는 층은 다름 아닌 농민층이었습니다. ->> * 문맥이 닿지 않습니다. 3) 동학의 성격은 우리나라를 어려움 속에서 지키는 힘이 되었고 대한민국을 현대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 비문입니다.

  • 11.11.06 22:52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작은 것일지라도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발전을 하려 노력한다면 분명히 큰 존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1.11.06 22:52

    교수님 수정하였습니다.^^

  • 11.11.06 22:43

    개인이 의식을 추구하고 개혁을 울부짖더라도,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들을 적합한 조건으로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동학은 보국안민과 인내천(人乃天)사상, 무술 신앙도 수용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농민들은 이러한 동학을 받아들임으로서 그들의 잠재적 개혁의식을 깨울 수 있었습니다. 사회계층의 다수에 해당하는 농민에게 공감과 환영을 불러일으킴으로서, 동학은 현실을 개혁하는 집단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leadership'과 'followership'은 서로의 공감과 협력에 기초합니다.

  • 11.11.06 22:43

    서로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집단의 힘, 즉 개인들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사와 학생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가 설득력이 없다면 학생들이 신뢰감을 가지고 교사의 가르침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이 탄탄해야만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1.11.06 19:02

    * 김선명 : 1) 개인의 의식을 추구하고 개혁을 울부짖더라도, 적합한 조건으로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하게 됩니다. ->> * 문장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2)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농민들에게는 동학의 보국안민과 인내천(人乃天)사상, 무술 신앙의 수용이 그들의 잠재적 개혁의식을 깨워주었습니다. ->> * 비문입니다. 3) 사회계층의 다수에 해당하는 농민에게 ->> * 문장을 좀 더 다듬으세요. 4) 농민에게 공감과 환영을 불러일으킴으로서 현실을 개혁하는 집단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 * 비문입니다.

  • 11.11.06 19:03

    5) 우리 사회에서도 'leadership'과 'followership'이 서로의 공감과 협력에 기초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 * 문장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 11.11.06 22:43

    수정했습니다.

  • 11.11.06 22:46

    동학은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이 종교운동으로 표출된 활동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인간 평등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 농민층의 권리와 평등은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얻고자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던 농민의 모습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자신의 권리나 주장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11.11.06 20:48

    * 최진희 : 1) 자신의 권리를 얻고자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했던 농민의 모습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도 목표를 세우면 그것을 의식에서만 그치지 말고 실천으로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비문이며 문맥도 닿지 않습니다.

  • 11.11.06 22:47

    수정하였습니다.

  • 11.11.06 22:42

    동학은 지배층의 착취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발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동학은 반봉건적 반외세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동학은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백성은 자신들의 주체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학은 평등사상을 통해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다 같이 살아간다는 공동의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참여로 나라를 바꿔보겠다는 민주주의적인 성향도 나타났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단순히 하나의 종교가 아닌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디딤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11.11.06 20:50

    * 오은아 : 동학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공동 삶의 원리를 하나라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세요. 1) 동학은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발전하였습니다. ->> * 비문입니다.

  • 11.11.06 22:42

    수정하였습니다.

  • 11.11.06 23:09

    조선 후기의 지배층은 백성과의 소통을 거부했다. 백성은 모순된 사회구조 때문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동학은 제법 성공을 거두었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소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이 원하는 것은 사람답게 대우해주는 것이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내천을 내세웠는데 이것은 동학이 백성과의 소통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며 오늘날 보수적인 여당의 소통 불능 문제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당이 국민과 소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무소속인 박원순 후보가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앞서는 나경원 후보를 이길 수 있었다.

  • 11.11.06 20:56

    * 김상규 : 1) 이를 보며 오늘날의 지도층과 국민의 관계를 생각해봤다. 한미 FTA에서 줄기차게 국민은 식량 주권의 확보를 요구했으나, 지도층은 국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지도층의 소통거부 결과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처럼 소통하지 않는 일방적인 정치는 동학농민운동 같은 불만의 폭발이 발생할 수 있다. 장차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일방통행식의 전달과 명령을 할 게 아니라, 학생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 논리적 비약이며 비유도 적절치 않습니다. 문맥이 닿도록 내용을 보완하세요.

  • 11.11.06 23:11

    조선 시대의 지배층이 백성과 소통을 중시했다면, 박원순 후보가 나경원 후보를 이겼듯, 안정적인 국가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겠다.

  • 11.11.04 00:06

    동학농민운동은 농민층이 중심이 된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동학농민운동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한 사회는 우리가 직접 참여하고 소통하는 가운데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 11.11.06 20:59

    * 조혜영 : 어떻게 농민들이 동학농민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바랍니다.

  • 11.11.06 22:42

    그 당시 정부는 조선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강력한 힘 아래에서 의타적인 태도 또한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은 그런 상황을 바꾸고자 한 개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일본과 합세하여 제압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이 조선의 내부문제에 간섭할만한 여건을 제공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는 모두 외국과의 소통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동등한 관계에서의 소통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의타적인 태도를 가진 채로 소통한다면 조선처럼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 11.11.06 22:43

    그러므로 우리나라도 외교관계에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태도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삶의 원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 11.11.06 21:07

    * 박연숙 : 1) 그 당시 정부는 조선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방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 문장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2) 하지만 정부는 이를 일본과 합세하여 제압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이 조선의 내부문제에 간섭할만한 여건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국과의 소통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 * 문맥이 닿지 않습니다. 3) 그러므로 나라와 나라 간의 소통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소통할 때도 자신만의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삶의 원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 * 논리가 서지 않습니다.

  • 11.11.06 22:43

    수정하였습니다.

  • 11.11.04 23:16

    고종이 집권한 이후에도 부정한 관리의 횡행, 부정부패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동학은 이런 조선 후기의 모순에 정면으로 대항한 운동입니다. 동학의 시작은 종교로 그들의 마음의 위안을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세가 확장되며 그들의 입김이 세어지고 더욱 체계적인 조직으로 그들의 힘을 형성하였습니다. 비록 동학농민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지만, 그것의 맥은 일제 36년에도 이어집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 하에서도 많은 활약을 한 독립투사를 배출하였고 많은 독립군을 이끌어주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습니다.

  • 11.11.06 22:44

    그리고 그 활약은 우리나라의 독립에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사상이 힘이 있으려면 그것을 믿고 따라주는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그것이 때를 잘 만나고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데도 쓸모없는 공상에 불과합니다. 조선 후기의 역동적인 면은 그러한 사상을 배출하게 했습니다. 그 시기가 혼란스러운 정국이 아니고 태평성대였다면 동학이 유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수님의 말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임용에 직면하기 전에 미리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 11.11.06 21:14

    * 홍여진 : 1)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그것이 때를 잘 만나고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 데도 쓸모없는 공상일 뿐입니다. ->> * 문장을 좀 더 다듬으세요. 2) 조선 후기의 역동성은 그러한 사상을 배출하게 했고, 또 혼란스러운 정국이 아니고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면 그런 사상이 유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 * 문장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3) 시기라는 것은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 * 비문입니다. 4)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임용에 직면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적절한 시기를 잘 기다린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 * 문맥이 닿도록 내용을 보완하세요.

  • 11.11.06 22:40

    그리고 그 준비를 다하고 그 결과를 잘 보여줄 적절한 시기를 잘 만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 11.11.06 22:40

    수정하였습니다.^^

  • 11.11.06 23:58

    동학은 삼정의 정치 기관의 문란과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면서 발생하였습니다. 동학은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개혁을 주장하였고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던 성리학에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민중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항상 역사 속에서는 끊임없는 혁명과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발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민중의 호응을 끌어낸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 11.11.06 21:23

    * 황경하 : 무성의한 댓글입니다. 경하는 성의를 다하여 댓글을 작성하세요. 1) 동학은 삼정의 정치 기관의 문란과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면서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민중들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양반세력에 대해 비판을 하고 동학 농민을 일으키는 등 적극적인 저항을 하였습니다. ->> * 비문입니다. 2) 우리도 끊임없는 저항과 노력을 통해 현실의 잘못된 문제점들을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 * 문맥이 닿지 않습니다.

  • 11.11.06 23:58

    수정하였습니다.

  • 11.11.06 03:55

    동학은 농민이 주축이 되어 지배계층에 대항한 조선 최대의 농민항쟁이다. 동학 농민항쟁 전에도 많은 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 민란보다 동학농민항쟁은 더 체계적이었고 조직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동학농민항쟁은 동학이라는 종교조직이 있었고, 조직을 잘 이끌 리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봉준은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 강화에 힘썼고, 일본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체포된다. 개인적 야망보다 ‘민중을 위해’서 죽음을 앞둔 순간 목숨을 담보로 한 유혹마저 거부한 채 투쟁한 그의 삶은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

  • 11.11.06 03:57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항쟁정신은 항일의병전쟁으로 이어진다. 동학농민항쟁이 체계적, 조직적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어내고, 이후 우리 역사에 항쟁정신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전봉준 같은 리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학농민항쟁과 전봉준을 통해 우리는 한 조직에서 리더의 유무(有無)는 실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 11.11.06 21:31

    * 강은진 : 전봉준의 지도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바랍니다. 1) 그 이유는 무엇일까. ->>

  • 11.11.10 03:47

    전봉준은 아버지가 민란의 주도자로 처형된 뒤, 사회 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고 동학에 들어가 고부접주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습니다. 고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약방도 운영한 전봉준은 농민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는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처럼 작은 키를 가졌지만, 담력도 크고 눈빛은 언제나 강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많은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집결해 고부 관아를 습격합니다.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 만민이 평등한 세상을 외치며 말입니다. 전봉준은 격문을 지어 봉기의 이유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4대 강령을 정한 뒤 전라도 곳곳을 장악하고 전주성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이 당

  • 11.11.10 03:48

    시에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려 있고, 세상은 동학군의 천지가 된다.’라는 소문이 퍼 질 만큼 전봉준의 ‘힘’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전봉준은 자신들이 제시한 신분제 폐지와, 토지개혁안 등을 수용해 줄 것을 정부에게 요청했고, 그 결과 전주화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서 다시 봉기했지만 결국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후에 체포돼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지와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녹두장군’전봉준이 죽은 후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통해, 전봉준

  • 11.11.10 03:48

    은 그 당시 힘든 삶을 살던 농민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봉준이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개혁안이 갑오개혁에 일부 수용되었다는 점을 보면 그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했고, 사람이 사람을 대접하는 세상을 꿈꾼 그의 노력을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 11.11.10 03:50

    보완하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교수님께서 지적해주신 1)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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