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3일 (화) 9시 반에 대전지하철 갈마역 3번 출구에서 만나 논산 반야사를 목적지로 정하고 떠난다.
현충원을 지나 삽재를 넘어 계룡터널을 지난다. 국도 1호선 세동에서 계룡대쪽으로 틀어 연산을 거쳐 반야사를 찾아 간다.
삼전리. 옛날 일제시대 때 채석장이었던 곳이 이제는 반야사라는 절로 바뀌었단다.
현대판 상전벽해(桑田碧海)인가? 일제시대 흔적이다.
-주차장에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바라본다. -
웬 오른쪽에 돌무더기 터였는지 시멘트를 발라 축대를 쌓은 것이 좀 특이하게 다가온다.+
-주차장 한켠 넓은 바위 위에는 돌탑들이 보인다. -
왜 그리 쌓는 것일까?
- 경사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니 전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기존에 보던 절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심검당이니 요사채 같은 것도 없고 휑하니 대웅전 한 채만 있다.
- 대웅전을 왼쪽으로 하고 오른쪽 절벽있는 쪽으로 나간다.
예전 채석(무슨 용도인지 모름) 절벽도 보이고, 그 한쪽에 동굴로 보이는 곳, 땅 아래로 용궁회상(龍宮會上)이라 쓴 굴이 보인다.
계단 중간 아래로 들어서니 찬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지하동굴에서 나오는 자연냉풍이다.
- 들어가니 굴이 오른쪽에도 있고, 조명이 다채롭다.
산신각에나 있을 법한 조각상이 나타난다.
- 지하 동굴속이라 시원한데, 동자상도 보이고
-동굴 속 천수천안관음보살상도 보인다. 관음전인가보다.
- 조명이 바뀌니 부처님 모습이 새롭다.
- 밖으로 나와 본다. 대웅전 한 채만 있던 것이 아마도 다른 전각들은 지하 동굴을 이용해서 배치한 듯 싶다.
자루를 등에 지고 다닌다해서 얻어진 이름 포대화상 상도 보이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크리스마스 때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인가.
--대웅전 처마 4귀퉁이에 매달린 풍경에서 바람따라 소리가 뎅그렁뎅그렁하고 울린다.
자세히 보니 물고기가 매달린 것도 있고 귀퉁이마다 모양이 다 다르다.
절에서 풍경소리 듣는 멋도 가져볼만 하다.
-대웅전 주변에는 포대화상 말고도 호랑이 상도 있고 독수리 조각상도 있다.
영취산을 상징하는가?
-경내 여기저기서 보이는 돌탑 무리들-
노란 금계국이 한창 여름을 알리고 있다.
반야사를 둘러보고는 탑정호(탑정저수지)출렁다리를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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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탑정호를 찾아서>
지도를 들여다 본다.
가야곡면을 지나간다. 가야곡이라는 지명이 궁금해진다. 옛지도 속에서 한자 지명을 찾아낸다.
'가야곡(可也谷) ' 의미가 잘 와 닿지 않는 한자 표기이다. 방죽 제(堤)자도 보인다.
-탑정호 동편 입구에서 들어간다.-
(탑정호에 대한 이야기는 둑방 아래 서쪽 편에서 본듯하다.)
- 출렁다리 전경도 담아본다.-
-출렁다리 서쪽에서 동편을 바라보면 멀리 대둔산 줄기(빨간 점 표시)가 희미하게 보인다.
- 인중서에는 부적면 신풍리와 가야곡면 종연리에 탑정호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가야곡면이라는 지명에서 "가야"(可也")라는 말에 필이 꽃힌다.
팁장저수지와 무슨 관련이나 있는 것은 아닐른지.
-출렁다리는 개통 처음에는 유료입장이었으나 지금은 무료란다.
( *매주 월요일은 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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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가야곡면의 땅이름에 대해서 살펴본다.
가야곡면의 한자식 이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대신 신채호 선생의 책 <조선상고사>의 가야편에서 단서를 찾는다.
성산 독용산성 답사와 연결되는 점이다. 세상에 이렇게 인연이 닿기도 한다.
옛지도에서 한자를 찾아본다. 둑방을 뜻하는 제방의 제(堤)자도 지도 아래 부분에서 찾아낸다.
이 '제' 가 현재의 탑정호의 먼 전신은 아니었을까? 유적으로나 전설로나 찾아볼 일이다...
-합천의 가야산 산모습도 찾아본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자료 사진에서)
-서산 해미에는 가야산도 있다.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 이름 <가야>에 대한 어원을 찾아본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살펴보면 '가야'에 대한 내용과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가라(加羅) 여섯 나라의 건국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립령 즉 지금의 조령 이남인 경상도에 신라와 가야국가들이 생겨난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주로 서쪽지방에 변진(弁辰)의 12자치부(自治部)가 설립되었다.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가라>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물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벼를 기르기 위한 논농사용 보를 막고 둑을 만들었다는 데, 이 물막은 곳을 <가라>라고 불렀단다.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加羅)>. <가락(駕洛)>.<가야(加耶)>,<구야(狗耶)>, <가야(伽倻)> 등으로 썼으니, 야(耶).야(邪 : 사를 야로 읽음). 야(倻)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가라>를 혹 <관국(官國)>이라 썼으니, <관(官)은 그 음의 초성(初聲). 중성(中聲)을 떼어 <가>로 읽고, <국(國)>은 그 뜻의 초성.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여기서 가야, 가라, 가락, 구야 , 등 다양하고, 그 것의 한자식 표기 지명은 더욱 다양하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말은 있는데 그것을 표기할 우리 글자가 없어서이다.
대신 한자를 빌어서 썼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준어가 없었을 것이고, 지방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글쓴이의 주관에 따라서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이란 이름도 가락의 동쪽이란 데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 지방 아닌 곳에서 발견되는 '가야'라는 말에도 그런 뜻이 적용 될 수 있을 까?
즉 대소[大沼], 커다란 물 막은 곳이란 뜻의 '가야', '가라'는 현재의 우리말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언뜻 떠오르는 말은 " 개울, 개울가, 개천, 물을 가둔다의 가두다와 물 담는' 대야' 정도가 떠오른다."
일단 신채호 선생의 주장을 따라 본다. 대소[大沼]. : 큰 물이요, 큰 저수지란 뜻으로 본다.
이곳의 가야곡면'의 한자식 표기는 <가야곡(可也谷)>이다.
한자는 달라도 '가야곡의 한자식 의미는 거의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이두식 표기임으로 추정된다.
주변 지형을 살펴본다. 물을 담아둘 만한 산세, 수원과 그 물을 필요로 하는 논벌판 지대가 펼쳐지는가?
일제시대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 저수지를 건설한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어떤 근거가 었었던 것은 아닐까?
가야곡이란 지명에서 헤아려 본다.
탑정호는 일제시대인 1941년 착공해서 해방되기 전해 인 1944년에 완성된 것이다. 그 후에 추가 보완해서 오늘에 이른 탑정저수지이다.
그 수원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농어촌공사가 만들어 놓은 탑정저수지(탑정호) 유역관리 안내판을 들여다 본다.
탑정호 유역지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수원의 시작이 대둔산 동북쪽 산줄기인 백령성에서 흘러내려 용계산성을 돌아 내리는 장선천이 주 수원임을 알 수 있다.
백령성(柏嶺城)은 백제산성의 표본이 될 만한 고대산성중의 산성이고 백제의 중요한 산성이다. 그 아래 건천리를 지나 천등산과 마주하는 용계산성이 가야곡 들판으로 들어가는 마지만 길목을 지키는 산성이다. 건너편 산마루에는 불명산(拂明山)으로 불리는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서 통신을 나눴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절들(완주의 화암사, 논산의 쌍계사)이 들어서자 현재와 같은 불교식 한자 지명인 불명산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봉홧불을 올리는 곳이었으니 <불밝히는 봉우리>라는 뜻의 불명산(<불(火),明,산)의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논농사는 지었을 터이고, 그러고 보면 '가야'라는 말이 우리 옛말이 아닌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아뭏든 긴 골짜기 따라 옛길이 이어지고 그것은 또 물길이기도 했으니 일반 민간인 뿐만 아니라 군사 대군도 이 길을 따라 왔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이웃에는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이 있기도 하고, 고려 왕건의 군대가 후백제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도 바로 이웃 개태사(開泰寺) 근처이다. 훗날 그곳 하늘이 보호주셨다는 뜻의 천호산(天護山) 아래 고려라는 국가창업의 대업을 완성하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면서 개태사를 지은 것이 아닐까. 왕건의 초상화를 모시고, 그 당시에 전사한 전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재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대형의 쇠밥솥인 철확이 지금도 유물로 보존되어 있고, 지명속에, 절 이름 속에서 그것을 짐작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유성에는 후대 왕들의 행차를 위한 별궁을 지어서 온천욕도 하며 쉬었으리라.
또한 후백제의 유민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이웃 은진 관촉사에 대형 미륵불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서 탑정호를 거닐어 보면 만단정회가 감도는 역사의 곳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인근에는 논산제2훈련소도 있고, 근래에 옮겨온 국방대학도 있고, 계백장군 박물관도 있고, 황산성 등 백제시대 산성 등이 즐비하다. 또 1894년도에는 동학군들이 머물다 간 풋개(草浦)다리 일대의 옛이야기들을 알고 보면 더욱 깊이있게 다가오는 곳이 이곳 논산 지역이기도 하다.
연산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대전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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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계룡대 조선 왕조 처음 왕궁 건설 당시의 추춧돌과 대궐터를 보고 싶어서 들리지만 절차상의 어려움 대문에 포기하고 돌아선다. 군사 시설 내의 문화재 관람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나설 수 밖에.
( 그곳도 보안시설이라 허락을 받아야 입산이 가능한 곳, 멀리서 바라만 본다.)
다음에는 덕유산 향적봉을 돌아보자고 한다.
한 여름이 오기전에 향적봉 고산지대의 풍광이 그리워진다.
(2023년 .6월 16일. 카페지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