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위를 부르심 -
☆ 2014년 가해 3월10일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수도회] 최후 심판의 잣대는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레위 19. 1 - 2. 11 - 18
† 복음 : 마태 25, 31 - 46
★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계명을 선포하신다. 이 계명은
주님께서 거룩하시니 백성 역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에서
시작된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행위도 포함되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집약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가를 것이며,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벌이
주어질 것이다. 그 기준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한 일로 결정된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야말로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 성경의 근본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이 바탕에 깊이와
밀도를 더하시며, 절박성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 절정을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듣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게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시어 주재하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찰은
곧 이웃 사랑을 미루는 변명의 예외 상황과 우회로를 우리 스스로 차단하는
기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비추는 진실의 빛에 아무런 숨김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영적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즐겁고 이로운 것들로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 기준으로 내 삶의 성패를 평가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 정신에 따른 영적인 모험을 감행한
사람의 일상생활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가장
작은 이들과 사랑으로 함께하는 삶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선택은 수익의 대차 대조표에 따라 타산적으로 살아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이
이러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종착점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가장 먼저 청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마종기 시인이
'기도'라는 제목으로 노래하듯, 자신의 안위와 이기심을 넘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뜨거운 눈물이겠습니다.
"하느님/ 나를 이유 없이 울게 하소서/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눈물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죽어서는/
그들의 눈물로 지내게 하소서."
- 매일 미사 -
◈ [청주] 지금은 사랑할 때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마태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지금은 사랑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줬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인 듯했습니다. 은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저는 눈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듯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 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어떤 사람이 ‘좋은 아내와 나쁜 아내’를 구분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좋은 아내는 천사가 되려고 하지만 나쁜 아내는 자기가 천사라고
믿습니다. 둘째, 좋은 아내는 작은 선물을 받고도 기뻐하지만 나쁜 아내는
뭘 사줘도 잘못 샀다고 구박합니다. 셋째, 좋은 아내는 작은 일도 남편이
원하면 해주지만 나쁜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안 된다고
우깁니다. 넷째, 좋은 아내는 남의 흉을 보지 않지만 나쁜 아내는 남 흉볼
때 남편이 동조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다섯째, 좋은 아내는 남편이 이불을 걷어차면 조용히 덮어주지만 나쁜
아내는 남편이 덮은 이불까지 빼앗아 덮습니다. 여섯째, 좋은 아내는
희망과 사랑으로 매일을 살지만 나쁜 아내는 절망과 푸념으로 매일을
삽니다. 일곱째, 좋은 아내는 남편이 실직해도 격려해주지만 나쁜 아내는
좋은 직장 다니는 남편도 구박해서 실직시킵니다. 여덟째, 좋은 아내는
잔잔한 얼굴로 남편을 편하게 해주지만 나쁜 아내는 잔인한 얼굴로 남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듭니다.
아홉째, 좋은 아내는 예쁘다고 하면 기뻐하지만 나쁜 아내는 예쁘다고
하면 “언제는 미웠어!” 하고 따집니다. 열 번째, 좋은 아내는 남편에게
새 양복을 사주며 기뻐하지만 나쁜 아내는 남편이 새 양복을 사면 “애인
생겼어! 그러면 끝이야!” 하고 위협합니다. 열한 번째, 좋은 아내는
친구들이 자기 남편을 흉볼 때 끼지 않지만 나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제일먼저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합니다. 열두 번째, 좋은 아내는
남편이 아프면 더 잘해주지만 나쁜 아내는 남편이 아프다고 하면
“아프려면 혼자 조용히 아파!” 하고 소리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과연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싶더군요. 좋은
남편의 모습도, 좋은 자녀의 모습도, 또 좋은 부모의 모습도 이 안에
적용해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좋은 사람의 모습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기준이 아닌, 주님의 뜻이 기준
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최후 심판의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벌의 구분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바로 가장 작은이들에게 행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시지요. 결코 자기만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급급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물론 언제 그들에게 해를 끼쳤다고 반문할 수 있지요. 그러나 복음에도
나오듯이 어렵고 힘든 작은이들을 향해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것이 곧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이 먼 훗날 주님 앞에 서는 최후 심판의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의 모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아녜스 레플라이어).
2014학년도 인천교구 예비신학생. 모두가 성소를 잘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랑의 실천은 미루지 맙시다.
아마 철학자 칸트의 청혼에 대한 이야기를 대부분 아실 것입니다. 그는
대철학자답게 항상 깊이 사고한 뒤에 결정했지요. 한 여인에게 받은 청혼에
대해서도 그는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깊이 사고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자신의 생각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도서관에서
결혼과 사랑에 관한 책을 보면서 연구를 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의 연구 결과, 그는 여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집에 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했지요. 이 대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여인의
아버지는 대답했습니다.
“너무 늦었네.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거든.”
심사숙고가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랜 기간의 심사숙고는
때를 놓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실천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각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거든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그
실천의 때는 항상 뒤로 미룹니다. 언젠가는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미루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후회로
끝맺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 절대로 미루지 맙시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순 제1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3월10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탈북자 출신인 서울시 공무원이 ‘간첩’혐의를 받았습니다. 검찰과
국가정보원은 간첩이라는 혐의를 그의 여동생의 진술에 따라서
입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은 변호사의 접견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6개월간 구속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법정에서 여동생은 자신의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오빠는 간첩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검찰은 오빠의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오빠의 핸드폰 속에 있는
사진들은 북한에서 찍은 거라 했습니다. 변호사들은 그 사진은 중국의
노래방에서 찍은 거라고 하였고, 법원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검찰은 항소를 했고,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북한에 다녀왔다는 중국 측
출입국 기록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이제 서울시 공무원은 북한에
다녀왔다는 증거가 있고, 간첩 협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출입국 기록의 진본 여부를 중국 정부에 확인해 달라고 하였고,
법원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 정부에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검찰이 제시한 출입국 기록이 위조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검찰은 처음에는 외교부를 통해서 출입국 기록을 넘겨받았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국가 정보원을 통해서 받았다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국가
정보원은 처음에는 중국을 통해서 출입국 기록을 받았다고 했다가,
자신들의 조직원으로부터 받았다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검찰은 간첩 혐의를 받고 있던 서울시 공무원을 조사하는 것을 중단하고,
국가 정보원이 출입국 기록을 위조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조사의 단계를 넘어서 수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가 정보원의
협조자는 조사를 받다가 ‘자살’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서울시
공무원’이 어떤 사람이기에 검찰과 국가 정보원은 서류를 위조해가면서
‘간첩’으로 혐의를 씌어야 했을까요? 국가 정보원의 협조자는 무슨 이유로
‘자살’을 기도해야 했을까요?
저는 간첩 혐의를 받는 서울시 공무원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검찰과 국가
정보원에 대해서도 별 감정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들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무섭다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이 재판의 결과를 지켜보려 합니다.
국가 기관에 의해서 자행된 ‘대통령 선거 개입’의 수사 상황도 지켜보고
싶습니다. 국가 기관이 한 개인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일에 거짓된 서류를
조작했다면 이것은 공권력이 아니라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을 했다면 이 또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 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 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최후 심판의 잣대는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19,1-2.11-18 마태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 25,31-46
최후 심판의 잣대는 사랑
거룩함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막연한 거룩함이 아니라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거룩함입니다.
오늘 1독서 레위기 서두, 주님의 명령이 엄중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 높은 품위와 존엄의 사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기대 수준이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모두 당신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이자 의무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최후 심판의 잣대도 바로 이 거룩함이 될 것입니다.
거룩함은 사랑입니다. 사랑 많은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이어 주님은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 사항에 대해 줄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도둑질 해서는 안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바로 이게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이요 이를 거스를 때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를 짓는지요.
계속 하여 '안 된다.'라는 부정적 말씀 뒤에는 확실하게 도장 찍듯이 '나는
주님이다.' 말씀하십니다.
'안 된다'라는 부정적 말씀에 이어 주목되는 두 긍정적 명령이 중요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바로 경천애인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이 모든 사랑을 요약하며 우리가 해야 할 모두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은 이 경천애인의 길 빼고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주님의 가장 작은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주님의 다음 말씀이 놀랍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게 바로 건강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모든 가장 작은 이들이 주님의 현존이자 성체입니다.
미사 때 주님의 성체를 사랑으로 모시듯 주님의 현존인 살아있는 주님의
형제이자 성체인 가장 작은 이들을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후 심판의 잣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역시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동사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 였을 때에 따뜻이 맞이해 주었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처럼 곤궁 중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주님이요
이런 작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게 구체적 심판의 잣대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진정성은 이런 작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입증됩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만나는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작은 형제들을 통해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미사의 완성은 일상의 현장에서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통해 완성됩니다.
가장 작은 이들 모두가 주님 현존의 살아있는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의 당신 성체를
모시듯이 당신의 살아있는 성체들인 가장 작은 당신의 형제들을 섬기라
삶의 현장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돕는 것입니다.'
2014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오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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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접고, 오늘은 단 한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작은 이들이라고 불리어지는 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살아왔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실된 마음으로 도와준 약한 처지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각자의 처지가 강자에 속하느냐 약자에 속하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얼마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이에 대한 답변이 시원치 않다면, 복음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태도를 거부한 꼴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라는 가슴 아픈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야 할 지도 모릅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강자와 약자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떠한 형태로든 유지될 것입니다.
이것은 체제의 문제가 아닌, 인간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노약자와 젊고 건강한 세대,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그리고 조직적
계급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삶의 구조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힘들어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도와야만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불편한 점은 있으리라 봅니다.
배고픔을 감수해야만 할지도 모르고, 피곤한 일에 말려들 수도 있겠지요.
바보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만 합니다.
언젠가 그분 앞에 설 날, “부족했지만 애썼습니다.” 라는 고백이 가능할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영혼 치유방법은 작은이를 돌봄
2014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영혼 치유방법은 작은이를 돌봄
몸의 어느 부분이 약하거나 아프면 온 몸이 그곳에 신경 씁니다.
더 아프고 힘들면 만사 제쳐놓고 병원가고 요양하며 치료에 전념합니다.
그래서 낫게 되면 온 몸의 긴급사태가 풀리고 편안히 원래생활 합니다.
몸이 그렇듯 사회도 그렇고 국가도 그런데 이게 잘 안되니 문제네요.
내 삶도 인생의 취약한 부위를 치료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회복해야겠지요.
그 치유방법은 작은이를 돌봄이라고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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