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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신산의 생애였던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 그의 삶을 단 네 글자로 줄여봤다. 병을 달고 살았던 육신의 세월은 '응달'이었다. 그러나 그의 언어·기개·얼은 '광휘(光輝)'했던 것 같다. 가난한 교회 종지기인 그가 매일 퍼올린 새벽녘 영롱한 종소리를 딛고 '몽실언니' '강아지 똥' 등 100여편의 주옥같은 동화를 남겼다. 동화는 어쩜 유일한 낙이었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놓는 촉매였으리라. 어느 날 유명해졌지만 굳이 지난 '무명(無名)의 세월'을 보상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월계관도 '허물'이라 여겨 철저하게 외면했다. 원했다면 서울의 번듯한 저택에서 우리 문단을 호령할 수도 있었지만 마굿간 같은 조탑리 양철지붕집을 일점일획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저승으로 가자, 다들 작품과 삶이 일치된 드문 사람이라고 했다. 꼭 유마(維摩) 거사 같았다. 주위에 굶주리고 소외된 자를 끌어안지 못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사람 갈 길이 아님을 외쳤다. 승용차를 버리고 '걸어다니기 운동'을 요구하면서 묵묵히 '나눔의 삶'을 실천궁행했다. 통장엔 인세 수입 등으로 10억원이 있었지만 고스란히 불쌍한 어린이의 몫으로 다 내놓았다. 한국의 굵직한 실천파 지성도 이 대목에선 모두 숙연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몸은 졌지만 그의 '문학혼'은 쉬 질 것 같지 않다. 오는 17일은 그의 첫 기일(忌日). 지난 1년간 고인 곁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둘러봤다. 표지사진은 1990년 권정생 선생의 생전 모습.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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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오덕과 각별한 사이, 김용락 시인이 수제자급 그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민들레 교회 최완택 목사 권정생을 발굴한 사람은 바로 같은 동화작가인 이오덕(2003년 작고). 이오덕은 한동안 고인의 후원자였고 적잖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서신 내용이 2003년 한길사에서 '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 받은 아름다운 편지'란 부제로 출간됐지만 고인이 동의를 하지 않아 결국 초판이 전량 회수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오덕은 그의 무덤 옆에 고인이 묻히길 원했을 정도로 12년 연하의 고인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그의 유언장 집행을 일임 받은 '한국 가톨릭계의 기인' 정호경 신부(현재 봉화 청량산 자락에 칩거)는 박정희 유신치하 안동 가톨릭 농민회 운동에 돕는 과정에 고인과 친분을 갖는다. '몽실언니'를 교회 주보에 실어 그를 세상에 알린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공동대표이자 울진 민들레 교회 최완택 목사도 그의 도반. 동화작가 겸 번역 문학이면서 불경과 노자 도덕경 등에 조예가 깊은 이현주 목사 역시 같은 길을 걷는 동화작가로 호흡이 잘 맞았다. '혼자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년 현암사)'의 전우익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제 함께 고인이 된 권정생-이오덕-전우익, 소설가 김영현은 이 셋을 주저없이'영남 3현'으로 꼽았다. 그 아래 세대로는 현재 경북외국어대 사무처장으로 있는 김용락 시인이 고인의 애제자. 그의 행장도 김 시인이 썼고 임종도 했다. 그는 80년 5·18로 휴교령이 내릴 때 우연히 그의 동화에 감화, 직접 찾아가 사제지연을 맺었다. 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안상학 시인은 80년대초부터 인연을 맺었다. 정호경·최완택·박연철의 뜻에 의해 그가 재단준비위 사무처장을 맡는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도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출간으로 더 깊은 사이가 된다. 민중 판화가로 유명한 이철수. 그는 한때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에서 농민운동을 하는 김영원 장로의 집 아랫채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중 고인과 연을 맺는다. 그를 가장 괴롭힌 시인이 한 명 있다. '안동의 천상병'으로 불리는 임병호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직초등 시절 고인의 담임선생이었다. 그의 누이는 통혁당 당수 김종태의 부인. 일찍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낭인처럼 살며 수시로 행패에 가까운 신세한탄을 했지만 고인은 포근히 받아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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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출판사에서 발빠르게 평전을 출간했지만 재단준비위측에선 내용이 짜깁기식이고 진정성이 보이지 않아 명실상부한 평전은 적당한 집필자가 정해지면 작업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김용락 시인은 지난 주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란 제목의 제4시집을 발간했다. 지난 1일엔 1996년 발간돼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고인의 대표 산문선 '우리들의 하느님' 개정증보판(317쪽)이 나왔다. 거기엔 김용락 시인이 적은 권정생 선생의 행장, 밀양 밀성고 교사인 이계삼씨의 글, 고인의 연보가 추가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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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벌초를 했는지 마당은 정갈 고인이 더없이 좋아했던 명자꽃 빨간 양철 지붕 벗삼아 흐드러져 ◇…고인의 집으로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IC를 빠져나오면 바로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만난다. 왼쪽으로 접어들면 생가로 가는 소박한 안내판이 길가에 놓여 있다. 골목으로 좌회전, 200m 농로를 간다. 왼쪽에 빨간 양철 지붕이 보인다. 지난 해 5월17일 오후 2시에 타계한 동화작가 권정생의 집이다. 고인돌 같은 바위가 초입에 사립문처럼 놓여 있다. 사람이 들락거리지 않았다면 잡초세상이 됐을 터인데 누가 벌초를 했는지 마당 안팎이 정갈하다. 최윤환씨 등 유품정리위원회 회원들이 청소를 해준 덕분이다. 여느 꽃은 다 지고 붉은 입을 벌리고 있는 꽃이 있다. 고인이 더없이 좋아했던 명자꽃이다. 댓평 남짓한 집 안의 살림은 유품정리위에서 다 챙겨갔다. 남은 건 백철솥, 찌그러진 양은 냄비, 처마에 매달린 옥수수, 빨랫줄에 걸린 네 장의 수건, 곰팡이 핀 돗자리, 살평상, 빈 개집, 6.4㎏ 한일 짤순이, 수돗가엔 자잘한 유리병 몇 개, 말라버린 꽃다발, 폐 타이어, 파리채, 옷걸이, 녹슨 낫, 화장지, 모기향 연소기…. 섬돌에 놓여 있던 파란 고무신도 '권정생 어린이재단 설립준비위' 사무실로 옮겨졌다. 문은 굳게 닫혀있다. 찢어진 장지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니 그릇이 몇 개 보인다. 집의 왼쪽 창문을 통해 고인의 침실을 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채 3.3㎡도 안되는 콧구멍 만한 방이었다. 집 뒤편 5m 남짓한 청석 언덕인 빌뱅이 언덕에 올랐다. 화장된 고인의 유해 일부 여기에 뿌려졌다. 잔돌 같은 뼛가루 몇 점 보인다. 법 없이도 살 착한 집사 장례식직후 동민 위안 잔치 열려 도민증부터 신문대금영수증까지 유품은 재단준비위서 일괄정리 ◇…추진 중인 권정생 어린이 재단(가칭) 대구의 김용락 시인과 재단준비위 사무처장으로 있는 안상학 시인이 취재에 동행했다. 둘한테 지난 1년간 고인에게 있었던 일을 들어 간추려봤다. 49일째 빈소가 철상된 뒤 맨 먼저 '조탑리 동민 위안 잔치'가 열렸다. 조탑리의 한 숯불갈비 식당에서 열렸는데 고인이 한턱 내는 형식이었다. 고인은 평소 동민들로부터 인심을 많이 얻었고 적잖은 동민의 어려움도 해결해줬다. 그래서 대다수 노인들이 그 자리에 기꺼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노인들은 유명 동화작가보다 그냥 '법 없이도 살 착한 권 집사'로 안다. 이어 생가 오른쪽 주방 문 앞 섬돌에 빈소가 마련된다. 걸개그림으로 유명한 최병수씨가 고인을 위해 판화 영정을 기증했다. 오전 10시~오후 6시'권사모(권정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관계자들이 돌아가면서 집을 지켜줬다. 49일째 되는 날 빈소가 치워진다. 이때 유언장을 집행하고 사후 일을 도맡게 된 정호경 신부·최완택 목사·박연철 변호사가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조속한 시일내 재단을 설립하자"는 뜻을 참석자에게 피력한다. 이어 생가에 방치된 고인의 유품을 분실되지 않게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이때 정 신부가 구성한 유품정리위원장은 최윤환씨가 맡았다. 유품은 예상보다 방대했다. 회원들은 지난 여름 방학을 이용, 철야 작업을 하다시피 하면서 유품 목록에 일련번호를 붙인다. 전 과정을 자료사진으로 찍어뒀다. 물론 자료는 모두 온라인으로 관리되고 조만간 홈페이지도 열거란다. 안동시 명륜동 317의1에 재단준비위 사무실이 있다. 본부 사무실이 생기기 전까지 거기서 기본 업무를 보게 된다. 사무실 한 공간에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30여개의 파란 상자에 넣어 현재 밀봉관리중이다. 책이 6천여권, 육필원고가 106점, 공구 28점, 문방구 26점, 생활용품 43점, 의류신발이 98점, 주방기구가 43점, 음향장비가 121점 등이다. 이밖에 의료용 튜브인 카데타, 병원진료카드, 징집면제증서, 도민증, 출판계약서, 가족사진, 신문대금 영수증, 14인치 낡은 TV, 유리병으로 만든 호롱 등 그의 체취가 묻은 건 버리지 않았다. 구석에 놓인 그의 육필 서각 한 점이 눈길을 끈다. '좋은 동화 한 편은 백번 설교보다 낫다' 1992년 11월5일 고인이 직접 쓴 거다. 지난 1월 재단설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1차 모임이 있었고 지난달 28일 2차 회의가 있었다. 박 변호사가 재단설립 관련 서류를 이미 다 구비해놨다. 정관과 이사진, 본부· 재단 기금 운용 방안 등이 안건으로 남아 있다. 5월 17일 그를 그리며 안동 생가에서 추도식 가질 예정 18일에는 '한티재'서 문학기행 고인의 책 전시·유품도 일부 공개 ◇…논란 빚었던 생가는 보존으로 결론 한때 관계자들 사이에 고인의 생가 보존 여부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다 고인을 사랑하는 맘에서 비롯된 거다. 보존으로 결론이 났다. 정호경 신부가 보존 이유를 육필원고로 정리해 공개했다. 그는 "고인은 지나가는 소리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문건으로 명시한 적은 없다. 유언장에도 그 대목이 없다. 그는 공인이고 그의 유품도 작품이다. 작품과 삶이 일치된 희귀한 작가인 만큼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집은 허물지 않는 게 맞다"면서 보존 이유를 적시했다. ◇…1주기 추도식은 어떻게 진행되나 기일은 양력 5월17일로 정했다. 이날 오후 2시 생가에서 추도식을 갖는다. 다음 날 오전 10시 고인의 동화 '한티재 하늘'의 배경이 된 한티재(대구에서 안동으로 갈 때 안동시내로 진입하기 바로 전 검문소 있는 고개)에서 어린이 문학 협의회 이주영 회장이 서울에서 온 기행단을 인솔해 돌음바우골, 섶밭밑, 계산골 등을 문학기행한다. 또한 명륜동 재단추진위 사무실에선 고인의 도서 전시전과 함께 유품 일부도 공개할 예정. |
- 2009. 9/17. 영남일보에서...
첫댓글 시간에 쫓겨 읽지는 못 하고 눈으로만 좌악! 내일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렵니다. 그렇다더라 하고 말로만 가르첬으니 사진 보여주면서 다시 일러 주어야죠. 사람 사는 냄새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름다운 삶이라는 건 어떤 것인지.... 자료, 고맙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권선생님의 삶이 얼마나 피부로 느껴질지 모르겠어요.
'한티재' 한티란 <큰 고개>란 뜻이라네요. 서울 대치동에 있는 지하철역이 '한티역'이고 또 근처에 '한티공원'이 있습니다. "그는 공인이고 그의 유품도 작품이다" 작품과 삶이 일치한 희귀한 작가이므로 고인의 생가는 보존되었다는,, 고 권정생님의 보배로운 삶을 기리며... *'*',
예, '한'은 크다(大)는 뜻이고 '티'는 지리산의 '정령치'처럼 '고개 치峙'의 변한 발음이지요. 그러니 한티는 '큰고개'라는 뜻인데 거기에 다시 고개를 뜻하는 '재'가 더 붙었으니 '역전앞'과 같은 구조입니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은 안동시청 근처 북문동에 있습니다. 꼭 다녀들 가시기 권합니다. 그 분이 쓰시던 물품을 보시면 왜 '성자'인지 알 수 있어요..
그렇군요. 기회가 있겠지요.
달희님께서 제공하신 자료를 보면서 새삼 고인의 진가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기회나는 대로 북문동을 찾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