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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묵상글 들 (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 거절도 수락도 사랑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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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거절도 수락도 사랑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믿는 바인데 요는 그 믿음이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그 확신인지 성찰케 됩니다.
믿지 못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단계와 정도가 있지요.
불신이 있고,
의심이 있고,
흔들리는 믿음이 있고,
흔들림이 전혀 없는 믿음 곧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불신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심이나 의문은 가질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은 차별이 없으시니
그에게도 주셨는데 그가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 경우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셨지만 인간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가 주저하거나 변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뜻에 맞으면 다 들어주시지만
당신 뜻에 어긋나는 것은 청하더라도 주시지 않습니다.
마약을 달라는 자식의 청을 들어주는 부모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랑의 거절을 경험한 우리는
온당한 청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신할 수 있고,
그래서 이젠 하느님께 청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벌려고 하는데
이런 불신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는
거절도 수락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에서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 하고,
그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요
더 큰 사랑 또는 다른 사랑을 위한 거절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선이 아니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왠지 생각들이 얼키고설켜서 더 이상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나눔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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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또한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마음을 듣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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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 봅니다. 어떤 이는 정치인이 되려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소신도 없어야 하고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고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헌신과 희생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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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
성탄 시기 중 공현 주간에 맞이하는 성모신심 미사는 마리아께서 지니신 모성을 기억하여 평화를 기원하는 지향을 내포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가모장(家母長)이셨던 성모 마리아께서 승천되신 다음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자격으로 천상 가정에서도 믿는 이들에 대하여 모성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이 천상 가정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곁에 계신 성모 마리아께 우리가 새 해를 맞이하여 전구해야 할 으뜸가는 지향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위해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전구는 하느님께도 향하지만, 우리 인류와 우리 민족을 위하여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천상에서 인류를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우리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우리가 당신처럼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이끌어 주셔야 하지요. 또 성모 마리아께서는 전구하시는 통공행위로써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 주셔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는 지상에서 평화를 해치는 전쟁과 폭력을 당장 멈추어야 하며,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인류가 평화로이 살아가도록 평화의 삶을 선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겨레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자기 몫을 다함으로써 그 선도의 몫을 해야 하지요.
나자렛 가정에서도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역할은 커다란 몫이었는데, 여기에는 연민의 마음을 가르치고 평화의 가치를 일깨워주시는 일이 가장 컸습니다. 우선, 아나빔으로서 살아오면서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과 전통을 아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기본이었습니다. 또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소외와 차별을 받기도 한 아들이 꿋꿋할 수 있도록 단도리를 하는 일도 중요했고, 오히려 이런 체험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억울하게 소외받거나 차별당하여 고통을 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도록 아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남편 요셉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마리아께서는 생계 대책이 막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친척 조카들에게 의탁하실지언정 아들 예수에게는 걱정 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출가를 격려하는 몫도 돋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떠나보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듯이, 필요한 경우에는 제자들까지도 함께 불러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함께 하면서 센스 있게 하느님의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켜서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성모 마리아께서는 내내 함께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을 불신하는 친척 형제들의 성화에 못 이겨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말리러 가보기도 하셨지만, 귀 얇은 조카들이 전해준 소문과 달리 당신 아들의 믿음직한 모습을 현장에서 확인하신 다음에는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 등 아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다른 여인네들을 불러 모아서 이들과 함께 아들과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아들이 수난하시는 순간까지 줄곧 감당하셨습니다.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다음에도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들의 부활을 굳게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셨지만, 믿음이 흔들렸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오순절에 온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성령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하고 흔들리는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기다려주시고 끝내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로 거듭 나도록 지켜보아 주시던 그분은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셨으므로 자연히 사도들이 주춧돌이 된 교회의 어머니도 되셨습니다.
이제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령으로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활약하시는 당신 아드님과 함께 우리 믿는 이들도 사도로 삼으십니다. 그리고는 연민의 마음으로 평화를 실현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모성의 역할을 맡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께서는 ‘평화의 어머니’, ‘평화의 모후’로 불리우시게 되셨습니다.
따라서 평화의 사도로 불리운 우리 모두가 각자의 마음속에 평화의 촛불을 켜면, 그 촛불이 커져서 증오를 녹이고 무명을 밝힐 수 있습니다. 갈라져서 적대시해온 남과 북의 겨레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지혜의 빛조차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올해가 남북이 처음으로 만나서 대화했던 7·4 남북공동성명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여기서 남북 쌍방이 합의한 조국통일원칙은 첫째, 통일은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과 둘째, 통일은 평화적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것과 셋째, 통일은 사상과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합의해 놓고도 남북은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차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반세기를 끌고 있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의 평화 지향 기도를 들으시고 하느님께 전구하시어, 남북의 정치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온 겨레의 마음을 평화 공존의 지혜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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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가 수업 시간에 낯선 사람과 함께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로, 실험을 위해 오늘 우리 학교에 오셨습니다. 박수로 맞이하겠습니다.”
힘찬 박수에 인사하며, 화학자라는 사람은 가방에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낸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제가 연구 중인 물질로 휘발성이 강해 병마개를 뽑으면 바로 휘발됩니다. 인체에 해가 없지만, 냄새가 조금 날 것입니다. 병을 열었을 때 나는 냄새를 맡은 사람은 얼른 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이윽고 병마개를 열자, 많은 학생이 차례로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이 냄새가 정말로 싫다는 듯이 인상까지 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심리학과 교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화학자가 아닌 일반인이고, 액체는 그냥 증류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 사람의 암시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병 안에 냄새가 나는 화학 물질이 있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믿었고 그래서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 암시는 우리 일상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주변에 누군가 하품을 하면 따라 하지 않습니까? 또 계속 기침을 하고 있으면, 자기 목도 간지러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똑같이 무시하고 건너갑니다.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좋은 영향을 이 세상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이 되는 영향,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투덜거립니다. 세례를 자기들의 고유 상표로 생각했는데, 예수님도 세례를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천명합니다.
신랑과 그를 축하하고 기뻐하는 신랑 친구에 비교하여 설명하지요.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며, 신랑의 친구가 그 신랑이 잘되는 것을 시기한다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부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며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랑이신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신랑의 친구인 자신은 작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많은 이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기만 드러나는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에 좋은 영향을 전달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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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신중하지 않으면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 일쑤이다(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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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생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몇 년 전, 미국에서 아이들이 뜨거운 차 안에 방치되어 있다가 사망했던 사건이 큰 이슈였습니다. 부모가 차에 아이를 놔뒀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자기 일을 보면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다며 사람들은 ‘아동학대’를 말했습니다. 무신경하고 어리석어서 어린아이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죽은 아이의 부모는 평소에 아동을 학대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양육자이자 존경받는 사회의 전문가였습니다.
아이가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차에 내리는 순간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쇼핑하러 와서 살 물건 목록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밖의 생각들이 아이와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게 한 것입니다.
저 역시 저녁 식사로 먹으려고 소머리국밥을 사고는 차에 놔두고 그냥 놔둔 적이 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차에 타는 순간,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뙤약볕 밑에 세워둔 차 안의 소머리국밥은 완전히 상했습니다.
하루에도 많은 생각으로 정작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중요한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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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의 기도 중에 ‘연도’가 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장례가 나면 빠지지 않고 고인을 위한 연도를 함께 했습니다. 고인을 위한 기도도 되지만, 유족들에게는 교회를 알리는 ‘선교’도 되었습니다. 유족들은 고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모습을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연도는 시편을 노래하면서 ‘성인호칭기도’를 합니다. 천상의 성인들에게 고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비록 고인이 생전에 잘못을 했을지라도, 뉘우치지 못했을지라도, 허물이 있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성인들의 전구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연도를 하면서 고인을 생각합니다. 생전에 많은 업적을 지닌 분도, 사람들에게 찬사와 박수를 받던 분도 말없이 누워있습니다. 건강하게 장수를 누린 분도,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게 세상을 떠나는 분도 말없이 누워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한 것을 봅니다. 어릴 때는 길고, 힘들게 느껴졌던 연도인데, 지금은 고인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며 정성껏 기도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빛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물질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파동의 형태입니다. 물질의 형태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만 파동의 형태는 쌍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리, 전파는 파동의 형태입니다. 우리가 주파수만 맞추면 소리와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쩌면 파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어쩌면 파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하늘의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하는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을 때입니다. 여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고, 예수님의 힘과 기운이 여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물질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기도와 신앙은 결코 물질의 영역에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주셨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생각에서는 걱정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세례자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쌓았던 명성과 명예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물질적인 영역에서 소유하려 하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겸손과 온유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파동과 존재의 삶을 살아가면 주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그 죄의 대가를 치루기 전에 그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도 소중하게 여기시지만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길을 찾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2022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미운 사람이 있다면,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곳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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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갈망(渴望;desire)의 사람
-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
갈망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갈망의 사람, 수도자는 물론 인간의 정의입니다. 시편 63장 2절,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갈망의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예전 '내 수도생활관'이란 글에서도 갈망에 대해 강조한 부분이 있어 나눕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어 수도자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사라지면 영성생활은 끝이다. 그리하여 수도자를 갈망의 사람이라 부른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저절로 깨어 있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여기서 마음의 눈이 열려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다. 그러니 갈망-깨어 있음-기도-개안-마음의 순수-주님과의 만남이 일련의 연쇠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엊그제 1월6일 교황님의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감동했습니다. 갈망의 동방박사들을 통해 갈망이 우리의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설파한 불후의 명강론이었습니다. 길다 싶지만 일부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갈망의 능력이다.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타오르고 있는 불을 연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갈망은 우리를 직접적인 것, 보이는 것들 넘어 영적 현실을 보도록 우리를 내모는 것을 뜻한다.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를 초월하는 신비로서의 삶을 포옹하는 것을 뜻한다. 삶은 우리의 여기 지금의 삶보다 더 큰 무엇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색깔로 채워지기를 부르짖는 빈 화판과 같다. 위대한 화가, 빈첸트 반 고흐는 언젠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나를 한밤중 뛰쳐 나가 별들을 그리게 했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동방박사들처럼 별들을 향하도록 방향지워진 반짝이는 갈망이다. 과장할 것 없이 ‘우리는 갈망하는 정도만큼의 존재(we are what we desire)’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 관습의 장벽을 넘어 우리의 삶을 앞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갈망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전 삶이 갈망의 훈련이다.’라고 말했다.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그러하다.
믿음의 위기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의 소멸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지상의 현실에만 골몰하다보니 하늘을,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잊었다. 위대한 것들에 대한 갈망은 증발되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욕구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은 닫혀진 공동체에서 텅 빈 공허를 느낄 뿐이다. 실로 갈망의 결핍은 다만 슬픔과 무관심의 개인이나 공동체로 인도할 뿐이다. 믿음은 갈망에 불을 붙일 것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늘 새로운 믿음일 수 있다. 내 마음은 하느님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느가? 혹은 실망으로 꺼져 가고 있는가? 바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오늘이 ‘갈망의 학교’(school of desire)이자 우리의 갈망을 키워야 할 날이요,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 나가야 한다. 갈망은 우리를 경배에로 흠숭에로 인도하고 흠숭은 우리의 갈망을 새롭게 한다. 하느님 향한 갈망은 우리가 그분의 현존 안에 있을 때만 자랄 수 있다. 예수님만이 욕구의 독재로부터 우리의 갈망을 치유한다. 실로 우리의 갈망이 욕구와 일치될 때 우리 마음은 병들게 된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의 갈망을 승화시키시며 이기심으로부터 그들을 정화하시고 치유하신다. 그래서 흠숭을, 침묵의 흠숭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흠숭을 잊지 않도록 하자. 캄캄한 밤일지라도 계속 빛나는 주님의 별이다. 그분을 향한 여정에 오르자. 동방박사들처럼 눈을 들어 우리 마음 속의 갈망의 소리를 듣도록 하자,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빛나게 만든 별을 따라 가자. 하느님의 놀라움에 활짝 열도록 하고 쉼없는 탐구자들이 되자. 그리고 우리 ‘꿈꾸고, 찾고, 흠숭하는’(dream, seek, adore) 사람이 되도록 하자.”-
내용이 너무 좋아 많이 생략하면서 거친대로 옮겨 봤습니다. 바로 이런 갈망의 모범이 제1독서의 사도 요한이요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갈망할 때 아드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체험입니다. 다음 ‘갈망의 사도’ 요한의 체험적 고백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말 그대로 갈망의 은총입니다. 갈망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아드님의 신비를 체험한 사랑의 신비가, 갈망의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1서가 오늘로서 끝납니다. 마지막 말마디,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큰 울림을 줍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의 이단을 지칭하지만 현대판 우상들은 득실득실 합니다. 우상들과 악마들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죄도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갈망할 때 저절로 이런 우상들이나 악마들로부터 이탈하여 초연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갈망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은 세례자 요한은 질투심에 불타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정체를 꿰뚫어 보며 겸손히 자신의 신원을 파악하며 제자들을 진정시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사람, 또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친구로 자신의 신원을 인지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갈망의 은총, 갈망의 체험, 갈망의 기쁨, 갈망의 충만, 갈망의 겸손입니다. 마침내 갈망을 통해 주님을 체험함으로 아드님과 자기의 관계를 깨달은 세례자 요한이요,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적 진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질 때 비로소 텅 빈 충만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여정은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가는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나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되신 그분 안에서 참나를 발견해가는 영적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점차 커져가고 나는 점차 작아져 갈 때 충만한 기쁨에 참 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향한 갈망의 표현인 ‘2022년 새해 소원’이란 자작 헌시 기도문중 다시 일부를 인용함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성요한 세례자가
성요한 시도가
바로 그러하였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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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주님 세례 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대화가 전개될수록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께로 완전히 옮겨지는 느낌입니다.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이라고 바로잡히지만(요한 4,2 참조),
예수님께서는 유다에서, 세례자 요한은 애논에서 세례를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합니다.
요한은 이미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요한 1,35-42 참조).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러 가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신부’인 이스라엘이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
‘신랑’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랑의 친구’로서 충만한 기쁨을 얻었던
세례자 요한은 이 증언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납니다.
작아져야 하는 세례자 요한의 삶은 커지셔야 할
예수님의 삶 안에 녹아 들어갑니다.
이제 구원의 무대에는 예수님만 계십니다.
그분께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언제나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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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을 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서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에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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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 29)
작아질수록
우리의
기쁨은 더더욱
충만하여진다.
버리지 않고서는
작아질 수 없다.
신앙의 진가는
작아지는
결심으로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하는
삶의 변화란
어디에서
우리가
멈추어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멈추어야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서
커지신다.
멈추는
아픔 뒤에
찾아오는
참된 기쁨이다.
멈추는 성찰과
버리는 반성이
필요한 우리의
여정이다.
참된 기쁨이란
버려야 할 것을
우리가
버리는 것이다.
미련과 집착을
버리는 실행의
기쁨이다.
떠나 보내는
아픔을
망설이지 않고
미련없이
이제 떠나
보내는 것이다.
어리석음이란
떠나 보내야
할 것을 떠내
보내지 못하는
망설임이다.
머뭇거리는
우리자신을
아는 것이
어리석음을
멈추는 길이다.
멈추어야
제대로
움직이게
되는
그리스도의
질서이다.
자아의 멈춤이
그리스도의
믿음이 된다.
믿음과 멈춤
사이에서
만나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다.
기쁨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멈추는 기쁨
버리고
떠나 보내는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기쁨의
신앙이다.
우리의 기쁨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를
묻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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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고받음의 영적 원리 ♣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관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간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어 인간과 ‘사랑의 관계’ 곧 계약을 맺으셨고, 관계 속에 현존하신다. 따라서 관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실존방식이자 삶의 질을 좌우하는 본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자신이 아닌 존재와 무엇인가를 주고받는다. ‘영’(靈)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에게 가장 으뜸가는 관계는 ‘영적인 관계’이다. 오늘의 성경 말씀들의 비추임을 받아 영적인 주고받음의 원리에 대해 묵상해보자.
영적인 주고받음의 첫 번째 원리는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영적 관계에서 생명과 선과 사랑을 주시는 분은 일방적으로 하느님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철저히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무상(無償)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1요한 5,14)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그저 받는 처지에 있다. 이렇듯 영적인 주고받음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자들을 제멋대로 구는 천박한 ‘갑(甲)질’과는 거리가 멀다.
두 번째 원리는 사랑의 주님께서는 늘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만,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 청하고 받을 때 요구되는 조건은 ‘그분의 뜻에 따라 야 한다’(5,14)는 것이다. 사랑의 동기에서라면 어떤 형제가 불의를 저질렀다 해도 그것이 죽을 죄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아니라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1요한 5,16). 우리가 주님의 뜻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한없는 사랑과 선과 자유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청할 때에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기도 안에서 식별하지 않고 ‘주님께서 알아서 주시겠지!’라고 말하는 ‘무분별한 막연함’에 자신을 내맡기는가! 또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 '사랑으로 겪어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책임지려는 노력 없이, 자신도 모르게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하며 ‘무책임한 의존’을 하는가! 주님께 청하기 전에 그분의 뜻을 찾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기도하며 식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적인 주고받음의 마지막 원리는 인간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되돌려야 할 의무’(reddere)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감사를 드림도 그분의 은사일 뿐이다(연중평일 감사송 4). 생명과 재능, 시간, 재물, 지위, 가족, 인간관계 등 어느 것 하나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렇게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받는 존재’이며 ‘말씀을 듣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善)과 사랑, 동료 인간을 통하여 받은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할’뿐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향하여 흘러 지나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않고, ‘주고받음의 영적 원리’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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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주님을 위한 작은 일에 제 온몸과 마음, 정성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찬란한 태양처럼 동쪽 하늘 위로 붉게 떠오르자,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놀랍도록 겸손하고 솔직합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서녘 하늘을 물들이며 저물어가는 석양처럼 담담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복음 3장 28절, 30절)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작아지는 것에 대해 조금도 슬퍼하거나 못마땅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충만한 얼굴입니다.
그는 주님의 커지심과 동시에 자신의 작아짐에 대해서 큰 기쁨이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커지고 높아지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세례자 요한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원 안에 살아가는 우리 역시 작아짐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넓은 시야, 너그럽고 부드러운 시선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저희 공동체는 지금 잡목과의 전쟁을 선포한 후, 다들 톱 하나씩 손에 들고 열심히 톱질을 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실수로 손톱 끝을 조금 잘랐습니다.
제가 농담 삼아 그랬습니다.
“손목이나 목이 날아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저 역시 어떻게 하다가 검지 손가락을 삐끗했습니다. 부어오르고 많이 불편했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위로를 했습니다.
“시골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작아진다는 것, 겸손해진다는 것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건 사고들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불행이나 불운 앞에서도 크게 호들갑을 떨거나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 크게 한번 껄껄 웃으면서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17세기 프랑스 가르멜 수도회 회원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가 수도원 안에서 맡은 소임은
다른 영성가들이 볼 때 가장 작고 하찮은 일, 허드렛일이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도 그의 얼굴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큰일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기에,
주님을 위한 작은 일에 제 온몸과 마음, 정성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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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왜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요한도 세례를 주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시니 마치 경쟁자가 된 것처럼 나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한 번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어 그분이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 메시아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왠지 세례자 요한을 높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우리는 모두 아무리 거룩해져도 세례자 요한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오해를 받는 분이 있다면 바로 ‘마더 데레사’입니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마더 데레사가 평생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름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들어, 믿음이 약해 구원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소명’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평생 로마에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로마의 국경을 더 넓히기 위해 변방에서만 살았습니다.
로마에서 떨어져 산 카이사르는 그러면 로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로마를 혼자 지배하려 들었기에 살해당하기는 하였지만, 로마 국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직무’상 멀리 떨어져야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달걀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달걀의 노른자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과 더 가까운 것은 껍데기보다 흰자입니다.
껍데기는 노른자보다 본질에서 다르고 더럽고 딱딱합니다.
그러면 노른자는 자신과 더 가까운 흰자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더 변방에서 더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 껍데기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몸통과 더 가깝다고 팔뚝을 더 사랑하고 손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끝에서 고생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물론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어쩌면 안의 것을 보살피기 위해 더 고생하는 것들은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둑보다 맨 끝에서 배를 부르는 등대를 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로 말하면 주님과 더 가까운 기도는 ‘관상기도-묵상기도-소리기도’ 순입니다.
저는 주로 묵상기도를 합니다. 관상수도원에 있는 수도자들은 주로 관상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는 거의 소리 기도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 사진에는 항상 묵주를 들고 있고 수도자들과 공동으로 하려면 성무일도와 같은 소리기도가 주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저보다 묵상기도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 가까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관상가-저-마더 데레사’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마더 데레사는 성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계란의 노른자는 스스로 오염된 흰자를 더 고마워할까요, 아니면 자신을 지키려는 단단한 껍데기를 더 사랑할까요?
당연합니다. 자신과 멀어도 자신의 ‘뜻’을 더 충실히 따라준 껍데기를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는 내가 어느 수준의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소명에 어느 정도 충실했느냐?’로 결정됩니다.
모든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더 그렇습니다.
소위 ‘로고스 찬가’(요한 1,1-18)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며, 그분을 증언한 유일한 분으로 세례자 요한을 말합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길을 닦으라고 보내신 유일한 분이요, 구약으로 말하면 엘리야 예언자와 같은 분입니다.
만약 기도의 단계로 본다면 세례자 요한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의 ‘회개’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고 기적을 행했던 그분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명을 충실히 수행한 면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사도들 못지 않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자신의 소명상 자신은 ‘회개의 세례’ 자리에 있어야지 그리스도께 가서 그분께 세례를 받으면 최초의 회개의 세례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자의 역할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은 보내도 끝까지 그리스도께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거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소명 때문입니다.
삶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그 기도를 통해 받는 기쁨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보다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목소리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듣는 기쁨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분이 커지시는 소식만 들어도 그 기쁨은 매우 충만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기쁨의 충만함은 소명의 충실에서 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달걀부침 하나 뒤집는 것,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는
『하느님의 현존 연습』의 ‘로렌스 수사’(1605-1691)나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티노 수사’(1579-1639)는 그리스도의 변두리에서 마냥 기뻤습니다.
그만큼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부가 검은 노예 취급되는 혼혈이었던 마르티노 수사는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나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나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나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주방에서 평생 일만 하였고 마당을 쓰는 일만 하였다고 해서 누가 관상 수도회의 수도자들보다
영성이 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분들은 사랑의 현존 안에서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사랑실천을 했기에 온전히 모든 시간의 삶이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했습니다.
기도는 그분의 뜻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그분의 음악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도의 맛을 느낍니다. 기도의 맛(기쁨)과 기도의 필요성(소명)만 잊지 않는다면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부활시킬 힘이 있다면 자신들을 위해 젊은 나이에 싸우다 요절한
알렉산더 대왕을 살려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기도를, 그것이 어떤 기도이건 간에, 당신 뜻에 일치하려는 강한 열망으로 했다면,
그 사람을 부활시켜 가장 당신과 가까운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그 사람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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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묵상과 기도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인류를 위한 자애와 사랑입니다. 주님 공현은 또하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 아기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예수 아기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우리도 황금, 유향, 몰약의 예물을 준비하여 예수님께 봉헌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인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 그리고 형제의 죽을 죄가 아니면 청하라.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 고 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을 때, 예수님도 세례를 주셨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러 갈 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보고하자, 요한은 그 세례가 하늘로 부터 권한을 주신 것.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분에 앞서 파견되었을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두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1요한 5,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2-30
실천
우리는 요한의 겸손을 봅니다. 요한 자신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그의 뒤에 오시는 분은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 조차 없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 추수하고 심판하는 분이다. 요한은 스스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요한 자신도 기쁨이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 분은, '네 뒤에 한 분이 오시는 데, 내가 나기 전부러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예수님 당시 요한 자신도 그리스도인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그는 분명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의 길에 단지 뒤에 오는 그리스도를 위한 '파견된 자'임을 밝혔습니다. 겸손을 배웁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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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 공헌 대축일 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제1독서 (1요한5,14-21)
"누구든지 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6~17)
요한 1서의 맺음말(5,13~27)도 요한 복음처럼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다시 밝힌다.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집필 목적이었는데(요한20,31), 여기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 집필 목적이라고 말한다(1요한 5,13).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 1,1)
이렇게 머리말이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된 요한 1서의 가르침이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1요한5,20)라는 신앙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오늘 말씀에서 특이한 것은 '죽을죄'(1요한 5,16)에 관한 언급이다.
'누구든지 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죽을죄'와 '죽을죄가 아닌 죄'가 무엇인가?
구약에서는 '살인, 간음, 배교'를 죽을죄<대죄(大罪)=중죄(重罪)=사죄(死罪)>라고 했다.
신약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교회는 하느님의 천주성(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혜인 '생명의 은총'(성화은총=초성은혜=상존성총)을 잃어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죽을죄'(대죄)와 '죽을죄가 아닌 죄'(소죄)로 구분된다.
윤리신학에서나 교리에서는 '대죄'와 '소죄'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 인간은 생각과 말과 행위로 대죄를 짓는다. 대죄가 성립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계명과 지성의 인식 행위와 자유 의지의 동의이다.
우리가 무슨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할 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줄 분명히 지성으로 알면서도 자유 의지로 좋아서 동의할 때 대죄가 성립되고, '생명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의 은총'은 세례성사때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해방)사업의 공로로 주어진 것인데, 대죄를 지음으로 잃게 된다.
오늘 독서에서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생명(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간구(청)하라고 가르친다(1요한 5,1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죄 중에는 죽을죄가 아닌것도 있다?
(1요한5,14-21)
14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 아드님에 대한 확신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죄의 속죄 제물로 주셨기에 그분의 십자가로 하늘의 생명을 받을 것을 믿는 확신이다.
그 하느님의 뜻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기도와 신앙이 되어야한다는 뜻이다.
(요한6,39-40)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기에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네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구원의 진리로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청한다면 들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큰 계명의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의 성령을 우리의보호자로 주셨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 말씀이 너무 어렵다.(오소서 성령이여~)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구하시려 당신의 목숨을 바치려 오셨다.(마르10,45) 그런데 죽을 죄가 아니면 기도하라?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죽을죄가 아니면, 곧 죄가 아직 죽은 죄가 아니면~용서받지 못해 죄가 살아있다면 기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할 필요가 없는 죽을죄란 이미 죄를 용서받아 죄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늘의 생명(성령)을 받아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그러나 십자가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신앙인이라고 왜 죄를 짖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다.
(로마8,10)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히브10,14) 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 성령께서 생명으로 계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영구히 거룩하게 완전하게 되었으니~ 우리에게 죄가 성립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능하신 분의 죽음의 힘, 당신 아드님을 대속으로 내주신 그 사랑의 힘이며 영원히 살아 움직이시는, 일하시는 구원의 새 계약, 법, 말씀이다. 그래서 악마가 죄를 빌미로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늘의 백성, 자녀들이지만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악마의 거짓 유혹을 받는다는 것이다.
20ㄱ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 거짓,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진리를 깨닫게 하실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요한16,13)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요한2,27)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0ㄴ우리는 참되신(진리)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 오늘 말씀의 결론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것들을 믿고 의지 한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골로3,5)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 세상이나, 믿는다는 우리나, 인간 본능인 자신의 뜻을 위해 욕심, 탐욕을 부리며 산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을, 그 모습으로 신앙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구원의 진리로 의탁하지 아노고 자신의 희생, 열심을 더 가치로 여기며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니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아직 자신을 버리지 못한(죽이지 못한) 그 죄의 용서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예전에 묵상했던 탐욕(에페 투미아)을 기억해 보면~
(루가22,15)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 우리 죄인들에게 당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당신의 피(죽음) 로 맺는 구원의 새 계약을 주실 때에 간절히 바랐다- (에페 투미아)탐욕이다. 탐욕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믿는 대상이 잘못된 것이 탐욕, 우상이며 믿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 미신이다.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가 당신으로 충만케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복음(요한3,22~30)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6~27)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 세례자 요한 보다 늦게 등장하였으며,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던 예수님께서 자신의 스승보다 더 인기와 명성이 있게 되자, 이것을 시기하여 예수님을 폄하하는 호칭을 쓰고 있다.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이라는 호칭 속에는 존경의 의미가 보이지 않으며, 동시에 스승님이신 세례자 요한에게 의존하는 자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다.
여기서 '증언하신던'에 해당하는 '메마르튀레카스'(memartyrekas)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과거 행하여진 동작의 영향이 현재에까지 미치는 것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표현은 그들이 예수님을 아직 세례자 요한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에 해당하는 '이데'(ide; behold)는 '보라'라는 뜻으로 '에이돈'(eidon)의 명령형인데, 말하는 사람이 어떤 것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할 때 쓰는 말로서, 이것을 통해 당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인기에 시기와 불안을 느끼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지도자인 세례자 요한이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현실에만 쏠려 있어서, 군중들이 세례자 요한을 외면하고 예수님에게로 몰려드는 것이 세례자 요한에게는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본다.
여기서 '가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에르콘타이'(erchontai)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세례자 요한을 만나고자 찾아오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몰려갔으며, 이런 현상이 계속 진행중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의 말을 빌어서 이제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새롭게 열리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 중심 주의적 신앙과 겸손이 잘 배어있는 구절이다.
그는 자신의 몫과 예수님의 몫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과 이것을 정해 주신 분이 '하늘', 곧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 사이를 마치 경쟁 상대(라이벌)라고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께 대하여 시기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여기서 '아무 것도'로 번역한 '우데 헨'(oude hen; not even one)은 '하나도 ~아니다' 라는 뜻인데, 앞에 나오는 '없다'로 번역된 부사 '우'(ou)를 강조해 준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중 부정을 통해 하늘에서 주어진 것만 사람이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에 해당하는 '에크 투 우라누'(ek tou ouranou; from heaven)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뿐이다(only what is given him from heaven).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사심없는 하느님의 일꾼이며 종이었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신본주의자(神本主義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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