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50,4-7; 필리 2,6-11; 마태 26,14─27.66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 데 이어 수난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축복받은 성지는 지난 주일에 저의 동창 박제준 신부님이 계신 도고 성당에서 나눠주신 건데요, 본당 사목 위원들께서 가서 받아오셨습니다. 댁에 가져가셔서 십자고상 뒤에 걸어놓으시면 되는데요, 구세주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승리에 대한 신앙의 증거로 내년 재의 수요일 전까지 가정에 간직하시면 됩니다.
백성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제자의 배반으로 붙잡히십니다. 배반자는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 넘깁니다. 이는 양 장사꾼들이 주님의 충실한 목자를 은돈 서른 닢이라는 보잘것없는 금액으로 값을 매겼던 즈카르야 예언서(11,12)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수난에 대한 구약의 말씀들을 하나하나 성취하시며 죽음의 길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고발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로마법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자는 유죄로 간주되었기에, 예수님의 침묵은 빌라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모독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이는 사순 제1주일 복음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했던 말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됩니다. 아모스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 나는 모든 사람이 …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아모 8,8-10)
오후 세 시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십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한 시편 22장의 첫 구절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무리가 둘러싸 손과 발을 묶고 당신의 옷을 놓고 제비를 뽑는 등 예수님 수난 때 일어난 많은 일들이 이미 이 시편에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0-31)라고 말씀하셨던 하느님의 아들께서, 차마 아버지라 부르시지도 못하고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 외치신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 절망적인 울음이 메시아의 마지막 말씀이어야만 했을까요?
캐나다의 한 기자가 보육원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보육원과 달리 여기서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보육사의 수가 부족해서 아이들이 울어도 일일이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점차 울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울어도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 넘어진 아이는 즉시 울지 않습니다. 엄마가 달려가서 ‘괜찮냐?’고 물어보면 그제서야 울음을 터뜨립니다. 엄마가 옆에 없으면 울음을 참고 집까지 가서, 엄마를 본 후 울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왜 우는 것일까요? 엄마 들으라고 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우는 것일까요? 누군가 들으라고 우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누군가 들으라고 울었고, 아무도 듣지 않으면 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왜 우는 것일까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왜 혼자서 우는 것일까요?
누군가 내 울음을 듣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분이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 듣고 계시다는 것을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알고 있기에, 그분 들으시라고, 즉 하느님 들으시라고 우는 것입니다.
삶의 여러 고통 중 가장 힘든 고통은 ‘버림받음’의 고통입니다. 특히 한평생 내가 의지해왔던 대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때, 그 고통은 다른 어느 고통과도 비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우리와 하나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고통에 함께하시는 하느님께서 ‘직접’ 겪으실 수 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버림받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이시기에 죽으실 수 없었고,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계시기에 버림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겪기 위해 인간이 되셨고, 죽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당신을 따르던 군중들에게서, 당신의 동족들로부터, 또한 이방인들에게까지 버림받으시고,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에게조차 버림받으심을 느끼시며 돌아가십니다. 우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신 것은, 사람이 되심으로써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함께 겪으심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은 진정 우리와 하나가 되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과 하나가 되십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움 중에 있는 이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 배반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 … 그 외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심연 한 가운데서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되어 외치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예수님의 외침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누군가 이 외침을 듣고 계시다는 것을,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것에 대해 따질 수 있는 누군가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당신의 영을 떠나보내십니다. (200주년 번역) “그 때문에 땅이 뒤흔들리고 온 주민이 통곡하지 않겠느냐?”(아모 8,8)는 아모스 예언자의 말처럼 땅이 흔들리고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자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말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시편 22장의 말씀이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세상 끝이 모두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 민족들의 모든 가문이 그분 앞에 경배하리이다.”
이제 우리는 사순시기를 마무리하는 거룩한 성주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먼발치에서 기념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파스카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성주간, 나는 어떤 버림받음 속에서 주님과 함께하겠습니까?
https://youtu.be/JNIa012mXgo?si=DoV7ZYeaJ4R0eywQ
바흐, 마태오 수난곡 중, 언젠가 제가 떠나야 할 때( Wenn ich einmal soll scheiden)
무리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1650년
출처: Christ on the Cross - Wikid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