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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터전] 청주교구 충주 숲거리 성지
충주 지역 신앙의 증거터
- 순교자 현양비
충주 숲거리는 현재의 문화동과 봉방동 경계에서 조선 시대 군사 훈련 지휘소였던 무학당을 지나 충주천 변까지 이어지던 울창한 숲 지역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숲이 깊어 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이곳 숲거리는 각처에서 체포되어 온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신자들은 이곳으로 압송되어 오면서 갖은 수모를 겪거나 돌팔매를 당했고, 마침내 참수형과 군문 효수 형으로 목숨을 바치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여러 차례 박해를 거치며 충주에서 순교한 이는 120명 이상, 타지역에서 순교한 충주 출신 신자는 35명 이상으로 전해진다.
충주지역 천주교는 남한강 물길을 통해 서울과 경기도 양근(현 양평)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전래되었다. 특히 양근의 안동 권씨인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 집안과 충주의 연안 이씨인 이기연 집안이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이 전파되었다. 권철신의 셋째 동생 권득신의 아들 권상익과 이기연의 딸이 혼인한 것을 계기로 이기연(1739~1802)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과 친척,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충주의 사도’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충주 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지역 신앙공동체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충주 천주교회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이기연을 통해 그의 며느리 권씨, 이부춘, 권아기련, 황조이 등 많은 이들이 입교했고, 다시 그들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이 퍼져 충주 지역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한 그의 조카 이향덕을 중심으로 연풍 지역에도 신앙공동체가 자리 잡았다.
충주지역 박해는 1791년 진산에 살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해 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유교식 장례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 이후 시작되었다. 당시 이기연은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내어놓고 배교를 약속해 석방되었으나, 이후 깊이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과 전교 활동에 힘썼다.
1800년 말부터 박해가 다시 거세졌고, 1801년 1월 10일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천주교도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이 반포되면서 신유박해가 본격화되어 충주 신앙공동체는 큰 시련을 겪었다. 이부춘과 권아기련은 체포되어 1801년 8월 27일 충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이부춘의 아들 이석중도 같은 해 순교하였다. 이기연 역시 유배지에서 다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뒤 1801년 12월 27일, 63세의 나이로 충주 숲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유배되거나 형벌을 받아 공동체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현재 이기연, 이부춘, 권아기련은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 중이다.
- 성지 십자가의 길
레지오 단원들과 신자들의 도보 성지 순례 이어져
청주교구는 2020년 11월 29일 숲거리를 순교성지로 선포하였으며, 2023년 11월에는 순교자 현양비 및 십자가의 길 축복식이 있었다.
성지 터가 마련되면서부터 충주 평화의 모후 꼬미씨움(단장 김창모 라파엘, 지도신부 석근웅 사도요한) 레지오 단원들은 신자들과 함께 도보 성지 순례를 하여 지금의 성지가 완성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며, 현재도 충주지역 신자들이 도보 성지 순례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성지 활성화를 위하여 2025년 3월 22일 교현동성당 이경호 베드로 신부가 집전한 성지 미사를 시작으로, 5월 17일에는 지현동성당 김남오 알로이시오 신부가, 9월 20일에는 연수동성당 이제현 요한금구 신부, 11월 15일 안림동성당 김영선 디모테오 신부 집전으로 4회에 걸친 성지 미사에 많은 레지오 단원들과 신자들이 참례해 순교 선조들의 신앙을 기렸다.
- 성지 미사(좌) 도보 성지 순례(우)
◇ 청주교구 충주 숲거리 순교성지
- 충북 충주시 국권대로 10
- 성지 순례 코스 : 충주목 동헌(충주 관아공원) ~ 진영터(구 충주 세무서) ~ 충주옥 순교터(중앙 현대타운 앞) ~ 숲거리 순교 성지 ~ 무학당 유허비(봉방천 다리 지역) ~ 충주목 동헌(충주 관아공원)
- 성지안내 : 김성래 실베스테르 010-7740-3433
[상징 속 성인 읽기] 성인의 삶과 상징 (6)
목을 관통한 칼: 밀라노의 성 아퀼리노
밀라노의 성 아퀼리노는 10세기 후반에 독일의 남부인 바이에른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쾰른에서 신학을 공부한 다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쾰른 교구의 동료 참사원들이 주교로 추천하자 이를 거절하고 선교 사제이자 순회 설교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쾰른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갔는데,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콜레라에 걸린 사람들을 낫게 해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파리에서도 성인에게 주교직을 제안했다. 이에 성인은 쾰른에서와 같은 이유로 파리를 떠났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의 파비아로 갔다.
얼마 뒤 성인은 밀라노로 옮겨가 그곳의 성 라우렌시오 성당에서 지냈다. 당시 이 도시에는 이단인 마니교를 따르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주교직을 마다하면서까지 선택한 순회 설교자로서 카타리파, 아리우스파, 마니교 등의 이단에 반대하고 맞서기를 서슴지 않던 성인은 밀라노에서도 마니교 추종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밀라노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러다가 동료와 함께 마니교 이단을 따르는 사람이 휘두른 칼에 찔려서 순교했다. 성인의 시신은 어느 배수로에 버려졌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성 라우렌시오 성당에 부속된 소성당, 곧 성 아퀼리노 경당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성인의 활동 시기와 순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설이 전해 온다. 하나는 975년경에 태어나서 1015년에 순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50년경에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싸우다가 순교했다는 것이다.
성인을 나타내는 상징은 성인의 죽음과 연관된 칼이고,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는 성인을 칼에 목이 관통된 모습으로 묘사한다. ‘쾰른의 성 아퀼리노’라고도 불리는 성인은 오늘날까지도 밀라노, 쾰른, 뷔르츠부르크에서 공경받는다. 특히 밀라노 지역의 호텔에서 일하는 관리인(또는 짐꾼)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손으로 받쳐 든 책: 성 베다 존자
성 베다 존자는 7세기 말 영국에서 태어나 7,8살 무렵에 친척들에 의해 수도원으로 보내져 교육받았고, 성장한 뒤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으며, 19세에 부제품을, 30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성인은 학문 연구를 위해 잠시 다른 지역들에서 체류하거나 로마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영국의 수도원에서 지내며 성경 연구, 저술 활동, 그리고 교육에 전념했다.
평생을 수도원에서 지냈으면서도, 성인은 생전에 이미 유럽 전역(당시로서는 전 세계)에 알려진 유명 인사자 당대 최고의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성인은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살았지만 라틴어를 익혀서 성경을 주석하며 그 영성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거기에 담긴 의미들을 라틴어를 모르는 평신도들도 큰 어려움 없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선대 교부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인용해 가며 성경을 풀이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인 성경 주해서들은 유럽 일대에서 가장 권위 있고 중요한 저서로 인정되었다.
그뿐 아니라, 성인은 교회의 전례와 의식에서 쓰이는 찬미가들과 시들도 썼고, 서한집, 강론집, 순교록, 전기 등 다양한 저서들을 남겼다. 또한 교황청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부활 대축일을 독자적으로 다른 시기에 지내던 켈트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같은 시기에 기념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자 서방 교회의 전통에 따른 부활절 날짜 계산 방식을 다룬 저서도 출간했다.
나아가 다섯 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영국 교회사」를 썼는데, 이는 교회의 역사서로서뿐 아니라 일반 역사서로서도 영국 최초의 저술이었다. 이 책은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까지 알려지고 읽히며 성인에게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말년에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요한 복음서를 영어로 번역해서 라틴어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성인은 교회 영역의 저술 외에 세속의 일반 학문에도 관심과 조예가 크고 깊어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책을 라틴어로, 그리고 영어로 집필했다. 음악과 운율학, 자연 과학에 관한 책도, 문법과 작시법, 역사 기록학, 연대기에 관한 책도 썼다. 이렇듯 다양한 부문에 걸친 저작물들은 성인이 당대의 지식을 두루 섭렵했음을 보여준다.
성인은 735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생을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자였다. 8살 무렵부터 오로지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평생을 연구와 저술에 투신한 생애였다. 그럼에도 뛰어난 학문적 업적은 성인의 명성을 좁은 삶의 영역인 수도원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했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은 성인의 크고 높은 지혜와 학문을 인정하여 이름 뒤에 ‘존자(尊者, the venerable)’라는 경칭(敬稱)을 붙여서 일컫기에 이르렀다. 이 호칭은 853년 아헨 교회 회의에서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1899년에는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러했기에 성인의 이름이 중세기에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인 성 암브로시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과 세비야의 성 이시도로 다음으로 많이 인용되었고, 단테의 「신곡」 ‘천국’ 편에 영국인으로 유일하게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성 베다 존자는 영국의 작가와 역사가, 성인의 주된 거처이던 영국 타인 위어주의 재로우시, 성인의 이름을 딴 대학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그리고 교회 미술에서는 성인을 평생에 걸쳐 점철된 연구와 저술 활동을 나타내는 책(구체적으로는 ‘영국 교회사’) 또는 깃털 펜을 손에 든 수도승으로 묘사한다.
[세계의 성모 성지] 스페인 몬세라트(성모상 성지)
몬세라트 검은 성모
- 미카엘 언덕에서 바라본 성지 전경
1) 성모상의 역사
- 몬세라트 왕좌실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는 로마로 건너가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 과정에서 잠시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 루카가 조각한 성모상을 스페인 신자들에게 주었으며, 성모상은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711년 이슬람을 믿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족이 이베리아반도로 침입하였고, 718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이슬람 국가를 세웠다. 신자들은 성모상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카탈루냐 지방의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몬세라트산의 동굴에 성모상을 숨겨 놓았다. 이후 카탈루냐는 801년 프랑크왕국의 도움으로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880년 몬세라트산 기슭에서 어린 목동들은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강렬한 빛이 내려오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 뒤 목동들은 사제와 함께 같은 장소를 찾아갔고, 역시 동일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주교는 즉시 조사단을 몬세라트산으로 보냈고, 그들은 한 동굴에서 성모상을 발견하였다. 주교는 성모상을 만레사로 옮기라고 지시했으나 성모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교는 이를 성모님께서 그곳에 머무르기를 원하신다는 표징으로 받아들이고 동굴에 성모상을 모실 경당을 건립하였다. 신자들은 성모상 발견을 이슬람의 박해로 감추어졌던 신앙이 성모님의 인도로 다시 세상에 드러난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1025년 주교는 성모상을 잘 모시기 위해 몬세라트산에 베네딕토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성모상은 수도원 성당으로 모셔졌고, 몬세라트는 수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는 성모 성지가 되었다.
현재 성지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은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 위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성모님은 왼손을 예수의 어깨에 얹어 전능하신 메시아가 자신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지름 약 10cm의 구체를 들고 있다. 이 구체는 온 세상, 곧 지구 또는 우주를 상징한다. 아기 예수는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왼손에는 다산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파인애플을 들고 있다. 좌상의 형태를 지닌 몬세라트 성모상은 높이 95cm, 폭 35cm로 다른 오래된 성모상들과 비교할 때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이런 규모로 인해 베드로 사도가 실제로 이처럼 큰 목조 좌상을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스페인에 전달했는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 신성한 동굴 경당, 최초의 성모상이 발견되었다고 여겨지는 동굴에 세워진 경당(좌), 동굴 경당의 중앙제단(우)
19세기 중반 이후 성모상 옷의 주름, 얼굴 표현 등 조형적 특징을 분석한 연구에서, 성모상이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과 유사하다는 견해가 나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보다 정밀한 비교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목재의 종류, 얼굴과 손, 의복의 조각 양식, 좌정한 형태, 왕좌의 구조 등 모든 요소가 12세기 말의 카탈루냐 로마네스크 조각 양식과 일치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또한 2001년에는 X선 조사, 표면층 및 채색층 분석, 목재 상태 조사를 통해 성모상은 1세기 작품이 아니라 12세기 후반에 조각된 작품이라는 점이 학계에서 거의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성모상의 보존을 위하여 베네딕토 수도원까지 건립되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전승으로 내려오는 초기 성모상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다만 그 성모상은 현재의 성모상처럼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목조 조각이라는 특성상 오랜 세월 동안 심하게 손상되었거나 전쟁과 약탈의 과정에서 훼손되거나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말에 새로 조각된 성모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촛불과 등잔의 그을음이 쌓이고, 목조 표면에 칠해진 투명 바니시(Varnish)가 산화되어 점차 흑갈색으로 변하였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검은 성모상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까무잡잡한 분’이라는 뜻의 애칭으로 라 모레네타(La Moreneta)라고 부르게 되었다. 1492년 스페인이 그라나다를 함락하고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통치를 종식시키자, 몬세라트는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스페인의 왕과 왕비, 귀족, 장군들이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몬세라트를 순례하였고, 몬세라트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모 성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대성당의 정면(좌), 대성당의 내부, 제단 뒤쪽에 성모상이 보인다(밝은 곳)
2) 몬세라트 성모 성지
성지는 대성당, 성모 마리아 경당, 회랑, 박물관,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와 식당, 그리고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당은 16세기에 건립되었으며 중앙제단 뒤쪽 상단에 성모상을 모시기 위해 ‘성모 마리아 왕좌실(Throne Room of Virgin Mary)’이라 불리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순례자들은 계단을 통해 이 왕좌실로 들어갈 수 있으며, 성모님께서 들고 계신 구체만을 직접 만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성당은 반도전쟁(1808~1814년) 당시 파괴되었으나, 19세기 말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좌실에서 내려오면 대성당의 후진에 해당하는 공간에 성모 마리아 경당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성모상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1812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으로 몬세라토 수도원은 약탈과 화재를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성물과 보물을 잃었다. 이후 1835년 수도원은 전면 폐쇄되었다가 1844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880년 몬세라트 성모상 발견 10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이듬해인 1881년 9월 11일 교황 레오 13세는 카탈루냐 지방의 고유한 가톨릭 신앙을 존중하여 몬세라트의 성모님을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고, 4월 27일을 몬세라트 성모의 축일로 정하였다. 이후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은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체제하에서 카탈루냐 정체성과 언어가 억압되면서 공식적으로 거행하지 못했던 몬세라트 수호 성모 선포 60주년 미사가 1947년 4월 27일, 약 10만 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봉헌되었다. 이 미사는 스페인 정부의 언어 정책에 대한 거부 의사를 담아 공개적으로 카탈루냐어로 진행되었다. 2025년에는 몬세라트 수도원 건립 10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가 거행되었다.
- 성모 마리아 경당(좌), 매일 1시에 열리는 ‘몬세라트 소년 합창단 에스콜라니아’의 연주
3)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을 방문한 교황과 유명 인사
아비뇽 유수 시기의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3세를 비롯하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돈키호테’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독일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흄볼트,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스페인 국왕 펠리프 2세, 그리고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역시 몬세라트를 방문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콜럼버스는 1493년 제2차 항해 도중 카리브해에서 발견한 한 섬에 몬세라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몬세라트 성모님에 대한 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81) 스위스 작셀른 순례 성당과 플뤼엘리-란프트
공동체 화해로 이끈 ‘은수자 성인’ 삶 간직한 평화의 순례지
- 자르넨 호숫가의 작셀른 순례 성당. 성 테오둘에게 봉헌된 마을 본당이자 성 니콜라오 데 플뤼에의 유해를 모신 스위스 대표 순례지. 순례자가 늘자 마을 공동체가 1672~1684년 지금의 성당을 새롭게 세워 성인의 유해를 옮겨 모셨다. 성당 밖 옛 종탑의 성인이 처음 묻혔던 장소에 무덤 소성당이 있다.
스위스는 중립국의 대명사로 꼽힙니다. 적대하는 국가들이 마주 앉는 회담의 무대, 국제기구가 자리한 호숫가 평화의 공간. 그러나 중립국은 원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정학적 이점뿐 아니라, 외부 압력 앞에서 버틸 내부 결속력과 자제력이 있어야 합니다.하지만 중세 스위스는 오늘날처럼 중앙 정부를 갖춘 단단한 연방이 아니었습니다. 도시와 농촌 공동체로 결성된 느슨한 동맹체였고, 내부 갈등으로 연방 자체가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열의 위기를 넘어 유럽의 강자로 부상하게 된 과정에는 한 평신도 은수자의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순례지는 스위스의 일치와 평화를 이끈 성인의 발자취가 이어지는 곳입니다. 스위스 산티아고 길이 지나는 곳으로 해마다 10만 명이 넘는 이가 찾아오는 순례지입니다.
- 작셀른 순례 성당의 주 제대와 본랑. 초기 바로크 양식 홀 성당으로 많은 순례자를 수용하기 위한 공간을 구성했다. 2층 회랑과 반복되는 아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로지아가 떠오르게 한다. 주 제대 중앙의 성모 승천화는 1881년 파울 폰 데슈반덴과 게오르크 카이저의 작품이다. 1976년에 제작된 중앙의 독립 제대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중세 스위스 분열 막은 은수자의 조언
루체른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르면, 저 멀리 창밖으로 필라투스 산과 목초지가 잠시 펼쳐지다가 곧 자르넨 호숫가 마을 작셀른에 도착합니다. 마을 한가운데, 검은 양파 모양의 지붕을 한 소박한 순례 성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순례 성당은 흰 벽면과 검은 석회암 기둥이 만드는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독일 남부 바로크 성당처럼 화려한 공간은 아니지만, 본랑과 측랑, 이층 회랑으로 이뤄져 성당 안에 또 하나의 성당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성당 중앙에는 성 니콜라오 데 플뤼에의 성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클라우스 형제’라 불리는 성인입니다.
클라우스 형제의 이름이 스위스 역사에 등장한 건 1481년 12월, 스위스 슈탄스 회의였습니다. 당시 구 스위스 연방은 부르고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였습니다. 그러나 전리품과 영토, 프리부르와 졸로투른의 연방 가입 문제를 두고 취리히·베른·루체른 같은 도시 칸톤과 우리·슈비츠·운터발덴 같은 농촌 칸톤이 크게 충돌했습니다.
회의가 파행을 거듭하자, 한 사제가 란프트 계곡의 은수자 클라우스 형제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사제가 회의장에 전한 메시지가 정확한 문장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이를 계기로 스위스 역사상 가장 극적 반전인 ‘슈탄스 협약(1481)’을 타결하며 평화를 맞이합니다.
- 클라우스 형제의 은수처와 소성당들. 오른쪽의 흰 건물(위 란프트 소성당) 옆의 오두막이 클라우스 형제가 1467년부터 20년 동안 살았던 은수처이다. 이 자리는 16세 때 체험한 환시에서 본 탑이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왼쪽 아래 개울 가까이에 보이는 흰 건물은 순례자가 늘어나자 1501년에 세운 아래 란프트 소성당으로 2020년 12월부터 베들레헴 주님 탄생 성당에서
전해진 평화의 빛이 연중 타오르고 있다.
평범한 농부 가장에서 성덕 이룬 은수자로
성인이 살았던 플뤼엘리-란프트는 작셀른에서 버스로 10여 분 오르면 닿는 산골 마을입니다. 정류장에 내리면 언덕 위의 플뤼엘리 소성당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성인의 고향이 순례지로 자리 잡은 뒤 세워진 마을 성당으로 주변에 성인의 생가와 가족 주택, 은수처가 있습니다.
은수자에게 가족이? 클라우스 형제는 처음부터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로테아 비스와 혼인해 다섯 아들과 다섯 딸을 둔 농부였고, 지역 공동체의 신망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50세가 되던 1467년 10월, 가족의 동의를 얻어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길 위에서 환시를 체험하고 돌아와서는 집 근처 계곡에서 20년간 성체 외에는 금식하며 은수 생활을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절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민부터 외국 사절까지 찾아와 그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으면서도 공동체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가 성인으로 공경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과 노동, 지역 공동체를 살아낸 50년의 삶과 은수자로 산 20년의 삶과 성체 신심이 함께 그의 성덕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세상과 새롭게 관계 맺는 법을 보여 준 평신도 은수자였던 겁니다.
- 플뤼엘리 성 가를로 보르메오 소성당. 순례자가 늘어나면서 17세기 초 바위 언덕 위에 새로 세운 성당이다. 작셀른 순례 성당, 성인 박물관, 플뤼엘리의 성인 생가와 니콜라우스·도로테아 가족 주택, 란프트 은수처로 이어지는 도보 순례길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전쟁 위협에서 국민들이 전구 청한 성인
가족 주택 뒤편의 가파른 골짜기로 10여 분 내려가면 흰 소성당과 갈색 목조 은수처가 나타납니다. 계곡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마련해준 은수처와 소성당입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1501년에 지은 또 다른 소성당이 나옵니다. 내부 벽화에는 성인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려져 있고, 성인의 전구로 스위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대형 봉헌화도 보입니다. 전쟁 직전, 나치 독일의 위협에서 스위스 국민은 다시 성인의 전구를 청했는데, 많은 이가 란프트 계곡 위로 스위스를 보호하는 영적 구름을 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선종 직후부터 성인처럼 공경받았지만, 정식 시성은 194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때, 스위스는 평화와 절제의 성인이자 나라를 구한 국부를 공식으로 모시게 된 겁니다.
하느님 향하며 세상에 열린 두 개의 창
스위스는 오래도록 클라우스 형제의 평화 메시지를 기억해 왔습니다. 울타리를 너무 넓히지 말고, 남의 싸움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며, 공동체의 평화를 잃지 말 것. 그의 평화는 갈등을 피하는 침묵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고,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세우는 적극적인 절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종교의 벽을 넘어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습니다.
은수처에는 두 창이 나 있습니다. 하나는 제대, 곧 하느님을 향해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 길,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오는 이들을 향해 나 있습니다. 그의 은수는 세상을 단순히 등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하느님 앞에서 세상과 새롭게 관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은수처의 좁은 창 앞에서 우리 삶에도 그런 두 방향의 열림이 있는지 묵상해 봅니다.
<순례 팁>
※ 루체른에서 작셀른까지 기차 이동(약 20분), 작셀른에서 플뤼엘리-란프트까지 버스 351번 이용(약 15분).
※ 작셀른 순례 성당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0:15, 평일 09:15, 11:00(목), 18:00 (수) / 플뤼엘리 소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소성당에서도 미사가 있다.
[수원교구 하느님의 종 47위] 두메꽃, 하느님의 종 유한숙(?-1801)
머릿수건을 쓴 한 무리의 여인들이 제가 사는 성지에 순례를 왔습니다. 나이도 모습도 각양각색이지만 수도복을 입은 여인들은 한결같이 소녀 같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시 「두메꽃」에 나오는 ‘외딸고 높은 산골 짜구니,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숨어 핀 꽃’을 만난 기분입니다. 그 꽃은 ‘해님만, 주님만 보시는 꽃’인데, 제가 몰래 숨어 보다 들킨 마음입니다. 저는 수녀님들이 좋습니다.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들을 보면 사랑스럽다가도 마음이 아리고 고맙다가도 애틋합니다. 주님께서는 어찌 이런 천사들을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수녀님들은 제게 순진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수도자도 질투하고 화내고 욕심부린다고요. 그래도 저는 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수도자는 우리 대신 주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온 존재와 삶을 주님께 드리는 숭고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날마다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덕을 살아내며,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주님의 가르침 가까이에 서 있습니다. 관상수도원 안에서 바치는 기도는 담벼락을 넘어 세상 끝까지 가 닿고 소명의 자리에서 이루는 활동은 온전히 주님의 영광을 향합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하느님의 종 유한숙은 경기도 양근 동막골(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출신의 양반이었습니다. 박해자들의 기록인 「사학징의」는 유한숙이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어서 세속 사람의 도리를 폐하고 끊어 버렸으며, 형벌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마음으로 달갑게 여기니, 죽음에 이르고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라고 전합니다. 유한숙은 어느 날 외척이었던 광주 이씨 집안의 이 아가타가 주님을 위해 삶을 바치려는 마음에 불타 동정 생활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혼기가 찬 처녀가 동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대부 집안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봉헌 생활의 의미를 알고 있던 유한숙은 이 아가타를 한양의 동정녀 공동체 회장이었던 같은 양근 출신 복자 윤정혜 아가타에게 데려다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에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이미 봉헌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었고, 또 그 길을 지켜 준 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수도 성소가 줄어든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길은 본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이들은 적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덕이 인간을 완덕으로 이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세속의 가치를 좇을 때도, 주님을 위해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사람들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 유한숙은 초기 교회에 싹튼 ‘두메꽃’ 같은 봉헌의 마음을 알아보고, 그 꽃이 꺾이지 않도록 곁에서 지켜 준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수도자들의 삶이 지치지 않도록 기도와 존중, 그리고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종 유한숙
이 땅의 수도자들을 지켜 주시고,
복음삼덕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시며,
저희 공동체 안에
성소의 새싹이 돋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