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인 모임에서는 정치적인 얘기와 더불어 대통령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대선 주자들이 어떻고, 누가 비자금을 어떻게 모았고 시사와 사건 등이 화제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모이는 모임에는 사람들이 그런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보다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 본당에서 돌아가는 일이나 전례나 복음묵상 등에 대하여 주로 얘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이슈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생기면 은근히 아주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분위기가 괜찮다 싶으면 곧 그 쪽으로 급선회를 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재속회(3회)에 참석해 보면, 형제들의 나눔과 대화 주제는 물론 ‘성인의 삶을 배우고, 성인의 삶을 따라서 살자.’는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따라 하기’였습니다. 그렇게 성인의 삶을 흉내 내고, 따라서 살다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성을 키우고, 우리도 성인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주제는 자연히 무거웠고 성인의 삶을 많이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의 결론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성인의 삶 중에서 무얼 따라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급기야 사부님의 무엇을 닮아야 할 것인가? 그래서 아주 철저하게 예수님을 닮고자 하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어떤 삶을 따라 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인의 겸손과 가난한 삶, 성인의 나눔, 공동체의 삶, 작아짐, 순교정신, 교회 재건의 소명의식, 철저한 희생정신과 육체의 고통의 수용, 극기, 비천함의 수용, 천지만물의 사랑, 자연 사랑 등등 너무도 많은 것을 어떻게 따라할 것인가 얘기를 나누며 늦은 시간까지 무겁고 진지한 얘기는 이어졌는데, 솔직히 나는 너무 신앙적인 분위기를 싫어한답니다. 이유는 솔직히 그렇게 살지도 못하고 살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 그런 기분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지다가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복음묵상을 하고, 신앙 강의와 교리도 하고, 성경공부도 인도하니까 나를 ‘거룩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 자리가 꺼려지게 됩니다. 그것이 악마의 유혹인지, 내 교만인지, 편견 속에 빠져 있는지 그런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답니다.
나는 거룩한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아주 세속적이고, 아주 천박한 사람이랍니다. 다만 놀아보지 않아서 놀 줄 모르고,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공부에 빠져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려 거룩한 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천할 줄 모르고 말은 그럴 듯하게 하는 언제나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입니다.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욕구를 접고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랍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내 진실을 숨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부끄러워지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 부끄러운 때가 점점 많아진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부끄러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시고 벗어나기 위해서 순간순간 용기를 내시어 실천으로 옮기신 분이었는데 그 것이 그분과 나의 근본적인 차이랍니다. 성인은 매 순간 용기를 내시어 그 부끄러움을 드러내신 분이고, 나는 그 부끄러움을 숨기고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랍니다. 아무리 내가 모든 것을 고백하고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여도 성인을 따라할 수 없는 것이 그 분의 용기랍니다. 그리고 성인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매순간 노력하셨고, 주님을 닮기 위해서 아주 작은 것도 실천으로 옮기신 분이었다는 것이 나와 그분을 하늘과 땅 사이로 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눈을 비집어 뜨고 쳐다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답니다. 썩지 않고 말라비틀어진 겨자씨가 있어도 백년이나 천년이 지난 다음에도 땅에 묻고 물을 주면 싹을 틔웁니다. 생명이 천년을 살아 있어서 새가 깃들일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누룩도 마찬가지로 다 썩어 죽어버린 듯 보이는 종균이 살아서 밀가루 반죽이 부풀려 커지게 합니다. 그 속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겨자씨는 싹을 틔울 수 없으며, 생명이 없는 누룩은 오히려 밀가루 반죽을 냄새나게 할 것입니다.
교만과 편견과 아집은 살아있는 생명도 죽게 만듭니다. 자랑하는 거짓이나 위선은 생명이 없는 것이랍니다. 무생물일지라도 그 안에 살아있는 원소가 있고, 제 궤도를 돌고 있는 전자가 있고, 파장이 살아있답니다. 그 것은 그 본질을 조금도 숨김없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턱으로 점점 다가가는 것은 바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품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과 아집과 편견으로 그 생명을 숨 쉬지 못하게 하고, 썩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숨 쉬지 못하게 하고, 썩게 하는 모든 것을 조금씩 없애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 하겠습니다. 정말 용기를 내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