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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운전해서 이동하다가 교차로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진행방향의 신호등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차량사고가 발생되지 않을 것이고 보행자들도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차량운전자는 그 차선에 정해진 신호등을 잘 보면서 운전하며 정해진 신호등이 초록불이면 진행하고 빨간등이면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운전하고 가는데 앞의 차가 신호등에 초록불이 점등되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자세히 보았더니 그 차량 앞쪽 횡단보도에 어느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며 지나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파지를 모아서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시는 듯 그 리어카에는 산더미만한 파지가 모여 있었꼬 그 할머니는 그 많은 파지를 담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횡단보도룰 지나가는 중이었습니다. 진행신호를 받은 차량들은 앞의 상황을 모르기에 뒤에서 클락션을 빵빵대며 난리가 났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통법규상 진행신호를 받은 차가 가야하니 교통법규를 어기며 횡단보도를 지나고 있는 그 어르신과 리어카를 치며 차량이 지나가야 할까요? 그럴 수 없겠죠? 그 어떤 차량도 어르신이나 그 어르신의 리어카를 치고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법과 원칙을 따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바로 긍휼과 은혜를 베풀며 너그럽게 기다려 줘야 할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법대로만 해서는 안되는 일이 현실에도 분명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 또한, 법과 원칙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 사랑의 관점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사역과 그 사역에 대해 ‘안식일에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고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와 참된 사랑을 이야기하실 때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분개하면서 옛님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할 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참된 주님의 사역, 참된 하나님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도 참 하나님의 관점으로 일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일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 첫째로 살리는 생각과 일을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1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지난 주 본문 마태복음 12장 6절에서 13절까지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시며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행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격적인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었으니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예수님에게 트집잡으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치는 것이 중요할텐데 그들은 고쳐도 트집, 고치지 않아도 트집을 잡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않았으면 능력을 행치 못하니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선지자도 아니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니 이젠 ‘왜 안식일에 이 같은 일을 행하느냐’라며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데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며 무슨 선지자냐고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결국 고쳐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고 못 고쳐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닌 것이니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를 만들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게 참 사랑이고 그게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유대인 어느 부자집에 한 사람이 굶어 죽을 것 같아 구걸하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가 뭐라고 했을까요? “야, 너 왜 하필 안식일에 구걸하러 온 거야? 내일 오면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줄테니 돌아갔다 내일 다시 와.” 그런데 그 배고픈 사람은 당장 오늘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부자가 “오늘은 안식일이라서 먹을 것을 못 주니 내일 와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굶어 죽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과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본 생각이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일단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17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장 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을 따라 항상 살리는 일에 대해 의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이려는 의논에 분분하며 어떻게든 죽일 명분을 찾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지난 주 본 말씀속에서도 분명 아픈 사람이 회당을 찾아와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데 지도자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비난하고 치유에 대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 또한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영혼을 죽이는 모습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이혼하려던 부부가 교회를 찾아와 관계회복을 해보려고 신앙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출석하는 어떤 분은 ‘왜 이혼을 하든지 말든지 본인들 일인데 왜 굳이 교회가 부부 문제까지 신경쓰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며 힘들어하는 자녀가 교회에 와서는 친구들과 잘 지내고 교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데 그 부모라는 사람이 ‘학창시절 제일 중요한 것은 어느 대학을 가느냐? 인데 왜 교회에서 진학을 책임절 것도 아니면서 붙잡아 두냐?’고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제가 20여년 전 전도사, 강도사 때 직접 경험했던 일이니 아마 지금은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생명의 일, 구원의 일에는 관심이 없을 때 이런 삶은 내 욕심만 채우려는 것은 나는 살고 예수님은 죽이는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니 결국 예수와 십자가까지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는 구원에 관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힘든 사람이 오면 손을 내밀라 하며 도와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사람을 살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죽이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 본문을 보니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라며 살인을 대소롭지 않게 생각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고 주님으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은 사람들을 죽일 의논이 아닌 살리는 의논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14절을 보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이라는 이 말씀은 인간의 완악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3장 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헤롯당과 손을 잡았다’고 마가복음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이상한 지 아십니까? 원래 바리새파와 헤롯당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적으로도 안 맞고 종교적으로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요즘 세상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등 수 많은 종교들이 서로 궁극적으로는 추구하는 것이 똑같다고 말하면서 손잡고 무슨 종교활동을 같이 하는 것과 같은 이상한 모양새와 같습니다. 이렇게 너무나 색깔이 다른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예수님이 없어져야 자신들이 인정받을 수 있을것이라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그냥 죽여야 자신들이 살 것 같으니까 그들이 배워왔던 종교도, 그들이 믿었던 신도 아무 필요 없습니다. 설교도 성경공부도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나 헤롯당에게나 자신들에게 좋은 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하나가 되어 죽일 궁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나 성경공부등을 하면서 내가 틀린 사실을 깨달으면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어떤 선생님이 나에게 나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우리는 빨리 나의 실수, 나의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오히려 그들은 참된 가르침을 주시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할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안식도 없고 평안도 없고 자유도 없어.”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들의 전통이라는 것, 너희들이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이다” 말씀하시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너희들은 지금 성령을 따라 살고 있지 않기에 너희들 인생에는 안식도 없고 평안도 없고, 긍휼도 없는거야.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복음고 설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설교를 통해 우리 죄를 깨닫고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게 바로 설교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설교를 듣고 찔려서 변화되려는 사람은 성령이 살아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왜 나를 그렇게 공격해?’ ‘나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비판하는거 아냐?’라며 말씀을 듣고 있다면, 그래서 저런 설교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 어떻게든 저 목사를 내쫓아야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영이 사람입니다. 사탄마귀에 잡혀 사는 멸망의 영혼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영혼이 살아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구원받은 백성은 또한 항상 살리는 사역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살아나는 교회, 어떻게든 살아나는 영혼을 기대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죽이려는 사역, 죽이려는 활동을 추구하며 살아가며 죽음의 길로 갔지만 참 하나님의 백성은 살리려는 사역, 살리려는 일들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을 살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일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 둘째로 때를 분별하며 일합니다.
마태복음 12장 15,16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방금 읽은 본문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당같은 무리들이 몰래 의논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분명 그 때가 되면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죽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그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떠나가셨습니다. 더 큰 구원의 일 때문에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를 피해 떠나셨지만 그들을 피해 숨어 지내신 것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 두려워 떠나셨으면 그런 무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신 다음부터 조용히 숨어지내시는 것이 맞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5절을 계속 보시면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을 떠나서 여전히 예수님께서 말씀과 치유사역을 행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며 병자가 있으면 병자를 고쳐주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말씀과 치유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리들의 문제를 다 치유하고 해결해 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나타내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1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자기를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병고침의 역사를 행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직접 보여주시더니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도대체 이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복음의 내용이 이런 기적으로 한정되는 것을 막으시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사명은 십자가를 지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잊지 않으시고 그 때를 기다리며 공생애 기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유명해지는 것은 전혀 관심없으십니다. 유명해지는 것이 목적이면 어떻게든 소문을 내라고 하셨겠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려하신 것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기적을 강조해서 순수한 복음의 내용을 가리게 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제는 나타내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그냥 묵묵히 기다리라”고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숨을 때와 나타날 때를 잘 분별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무조건 전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잠잠히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의지, 내 생각으로 막무가내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인정받고 싶고 나타내고 싶고 드러나는 사역을 하고 싶은 그 마음을 숨기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낮아져서 묵묵히 기도하며 참고 인내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도 논쟁이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며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을 떠났습니다. 우리 인간적 관점에서 우리 기준으로 해석해 보자면 자칫 혈기와 분노에 매여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우리들의 심성을 볼 때 때를 기다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 때까지 기다리며 실력, 인격, 영성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우리를 자랑하고 우리의 열정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항상 내 생각대로 행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사를 주장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양, 그것이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인 양 착각했고 결국 그런 제사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그런 결정이 저와 여러분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일을 잘 하는 것,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모두 주님의 일이라는 관점에서는 맞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에 맞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때를 기다릴 줄 알고 하나님의 때를 잘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일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 셋째로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7,18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17절부터 21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런 사역을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언된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방금 읽은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 42장에 있는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택함받은 자들의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을 다시 마태복음에 인용하면서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속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며 심판의 주인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성령과 함께 하셔서 이 땅에 심판을 미리 알려주시며 심판을 행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며 이방인이 예수님의 심판을 알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나타내시느냐라는 것이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구약시대나 현대까지도 유대인들의 신념속에는 오실 메시아가 투쟁하며 혁명하는 정치개혁자인줄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이 땅에 오셔서 민족을 해방하고 국가를 독립하며 전 세계에 이스라엘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분은 절대 혁명가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치인으로 이 땅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심판을 알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않고 어느 길에서 그 소리를 듣도록 하지 않으신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혈기와 폭력으로 일하시지 않으셨고 오직 온유와 겸손으로 일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지도 않으셨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20,21절을 보시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사람들이 바라며 기대했던 방식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들의 이상을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싸워주는 그런 메시아였습니다. 투쟁가, 선동가, 정치가, 혁명가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사람들과 같이 지내며 영적으로 죽은 백성, 세상에서 찌들려 살아가는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우리는 항상 싸우고 소리지르고 강한 행동을 하며 승리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게 사역하시지 않고 성령과 더불어 사역하시면서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지만 결국 이기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라는 말의 원뜻은 “내 속에서 승리를 향하여 심판을 내던질 때까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갈대’라는 것은 연약한 인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조금만 쎈 시련이 찾아와도 꺾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갈대’라는 것에 비유하며 우리의 인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상한 갈대’입니다. 이는 연약할 뿐 아니라 상하여 스스로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등불’은 인생의 생명을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꺼져가는 심지’는 생명을 다해 죽음, 심판의 자리에 직면한 소망없는 인생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생은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존재인 우리를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심판가운데 이기는 역사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란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은혜속에서 살아간다면 결국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학생운동노래 일명 민중가요의 대표적 노래중 하나의 가사에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가사는 인간의 투쟁을 미화하며 결집력을 키우기 위한 선동적 노랫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은 혁명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기는 것은 우리의 마인드컨트롤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김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 분만 믿으며 살아갈 때 우리는 승리의 길,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평안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승리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때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면 안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항상 “나의 주님이 누구신가” “나를 구원한 주님이 누구신가” “나는 무엇을 원동력으로 일을 하고 나는 무엇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는가”이런 질문을 하며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성령님의 힘주심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원동력은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일들을 바르게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고백하며 일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정말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내가 하는 모든 일들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고백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이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참 바른 인생, 참 믿음의 인생, 정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항상 나를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살린다는 말은 영혼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항상 어떤 삶이 참된 구원을 보여주는 것인지 항상 고민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신앙인은 자신의 혈기와 자신의 노력을 가지고 결단과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고민하며 기다리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적극적이고 재빠른 삶이 신앙인의 삶이 아닌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때를 발견하여 그 때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역사, 우리 주님의 영광을 기대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참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번 한 주간도 이런 가치관을 제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만 하며 하나님의 때에 맞춰서 일을 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영혼구원의 삶이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에 많이 열매맺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