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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조리 ~~~
사세요 ~ 복조리요 ~~~ " 섣달 그믐날 자정을 넘기면 복조리를 사라는 구슬프고도 애절한 소리도 매서운 밤하늘을 흔든다. " 메~밀~묵 사 아 려 ~ 찹 싸아알 떠 어 억~~~"메밀묵 장사도, " 아지 사세요~ 생선 아지요 ~꽁치도 있어요 고등어도 있고요 ~~~" 등지게에 생선장사도, " 엿 사세요 ~~~빈병이나 신발짝도 떨어진 냄비도 모두 모두 가져오세요 " 짤랑 짤랑 짤랑 엿장수의 가위소리도, " 따악 ~ 딱~ 따아악~ 딱 ~ " 밤마다 방범순찰대의 나무판때기 치는 소리도, " 두부 사세요~ 두부여 ~ 맛 좋은 콩비지도 있어요 " 딸랑 딸랑 두부장사의 손종소리도, " 아~이~스 크 림 어~름 과 자~ " 나무통을 어깨에 걸치고 가녀린 소년의 목소리도, " 기쁘다 구주 오셨네 ~ 만 백성 맞으라 " 크리스마스 이브에 들려오는 교회 성가대의 찬송가 소리도 모두가 마을 곳곳을 돌며 외치고 두드리며 부르고 있다. 제일 생각이 새롭고 듣고 싶은 여운이 뇌리에 떠오른다. 그토록 엄청 춥고 눈보라가 휩쓰는 겨울 배고픈 시절이다. " 차~아~ 압 ~싸~아~알 떠 어 어 억 ~~~" 너무 먹고 싶고 그 때 그 소년의 애절한 모습도 보고프다. 찹쌀떡이 어떤 모습이며 얼마나 맛이 있을까. 싸늘한 이불 속에서 밤잠을 설치기를 몇몇이던가. " 정남아 ~ 오늘 밤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되는 거란다, 잠을 자면 안된다, 알았네 " 섣달 그믐밤이면 내 아버지의 이 말씀도 너무 너무 가슴을 울리고 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까지 흔히 듣던 목소리들이다. 이 노객의 나이가 10대~20대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일테이다. 삶의 궁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려는 서민들의 읍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지금 어드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복조리는 대나무나 싸리나무의 속대로 만든다. 밥을 하기 전에 쌀 보리 좁쌀등의 곡식에 섞여 있는 돌을 골라내는 조리 기구이다. 복조리로 쌀을 골라 담아내듯이 복(福)을 조리에 담는다는 것이다. 부엌이나 대청마루등에 걸어 놓으면 일년 내내 복(福)이 들어오는 행운을 뜻하고 있다. 하루 세끼를 굶지 않는 날이 행복한 순간이 아닌가. 각 가정에서는 1년 동안 필요한 수량만큼의 복조리를 사기도 한다. 대문이나 집안에 걸어두면 복이 담긴다는 믿음이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둔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 새 옷을 설빔이라 한다. 아침에는 가족 및 친척들이 모여들어 정초의 차례를 지낸다. 조상님께 술잔(盞)을 올리고 두번 반의 큰 절을 드린다. 여인들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 있다. 필요한 음식을 그 때마다 준비할 뿐이다. 지금 돌아보면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그늘이 아닌가. 인간은 태여나는 순간부터 동등한 위치의 사람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남자로 여자로 내 마음대로 태여날 수는 없지 않은가.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께 순서를 따져 세배를 올린다. 떡국으로 마련한 세찬(歲饌)을 먹고 어른들은 세주(歲酒)를 마신다. 세찬이 끝난 후에는 차례상에서 물린 여러 명절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이 마련된다.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을 주며 덕담을 나누고 한해의 운수대통을 축원해준다. 이웃 및 친인척을 찾아서 세배를 다니는 일도 중요한 풍습이다.
1951년 1월4일 1.4후퇴로 이북 고향산천을 뒤로 하고 첫 거주지가 충청도 계룡산 밑의 두계라는 곳이다. 주인도 없는 허름한 빈집에서 여섯식구가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살았는가. 꽁꽁 얼어붙은 배추 양배추 떡닢에 겉보리죽이 전부이다. " 기차는 떠나가고 검은 연기만 나는 나머지 연기가 나를 울리네 큰 애기의 가슴에도 기가 막힌 정이 들어 가슴을 우려내는 이별이란다 ~~~ 아 ~아 ~ "라는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는 여리디 여린 학생이다. " 그만 해 ! 그런 노래를 부르면 안되는 거야 알겠지 " 국민학교 1학년 담임선생의 한 마디이다. 노래 하나 불러보라고 하곤 왜 그만 하라는 것인가. 배운 노래도 없고 그저 이북에서 누나들이 부르던 노래 가사를 읊었을 뿐이다. 여덟살 때 어리둥절 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머리속에 맴돌고 있다. 2년여 동안이나 다니던 그 때 그곳의 국민학교 이름도 기억에 없다.
대전시 성남동으로 옮긴다. 집도 절도 없던 세월이다. 한줄에는 서너평 정도의 판잣집이 십여개 붙여서 지은 곳이다. 가로로 세줄이고 세로는 열댓개가 나열되어 있는 피난민들을 위한 마을이 생긴다. 맨 오른쪽 열(列)에 앞에서 두번째 줄에 있는 곳이 우리 식구들의 안방겸 부엌이다. 화장실은 공동변소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피난민들 마을 뒷편으로는 보리밭이 있는 언덕이다. " 보리밭을 절대로 지나지도 들어가지도 말거라 " 어른들의 간곡한 말씀이다. 혹여나 보리밭에 문둥이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부탁이다. 언덕 너머 산 밑에는 여래 채의 집들이 보인다. 이름하여 문둥이 촌이라는 마을이다. 봄이면 보리싹이 소롯이 올라와 어른들 키높이까지 자란다. 이런 보리밭 속에 숨어 있던 문둥이들이 어린이들의 생간(生肝)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둥이병이 치료된다는 저들만이 믿고 있는 망상이다. 듣기만으로도 얼마나 섬뜩한 느낌인가. 그 근처는 아예 갈 생각도 없으며 쳐다보기도 싫다. 이곳에서 근처에 있는 홍도국민학교 4학년으로 편입학을 한다. 교실이 모자라서 교실 하나를 둘로 나누어 놓은 모양이다. 홍도국민학교는 대전에서는 배구가 특기로 여러번 우승기도 거머쥔다. 배구시합을 할 때마다 여러번 응원을 하러 갔을 것이다. 이것도 남아있는 내 모습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집 앞에는 폐수가 얼어 자그마한 빙판이 있다. 나무로 만든 썰매를 몇번 타본 경험이 있다. 나무 판대기 밑에 철사를 감아 만든 썰매이다. 장갑은 어디에 있는지 이름도 꺼내보지 못한 때이다. 새빠알갛게 얼어서 통통 부어 오른 손가락 마디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리고 있다. 어느 날 화재가 발생한다. 메마른 판자집은 한마디로 불쏘시개와 다름이 없다. 1시간도 되지 않아 400여채 정도의 판잣집은 잿더미로 변한다. 맨 앞줄과 두째줄에 있는 일부분만이 피해를 면한 것이다. 우리 집도 그중에 하나이다. 학교에서는 집이 몽땅 타버린 학생들에게는 공책 몇권과 연필 몇자루가 전부이다. 일부만 탄 학생들에게는 연필 몇자루가 돌아갈 뿐이다. 화재보험은 단어도 없을 때이고 보상금은 하늘나라 몫이다. 아마도 큰 누님이 경찰병원인가 간호사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피난민 판잣집 마을의 통장(統長)을 하기도 했던 아버지로 알고 있다. 이북 고향에서는 우체국 국장도 역임하고 있던 아버지이다.
어느 날 홀로 아버지는 서울로 발길을 향한다. 아마도 먹고 살아갈 방도를 알아보기 위함일 터이다. 서울 운동장 앞에서 아버지는 우연히도 처남을 상봉한다. 내 외삼촌인 셈이다. 피난을 나와 외삼촌댁은 서울 중구 쌍림동에 살고 계실 때이다. " 매부 ! 서울로 올라 오세요 " 외삼촌의 한 마디가 우리가족 모두의 삶이 바뀌는 순간이다. 무조건 서울로 온 가족이 상경이다. 집도 절도 갈곳도 없다. 며칠동안 외삼촌댁에 머문 것이 아닐까. 지금의 중구 을지로 5가 뒷편에 있는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는다. 3년여 뒤에는 현재의 중부시장이 탄생한 곳이다. 역시 거처할 곳은 판잣집도 과분하다. 서너평 판잣집에 온돌은 언감생심으로 가마니 몇개가 전부이다. 여섯 식구가 서로 움츠리고 웅크리고 새우잠도 다행이다. 밥을 어떻게 무엇을 어디에다가 해서 먹었는지도 가물가물이다. 을지로4가 근처에 있는 영희 국민학교 5학년 2학기가 서울 깍쟁이라는 시작점이다.
한 반에는 5학년은 1개반에 60여명 정도로 남학생 3개반과 여학생은 2개반이다. 중학교 입학원서는 1차에는 경동중학교이다. 5대 공립학교로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지원서가 가능한 학교이다. 무슨 과목을 배웠을까. 방학숙제는 무엇인가. 전혀 예측도 불가한 시절이다. 후기인 2차는 광희중학교이다. 이곳도 2차중에서는 이름이 있는 학교이다. 1류는 아니더라도 2류 정도로 인정받는 학교에 지원서를 넣은 것이다. 입학시험으로 어떤 과목으로 무슨 문제가 출제 되었을까. 몇문제나 정답을 찾았는지 도저히 모른다. 국민학교 성적표도 없으나 그 당시의 실력이 그런대로 인정을 받은 모양이다. 물론 결과는 불보듯이 1차 2차 모두 쓴잔을 마실 수 밖에 방법이 없다. 낙방은 이미 정해진 결과가 아닐까.
기억이 나고 있는 한가지가 딱 떠오른다. 1차 경동중학교에는 혼자 갔을리는 없다. 누구랑 버스를 탔는지 전철은 꿈속에도 없는 시절이다. 2차 광희중학교 입학시험 때이다. 큰 누님과 함께 다녀오면서 함께 찍은 사진 한장이 증명서이다. 광희중학교에서 을지로6가 서울운동장을 지나 지금의 중부시장 자리인 판잣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길거리에서는 카메라를 들고 지나는 행인들을 샷다를 누른다. 사진을 찍힌줄로 오인할 수 밖에 없다. 사진값을 누님이 지불한다. 그 순간의 모습을 다시 재차 촬영하는 수법이다. 일종의 사기 수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광희중학교는 청계천6가~7가 정도의 위치에 있다. 지금은 성동공업고등학교가 그곳에 있는 곳이다. 순진무구한 누님 덕분에 추억의 한장을 지금도 앨법메 간직하고 있다. 1957년도 1월로 만으로 12살 때이다. 누님은 23살로 수도경찰병원 간호사로 근무할 때일 것이다. 피난 나온지 6년만에 " 최정남 "이라는 여린 학생의 생활사(生活史)의 출발이렸다. 집에는 카메라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뿐 사진은 생각밖이다. 사진은 당연히 사진관에 가서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여덟살 때 누님과 단 둘이서 같이 찍은 사진도 있다. 사진관에서 누님은 뒤에 서서 있고 나는 앞에 앉는다. 앞에는 조그만 화분이 내 왼쪽 가슴을 가리고 있다. " 정남아 ! 네가 입은 상의에 일부가 떨어진 상태를 가리우기 위함이란다 " 20여년이나 흐른 뒤에 앨범을 뒤적일 때 누님의 고백이다.
매일 아침이면 여타 친구들은 중학교로 향하고 있다. 전기 후기 두번 모두 중학교 입시에 실패한 녀석이다. 중학교 입학에 대한 욕심도 관심도 없다. 을지로 5가 버스정류장 앞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는 오마니에게로 달려 나간다. 가로 세로 1m 정도 크기의 나무상자 하나가 상품 진열대라고 할 수 있다. 상품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지금도 선명하게 사진으로 보이고 있다. 담배로는 " CAMEL MALBORO KENT등의 양담배와 국산으로는 아리랑 청자 파고다 화랑"등이다. 마른 오징어 미제 껌 눈깔 사탕이 전부이다. 담배와 껌은 낱개로도 판매를 한다. 여름에는 당원을 넣고 어름 한덩이 수박 한쪽을 띄운 커피색상의 냉차도 있다. 내 오마니는 언제나 환한 밝은 웃음으로 받아준다. 내일에 대한 걱정은 없다. 오징어 다리 하나 껌 한개 시원한 냉차 한잔 눈깔사탕 한알이면 만족이다.
어느 날인가 두살 아래인 남동생의 간(肝)을 문둥이들에게 갈취당할 순간도 있다. " 내가 지금 돈이 없으니 동생을 데려가서 한갑의 값을 줄거야 " 낱담배 한가치를 물고 뱉어내는 아주머니의 너그러운(?) 한 마디이다. 여름 땡볕 아래 쪼그려 앉은 남동생은 팬티뿐으로 위에는 걸친 것이 없다. 국민학교 3학년이지만 더 어리게 본 모양이다. 밤이 되어도 동생은 돌아오지를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 님과 누나 온가족이 혼비백산으로 정신이 없다. 파출소도 경찰서에 달려가지만 전혀 알길이 없다. " 동생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 " 아버지에게 혼나게 될 생각에 어쩔줄을 모른다. 어디로 끌려가서 어떻게 된 일인가. 살아있기는 한 것인가. 이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동생인가. 아들을 잃은 부모님은 물론 모두가 지치고 넋이 나간 모습이다. 밤 아홉시가 다 되는 시간에 동생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내리고 걷기도 한참이란다. " 애가 너무 크니까 그냥 돌려 보내야 되겠구만 ~~~" 문둥이 몇명이 둘러 앉아 하는 소리를 동생이 하는 말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안는 다. 막내 아들을 잃을뻔 한 부모님은 동생을 끌어안고 눈물바다가 되는 순간이다.
1900년도 초에 출생한 나의 부모님 시절이다.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 얼굴은 커녕 나이도 이름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양가(兩家) 부모님들만의 선택이다. 11살의 소년과 16살의 소녀가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는다. 백년가약주(百年佳約酒)는 어린 청소년소녀들에게는 쓰디쓴 고역일 뿐이리다. 내 오마니의 출산이력(出産履歷)을 돌아본다. 17세의 나이에 첫 딸을 낳는다. 이북에서 결혼을 한 제일 큰 누님으로 생사도 모른다. 두째 세쩨는 모두 사내애로 태여난다. 엄마 젖을 한번 물어보지도 못하고 엄마의 품을 떠난다. 네번째에 태여난 딸이 현재 서울 서초구에 살고 계신 90세인 누님이다. 다섯째도 여자애로 태여난다. 이름은 실명(實名)은 옥선(玉仙)이다. 부르기에는 까토리(암꿩)라고 한다. 그래야 다음 출산아기는 남자로 태여난다는 믿음이다. 10세 이하일 때라고 한다. Malaria(虐疾)에 감염이다. 고열로 실성(失性)도 부들 부들 경련도 일으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다. " 우리 아이 꼭 살려 주세요 " 오마니의 처절한 애원이다.
" 見込みがない " 즉 가망이 없다는 뜻이다. 손 한번 잡아 보지도 않고 일본 의사의 퉁명스레 한 마디뿐이다. " 제발 살려주세요 " 바지가랭이를 붙들어 보지만 뿌리칠 뿐이다. 대문 앞에 철퍼덕 주저앉는 오마니이다. 하염없는 눈물이 실신한 모습이다. 다급한 오마니는 오줌을 누워서 채에다 거른다. 거른 오줌을 극심한 고열로 헛소리까지 하고 있는 딸에게 먹인다. 오마니의 마음은 얼마나 처절한 마음이었을까. 의사도 약사도 없는 허망한 민간요법만이 그 세월의 답이 아닌가. 이렇듯 또 사랑하는 딸도 보내야 한다. " 누님 ! 미안해요,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시여 온 몸을 덮어주고 맛사지를 하면서 주물러 주었으면 좋았을텐떼 ~~~ " 오늘의 남동생도 가슴이 아프다. 흐르는 눈믈을 주체할 수도 없지 않은가. 요즘처럼 흔하디 흔한 해열진통제도 원망의 대상이다.
일곱번째가 현재 성동구에 거주하고 있는 작은 누나이다. 황해도 재령군에 있는 장수산(長壽山 747m)으로 향하는 오마니이다. " 제발 아들을 낳게 해주십시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정한수를 떠놓고 신령님께 백일기도를 드린다. 오마니 나이 38세에 여덟번째의 이 못난 사내애를 가슴에 품는다. 2년 후에 40세 나이에 아홉째인 남동생도 연속 출산을 한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들이다. 네명의 자식들이 떠나고 다섯명만이 어머니 품에 님아 있다. 재 너머 긴 밭을 하루종일 땡볕에서 길쌈을 하곤 하는 오마니이다. 더구나 어린 막내 아들을 등에 업은 모성애의 희생뿐이다. 여전히 시어머니의 싸늘한 시선만이 돌아온다. 아침 점심 저녁 때마다 쌀을 시어머니가 꺼내주신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열명의 식구 숫자에 모자라게 주신다. 며느리인 나의 오마니는 굶다시피 솥올치(누렁지)만 마신다. 광에 가득히 쌓아 놓은 쌀가마니는 시어머니 수중에 달려 있다. 며느리인 내 오마니에게는 그림의 떡이 아닌가. 참다 못한 오마니는 도끼로 광(창고)을 때려 부순다. 얼마나 굶주려 고픈 배가 극(極)에 달한 순간이리라. 당황스런 내 할머니이자 시어머니는 할 말이 없다. 사내애를 꼭 낳아야 한다는 출산도구로 몸종일 뿐이다. 최근에야 누님에게서 눈물겨운 사연을 가슴에 담은 것이다. 이것이 한국 근대사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삶의 현장이 아닌가.
할머님전 상서
" 할머니 ~~~ 지금 어드메에 계십니까, 맏 손자 정남입니다, 손자 나이가 이제 곧 팔십이지요. 이 손자의 아들 딸도 즉 할머니의 증손자(曾孫子)들도 결혼을 했습니다. 할머니 증손자가 장가를 가서 딸 아들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어요. 증손녀도 딸과 아들을 낳았지요. 할머니의 손자의 아들 딸들이 또 아들 딸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니까네 할머니에게는 고손자(高孫子)들이 아닙니까. 할머니 ~~~ 할머니도 손자 증손자 고손자들을 얼마나 보고싶고 그립습니까, 요즘 손자인 저도 며느리와 손자녀석들을 일년여 동안이나 보지를 못했어요. 할머니 손자의 아들과 며느리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의사들입니다. 모두가 교수로 재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녀석은 교수직을 마다 하고 서울 마포구에 연세한강병원을 개원했어요. 개원한지도 벌써 만4년이 흘렀지요. 정형외과 중점 병원이예요. 애비인 저도 아들 병원에 약사로 약제실에 매일 출근하고 있는 근무 약사랍니다. 아들이 그래도 애비인 나에게 두득하게 월급봉투를 내밀고 있습니다. 혹여 할머니께서 발목이나 관절등 어디 아프시면 증손자 병원으로 진료 받으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프지 않으셔야 얼마나 좋습니까. 며느리는 교수 안식년제로 지금은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SAINT MARY HOSPITAL에 연수중입니다. 물론 쌍둥이 아들 딸도 동행을 했습니다. 손주들이 한국에 안오고 그곳 미국에서 살겠다 할까봐도 한편 걱정입니다. 이처럼 할머니 증손자 부부들도 훌륭한 직업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고손자들은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착실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이처럼 잘 살고 있는 것도 어쩌면 모두 할머니의 간절한 소원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
해마다 돌아오는 설과 추석이면 이북(以北) 고향 산천 생각으로 가슴을 저미고 있다. 더 큰누님과 할머니를 함께 못함에 대한 죄책감이 7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설명절 추석이면 차례상을 북쪽 하늘로 가득 차려 놓으신다. " 오~마~니 ~~~ 보고 싶 습 네 다 아~ 흐~ 흐~ 흐으윽 ~ 오마~ 니~~~ " 이북에 두고 오신 오마니를 부르시며 대성통곡(大聲痛哭)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내 아버지가 심장을 옥조이고 있다. 누구를 원망하리이까. 사흘이면 아니 일주일 후에는 한달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던 믿음으로 버텨온 피난시절이 아니던가. 설명절 추석이 수많이 바뀌고 바뀌어도 돌아오는 것은 절망뿐이다. 어느덧 내 아버지 오마니가 저 멀고 먼 곳으로 한마디 말씀도 없이 떠나신 것이다. 아버지는 55년 내 오마니는 43년이 흘렀다. 내 할머니는 연세가 몇이더냐. 회갑이 지나신 할머니를 뒤로 하고 떠날 때가 1951년 1월4일 손자인 내 나이가 일곱살이다. 2022년 내일이 설명절 정월 초하루가 아닌가. 어림잡아도 130여세가 훌쩍 넘은 할머니이다. 살아 생전에 못 다 이룬 서러움의 고향땅을 하늘에서나마 내려다 보고 계시려는가. 오늘이 섣달그믐날이다. 내일 설명절에는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파 우시던 아버지가 내 할머니를 끌어안고 무슨 말을 하시려는가. 짐작키도 어렵다. 광(창고)에 가득한 곡식들을 지킨다고 고향에 남으신 할머니이다.
" 할머니 ~ 갑자기 손자가 할머니와 할아버지 존함(尊銜)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혹시 틀리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할머니의 갸름한 얼굴 모습은 지금도 가슴에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기억도 기록도 없습니다." " 누님 ! 누님은 할아버지를 생전에 보았나요? " 할머니의 두째 손녀인 내 누님에게 물어 보았어요. 이미 할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떠나신 후에 태여났다는 대답입니다. " 할머니 ~ ~~ 할아버지 존함은 崔 字 攝 字 天 字이며 할머니는 金 字 鳳 字 姬 字가 맞습니까 " " 그래 정남아 ~ 손자인 네가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도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귀여운 녀석 고맙구나 " 할머니의 음성이 귓전을 흔들고 있다.
" 할 머 니 ~~~ 창고에 가득 쌓아 두었던 곡식들을 몽땅 들어 내세요." " 할머니 !!! 손자인 내가 태여난 곳은 평안남도 개천군 조양면 용현리이며 내가 살고 있던 고향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두 부르세요 " " 밤새껏 주민들과 하얀 쌀밥 인절미 떡국 만두 송편 녹두빈대떡등등을 한마당 가득 만드세요 " " 소도 닭도 모두 잡으세요 할 머 니 ~~~헐벗고 굶주리고 죽어가고 있는 이북 동포들에게 싫컷 배불리 대접 하세요 " 그리고 "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다 바쳐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목숨 받쳐도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 라는 노래도 손에 손잡고 목청껏 부르세요. 손자도 이남 땅에서나마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함께 부를 것입니다. 내 할머니 아버지 오마니 세분이 더 큰누님 손을 잡고 하늘을 훨훨 날으시면 어떠신가. 이제라도 이북 고향산천을 마음껏 즐기시기만을 기원드리고 있다. 통일이 오는 그날이면 고향산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여 있는 아늑한 곳에 손자가 함께 모셔 드릴겁니다. " 할머니 ~~~ 평생 보고프고 그립고 사랑합니다. 언제 그날이 올 때까지 평안히 계십시요 "
2022년 1월31일 섣달 그믐날 손자 최 정 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