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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 한 그릇
국수집의 제일 큰 대목은 섣달 그믐날이다. 북해정(北海亭)도 이날만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보통 때는 12시 넘어서도 시끌벅적한 길가지만 저녁 나절이 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빨라졌고, 10시가 지나자 북해정의 손님도 딱 그쳤다.
이때쯤 사람은 좋지만 무뚝뚝한 주인 대신 단골손님들로부터 '여주인' 이라고 불리는 그의 처는 바빴던 하루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특별상여금이 든 주머니와 국수를 시간제 종업원에게 쥐여 돌려보냈다.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나가자 이제 슬슬 바깥의 발을 내릴까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이 드르륵 힘없이 열리며 한 여자가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섯 살, 열 살 정도의 남자아이는 막 사 입은 듯한 운동복 차림이었고, 여자는 계절 지난 체크무늬의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라며 맞는 여주인에게 그 여자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우동 한 그릇이라도.... 괜찮나요?"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 봤다.
"그럼요. 자, 이리로 오세요." 난로에 가까운 2 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카운터 저쪽을 향해,
"우동 한그릇" 이라고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주인은 슬쩍 이 일행을 보면서, "우동 한 그릇" 이라고 대답하며 국수 1 인분에 반사람 몫을 더 얹어 삶았다. 손님과 여주인이 눈치채지 못한 서비스, 곱배기의 분량이다. 테이블에 내온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싸고 이마를 맞대며 음식을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카운터에까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맛있네요." 라고 말하는 형. "어머니도 드세요." 라며 국수를 집어서 어머니의 입에 갖다대는 동생. 우동을 다 먹고, 150엔을 내고, "잘 먹었습니다!" 라며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말하는 주인과 그의 처. 새해를 맞은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매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1년이 지나고 또 12월 31일이 됐다. 지난해 이상으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하루가 지나고 10시가 됐다. 가게를 닫으려 하는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며 남자 아이 둘과 함께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주인은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무늬의 반코트를 보고 작년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손님을 생각해냈다.
"저.... 우동 한 그릇이라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자, 자, 이쪽으로." 여주인은 지난해와 똑같은 2 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우동 한 그릇"이라고 크게 외쳤다. "여보, 서비스하는 셈 치고 3 인분 내줍시다." 살짝 귀엣말을 건네는 여주인 에게, "안 돼. 그러면 오히려 신경을 쓰게 돼." 라며 국수 한사람 반 분을 삶아 내놓는 주인.
테이블 위에 우동 한 그릇을 둘러싸고 이야기 하는 모자 세명의 대화가 카운터 안팎에 있는 부부에게 들려온다.
"금년에도 북해정 우동을 먹을 수 있었네요." "내년에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식사를 마치고 나서 150엔을 낸 뒤 나가는 세 사람의 뒤에 대고 부부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크게 말했다.
장사가 날로 번창해 가는 가운데 맞은 그 다음해의 섣달 그믐날 밤. 북해정 주인과 부인은 서로 말은 안하지만 9시 반이 지나자 웬지 침착해 질 수가 없었다. 10시가 지나 종업원을 귀가시킨 주인은 벽에 건 메뉴판을 차례로 뒤집었다. 금년 여름부터 가격이 올라 '우동 200엔'이라고 쓰인 메뉴판이 '150엔' 으로 바뀌었다. 2 번 테이블 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여주인에 의해 놓여 있었다.
10시 반이 되자 가게 안의 손님이 없어지는 것을 기다렸다는듯이 어머니와 두 아들이 들어왔다. 형은 중학생 교복, 아우는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점퍼를 입고 있었다. 둘 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색 바랜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은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웃는 얼굴로 맞는 여주인에게 어머니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우동 2인분이라도.... 괜찮을까요?" "예. 그럼요. 자, 이쪽으로." 2 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거기에 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감추고 카운터를 향해, "우동 2인분." 하고 외쳤다. 주방의 주인도 "우동 2인분"하고 대답하며 국수 3인분을 삶아냈다.
두 그릇의 우동을 나눠 먹은 모자 세 사람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활기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운터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마주보며 미소 짓는 여주인과 주인. 주인은 예의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아야, 준이야. 오늘은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고맙다니요? 왜요?"
"실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으킨 사고로 8명이나 다쳤단다.
보험으로도 갚을 수 없었던 비용을 매월 5만 엔씩 내고 있었어."
"예. 알고 있어요." 형이 대답했다. 여주인과 주인은 가만히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
"원래는 내년 3월까지 돈을 내게 돼 있었는데, 실은 오늘 전부 갚을 수가 있
었단다."
"정말이에요? 어머니."
"정말이야...
형아가 신문배달을 하며 애써주었고, 준이가 매일같이 시장보고 저녁준비를
해준 덕택에 엄마는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있었거든...열심히 했다고 회사에서 특별수당도 받았단다. 그걸로 빚을 갚을 수가 있었어."
"어머니! 형! 너무 잘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식사 준비는 제가 할께요"
"저도 신문 배달을 계속 할래요. 준이야 힘내자, 응?"
"지금이니까 얘기하겠지만 준이하고 저, 어머니에게 비밀로 한 일이 있어요. 실은...지난 11월 어느 일요일, 준이의 수업참관 안내가 학교에서 있었잖아요? 그때 준이는 선생님에게서 편지를 한통 더 받아 왔었어요. 준이가 쓴 작문이 북해도 대표로 뽑혀서 전국 콩쿨에 출품되게 됐기 때문에 참관일에 그 작문을 준이가 읽게 됐다고. 선생님 편지를 어머니께 보여드리면 무리하게 회사를 쉬시게 될것 같아서, 준이가 그걸 감췄어요. 그 얘기를 준이 친구한테서 듣고 제가 참관일에 갔어요."
"그래... 그랬니?... 그래서?"
"선생님이 `당신은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라는 제목으로 학생 모두에게 작문을 쓰게 했어요. 준이는 `우동 한 그릇'이란제목으로 글을써 상을 받았는데 `우동 한 그릇'이란 말을 듣고 북해정이야기인지 알았어요. 순간 준이 놈, 왜 그렇게 창피한 이야기를 썼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죠. 작문은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많은 빚이 남았다는 일, 어머니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계시다는 것, 제가 조간과 석간배달을 하고 있다는 것 등....전부 읽었어요. 그리고 12월 31일 밤, 셋이서 먹은 한 그릇의 우동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세 명이서 단 한 그릇밖에 부탁하지 않았는데, 국수집의 아줌마 아저씨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을 걸어준 일. 그 목소리가 '지지 말아라! 힘내라! 살아야 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준이는 어른이 되면 손님에게 `힘내세요! 행복해지세요!'라는 마음을 갖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국수집 주인이 되고 싶다고 큰 소리로 읽어나갔어요."
카운터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인과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깊숙이 쭈그려 앉은 두 사람은 한 장의 타월 양쪽 끝을 서로 끌어 잡아당기듯이 붙잡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작문을 다 읽자 선생님께서 저더러 어머니 대신 인사하라 하셨어요."
"그래? 그래서 형이는 어떻게 했니?"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지만....`모두들 언제나 준이와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동생은 매일저녁식사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클럽활동 중간에 집에 돌아가서 여러분들께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동생이 우동 한 그릇이라고 읽기 시작했을 때, 저는 창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펴고 큰 소리로 작문을 읽는 동생을 보고 있는 사이 한 그릇의 우동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때 한 그릇의 우동을 부탁한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가 힘을 합쳐서 어머니를 지키겠습니다.
앞으로도 준이와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이렇게 말했어요."
서로의 손을 꼭 잡기도 하고 재미나 죽겠다는 듯이 웃으며 서로 어깨를 두드리는 등 이들은 지난해와는 전혀 다르게,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한해를 보내는 국수를 먹었다. 식사를 하고 300엔을 낸 뒤 `잘 먹었습니다.'라며 머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는 세 사람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1년을 마감하는 큰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외쳤다.
그로부터 1년 뒤. 북해정에서는 밤 9시부터 '예약석' 팻말을 2 번 테이블 위에 놓고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그 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2 번 테이블을 비워두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북해정은 장사가 날로 번창해서 가게 안을 새로 꾸미게 됐다. 테이블이나 의자를 새로 새것으로 바꿨지만 2 번 테이블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새로 들여놓은 테이블이 줄지어 있는 가운데 딱 하나 낡은 테이블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왜 이게 여기 있지요?"
이상하게 생각하는 손님들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우동 한 그릇' 이야기를 하고는, "이 테이블을 보면서 스스로 격려하고 있다. 언젠가 그 세 명의 손님이 와 주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테이블로 모시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가 `행복의 테이블'로 손님에게 전해졌다. 일부러 멀리서 찾아와서 국수를 먹고 가는 여학생도 있었고, 그 테이블이 비는 것을 기다려 주문하는 젊은 커플이 있기도 했다.
그로부터 수년의 세월이 흐른 12월 31일 밤의 일이었다. 북해정에는 같은 마을 상점회 회원으로 가족같이 지내는 친구들이 각각 가게 문을 닫고 모여 있었다. 북해정에서 한 해를 보내는 국수를 먹은 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친구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근처의 신사에 첫 참배를 가는것이 5, 6년 전 부터의 연례 행사였다.
이날 밤도 9시가 지나가 생선 가게 집 부부가 생선회를 가득담은 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언제나 모이는 동료 30여명이 술이나 안주를 들고 차례로 모여와 가게 안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모두 2 번 테이블의 유래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라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아마도 올해 역시 빈자리로 새해를 맞이하게 될 `섣달 그믐날 10시 이후의 ‘예약석'을 그대로 둔 채, 좁다란 자리에 몸을 조금씩 비켜 늦게 온 동료들을 맞아들였다.
국수를 먹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가지고 온 요리에 손을 뻗는 사람, 카운터 안에 들어가 도와주는 사람, 자기 멋대로 냉장고를 여닫는 사람...물건을 왕창 판 이야기,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손자가 태어났다는 이야기 등.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 10시 반쯤, 입구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몇 사람의 시선이 입구로 향해지고 갑자기 모두 조용해졌다. 오버 코트를 손에 들고, 양복을 입은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모두 `다행이다'라는 듯이 숨을 내쉬며 다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여주인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죄송하지만 자리가 없어서요."라며 나가달라고 요청하려는 찰나, 기모노를 입은 부인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와 청년 둘 사이에 섰다.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기모노를 입은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 우동 3인분인데, 괜찮을까요?"
이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색이 바뀐다. 10여년의 세월이 순간에 뒤돌아가 젊은 어머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눈앞의 세 사람 위에 겹쳐졌다. 카운터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주인과 지금 들어온 세 명의 손님을 번갈아 가리키며
"아, 여보!" 라며 어쩔 줄 모르는 여주인에게 청년 중 하나가 말했다.
"저희들은 14년 전의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세 명이서 한 그릇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의 우동 한 그릇의 힘을 얻어 세 명이서 힘을 모아 살아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후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시가겐으로 이사했지요. 저는 올해 국가시험인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서 교토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의 후보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내년 4월부터는 삿포르의 종합병원에서 일할 계획입니다. 그 병원에 인사하고 아버지 산소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김에 국수집 주인은 되지 않았지만 교토의 은행에 근무하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서 최고 호화스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니와 세 명이서 삿포르에 있는 북해정을 찾아 3인분의 우동을 부탁하는 일이었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여주인과 주인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입구 근처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던 채소가게 주인은 국수를 입에 문채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그대로 국수를 삼켜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이봐요, 여주인! 뭘하고 있는 거야! 10년 동안 이날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 10시 이후의 예약석'이 아닌가? 빨리 안내해야지, 안내!" 그가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 "어서오세요. 자, 이쪽으로. 여보! 2 번 테이블에 우동 세 그릇!" 하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소리에 약속이라도 한듯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하늘도 감동을 했는지 방금전까지 흩날리던 눈도 멎었다. 신설(新雪)에 반사돼 더욱 밝아진 창문 빛이 '북해정'이라고 쓰인 발을 환히 비추었다. 이 발을 종종걸음치듯 불던 정월바람이 흔들고 있었다.
구로 료헤이(栗良平)
세계 10大 天才
영국의 과학 전문지Nature는 인류 역사를 바꾼 세계의 천재 1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선정 단체가 과학 분야를 다루는 단체인 만큼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천재들이 다수를 차지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뜻밖의 결과였다. 최고의 천재의 자리에는 과학자로서의 재능도 많았지만 화가로서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올랐다. 이 외에도 아테나 여신상의 건축가 피디아스, 미국 독립선언문의 주인공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과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수를 차지했다.
‘천재’와 그 이름이 동격으로 취급되는아인슈타인은 턱걸이로 겨우 10위에 올랐고, 발명의 아버지에디슨과 슈퍼 컴퓨터 두뇌를 가진빌게이츠는 순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도대체 선정 기준이 무엇이길래 에디슨도, 빌 게이츠도 제외된 걸까. 정답은 특정 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르네상스형 인간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사실 선정된 천재들의 명단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두 거장,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을 지언정 ‘색채론’의 기본을 확립한 괴테 역시 그 이름을 올렸다. 많고 많은 미국의 대통령 중에 한명일 뿐인 토머스 제퍼슨은 정치가이자 변호사였으며, 건축가이자 언어학자였을 만큼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만능이었다.
그러니 전형적인 실험실형 발명가였던 에디슨이나 컴퓨터 박사 빌 게이츠는 제외될 수밖에.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도 도달하지 못한 신의 경지에 도달한 10명의 천재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보다 편해지고 보다 여유로와졌음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천재성과 함께 창조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천재들의 신화를 벗겨보자.
1.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다빈치의 미술 작품은 치밀하도록 과학적인 그의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의 미술 작품에 나타나는 완벽한 조화와 신비로움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름 앞에 붙은 ‘과학의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다빈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 누구보다도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는 미술, 음악, 건축, 군사공학, 도시계획, 비행 기계의 고안을 포함한 다양한 발명과 함께 해부, 요리, 식물학, 의상 및 무대 디자인, 해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예술가로서의 업적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대에 여러 자연과학 분야에 걸친 다양한 관찰과 실험을 하고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인류 최초의 비행으로 기록된 라이트 형제의 역사적 발명품의 시초가 된 비행기 설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실험 관찰과 이론이 종합되고 정형화되어 자연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 과학이라면,
아직 망원경과 현미경이 없던 시대에 살았던 다빈치의 관찰이나 관찰 결과의 수학적 분석은 제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자연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 모든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그에게 ‘인류 최고의 창조적 천재’라는 호칭만큼 탁월한 수식어는 없다.
2. 윌리엄 셰익스피어
위대한 심리 치료사,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재다능한 ‘르네상스형 인간’이 의 선정 기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전형적인 문학가인 셰익스피어가 두 번째로 선정된 데에는
어딘지 모순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 불후의 명작만 남긴 게 아니다. 시인이자 극작가로서 삶의 희비극을 가장 밝은 눈으로 꿰뚫어보고 생각의 깊이를 제공한 선지자였다.
4백 년 전의 셰익스피어에게서 오늘의 지혜를 발견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런던 그린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자를 위한 셰익스피어 강좌’를 열어 화제를 모았는데,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역할을 바탕으로 인간 경영과 인사관리 등의 리더십을, 극 중 주인공 간의 함수관계로 기업 인수·합병, 공동 가치 추구 등의 경영 기술을 강의했다.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안토니오에게서는 설득 기술을, 햄릿이라는 우유부단한 인물을 통해서는 결단의 중요함을, <템피스트>의 등장인물인 프로스페로에게서는 책임과 승리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의 몸속에서 자신을 심리적으로 재생시키는 작업을 통해 수많은 종류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또한 극 중 인물에 몰입하는 ‘메소드 액팅(method acting)’의 숙달자이자, 인류 최초의 심리학자였던 셈이다.
3. 요한 볼프강 괴테
최초의 색채 이론가, 요한 볼프강 괴테 어렸을 때부터 라틴어, 희랍어, 음악, 미술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괴테는23세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4세 때 <파우스트>, 33세 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완성하여 다작가이면서도 대작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괴테는 단순히 작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정치가, 행정가, 교육자, 과학자로서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1775년 바이마르를 방문한 그는 50여 년간 머물면서 바이마르를 고전주의 문학의 중심지로 이끌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학·해부학·광물학·지질학·색채론 등에 몰두하여 전 방위적인 재능을 펼쳤다. 그의 문학적인 명성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한 <색채론>은 괴테가 20여 년에 걸쳐 연구한 오랜 실험의 결과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괴테는 1786년 이탈리아 여행 시 그곳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실용적인 차원에서 채색의 규칙과 법칙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본격적으로 색채 연구에 들어갔다. 색채를 관찰자의 시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객관적인 실체로 파악한 뉴턴과 달리, 색채 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대립 관계로 보았던 그의 이론은 수학적인 체계가 없다는 이유로 물리학의 주류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새롭게 조명받았다. 색채에 대한 그의 실험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7가지 색밖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4.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인
불가사의를 창조해낸 사람들,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인 고대 이집트 왕가 무덤의 한 형식인 피라미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자 7대 불가사의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제4대 왕조였던 쿠푸 왕의 지휘 아래 약 10만 명의 인부가 3개월씩 교대하여 30년 이상 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피라미드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로 남서쪽 기제에 있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 높이는 137m로 40층 건물의 높이와 같으며, 무게도 6백만 톤이나 된다.
피라미드의 각 변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대피라미드엔 지구의 반지름이나 태양까지의 거리, 원주율이나 1년 날짜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피라미드의높이는 정확히 태양까지 거리의 10억분의 1, 피라미드의 너비는 정확히 지구 반지름의 1천만분의 1, 한 변의 길이는 정확히 365.23인치로 1년의 날짜 수와 같다. 피라미드를 건설한 사람들이 천재의 범주에 포함된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피라미드의 기이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피라미드의 한가운데와 높이의 3분의 2 지점에 어떤 물체를 놓아두면, 그 물체는 흔히 일어나는 변화를 겪지 않는다. 꽃은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고 마르며, 쌀은 썩지 않고 굳고, 면도날이나 칼날은 무디어지지 않는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그들,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인들뿐이다.
5. 미켈란젤로
진정한 르네상스맨,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또 한 명의 천재가 전성기 르네상스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동시대를 살았던 다빈치의 천재성에 가려 ‘열등감에 가득 찬 고독한 예술가’로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다빈치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바로크 예술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또 화가로서, 조각가로서, 건축가로서, 시인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맨이었다. 어릴 적부터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손꼽히는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문하에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당시 기를란다요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된 그림에도 질투를 느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는 ‘타고난 예술가’였던 모양이다. 그 후 피렌체의 권력자인 메디치가의 조각 학교로 옮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고대 조각을 연구했다. 40여 점의 조각 작품 회화로는 사면의 대벽화, 건축에서는 교회와 기념 건축물 등의 설계와 장식을 남겼고, 또 회화·조각·건축에 관한 습작·소묘·에스키스 등 약 8백여 점이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그중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만찬’은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작들이다.
6. 아이작 뉴턴
17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뉴턴과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아인슈타인. 근대를 지탱해온 뉴턴적 우주관을 현대의 아인슈타인이 뒤집었기에 두 사람은 시대를 건너뛴 라이벌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그보다 더 자주 동일한 수식어로 묘사되는 과학사의 단짝 커플이다. 로 ‘세상의 몰이해 속에 고독하게 연구한 천재’라는 것이다.
뉴턴이 창조성을 발휘한 부분은 풀이가 가능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당대의 학자들이 ‘빛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빠져있을 때, 턴은 눈으로 검증할 수 있는 빛의 성질에 주목했다. 또한 자신이 상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로 실험해보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학에 관한 실험은 일반인들도 따라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실험이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가 아니라, 실제 실험을 통해서 당시 유행하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사고 실험이 갖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뉴턴은 기존의 지식을 습득할 때도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깊이 이해할 때까지 읽고 또 읽는 스타일이었다. 집중력과 끈기, 노력을 몸소 실천한 뉴턴에게 한순간의 번득이는 영감이나 천재성이라는 말은 그의 창조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빛의 구성을 논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 <광학>은 30여 년에 이르는 오랜 연구 결과이며, 만유인력 역시 사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발표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전된 개념이다.
7. 토머스 제퍼슨
한국에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이름이 알려졌던 것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클린턴의 스캔들이 터지던 무렵이다. 흑인 노예와의 스캔들로 인해 클린턴과 자주 비교가 되었던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바로 토머스 제퍼슨이다.
스캔들은 차치해 두고라도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잡았던 인물이자 미국인들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에 한명인 그가 어떻게 천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전형적인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그가 도시 계획자이자 건축가였으며, 농학자이자 언어학자였으며, 또한 위대한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오늘날 고고학계의 규범이 된 방법들을 이용해 최초로 과학적인 고고학 발굴을 한 아마추어 과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대통령이 되기 전 변호사로 일했던 제퍼슨은 재임 중에는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에 주력한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灣)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현재 미국의 영토를 확립한
뛰어난 도시계획자였고,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여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노력한 뛰어난 교육자였다. 뿐만 아니라 철학, 농학, 언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몬티셀로의 성인(聖人)'으로 불리었다.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해 놓았다는 묘비명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가 그의 이러한 업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8. 알렉산더 대왕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말 그대로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그가 10명의 천재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의 대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컸다.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알렉산더 대왕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探險) ·측량 등을 시킨 일,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배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뛰어난 전략, 전술가였다. 종종 광개토 대왕과 비교되면서도 광개토 대왕보다는 한수 위라는 평가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시리아, 페니이카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와 인도의 인더강에 이르는 유럽, 아시아 대륙까지 점령한 그는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패한 적이 없을 만큼 뛰어난 전술을 자랑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라는 이름 붙였는데 33세의 일기로 죽기까지 그가 이름 지은 도시가 자그마치 70개에 달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나뉘어졌다.
9. 피디아스
건축 역사상 건축가가 밝혀진 몇 안되는 건축물인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 이 두 작품의 총지휘를 맡은 이가 바로 피디아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올림피아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이었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된 후 40년이 지났을 때 피디아스에게 주문되었는데, 8년 여의 작업 끝에 높이 90cm, 길이 10m, 폭 6.65m 크기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피디아스는 제우스의 신성한 위엄과 너그러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제우스 신의 발굴 움직임은 18세기 경부터 일어났지만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또한 피디아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로 8m나 되는 대형 아테나 신상을 만들었고,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을 조각하기도 했다. 덕분에 피디아스는 건축가에서 최고의 조각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0. 아인슈타인
20세기 초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함으로써 근대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아인슈타인.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로 지칭되는 그가 고작 10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9명의 천재들에 비해 과학 분야에서만 뚜렷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과학 분야에서는 ‘최고’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르네상스형 인간’에는 미치지 못한 이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한낱 실험실과 과학적인 사고에 갇힌 천재는 아니었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는가 하면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그 무엇보다도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꿈꾼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1879년 독일 울름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이때 광양자설, 브라운 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 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또한 논란이 되었지만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이론으로 확대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