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행24:1-27)
갈등
1. 뜨거운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머물며,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먼지가 자욱한 법정 한가운데, 쇠사슬에 묶인 바울은 당당하게 서 있었어요. 그의 눈빛은 마치 천상의 평안을 보고 온 사람처럼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반면, 화려한 옷을 걸친 벨릭스는 겉으로는 위엄을 뽐냈지만, 그의 눈은 교활함과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마치 화려한 껍데기를 두른 채, 속이 텅 빈 항아리 같았습니다. 그의 옆에는 드루실라, 헤롯 왕족의 혈통을 자랑하는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진짜 재판석에 서 있는 이는 바울이 아니라 벨릭스였습니다.
벨릭스는 자신이 심판자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는 심판대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의와 절제, 그리고 장차 오는 심판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그 메시지는 과거의 법정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이제 법정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바울을 고발하고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기세가 등등했어요. 마치, 예수님을 죽이려고 빌라도 총독을 압박했던 때를 연상하게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당시 유명한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고발했습니다.
2. 대제사장의 변호인 더둘로가 3절,“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정치인이나 변호사는 양심과 줏대가 없기로 유명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모습이에요. 그들의 목적이 매우 현실적인 것이라 그렇습니다. 정치인은 권세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변호사는 자기 고객을 위해 성실을 다하고 변호비를 최대한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현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양심도 저버리고 하나님은 멀리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더둘로는 대제사장 측이 원하는 대로 사도 바울을 유죄로 이끌기 위해 벨릭스 총독에 아첨을 했습니다. 벨릭스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평화를 누리고(Pax Romana), 당신 때문에 우리 유대인들의 삶이 많이 개선되었으니 크게 감사드린다고 말했어요. 천하에 믿을 수 없는 직업인이 변호사입니다. 이 말을 하도록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동의했고, 그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사는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비하하고 폄하해서 벨릭스에게 말했어요.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하는 자-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성전을 더럽게 하려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3. 참 어처구니없는 고발문이었습니다.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이 사도 바울을 심문하면, 자기들의 고발문이 사실임이 밝혀질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바울은 더둘로의 말에 대해 13절,“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바울은 재판관 벨릭스 총독과 유대인들 앞에서 매우 침착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갈등 심화
4.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세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보람은 여기에 있었어요. 딤후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겨계하며 권하라.”바울은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디모데에게 복음 전도를 권하며, 자기 스스로 본을 보였습니다. 바울이 벨릭스와 유대인들 앞에서 전한 복음은 14-15절,“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정치적인 문제나 도덕적인 문제로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발된 것이 아님을 스스로 변호했습니다. 자신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기독교 복음을 따라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어요. 자신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구약성경-을 다 믿으며, 유대교인들과 같이 자기도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담담히 그러나 확신에 차서 말했습니다.‘나는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믿는 사람입니다.’그의 목소리는 법정을 울리는 천둥처럼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 유대 지도자들의 얼굴은 일그러지며 낮은 목소리로 불평이 오갔습니다.
4. 그들의 고소는 더는 진실을 담을 수 없음을 그들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과 마찰을 피하려고 했던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자기가 굳이 유대교 본산지인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그들과 다투려고 한 것이 아니고 기근 가운데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려고 이방 교회의 헌금을 1년 이상 모아서 온 일을 이야기했어요. 또 유대교인들이 자기에게 오해를 품고 있어서, 결례를 행하면서까지 그들과의 갈등을 없애고자 했던 노력까지 피력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다 알았습니다.
벨릭스도 바울이 로마를 향해서 어떤 정치적 선동을 하거나, 도덕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벨릭스는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23절,“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며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의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벨릭스는 자기 사저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듣기도 했어요. 벨릭스는 교활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가 선의로 바울을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속물이었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벨릭스의 이런 모습이 나타내주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실마리
5. 사도 바울은 1-3차 아시아와 유럽을 횡단하며 복음을 전할 때만 아니라, 재판정에서-또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의 태도는 동일했습니다. 바울은 마치 천상의 방패를 두른 군인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불타는 칼처럼 진리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활 신앙이라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었기에, 어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확신은 마치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햇빛과 같았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참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며 전한 것처럼,“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순수한 믿음을 마지막 순교하는 날까지 잘 지켰어요. 믿음과 삶이 순수하면 그리스도인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의 빛으로 구약성경을 3년이나 읽으면서 복음을 정리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 복음의 어떤 면을 강조하여 전할지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신약시대 복음의 최고 대가였습니다. 그를 능가하는 랍비-율법 선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6. 사도 바울이 말씀을 귀히 여기고 순종할 때,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도 계속해서 일어났어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최고 변호사 더둘로를 동반하여 유대인들과 함께 벨릭스에게 고발하는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은 조금도 그들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복음을 전했어요. 세계 역사는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바울은 16절,“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갖고 부활 신앙을 가진 자로서 자신의 마음이 청결함을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매우 성숙한 신앙을 나타내줍니다. 벨릭스는 속물 정치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세 번째 아내가 된 드루실라와는 25살 이상 차이가 났어요. 드루실라는 헤롯왕 가문 출신의 미모의 공주로 시리아 왕국의 아지조스 왕과 이혼하고 벨릭스 총독과 재혼을 했습니다. 벨릭스의 유혹에 전 남편을 떠났습니다. 벨릭스나 드루실라나 현실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했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이 돈이 많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바울이 이방 교회의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한 것을 알고, 그를 오래 감금시키고 있으면 자기에게 뇌물을 줄 줄 기대했습니다.
7. 벨릭스는 사도 바울에게 친절을 베푸는 척했습니다. 친구들이 그를 접견하게 허락하고 돌봄도(음식-돈) 허락했어요. 그의 탐심은 26절,“동시에 또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벨릭스는 바울을 구류시키고 2년 동안이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마음을 알고 바울은 가시아에게 상소를 하고 사도행전 남은 말씀은 로마로 가는 여정이 소개되었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을 만나며 25절,“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벨릭스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주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통해서 현실적 이익을 얻으려고 했어요. 반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의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벨릭스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편리와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통해서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잠시 마음이 움츠러듭니다. 형식적인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제시
8.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사람들이 준비하게 하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요한의 목소리는 광야의 거친 바람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그의 외침은 듣는 이들의 양심을 찔렀고, 그들의 삶의 잔잔한 연못을 뒤흔드는 파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당신의 삶의 여유(잉여)가 어디에 있는지 보라! 그 여유가 이웃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면, 당신은 천국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눅3:10-14)
벨릭스는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움을 느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인의 한계를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한없이 구류하여 두었습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와 자녀들의 결말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심판을 받고 인생을 마쳤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조차 구원의 기회를 놓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회개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보장되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 땅에 보상받지 못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기대
9. 사도행전 이야기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초대 교회를 어떻게 세워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의 절반 하반부는 바울과 선교팀의 이야기만 소개해주었어요. 나머지 사도들과 형제자매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을 세계 각지에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내가 전하고 가르쳐야 할 것들을 조심스럽게 터치해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전도자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는 마치 횃불을 든 사람처럼,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에게 길을 비추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들불처럼 퍼져 나가며, 어디를 가든 복음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의 어두운 길목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성령의 바람이 우리의 횃불에 불을 붙이기를 소망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뜻대로 순종하며 그의 생명을 다하기까지 쉬지 않았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기도합니다. 바울은 한 생명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10. 그의 길은 좁은 길이었지만, 그 길 끝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편안한 길입니까, 아니면 좁고 험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바울처럼 복음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우리가 전한 복음이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때, 그것이야말로 천국의 기쁨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