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습니다. 이 우주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그 생명책을 근거로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신 것이며 여전히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의 지킴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식을 자식답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삶에 깊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반성문도 쓰게 하시고 때로는 회초리를 대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번쩍 들어 올려주시며 ‘잘 했다’ 칭찬해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다정히 보듬어 안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 인생이 이만큼 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로 정확하게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지금 칠흑 같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우리의 삶은 정직하고 정확하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혹 자신이 저질러 놓은 엄청난 죄 때문에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이 삶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존재가 맞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본 모습을 망각해 버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떠난 자들의 추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에게 직접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지만 그 지저분한 놀라움을 추스르고 더 이상 그러한 어두움과 더러움이 없는 새 몸과 새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를 향한 정직한 삶의 기여입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우리 인생을 겪으면서 영원한 집인 하늘나라로 한발 한발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하늘의 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성도다움을 훈련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이 땅의 무대 세트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더러운 죄를 반복하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왜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한 가를 배우는 것이고, 허무(虛無)를 향해 돌진하는 역사를 바라보며 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쌓아놓은 물질과 공간은 불 타버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어떻게 그들의 최후를 맞는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만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들의 더러움이 폭로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뜻에 동의하는 자들의 행복이 드러나는 한시적인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역사와 물질과 공간의 한시적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를 가르치고 하늘의 소망을 공고히 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가 병이나 고치고 사업의 번창이나 빌어주고 자녀들의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무당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녁 여섯시만 되면 어김없이 울려오는 애국가에 발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마음에도 없는 경의를 표하던 기억이 납니다. 예배당에 앉아 혹시 그런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예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이며,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정말 여러분은 아십니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저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해결이나 하는 무속신앙의 모습과 섞여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비빔밥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복교가 되었다는 웃지 못 할 농담이 정설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처럼 구복(求福)자가 어떤 큰 힘을 가진 존재에게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먼이라는 무당을 중재자로 세우고 그를 통해 치성을 드리는 것은 샤머니즘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목사라는 샤먼을 중재자로 세우고 하나님이라는 그저 힘만 센 비인격적인 어떤 존재를 달래고 닦달해서 복이나 받아내려고 하는 그런 무당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와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게 되면 첫 번째로 찾아오는 것이 ‘고난’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수많은 샤먼들은 자신의 세(勢)를 늘리고 과시하기 위해 그 ‘고난’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어줍지 않은 ‘복(福)’으로 포장을 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청중이 듣기 싫은 소리는 안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교회의 강대상에서 ‘죄’와 ‘회개’, ‘고난’과 ‘심판’ 그리고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같은 주제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들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신비한 체험’같은 것들입니다.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넘어갑니다. 물질주의, 실용주의, 역사 낙관주의, 성공주의, 소유 지향성, 맘모니즘에 젖은 현대인들은 만사형통의 당근 앞에서 허리를 조아리고 연신 ‘주옵소서’를 외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掌中)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보겠다는 타락한 인간들의 수많은 시도들과 열매들이 참으로 부질없음을 이 역사 속에서 올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와 더러운 범죄도 때로 허락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절대 영원한 왕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질병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참 행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물질과 공간에 정나미가 떨어지게도 만드십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기’가 부인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자기를 왕처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밟아왔던 옛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다 가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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