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입장문]
일본에서도 주목한 광주전남지역 일제전쟁유적,
이토록 무심히 버려둔 채 일본의 반성 운운할 자격 있나!
지난 24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 보도는 한때 일제 식민 통치를 겪어야 했던 우리의 뒷모습을 들추는 것 같아 부끄럽게 한다. 일본의 3대 일간지이자 진보적 논조로 평가 받는 마이니치신문은 지난 5월 24일 1면 톱과 3면 절반을 할애해, 광주전남지역에 산재한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전쟁유적을 대서특필했다.
일본의 권위 있는 일간지가 이렇게 큰 지면을 할애해 한국 소식을 취급한 경우는 드문 일이다. 특히, 전쟁의 직접적 증거이자 가해자 일본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일제전쟁기지(일제전쟁유적)라는 민감한 소재를 톱기사로 비중있게 다룬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마이니치 신문은 전남 서남해안에 방치돼 있는 일본군 진지 실태를 소개하면서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한 옛 일본군은 이곳에서 본토 결정에 대비한 거점 구축을 추진했다.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역사적 배경을 소개했다.
특히 보도에서 주목한 곳은 광주 5.18기념공원과 5.18 당시 민주인사들이 끌려와 구금, 고문을 당했던 구 505보안대 일대다. 신문은 “그 일대는 전쟁 전에는 옛 일본 해군 광주항공대의 기지가 있던 장소였다. 공원 안과 주변에서는 지금까지 옛 일본군이 파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참호가 10곳 확인됐다.”며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한 일본군의 본토결전 계획과 5.18.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겹쳐진 이 참호는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지켜봐 왔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문은 끝으로 “전후 80년. 머지않아 전쟁 이전의 경험을 직접 이야기할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시대가 온다. 우리는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광주전남지역에는 벙커, 일본군 진지 및 방어시설, 비행장과 그 연관 시설 등 다수의 일제전쟁유적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버려지다시피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에는 <광주일보>, <KBS>가 기획취재를 통해 흩어져 있던 일제전쟁유적을 재조명하면서 관련 증언과 중요한 문헌 자료도 축적되고 있지만, 전라남도가 관련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한 것과 달리 광주광역시는 아무런 구상없이 손 놓고 있는 상황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해 식민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경찰과 군대를 통한 물리력이다. 다시 말해 일본군 시설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통치를 보여주는 직접적 증거다.
아울러 일본군이 조성한 이런 시설은 당시 조선인들의 피와 땀, 고혈을 짜내 구축한 것이라는 점에서 군국주의 일제의 광기를 고발하는 더 없는 교육현장이자 역사자원이다.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던 피해국 한국조차 침략전쟁의 증거이자 군국주의 일제의 광기를 보여주는 이들 시설을 이렇게 방치하고 무관심한 것을 볼 때, 일본은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피해국 우리조차 이렇게 가해의 증거에 무심하면서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반성을 운운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강조하지만, 마이니치 신문이 묻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우리 스스로한테 던져야 할 질문이다.
“전후 80년. 머지않아 전쟁 이전의 경험을 직접 이야기할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시대가 온다. 우리는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가”
2026년 5월 28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마이니치신문. 2026. 5.24]
<강점기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다>
<조선반도 결전에 대비>
2000개가 넘는 섬들이 흩어져 있는 한국 남서부 전라남도 앞바다는 예로부터 한반도로 향하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이 침공했을 당시에는 조선 수군을 이끈 장군 이순신이 이 일대에서 이를 맞아 싸웠다. 지금도 그 공적을 기리는 동상과 기념비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약 350년 뒤,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한 옛 일본군은 이곳에서 본토 결전에 대비한 거점 구축을 추진했다.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남서부 앞바다의 섬들에서, 옛 일본군이 남긴 ‘전쟁 유적’을 추적해 온 한 기자가 있다. 한국 공영방송 KBS 목포방송국에서 일하는 지종익 기자(46)다. 기자는 섬 가운데 하나인 용출도에 대한 두 번째 취재에 동행했다.
이 섬에는 정기 여객선이 없다. 목포항에서 전세 보트를 타고 섬으로 향하자 지 기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본인이 이 섬에 들어오는 건 아마 당신이 처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후로는요.”
이 섬에는 일본 패전 때까지 많은 일본군이 숨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태평양 각지에서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옛 일본군은 일본 열도에서 미군을 맞아 싸우는 본토 결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각지의 해안에 미군 상륙을 막기 위한 거점을 만들었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반도 역시 이 계획에 포함됐다. 최전선은 목포에서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제주도였다. 이를 중심으로 남서부 해상의 여러 섬에서도 군사용 호(壕)를 파는 작업이 진행됐다.
목포항을 출발한 지 약 20분 만에 용출도 남쪽에 도착했다. 둘레 약 2.4km. 평지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바위 지대와 숲이었다. 해안 가까이에 오래된 민가 한 채가 있었고,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섬 주민은 저 혼자입니다. 약 20년 전부터 어업을 하며 살고 있고 생활용품은 배를 타고 육지에 나가 구입합니다.”
섬의 유일한 주민인 김동오 씨(77)의 말이었다.
새 외에는 다른 동물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81년 전 이곳이 본토 결전의 전선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풍경이었다.
<사료에서 참호를 발견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옛 일본군은 한국 남서부 앞바다의 섬들에서 본토 결전에 대비해 진지와 군사시설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작성된 용출도 진지 배치도에는 군용 호로 추정되는 위치에 다섯 개의 번호가 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204’ 참호 근처, 섬 북쪽 해안에 도착했다. 참호로 가려면 먼저 높이 약 4미터 정도 되는 바위를 올라야 했다.
“왜 등산화가 필요하다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죠?”
안내를 맡은 KBS 지종익 기자(46)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바위를 올랐다.
표지판 하나 없는 길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헤치며 나아가는 지 기자를 따라 우리도 204번 참호를 향했다.
지 기자는 일본어가 능숙하다. 2024년 8월까지 KBS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그는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가 공개한 방대한 자료 검색 시스템을 조사하다가 조선반도에서의 본토 결전 준비 상황을 기록한 자료가 다수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묻히는 전쟁유적>
군용 호 배치도 역시 용출도뿐 아니라 한국 정부의 2015년 조사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은 여러 섬의 자료가 남아 있었다. 한국 복귀 후 가장 먼저 주목한 곳이 용출도였다.
2025년 7월 처음 섬에 들어간 지 기자는 유일한 주민 김동오 씨의 집 근처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을 발견했다. 일본군 자료에 표시된 ‘208’ 위치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어 북쪽의 ‘204’ 지점에서도 참호를 찾아냈고 이를 방송 특집으로 보도했다.
지 기자와 함께 북쪽에 상륙해 한 시간 가까이 걸었다. 풀숲 속에서 204 참호의 입구를 발견했다. 세로와 가로 약 1미터 크기의 입구로 몸을 숙여 들어가자 안쪽으로 갈수록 공간이 넓어졌다. 가장 높은 곳은 약 1.8미터, 최대 폭은 약 1.4미터였다. 길이 약 12미터 끝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작은 공간이 있었다.
측면에는 총안구(銃眼)가 있었고, 위쪽에는 환기구로 보이는 가느다란 사각형 통로가 지상과 연결돼 있었다. 일본군 진지 단면도 자료와 비교해보니 구조가 거의 동일했다. 총안구 너머로 바라보니 목포항으로 향하는 항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상륙하는 적을 감시하고 기관총 사격을 가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205도 찾아봅시다.”
지 기자의 제안에 따라 산속으로 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있다!”라고 외쳤다. 배치도와 정확히 같은 위치였다. 입구는 높이와 폭이 약 70센티미터. 내부는 물에 잠겨 있어 진입은 어려웠다.
손전등을 비추자 안쪽에서 204와 같은 콘크리트 구조 공간이 보였고 총안구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 기자는 감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에 온 사람은 어쩌면 일본군 병사 이후 처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기자가 이 참호의 존재를 보도하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전쟁 유적 관련 자료의 상당수가 일본에 있고, 실태를 밝히기 위해서는 일본 전문가들도 조선반도의 전쟁 유적에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일의 다음 세대로 잇다>
그렇다면 용출도의 참호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일본군의 전후 기록인 『조선에 있어서의 전쟁 준비』에 따르면, 목포 일대 방어는 1945년 6월 편성된 독립혼성 제39연대가 담당했다.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국군 최후의 병비로서 이른바 ‘총동원’이 되었고, 조선 내 예비군 소집 가능한 인원을 거의 모두 동원했으며, 여기에 다수의 훈련받지 못한 조선인 청년까지 포함되어 부대 전체의 질은 충분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여기서 말하는 ‘훈련받지 못한 조선인 청년’은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인 성인 남성을 뜻한다. 즉, 남서부 섬들의 진지 구축과 전투 준비에는 많은 조선인이 동원됐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 이전 조선인 동원 문제는 지금도 한일 간 역사 문제의 주요 쟁점이다.
지 기자는 말한다.
“전쟁 유적을 취재하면서 조선인 동원 문제가 민감한 이슈가 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과거 문제도 잘 해결되어야 양국의 우호적인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에 지하기지 있었나>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전쟁 유적은 섬뿐 아니라 조선반도 본토에도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지 기자가 특히 주목하는 곳은 남서부 최대 도시인 광주다.
광주에서는 1980년 5월 18일,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정권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진압했다. 16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날짜를 따 ‘5·18’이라고도 불린다. 도심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비극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5·18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일대는 전쟁 전에는 옛 일본 해군 광주항공대의 기지가 있던 장소였다. 공원 안과 주변에서는 지금까지 옛 일본군이 파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참호가 10곳 확인됐다.
그 가운데 하나에 들어가 봤다. 입구는 좁았다. 몸을 숙여 가까스로 안으로 들어가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높이 약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 깊숙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길이는 100미터가 넘는 듯했다. 참호는 위에서 보면 Y자 형태였고 수십 명이 생활해도 충분할 정도의 규모였다.
이 일대는 일본군 철수 이후 오랫동안 한국군이 사용해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참호가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목적과 상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 기자가 일본군 자료에서 찾아낸 것이 **「광주비행장 평면도」**였다. 검게 칠해진 표시가 수없이 있었고 그 위치는 현재 확인된 10개의 참호 위치와 일치했다.
여기에 추가 자료인 **「광주항공기지 공사현황보고서」**를 분석하자 목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문서는 1944년 10월부터 1945년 8월까지의 공사 계획을 정리한 표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하 거주시설 25×25×260 / 진척률 35% 공장시설 4×3×429 / 진척률 26%
숫자의 단위는 미터로 추정된다. 표에는 약 30개에 달하는 시설을 지하화하는 계획이 기록돼 있었다.
대규모 지하기지를 구축해 미군에 끝까지 저항하려 했던 것일까. Y자형 참호 입구에는 이런 안내판이 있었다.
“5·18 당시 이곳에는 군 정보부대가 있었다. 시민과 학생들을 지하에 감금하고 고문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장소다.”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한 일본군의 본토결전 계획과 5.18.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겹쳐진 이 참호는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지켜봐 왔을 것이다.
비행장 평면도에는 길이 300미터에 이르는 대형 참호도 표시돼 있었다. 지금도 지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 기자는 말한다.
“옛 일본군 시설은 일본 측 자료와 대조해 조사하고 보존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행정기관과 전문가도 함께 참여시켜 조사를 이어갈 각오다.
일본군이 아시아 각지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많은 일본 병사가 전사했고 현지 주민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옛 일본군 전쟁 유적 연구자인 전 四川외국어대학 기쿠치 미노루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에는 이런 일본군 전쟁 유적이 여전히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공동조사를 통해 실태를 밝히는 데 의미가 있다.”
전후 80년. 머지않아 전쟁 이전의 경험을 직접 이야기할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시대가 온다. 우리는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가. 지 기자의 도전은 일본인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