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우전에 8시 40분경 산막골로 차를 가지고 왔다.
한솔이 일행은 우전이 오기 전에 생각보다 빨리 나갔다.
곡운구곡 4곡 백운담에서 먼저 도착한 역문연 오동철사무국장을 만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정재억 회장과 정재경, 한희민,
신대수, 김남덕운영위원은 반가웠고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았다.
'곡운과 다산, 곡운구곡을 걷다'란 책을 낸 권혁진선생과 첫 만남도 있었다.
권선생의 안내로 삼일리에 있는 곡구정사[谷口精舍]유적지를 둘러봤다. 권선생이
찾아낸,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이 정사[精舍]와 완재정[宛在亭], 물레방아를
지었던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삼일리 마을회관과 화음동정사지 중간지점
쯤 되는 위치다. 상담[上潭]과 하담[下潭]이 있어 빼어난 계곡미를 보여준다.
주변에 피서객이 빼곡하게 모여 더위를 식히고 물놀이에 한창이었다.
석천[石泉]과 백록암지가 계곡 건너에 있다는데 석천은 물이 말랐고 백록암지도
남아있는 게 없다고 했다. 이렇게 기록을 바탕으로 유적들을 발굴해 훼손을 막고
복원할 수 있는 것은 해야한다. 후손들이 할 일이다. 권혁진선생의 탐구가 귀하다.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는 곡운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하도낙서, 음양도,
천근석, 월굴암, 삼일정의 각서가 남아있는 곳이다. 월굴암위에 초가지붕 정자와
삼일정만 복원해 놨다. 유준영교수가 곡운구곡을 찾으러 답사하는 중에 먼저
발견해 강원도유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곳이다. 18년간 곡운구곡을 찾기위해
수없이 답사를 했으나 내가 방화계에서 각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추정의 단계를
넘지 못했었다고 한다. 지금보면 길가를 따라 있는 구곡이라 싱거워 보이지만
곡운구곡도와 유교수의 자료를 가지고 현지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고서도 2년이
걸려서야 방화계의 각자를 찾아내고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그 고충이 상상도 안될 것이다.
제1곡 방화계부터 9곡을 지나 삼일리 화음동정사지까지 어디나 피서객들로 가득했다.
그 위로도 계곡이 좋은 곳은 계속 그럴 것이다. 처음 친구의 이끌림으로 삼일리계곡을
찾았을 때도 화음동정사지에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는 곳에서 더위를 식히고 왔었다.
촛대바위 아래 계곡으로 기억한다. 초행이었고 그런 유적들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당시 화음동정사지에 아무런 표지가 없었으니 유교수가 발견하기 전이었을 터이다.
지금의 길이 아니라 군부대 정문을 거쳐 다녀야 할 때였다. 뒤에 깊은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당시엔 까맣게 몰랐다.
유준영교수가 '계간 미술'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인지하게 되었고 미발견인지도 모른채
사창리에서 그림을 배우러 나오는 주민이 있어서야 발걸음을 하게 됐었다. 조세걸의
후학으로 현재의 구곡도를 그리고 싶어서였다. 구곡의 위치를 모르니 스케치보다는
찾아내는 일이 먼저였다. 여름과 겨울 며칠씩 화실을 닫고 물안골에 머물며 탐색을 했다.
머무는 동안 주민 대여섯 명 많게는 십여 명이 모여 곡운구곡에 관한 이야기로 지새웠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지금까지도 미궁속에 있으리라. 또 얼마나 파괴되었을 것인가.
특히 제1곡이 그랬다. 계곡을 절반가량 가로지른 바위엔 폭파시키기 위한 다이너마이트를
넣을 구멍들이 뚫려있는 걸 지금도 볼 수 있을 정도다. 각자[刻字] 방화[傍花] 중 화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 것은 인위적인 파괴의 흔적임에랴. 이 각자가 없었다면 나머지 8곡은 어디에도
규명할 단서가 없는 상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포덕각이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삼일리 주민이기도 한 서양화가 길종갑이 삼일리에선
부연 설명도 해주며 동참하여 고마웠다. 고향의 유적을 지켜야할 책무가 막중하다.
토종닭 백숙과 닭죽이 나와서 맛있었다. 인사말 중에 이번 가을 기필코 곡운구곡도를 완성
하겠다는 결심을 피력하고 박수까지 받았다. 서예가 여초선생님 생전에 완성해서 발문을
써주시기로 한 약속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제는 작고하셔서 영원히 이뤄질 수 없게 됐다.
산막골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생전에 그려낼 수 있었을 텐데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식후에 화음동정사지 옆 계곡 윗쪽에 있는 법장사를 둘러보며 답사를 마무리 지었다.
전통천렵은 이번엔 시행하지 못했으나 아쉬워할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답사가 보람있었기
때문이리라. 우전의 수고 덕분에 편하게 참여하고 산막골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맙다.
첫댓글 잘 들어가셨네요. 반가웠습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있어 역문연이 든든합니다.
우안화백님께서 소중한 답사기를 올려주셨네요! 20년 가까이 되도록 구곡 유적의 발견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합니다. 구곡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을 들으니 내심 많은 기대를 하게 되네요!
당시에 부딪쳤던 막막함이 다시 떠오릅니다. 찾아놓고는 실소가 나왔지요. 수수께끼처럼 답을 모르면 답답하고 알고나면 싱거운 것 처럼요. 유준영교수가 18년을 헤메면서도 추정에만 머물던 것을 유교수와 함께 확인할 때 허탈해 하던 그분의 표정이 생각납니다. 방화계도 수없이 답사를 했으면서도 그 큰 각자가 안보였다니요. 하긴 그곳 토박이 주민들이 합세해 그들의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방화계를 뒤질 때도 오직 우안 눈에만 띄었으니까요. 이런걸 행운이라 할런지요. 여초선생님을 모시고 안내를 했고 지금 표지석에 들어간 글씨를 인제 처소로 방문해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한 보람으로 남아있습니다.
단추를 제대로 꿰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화천 분과 이야기를 나누니 화천군청 공무원들을 움직이는 일, 또한 녹녹치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공무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은 아직 기초도 안되어있다고 봐야 합니다. 문화체육과에 전담 학예사가 필요한 이유가 됩니다. 더 이상 훼손만 안되도 다행으로 여겨야지요.
우안 선생님의 노고 덕에 저희는 편안하게 곡운구곡을 둘러 볼 수 있습니다.
몇번을 다녀도 갈때마다 새로움이 느껴집니다.
건강 잘 지키시어 우안 선생님의 곡운구곡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산막골로 들어오느라 15년을 넘게 곡운구곡도에 손대지 못했는데 이번 가을에 어떻하든 완성을 시켜보려합니다. 산천어축제 기간에 발표를 하면 의미가 더 새롭고 깊으리라 여겨서요.
선생님의 노고가 없었다면 삼연선생의 곡구정사도 찾기 어려웠을 겁니다. 다시 감사드립니다.
권선생님의 곡운구곡과 그 전반에 연결된 사항을 향한 깊은 학구열에 존경을 보냅니다.
만나서 반가웠고요. 곡구정사 유적을 더함으로 용담리와 삼일리 일대는 서말의 구슬이 꿰어지고 있습니다.
칠선동만 확정지을 수 있다면 한국 제일의 구곡 전시장이 될 수 있으려니 합니다. 행운을 기대합니다.
@우안[최영식]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있는 선생님 그림 제가 운영하는 카페로도 옮겨가도 되겠지요? 다음 카페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입니다. 한번 들려주세요.
@권혁진 좋습니다. 카페에도 한번 들르겠습니다.
교황님이 집전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에 참가하느라 우리 역문연 천렵에 참가치 못했습니다.
천렵 후기를 보니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네요. 금년 천렵 행사를 잘 진행해주신 회장님, 사무국장님, 권혁진 전문위원님, 우안 선생님, 신대수 운영위원님등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내년엔 인근의 자치단체 문화원과 향토사 연구단체를 초청해서 폭 넓은 교류를 가지려 합니다. 많이 협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교황님의 방한으로 위 사회에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듯 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낮은 곳을'이라 할까요.
특히 세월호 유족들을 향한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은 감동이었습니다.
운영위원장님 같은 글이 두개가 겹쳐서 하나는 삭제를 하였습니다.
우안선생님이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였고 당일 저희의 염원을 표현한것처럼 곡운구곡도가 오나성되기를 응원하며 기다립니다.
저역시 본적지를 삼일리에 두고있었는데 그동안의 무지가 한스럽습니다. 선친께서 계실때 좀더 이야기를 들어두었어야 하는걸 이제야 깨닳으니 아쉬움이 배로 남습니다.
제 고향의 ㅇ리이기도 한 곡운구곡문제는 늘 숙제로 남겨야할듯 합니다.
원로(遠路)에 너무 애쓰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사무국장님도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