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54
8월16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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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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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xo8Jioqr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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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고봉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잊지 않을 때, 찬란한 성덕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부적격한 지도자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들, 자기관리 등 기본도 안 되는 지도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까? 한 자리 차지하면 갑자기 신(神)이라도 된 듯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아랫사람들을 억압하는 지도자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 백성들을 아끼고 섬기는 지도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는 지도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멋진 국왕이 한 분 있습니다.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75∼1038)입니다. 그는 성덕이 왕좌에 숨어있을 수도 있으며, 걸인의 의복 안에 숨어있을 구도 있음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적 위대함의 최고봉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잊지 않을 때, 반대로 가장 비참한 곤궁 중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기꺼이 수용하고 사랑할 때 찬란한 성덕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무척이나 청빈했습니다. 왕으로서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아주 소박하고 단출한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백성의 필요성에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기에 굶주리던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활짝 열어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자신의 손에 맡겨진 헝가리 왕국 안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생애 안에 잘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신앙과 삶, 기도와 활동 사이에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현대 성인의 선구자요 리더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아들 에메리코에게 보낸 편지 안에는 그의 탁월했던 신앙심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면 아들에게만 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오늘을 살아가는 바로 나를 위해 남긴 편지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땅의 모든 지도자들이 귀를 기울여야할 성왕 스테파노의 유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잘될 때 교만해지지 말고 역경에 처할 때 실망하지 않도록 굳건한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께서 현세와 후세에 너를 높여주시도록 네 자신을 낮추어라. 중용지덕을 지니도록 하여라. 어떤 사람이간 너무 지나치게 처벌하거나 단죄하지 말아라. 온유한 사람이 되어 정의를 거스르는 것을 피하여라. 성실히 처신하되 누구에게도 수모를 주지마라. 정결한 사람이 되어 죽음의 충동인 사악한 유혹을 피하라. 이와 같은 것들이 왕관을 씌워주는 덕행들이다. 이런 덕행이 없다면 이 지상에서 제대로 왕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영원한 나라에 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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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uJZb0G-u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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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끼리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에 관해 묻습니다. 그런데 묻는 방식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는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사랑’에 관한 율법입니다. 그가 ‘행동’에 관해 물었기에, ‘행동 지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행동으로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팔아야 합니다. 돈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따름은 곧 욕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그분의 법이 내 안에서 실현되게 만들어야 완성됩니다. 자기 힘만으로 지키려는 율법은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행동으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한계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구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욕이 살아있는데 내어주려고 사랑하려 하니, 결국 이도 저도 안 됩니다.
영화 ‘싱글라이더’(2017)는 일밖에 모르던 한 가장이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삶을 무겁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증권회사의 지점장 강재훈은 회사가 부실채권을 팔아 피해자가 많이 생기고 회사가 와해하자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낍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와서 서재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호주로 유학 보낸 아내와 아들의 집 주소를 손에 적고는 술을 마십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보고 싶어 무작정 호주로 떠납니다.
호주에 도착하여 가족이 있는 집으로 찾아가지만, 집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슬쩍 들어가 살펴봅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돌아오는 소리에 급히 집을 나가서 목격한 것은 아내 이수진과 아들, 옆집 아저씨 크리스와 그의 딸 일행이 한 가족처럼 들어와 놀고 저녁을 먹는 모습입니다. 수진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고 그만두었다던 바이올린도 다시 연주를 시작한 상태입니다.
다음 날 그는 아내의 애인으로 의심되는 크리스를 미행합니다. 계속 미행하다가 크리스가 한 병원의 병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보고 본인도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크리스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재훈은 복잡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오고 다시 집으로 간 재훈은 수진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걸 몰래 지켜보고 아내가 주체적인 삶을 찾은 모습을 봅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 때문에 아주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수진이 오케스트라 면접을 보는 동안 재훈은 수진의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동네 노인의 목격에 의하면 재훈의 아들이 통증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크리스가 발견하고 맨발로 뛰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재훈은 수진과 크리스 몰래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만납니다. 아들은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아빠 맞냐며 기뻐하고 재훈은 아들에게 괜찮냐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동안 자신이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재훈은 크리스와 수진의 불륜 광경을 목격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자리를 떠납니다.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집에 몰래 들어온 재훈은 수진이 작성한 영주권 신청서를 발견하고 아직도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트립니다. 재훈은 잠자는 아들 옆에 누워서 아내와 아들이 매일 즐겁게 지내길 빌고는 집 밖으로 나와 오열합니다.
아들은 수진에게 아빠가 와서 자신과 얘기했다고 말하고, 수진은 그럴 리 없다 하면서도 의아해하며 한국의 집으로 전화를 거니 벨만 울립니다. 아내 수진은 크리스에게 사과하며 이성으로서의 관계를 거절하고 영주권 신청서를 준비하고 재훈에게 알리려 한국 집에 전화하지만, 또 다시 통화가 되지 않자 한국 집의 관리소장에게 전화해 비밀번호를 알려줄 테니 남편이 잘 있나 확인해달라 부탁합니다.
남편의 회사가 망한 것을 안 수진은 한국에 있을 재훈을 걱정해 열쇠수리공까지 불러 한국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건 컴퓨터 앞에 조용히 자는 듯 죽어있는 재훈이었습니다.
재훈은 가정을 위해 일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정에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의 일환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도 잃고 가정도 잃었습니다. 다 사랑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지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진도 남편을 사랑했지만, 자신에게 무심한 재훈보다는 옆에 있으며 자신과 아들을 챙겨주는 크리스에게 더 끌립니다. 불륜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죽었습니다. 수진도 사랑은 했지만, 자기 욕심을 버릴 수 없어 불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엔 반드시 ‘나’가 살아있어서 그 나의 소유욕, 성욕, 이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부자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마음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승님, 제가 사랑을 쟁취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해서 사랑이 된다면 나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 자아가 하느님처럼 살아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소유하려던 것을 잃으면 그 절망감에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은 ‘소유’하려는 마음이기에 항상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소유함은 창조자의 속성입니다. 피조물은 서로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너는 내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끼리 서로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 모두의 주인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충고처럼 ‘가진 것을 버리고’, 곧 ‘내가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참 창조자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 밑에서는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죽었다고 할 때 나의 생명까지 끊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것이고, 나까지 잘못돼 버리면 부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소유’가 되지 않고 적정한 ‘분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부모가 있는 형제 안에서 더 완전하게 성취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시고 나를 창조하신 주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나는 부모의 뜻만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때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 되고 그래서 나의 모든 소유욕이 사라져 마치 태양이 지구를 사랑하듯 상대가 있거나 없거나 그저 사랑의 빛을 보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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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6-22 :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그 젊은이가 생각하는 영원한 삶이란 자신의 만족과 함께 하느님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편안함이었던 것 같다. 이 질문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그 대가로 영원한 삶을 받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준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고 한다.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든지 간에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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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어떤 청년이 질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이미 그런 것들은 잘 지켜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준 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이라는 형용사는 네 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오 복음에만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제자들과 군중을 대상으로 이웃 사랑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이미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3-48 참조). 유다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전은 전심전력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을 전적으로 다 바치는 데 있습니다”(박영식, 『마태오 복음 해설』, 157면).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뛰어넘는 훨씬 더 큰 사랑이 요구된다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은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입니다. 성인은 어느 날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을 닮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이 수도 생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안토니오 성인과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웃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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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슬퍼하며 떠나갔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9,16)
여기서 ‘어떤 사람’은 ‘젊은이’이고(20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부자입니다(22절). 그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 저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습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뒤의 22절에, 그가 슬퍼하면서 떠나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는 그의 희망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간절한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일’이 무엇인지 몰라서 예수님께 그것을 물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일’을 말씀하시지 않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말씀하십니다. “......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19,18-19)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배워서 알고 있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잘 지키면 된다.”라는 뜻인데, ‘이웃 사랑 실천’을 좀 더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해서 실천되고 완성된다는 가르침입니다.(1요한 4,20-21)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0-22)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말은, “제가 실천하고 있는 계명들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더욱 특별한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라는 말은, 자기가 하느님의 계명들을 다 잘 지키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교만한 말이 아니라, “저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의 솔직한 말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르 10,21)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느님의 계명들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말을 바꾸신 것도 아니고, 앞의 말씀으로는 부족해서 새로운 가르침을 보충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의 부족한 부분을 완전하게 해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천’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느님의 계명들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정하셨지만, 그의 실천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첫 번째 부족한 점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족한 점은, 이웃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점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실천하는 이웃 사랑은 형식적인 실천으로 그치거나 최소한의 실천으로 그치게 됩니다.) 세 번째 부족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실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젊은이는 율법에 정해져 있는 자선은 잘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재산이 축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실천도 아주 잘하는 일로 보이겠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아주 부족한 실천입니다.)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를 믿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을 제대로, 완전하게 실천한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요한 5,39)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젊은이는 사도들 같은 제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은 갖추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재물’이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서 슬퍼하며 떠나갔다는 뜻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슬퍼한 것은 아니고, 영원한 생명과 재물 가운데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슬퍼한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슬픔입니다. 또 그의 ‘슬픔’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는 희망과 재물을 그대로 소유하고 싶다는 희망 사이의 충돌에 대한 슬픔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는 그 젊은이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말도 없고,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나쁜 사람이라는 말도 없고, 평소에 하느님의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경건한 신앙인이라는 것만 나타나 있습니다. 어떻든 그는 좋은 사람이긴 한데,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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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전에는 6억 명이 굶주렸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8억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1964년 유엔 세계 식량계획(United Nations World Food Programme, WFP)에 가입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가 되었고, 세계에서 10번째로 식량 원조를 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가입했던 아프리카의 기니는 아직도 원조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 인구의 10% 이상이 굶주리는 상황인데 우리가 먹는 음식의 35%는 버려진다고 합니다. 버려지는 음식이 1000조 원가량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만 아껴도 8억 명이 넘는 사람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제공되는 음식을 모아서 아이티의 꽃동네로 보낸다고 합니다. 아이티의 꽃동네 수녀님들은 미국에서 오는 음식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고, 남은 것이 12광주리였습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다면, 굶주리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8억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월(超越)은 신비한 깨달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만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초월이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애쓸 때, 우리의 삶이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奇蹟)은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만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적이란 연민의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초월과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가문비나무의 노래는 영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 의식이 더 깊은 단계로, 더 높은 단계로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 의식이 소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소명은 이웃의 필요를 헤아려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폰 살란트는 “네 이웃의 물질적 곤궁은 너의 영적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물음이 있습니다. 자기 삶이 어떤 사람 또는 무엇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은 선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이 내게 선함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에 기꺼이 자신을 선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믿는가?’라고 묻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내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부자청년은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청년에서 선한 일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렇습니다. 선한 일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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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판관들이 다스리는 동안에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그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이집트 종살이 탈출과 해방, 곧 구원의 큰 행위를 잊어버리고 늘 똑같은 죄를 저지릅니다.
주님의 진노와 처벌은 그들의 행실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다시 억압과 종살이의 상황에 빠집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려고 판관들을 세우십니다.
판관들은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중재합니다. 그러나 판관이 죽은 뒤에 그들은 하느님의 눈에 악한 일을 다시 저지릅니다. 이는 참으로 인간이 저지르는 죄의 단조롭고 슬픈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회개로 이끄십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상황에서 그리고 저지른 모든 죄악에도 아랑곳없이, 하느님을 믿고 충만한 생명을 회복하려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충실은 인간의 불충실보다 탁월합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적인 충실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에게 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음에 들어찬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고 전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옛 법을 충실하게 지키지만, 복음의 새로움을 향하여 확실하게 뛰어들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참된 보물을 차지하려고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의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가로막는 온갖 애착을 상징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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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판관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주 우상을 섬겼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한 조상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에 대한 배반이므로 다른 신을 섬기는 불륜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더욱 심화되어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콜로 3,5) 하고 명시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불륜과 욕정, 나쁜 욕망과 탐욕을 섬기지 말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이 많아 하늘 나라의 보물 곧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우리는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못한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재물과 탐욕’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재물 자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선행과 재산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장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 라삐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율법을 외면적인 삶에서 잘 지킬 수 있지만, 내면의 탐욕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을 잘 지키며 윤리적으로 결함이 없는 삶’이 완전한 삶이 아님을 부자 청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완덕의 길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성 비오 10세 교황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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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수홍 안드레아 신부님]
<부자 청년>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부자 젊은이가 자신의 재물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져간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를 찾아와서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행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계명을 들면서 이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부자 젊은이는 "그런 것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하고 의기양양해서 다시 묻습니다. 아마 나름대로는 이 젊은이가 윤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충실하게 살았던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대답은 결정적입니다.
"당신이 완전해 지려거든 가서 당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라고 청빈에 대한 확고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그이가 부자였음을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이에 부자는 갈등합니다. 그리고 근심하면서 예수를 떠나갑니다.
이 내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내가 가진 여분의 것도 남에게 주는 것이 아까운데 가진 것 모두를 주라니, 어찌보면 예수의 요구는 너무 무리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요구는 예수를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에 대한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말은 신앙인라고 하면서 적당한 세속과의 타협을 바라고 세속과 양다리를 걸치면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기꺼이 신앙을 버릴 수도 있는, 그래서 신앙이 마치 요술도깨비 방망이나 악세사리같은 도구가 되어버린 인간들에게 참된 신앙의 길을 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얄팍한 계산법과는 다르게 주어집니다.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선택들인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을 비우는 일을 과감하게 실행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반드시 더 큰 은총이 주어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한 예화가 생각납니다. 어떤 이가 천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가지의 의문을 지닙니다.
첫째가 나같은 인간이 어떻게 천당엘 왔을까 였습니다. 다음으로 가진 의문이 저런 인물이 어떻게 천당엘 왔을까 였습니다. 세 번째로 가진 의문이 그 사람이 왜 천당엘 못 왔을까 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눈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은 마치 개미가 인간을 판단하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신유박해가 있은 지 20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 신앙인들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만 보이고 사악한 사람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신심과 피를 흘려 순교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려 했던 용기는 200년이 지난 오늘날 성인이라는 월계관을 받게 되어 온 세상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진정 그들은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과는 달리 가진 것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신앙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단지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박해의 목적은 신앙을 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고 있습니까? 현대에는 무슨 박해가 있기에 그리합니까?
칼을 들이대는 물리적인 박해는 아니지만 교묘하게 다가오는 현대적 박해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순교는 어떤 것인지 오늘 이 강론을 통해 묵상해 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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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 삶의 본질이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바로 이 질문을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합니다. 이는 <루카>(10,25)에서는 율법학자가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그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 어떤 공로를 쌓고 그 공로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이는 우선 생명을 얻는 길은 선한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나가서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은 ‘행위’를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러한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 말씀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그리고 “당신께로 오라”,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네 가지 행동의 실행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네 가지를 통한 ‘행동의 전환’을 말씀하고 계신다기보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곧 이 문장의 핵심은 뒤 구절에 있습니다. 뒤 구절은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는 존재, 곧 당신께 속한 사람, 당신의 소유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 구절은 그러한 존재가 되는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자청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쥐락펴락하는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의 재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고, 재물을 따랐던 것입니다. 곧 자신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적 전환을 요청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오늘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청년처럼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슬퍼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슨 위대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소유,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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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가리고 있는 겹겹의 옷을 벗기시고, 벌거숭이로 만드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제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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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19,16)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가?'
마태19,16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십계명에서 이웃 사랑과 관련된 계명들을 언급하십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19,22)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가?'
젊은 부자는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말로 원했다면, 슬퍼하며 떠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몰랐던 부분을 알려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예, 가지고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가?'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매일매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 말씀에 순명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그 소중한 것을 너를 위해, 주님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때가 되면 내려놓고 싶지 않아도 내려놓아야 하고, 꼭 움켜쥐고 있는 것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채움의 여정에서 비움의 여정으로 나아가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다리 건너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내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어제보다 '조금만 더' 내려놓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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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짐이 지닌 뜻>
마태오 19,16-22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짐이 지닌 뜻>
가지고
있다는 것이
뜻하는
단 하나는
나눠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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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 이곳에서 피정을 하면 기도가 정말 잘 되겠어요.”
갑곶성지에는 피정의 집이 있는데 워낙 조용하고 또 분위기가 좋아서 기도가 저절로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안에 있으면 볼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피정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스마트폰도 꺼놓고, 단순하게 침묵 속에서 머무를 뿐입니다. 이때 보이는 것이 바로 자기 마음속에 있던 어두운 것들입니다. 이 어두운 것들이 계속 보이는데 과연 기도가 잘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피정 프로그램의 시작은 거의 모두가 자기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보게 하는 죄 묵상입니다.
피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냥 쉬기만을 바란다면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30일 동안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지요. 또 옛날 성화를 보면 수도자들이 사막에서 마귀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는 모습 모두가 내면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단순히 피정 자체에 참석했다는 것만으로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과거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자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가 말하는 선한 일은 곧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훌륭한 삶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한 이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가 기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 율법을 일러 주기만 하십니다. 이는 율법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다 지켜왔다고 자랑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사랑의 실천을 할 것을 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의 정신에 따라 온전하게 사는 것입니다.
부자 젊은이가 슬퍼하며 떠나간 것은 그가 나쁜 뜻을 품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너무 나약했음을 말해 줍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의지를 세워보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영적 생활이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또 의지를 세워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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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맞이했을 때...>
노르웨이의 한 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세 살에는 자신을 어머니처럼 돌봐주었던 누나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여동생도 몇 년 뒤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계속된 가족의 불행은 그를 신경쇠약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양이 붉게 물든 하늘을 보다가 마치 자연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느낌을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며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이 사람은 에드바르 뭉크이며, 그의 작품이 바로 ‘절규’입니다.
아픔을 딛고 삶을 새롭게 보려는 그의 노력이 이런 명작을 그릴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아픔을 맞이했을 때 다르게 보는 사람만이 아픔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픔 자체에 매립되는 사람은 슬픔과 절망 외에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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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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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 주님 추종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목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자주 만나는 그 유명한 시편 성구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사람,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바로 이것이 종교적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서 샘솟는 열정이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유명한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만드셨으니, 우리는 당신 안에 머물때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예전 써놨던 자작시 두 편도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새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은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당신의 사랑이 되고 싶다.”-1998.12.25.
세월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같은 심정입니다. 당신이 지칭하는 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인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과 사랑의 만남을, 사랑의 일치를 갈망하는,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평생 이런 주님을 만나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하고, 아니 아예 이런 주님께 대한 자각없이 생각없이 대충 살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사랑의 만남이, 사랑의 일치가 누구나 목마르게 찾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 아니고는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채워줄 수 없는 우리의 끝없는 영적 목마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대하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 젊은이 우리 보편적 인간상입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오늘 복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참 아이러니 하게도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앞에두고 영원한 생명을 묻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만날 때 영원한 생명인데,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관상보다는 해야 할 활동의 일을 찾습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
“어떤 것들입니까?”
“살인해서는 안된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영적 명의이신 주님께 영적 상태를 진단 받는 젊은이입니다. 참으로 십계명과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해온 훌륭한 모범적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목말라 하는 젊은이입니다. 그처럼 오래 계명을 실천해 왔어도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외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목말라 하는 우리 모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결정타가 된 권고 말씀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영적 명의이신 주님은 진단은 정확했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처방을 필요로 하는 젊은 부자였습니다. 은수자들의 아버지, 사막의 안토니오를 회심케한 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안토니오입니다.
이제 그만 땅에 보물을 쌓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권고입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눠 비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부분적 지엽적 계명을 지켜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사랑하여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만나 따를 때 저절로 계명 준수의 실천입니다.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젊은이에게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 환히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우리를 비춰주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마음의 중심인 하느님 자리에 재물이 또아리 틀고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주님을 만나고도 몰랐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절호의 기화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참 보물인,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참으로 만났더라면 이렇게 좌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 슬퍼하며 떠났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젊은이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만날 때 회개와 겸손이요 무집착의 이탈의 삶에 자발적 따름의 주님 추종의 삶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의 주님은 고정적 실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찾아 만나 사랑하고 따라야 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유동적 실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부터는 판관기의 시작입니다. 판관기의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패턴의 악순환의 죄스런 현실입니다. 판관이 있을 때는 주님을 잘 섬기다가 판관이 떠나면 또 탈선하여 악행을 저지르고, 고통을 당해 부르짖으면 하느님은 또 판관을 보내 구해주시고, 끊임없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예나 이제나 변함 없는 인간의 부정적 현실입니다. 답은 단 하나 날마다 늘 주님과 새로운 사랑의 만남의 회개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회개하지 않을 때 반복되는 악순환입니다.
이런 인간의 무지와 망각에 대한 근본적 치유는 날마다 주님과 새로운 사랑의 만남과 추종의 삶뿐입니다. 이래야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회개를 통한 주님과 사랑의 만남, 버림과 비움, 따름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고 당신을 한결같이 따를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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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따르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의무입니다. 그 의무만 충실히 이행해도 하느님 뜻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1)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고, 실제로도 나름 잘 살아왔을 그 청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부족함이 느껴졌나 봅니다. 영원한 생명이 이 정도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들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지금처럼만 살아도 충분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을까요? 사실 갈망은 부르심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더 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지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께서 진복에 이르는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이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에도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발설되지 않는 비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자기와 식구들을 건사하며 살아야 하는 보통의 평범한 이들에게도 큰 도전을 줍니다.
과연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되는 '구원'의 가능성은 재물의 양과 반비례할까요? 그렇다면 재산을 어느 정도 이상 지닌 이들은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그 해답을 제1독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판관 2,11-12)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리를 잡고 사는 가나안 땅의 신들입니다. 바알의 뜻은 "주, 주인"이기 때문에 야훼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은 땅의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바알에게 이끌려 그들을 받들어 모십니다. 왜 이스라엘이 굳이 하지 말라는 바알 신 숭배에게 빠져든 걸까요? 바로 바알 신이 재산을 증식시켜 주고 부을 축적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래라 저래라 요구조건이 많으신데 비해 바알은 실질적으로 손에 쥐어주는 게 더 많아 보이니까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이 베풀어 주신 약속의 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살아야 하는 본분을 잊고, 이방 민족들을 따라 재산과 재물을 탐욕하며 하느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지고 맙니다. 성경은 내내 이 죄악을 "불륜"이라 칭합니다.
"제 스스로 덫에 걸렸네."(화답송)
이스라엘에게 재물과 하느님은 병립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하고 어느 한 편을 외면할 수 밖에 없지요. 하느님을 선택하고 섬김으로써 누리는 은총과 축복보다 눈에 보이는 재물이 더 귀하고 소중했던 겁니다. 이 덫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걸려든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탐욕은 그만큼 드센 유혹거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빈털털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믿고 의탁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유형 무형의 온갖 축복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콕 집어 재물 축복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을 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니까요. 차이는 그걸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서 발생합니다.
오늘 복음 속 젊은이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더 믿는지, 자기 손의 재물을 더 믿는지" 질문을 받은 것과 다름 아닐 겁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제 손의 것에 의탁하는 삶을 유지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 부자 청년을 처음에는 계명 준수의 윤리적 삶으로 부르셨고, 그 다음은 갈망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려온 넉넉한 재물이 오히려 버림과 따름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정적 순간에 그냥 그동안 살아온 수준에 머물기로 결심하지요. 사실 그만큼도 준수하니까요.
그 청년이 예수님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느낀 슬픔은 하느님의 마지막 부르심일 수도 있습니다. 이 복음서 뒷편에서 그가 어떻게 응답할 지 모르지만 이대로 끝이 아니길 빕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입당송)
이 고백이 벗님의 것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맛깔진 행복을 벗님이 꼭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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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A3Z7-X8CM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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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여름이
멈추어야
가을이다.
멈추는 것이
성숙이다.
많은 물질로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없는 애처로운
우리들 삶이다.
매순간
하느님을
놓치며
살고있는
우리들 시간이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아픈 현실이다.
복음의 토대는
나눔과
감사에 있다.
감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참된 나눔을
실천하는
기쁨에 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이 우리의
인격이 될 순
없다.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인격을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멈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물질의
충만함은
관계의
충만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욕심과 욕망을
멈추는 것이
삶의 참된
변화이다.
복음은
우리자신을
보게한다.
우리의 걱정과
우리의 뜻이
하느님을
앞서갈 수는
없다.
물질도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죽는 것이
잘 따르는
삶이다.
물질에 죽고
욕심에 죽고
넓은 길에서
죽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복음의 길이다.
복음은
비우고
나누고
감사하는
기쁨의
좁은 길이다.
욕심을
버린 이들만이
통과하는
좁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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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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