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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시창작 강의◇ - 김관식
◇시창작 강의◇
시의 제목
-좋은 시제 붙이는 방법
김관식
1. 프롤로그
시에서 제목은 시의 첫인상이다. 제목이 좋아야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시의 제목은 좋으나 내용이 그 제목을 감당하지 못할 때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주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명리학에 성명학이 있어서 예로부터 사람의 이름이 좋아야 출세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좋은 이름을 얻기 위해 작명가들에게 작명을 맡겼다. 오늘날도 이름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는 사람들이 개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작명을 직업으로 하는 작명가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대방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널리 알려지기 쉬운 이름에 대한 맹신은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성명학에서 좋은 이름을 작명하기 위해 이름의 구성, 발음, 글자, 뜻 등을 고려하여 이름을 짓는다. 명리학에서는 태어난 연월일시 사주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이름은 다시 개명하여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해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명신청자가 몇 십 만 명에 이를 정도라고 보면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하물며 시의 이름도 그 시의 운명을 좌우한다. 길을 가다가 가게의 상호가 좋아 그 가게를 찾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의 제목에 끌려 영화를 관람한다거나 서점에서 책의 제목이 좋아 책을 구입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물건에도 상표권이 존재한다. 명품으로 알려진 상품명으로 믿고 물건을 구입하게 될 정도이다. 그런가하면 상품명을 유사하게 예를 들어 “예쁜이”라는 제품이 인기 있는 상품명이라면 그 이름과 유사한 상표법에 위반되지 않게 “예쁜아”라고 명명한 유사품이 나오게 된다. ‘이’, ‘아’의 차이를 두어 유명상품의 인기에 편승하여 소비자가 오인하여 구입하게 하려는 짝퉁 상품 이름을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시의 제목도 마찬가지로 시의 운명을 판가름하게 된다. 시제는 곧 시의 첫인상이다. 시제만 보고서도 시에서 무엇을 말하려는지 예측하게 된다. 시의 주제를 암시하여 독자들의 호기심을 촉발하기도 하고 외면받기도 하며, 시인의 성격까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명리학에서 이름을 운명론으로 여기지만, 심리학에서 분명 이름은 자기충족예언이나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기도 한다.
따라서 시의 제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2018년 여름 호에 실린 30분의 67편의 시와 시조를 통해 시의 제목을 어떻게 붙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 현대시의 제목에 대한 탐색
시제는 시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요인이다. 시의 내용과 성격을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촉발할 수 있는 시제여야 한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시의 제목을 붙이는 경우, 먼저 제목을 정해놓고 그 제목에 알맞은 시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시를 다 쓰고 난 뒤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제목이 먼저 정해놓고 시를 쓰는 경우는 그 제목이 시인의 상상력을 가두어둘 개연성이 크고, 그렇게 되면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는 시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시의 창작과정에서 영감이 떠오르면 그 영감에서 시의 종자가 발아하고 처음에 막연하고 모호한 정서가 연상 작용에 의해 유사 이미지와 결합하여 변용되고 또 형상화 되는 과정을 통해 구체화되기 마련이다. 이때 구체화된 관념이나 이미지에 의한 제목이 확정되어야 시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암시하거나 대표하는 시제가 확정되기 때문이다.
시를 다 쓰고 나서 제목을 붙이는 경우, 시의 제목을 붙일 때 시의 내용이 추상적이라고 여겨질 때는 시제는 구체적인 제목을 붙여야 하고, 시의 내용이 구체적일 때는 추상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습작기 시인들은 이러한 기본 원리와 무시하고 시제를 붙이기 때문에 시제만 보고도 습작기 시인인지 노련한 시인인지 구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습작기 시인이나 시의 창작 원리를 공부하지 않는 시인들은 시제가 관념어나 추상어, 한자어, 장황한 수식어가 들어가는 시제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제가 관념어로 붙여져 있다면 그 시를 읽어보지 않아도 그 시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감정토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시제 자체가 그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척도가 되고만 셈이다.
현대시가 시를 통해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주제를 암시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에 시의 제목도 마찬가지로 주제를 직접적으로 노출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게 된다. 주제를 바로 시제로 노출하게 되면 시의 형상화가 이루어지기 곤란하게 된다. 따라서 ‘사랑’, ‘이별’ 등 주제를 시제로 직접 노출하면 일반 독자는 그 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시를 읽지 않고 외면하게 만다.
따라서 시의 제목은 시의 첫 행처럼 시의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제목의 개념과 기능
제목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 대사전에서는 “작품이나 강연, 보고 따위에서 그것을 대표하거나 내용을 보이기 위하여 붙이는 이름=제(題)”라고 풀이되어 있고,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서는“ 겉장에 쓴 책의 이름글제, 과제”, 한글학회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작품이나 글 따위에서, 그것을 대표하거나 그 내용을 보이려고 붙이는 이름”, 그리고 이기문의 동아 새 국어사전에서는 “글제, 책이나 문학작품 등에서 그것의 내용을 보이거나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정의 되어 있다.
오늘날 현대시가 노래보다는 이미지에 의해 보여주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만큼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경우 그림은 이미지 자체가 되는데,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화가의 표현의지로 설명할 수 있는 제목에 해당하게 된다. 시 또한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로 형상화된 이미지를 시인의 표현의지를 암시하는 시제가 붙여지게 된다.
마르셀 뒤샹은 남자소변기에다가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전시장에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화장실의 남자소변기라는 생활용품이 이름이 붙어서 작품으로 변신하였다. 화장실에 놓여있는 변기가 전시장에 전시되었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것을 현대 미술의 표현기법의 하나인 레드 메이드인 것이다. 레디메이드란 기성품을 일상적 환경과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사물 자체의 무의미함만이 남는다. 화가가 특정한 시공간에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기 구조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레드 메이드는 현대시의 원리와 제목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암시하고 있다.
현대시가 언어에 의한 이미지의 시각화라고 볼 때 언어의 정보 전달기능에 고착화된 기표와 기의의 고정된 관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시의 제목도 새롭게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제목은 시의 이미지나 사물의 존재 양태의 정체성을 표상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빠’라는 말은 예부터 ‘오라버니’를 의미했으나 요즈음에는 ‘애인’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해석도 다르다. 제목이란 사물의 정체성을 지시하지만 사물 자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제목이 달리 해석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목은
첫째,
정보 전달 기능과 색인 기능을 하게 된다. 내용을 압축하고 요약하고, 정보의 핵심을 독자적으로 전달하는 “제목의 요약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때 제목이 내용을 충실히 요약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제목의 적합성, 정확성 등의 제목 내용의 문제, 용어 사용의 문제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러나 시에서 시어가 일상적인 의미나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전달이며, 이미지의 시각화를 통한 구체화라고 볼 때 정보 전달 기능은 시에서 그 의미의 비중을 둘 때 전근대적인 감정토로의 시로 퇴행해버릴 우려를 낳고 있다. 그러나 시의 원리를 잘못 이해하는 습작기 시인들은 시를 정보 전달 기능을 목적으로 한다고 오인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시작 태도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색인 기능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이 관심을 갖는 정보나 내용을 쉽게 식별하는 제목에 의존하게 된다. 독자는 제목을 일단 훑어보고 무엇을 읽을 것인가 결정하가 되는데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쉽게 찾도록 도와주는 안내의 역할이 바로 색인 기능이다.
둘째,
내용의 이해와 의미해석을 돕는 기능을 한다. 이는 시의 내용의 이해를 돕는 보조기능으로 제목이 내용의 이해를 돕고 의미를 파악하는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시에서 주로 은유 제목을 붙이는 경우에 은유적인 표현의 실체인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시가 표현됨에 따라 그 제목이 내용을 압축하여 제시하게 되는데 이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에서 화자인 나를 비유한 ‘나룻배’와 행인과의 관계를 통해 인내와 희생, 사랑에 대한 숭고한 의지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암시하여 내용의 이해와 의미해석을 돕는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셋째,
흥미를 유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를 제목의 선택성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독자의 흥미와 관심을 유인하는 기능을 말한다. 수많은 시들 중에서 독자의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제목의 시어나 형태 등이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독자들이 읽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제목이 호기심을 끌기는 했으나 내용이 부실하다면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어 시원찮은 시제로 관심을 끌기는 하였으나 내용을 보고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도록 내용까지 알찬 시로 시제와 내용이 일치한 시를 써야 한다.
넷째,
개성을 표현하는 기능을 들 수 있다. 이를 “제목의 주관성”이라고 하는데, 말하고자하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제목을 의미한다. 제목을 통해 시인의 색깔을 감지할 수 있고, 시인의 독특한 개성적인 제목을 통해 그 시인의 주장하고자하는 의미를 유추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섯째, 발표지면의 미화의 기능을 들 수 있다. 다양한 형태로 제목이 배치되었을 때 지면이 미화되어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따라서 생동감 있고 변화무쌍한 구성에 의해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2) 좋은 제목 붙이는 방법
시의 제목은 주제나 제재를 제목으로 붙이거나 암시 상징하는 단어나 어구, 그리고 문장으로 붙이기도 하며 시의 첫 행이나 끝 행을 그대로 붙이는 경우도 있다. 이승하는 『시 쓰기 교실』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시창작 경험을 들어 말하고 있다.
첫째,
시 전체의 내용을 압축하여 말해 줄 수 있는 것을 제목으로 삼는다. 예) 님의 침묵(한용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또 다른 고향(윤동주), 그 날이 오면(심훈), 3월1일의 하늘(박두진), 고지가 바로 저긴데(이은상),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모윤숙),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조종현),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김춘수), 울음이 타는 강(박재삼),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흔들릴 때마다(감태준),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등이 있다.
둘째,
가급적이면 남들이 써본 적이 없는 참신한 제목을 만들어보도록 한다. 예) 평이한 제목-봄(김소월), 바위(유치환), 고독(김광섭), 황혼(이육사), 해(박두진), 풀(김수영), 가을에(정한모) 등, 눈길을 끄는 제목-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서정주), 도전적인 제목-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남진우), 짧은 문장이나 의문문-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정진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황동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정현종), 인생은 언제나 속였다(이승훈),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문정희), 게으른 사람은 아름답다(이문재),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박정대), 꽃 앞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묻다(복효근) 등이 있다.
셋째,
현대시의 제목은 거창함과 추상과 관념을 배격한다. 예)거창한 제목-조선의 맥박(양주동).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오상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제목-碧毛의 猫 (황석우), 離恨(홍사용), 末世의 欷歎(이상화), 黑房悲曲(박종화), 소박하고 친숙한 제목-알수 없어요(한용운),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별 헤는 밤(윤동주), 국화 옆에서(서정주),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김춘수), 하루만의 위안(조병화), 그대는 별인가(정현종),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이가림). 단순히 시제를 ‘봄’이라고 하는 것보다 변형하여 봄은 간다(김억), 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 봄을 위하여(이유경), 봄이 오는 바다(조인자), 봄꽃이 꿈처럼 휘날린다(박혜숙) 등이 있다.
이상에서 좋은 시의 제목을 잘 붙이려면 다음과 같다.
① 시의 내용에 대한 핵심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② 쉬운 낱말을 선택하고, 올바른 어법 및 문장구조로 간결하게 붙인다.
③ 시의 핵심을 찌르는 감각과 리듬이 있는 시어를 선택한다.
④ 멋있고 운치 있는 참신한 제목이 좋다. 가식적이고 상투적인 시어는 배제해야 한다.
⑤ 말의 순서를 의식한다. 어순의 세심한 배려를 고려하고 일반적으로 주어가 앞으로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나 논리성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에서 순서를 뒤바꾸는 방법이 때로는 제목이 내용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⑥ 미학적인 시어나 조어 능력을 발휘하여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강인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새로운 의미의 합성어로 제목을 붙이는 것이 좋다.
⑦ 관념어, 추상어가 중복되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관념어가 중복되면 그 의미를 시인 혼자만 알지 독자는 전혀 막연하여 공감하지 못한다. 예) 슬픈 사랑, 외로운 이별
◎ 제목의 중요성◎
제목은 그 시의 이름이다. 이름이 좋아야 시에 대한 호감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이 읽고 싶은 충동이나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렇게나 제목은 붙이면 독자들은 시를 거들어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의 제목 붙이는 원칙은 제목이 뜻이 넓은 관념어나, 추상어, 직접적인 정서관념어인 경우 시의 내용은 구체적인 경험을 진술하거나 이미지를 제시하여야 한다. 시의 제목이 관념어이고 시의 내용도 관념어라면 시를 공부하지 않는 습작기 시인이라고 단정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소재, 주제, 줄거리 압축, 명사 하나로, ○과○, 상징적인 것 : 주홍글씨, 감자, 계절명, 지명, 분위기 : 달빛 고요, 매혹적인 것 : 안개는 나를 유혹한다. 인상적인 것 :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
첫째, 내용과 너무 동떨어진 것은 피해야 하며
둘째, 평범하지 않고 특색있는 제목을 택할 것이며,
셋째, 간결하고 선명할 것이며
넷째, 흥미를 끌고 매력적인 것으로 제목을 붙여야 한다.
다섯째, 장식적인 수사를 피하라.
여섯째, 상투적인 시어, 관념적인 시어는 제목으로 좋지 않다.
일곱째, 소재를 지칭하거나 시의 내용을 상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시어로 제목을 붙이면 무난하다.
3. 예시 (시의 제목과 시의 내용이 일치한 시들)
고향(故鄕)
백 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 문학』 2호(1938. 4)
민물낚시
김관식
물 속 붕어에게
물음표 던졌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낚시 바늘 끝에
먹잇감 매달아
붕어에게 물었다
설문지 앞
응답 찌 까닥까닥
방울 딸랑딸랑
낚싯대 거머쥐고
응답 끝나자마자
설문지 거둬들였다
파닥파닥
길길이 날뛰면서
뻔히 알면서 왜 묻느냐?
살기 위해 입 벌리다가
설문조사에 낚였다
낚싯대 휘청휘청
온몸 붕 떴다
똥파리
김관식
구더기 떼
득실득실
똥냄새 맡았다
똥똥
동동
파리 떼
우글우글
돈 냄새 맡았다
돈돈
동동
여기저기
마구 똥 싸놓았다
파리똥 마침표
돈더미
구석구석 알 실어놓았다
구더기 우글우글
세상은 온통
구린내 펄펄
똥파리들 세상
장미 도둑
바스코 포파(1922~91)
누군가는 장미 덤불이고
누군가는 바람의 딸들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장미 도둑이지
장미 도둑들이 장미에게 몰래 다가와
그 중 하나가 장미를 훔쳐
자신의 심장 속에 숨기네
바람의 딸들이 나타나
그 꺾어진 아름다움을 보고
도둑들을 추격하지
그들은 도둑들의 심장을 하나하나 여네
한 도둑에게서 그들의 심장을 발견하네
다른 도둑들에게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지
그들은 그들의 가슴을 열고 여네
그들의 심장하나를 찾을 때까지
그리고 그 심장 안에서 도둑들의 심장을 찾을 때까지
숨바꼭질
바스코 포파(1922~91)
누군가 다른 사람을 피해 숨는다
그의 혀 밑에 숨는다
다른 이가 그를 땅 밑에서 찾는다
그는 그의 이마 위에 숨는다
다른 이가 그를 하늘에서 찾는다
그는 자신의 망각 속으로 숨는다
다른 이가 그를 풀밭 속에서 찾는다
그를 찾는 것이 보인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은 없다
그는 제 자신을 잃고 있는 것을 본다
*바스코 포파 :
유고슬라비아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세르비아의 전래 수수께끼, 주문, 잠언, 자장가 등에서 시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뽑아 탄생한 첫 시집 『껍질』은 그 혁신성과 실험성으로 전후 유고슬라비아 초현실주의 문학의 신호탄으로 평가 받는다. 시집으로는 『절음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