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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은 구름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세월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날엔 항상 하늘이 열려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2.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3.
아아 하늘, 하늘에다 나를 맡기고 싶다.
서러울때는 하늘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순하게 흑흑 느껴 울고 싶다.
4.
하늘에 노을이 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온통 피로 물들이듯 타오르는 노을.
나의 아픈 그리움도 일제히 일어서서 가슴 속에 노을을 타고있다.
5.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다.
타다가 타다가 검붉은 재로 남은 나의 그리움이 숨어서 숨어서 노을로 지고 있다.
6..
'하늘'이란 말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하늘 빛 향기.
하늘의 향기에 나는 늘 취하고 싶어 '하늘', '하늘' 하고 수없이 뇌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또 하늘을 생각했다.
7.
하늘을 생각하다 잠이 들면 나는 하늘을 나는 한 마리새,
연두색 부리로 꿈을 쪼으며 하늘을 집으로 삼은 따뜻하고 즐거운 새.
8.
하늘은 환희의 바다.
날마다 구름으로 닻을 올리고 당신과 함께 내가 떠나는 무한의 바다.
하늘은 이별의 강.
울어도 젖지 않고 흐르지 않는 늘 푸른, 말이 없는 강.
9.
하늘은 속일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울.
당신이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나의 얼굴.
내가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당신 얼굴.
하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어도 흔들임이 없다. 깨어지지 않는다.
자주 들여다 보기가 갈수록 두려워지는 너무 크고 투명한 나의 거울.
10.
지구 위에 살다가 사라져 간 이들의 숱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하늘.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든 이야기를 또한 기억하는 하늘.
하늘은 그래서 죽음과 삶을 지켜보는 역사의 증인.
11.
하늘이 내져 준 하늘의 진리, 하늘은 단순한 자에게 열린다는 것.
하늘은 날마다 노래를 들려 준다. 티없는 목소리로 그가 부르는 노래.
나 같은 음치도 따라 할수 있는 말고 푸른 노래.
온 몸으로 그가 노래를 하면 나는 그이 노래가 되어 하늘을 오르고 싶다.
12.
오늘도 하늘을 안고 잠을 잔다. 내일도 하늘을 안고 깨어나리라.
나의 모든 것, 유일한 기쁨인 사랑.
사랑엔 말이 소용없음을 하늘이 알려 주도다.
살아 있는 동안은 오직 사랑하는 일뿐임을 하늘이 알려 주도다.
13.
오늘, 당신은 몹시 울고 있군요. 나의 모든 이를 위해서 통곡하고 있군요.
그래요, 실컷 쏟아 버리세요. 눈물비를 쏟아 버리세요.
세차게, 아주 세차게. 당신이 울고 있는 날은 나도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 함께 울고 있어요.
14.
하늘의 파도 소리. 나를 부르는 소리.
오늘의 내 슬픔 위에 빛으로 떨어지는 당신의 푸른 소리.
당신의 파도 소리.
15.
나는 구름이 되어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
나의 집이 하늘인 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 임을 잊지 말아요.
높이 떠도는 외로움도 어느날 비 되어 당신께 가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멀리 멀리 있어도 부르면 가까운 구름인 것을.
16.
꼭 말하고 싶었어요.
지나가는 세상 것에 너무 마음 붙이지 말고 좀더 자유로워지라고.
날마다 자라는 욕심의 키를 아주 조금씩 줄여 가며 가볍게 사는 법을 구름에게 배우라고.
구름처럼 쉬임없이 흘러가며 쉬임없이 사라지는 연습을 하라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의 구름이라면.
17.
하늘은 희망이 고인 푸른 호수.
나는 날마다 희말을 긷고 싶어 땅에서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댄다.
내가 물을 많이 퍼 가도 늘 말이 없는 하늘.
18.
내가 소리로 말을 걸면 침묵으로 대답하는 당신.
당신을 부르도록 나를 지으셨으며
나의 첫 그리움인 동시에 마지막 그리움이기도 한 당신.
당신은 산보다도 더 높은 내 욕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세상에서 치닫는 나의 허영의 불길을 단숨에 꺼 버리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일체의 그리움도 당신은 거두어 가신 뒤에
나는 세상에서의 자유를 잃었으나 당신 안에서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당신의 가슴에서 희망을 날리는 노란 새가 되었습니다.
19.
하늘 색 연필을 깎아 하늘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글을 쓰는 아침.
행복은 이런 것일까. 향나무 연필 한 자루에도 온 세상을 얻은 듯 가극 찬 마음.
내 하얀 종이 위에 끝없이 평쳐지는 하늘 빛 바다.
나에겐 왜 이리 하늘도 많고, 바다도 많을까.
어쩌다 기도도 할 수 없는 우울한 날은 색연필을 깎아서 그림을 그렸지.
그러노라면 봉숭아 꽃물 들여 주시던 엄마의 얼굴이 보이고, 소꿉친구의 웃음소리도 들였지.
오늘도 나는 하늘을 본다. 하늘을 생각한다. 하늘을 기다린다.
하늘에 안겨 꿈을 꾸는 동시인이 된다.
끝없이 탄생하는 내 푸른 생명의 시를 하늘 위에 그대로 펼쳐두는 시인이 된다.
- 이 해인 시 ‘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대며 ‘모두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 이 해인 시 ‘살아 있는 날은’
* ’ 내 혼에 불을 놓아 ‘1979.
어느날
아름다운 절에 놀러갔습니다.
차 마시는 방
앞 산의 숲이 그대로 들어 있었지요
진짜 숲인 줄 알고
새들이 와서 머리를 부딪히고 간다는
스님의 말을 전해들으며서
사람들은 하하호호 웃었지만
나는 문득 슬프고
가슴이 찡했지요
위장된 진실과
거짓된 행복
하도 그럴 듯해
진짜인 줄 알고
신나게 달려갔다.
머리를 박고
마음을 다치는 새가
바로 나인 것 같아서요
실체와 그림자를
자주 혼돈하는 새가
나 인 것 같아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답니다.
- 이해인 시 ‘유리창 위의 새’
밤새
길을 찾는 꿈을 꾸다가
빗소리에 잠을 깨었네
물길 사이로 트이는 아침
어디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나를 부르네
만남보다 이별을 먼저 배워
나보다 더 작은 자유로운 새는
작은 욕심도 줄이라고
정든 땅 떠나
힘차게 날아 오르고
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네
아침을 가르는
하얀 빗줄기도
내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전하는 말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떨어져 내리는 아픔을
끝까지 견뎌내는 겸손이라고
오늘은 나도 이야기하려네
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
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
서로를 적셔주는 기쁨이라고
- 이 해인 시 ‘비가 전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 이 해인 시 ‘ 황홀한 고백‘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 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을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네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웅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 가고
기도는 깊어 가네
- 이 해인 시 ‘ 가을 노래‘
<시간의 얼굴>
바다도 아름답지만
밭도 아름답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밭은 가까이 있다
바다는 물의 시지만
밭은 흙의 시이다
상추, 쑥갓, 파, 마늘
무, 배추, 당근, 오이
흙냄새 나는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새로움, 놀라움
고마움의 빛
나는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열려 있는
엄마 밭이 되고 싶다
흙의 시가 되고 싶다
- 이 해인 시 ‘ 밭도 아름답다‘
가까운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눈물을 찍어 조시(弔詩)를 쓰고 나면
며칠은 시름시름
몸이 아프고
마음은
태풍에 쓰러진 나무와 같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는데
살아서 그를 위해 시를 쓰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을까
후회도 해본다
슬픔을 일으켜 세우는 건
언제나 슬픔인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실컷 슬픔을 풀어내고 나면
나는 어느새 용감해져서
일상의 길을 걸어 들어가
조금씩 웃을 수 있다.
- 이 해인 시 ‘ 조시弔詩를 쓰고 나서 ‘
하얀 눈을 천상의 시(詩)처럼 이고 섰는
겨울나무 속에서 빛나는 당신
1월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새벽마다 당신을 맞습니다
답답하고 목마를 때 깎아먹는
한 조각 무우맛 같은 신선함
당신은 내게
잃었던 꿈을 찾아 줍니다
다정한 눈길을 주지 못한 나의 일상(日常)에
새 옷을 입혀 줍니다
남이 내게 준 고통과 근심
내가 만든 한숨과 눈물 속에도
당신은 조용한 노래로 숨어 있고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라는
우리의 인사말 속에서도 당신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또다시 당신을 맞는 기쁨
종종 나의 불신과 고집으로
당신에게 충실치 못했음을 용서하세요
새해엔 더욱 청청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 이 해인 시 ‘ 희망에게 ‘
*시집/시간의 얼굴
아프다 아프다 하고
아무리 외쳐도
괜찮다 괜찮다 하며
마구 꺽으려는 손길 때문에
나의 상처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오랜세월 남모르게
내가 쏟은
하얀 피
하얀 눈물
한데모여
향기가 되었다고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라고
당신이 내게 말하는 순간
나의 삶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축복으로
다시 태어 났습니다.
- 이 해인 시 ‘ 찔레꽃‘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은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씨만 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이십 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 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숲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본 적이 있습니다.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17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주십시오.
18
당신은 내 생에 그어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선. 그리고 내 생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점.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19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본 하늘 위에 착한 새 한 마리 날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무언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 당신 앞에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시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22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냅니다. 사람은 늙어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23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빛 새 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 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24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께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25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로 피워올리는 나의 기도 - 나의 사랑이 티 없이 단순하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게 하십시오.
26
오늘은 모차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쓸함조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쑥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 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 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헤매다 병이 나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당신 사랑의 비법을 들려주십시오. 당신을 부른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 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 이 해인 시 ’ 가을 편지 1~30‘
참 이상도 하지
사랑하는 이를
저 세상으로
눈물 속에 떠나 보내고
다시 돌아와 마주하는
이 세상의 시간들
이미 알았던 사람들
이리도 서먹하게 여겨지다니
태연하기 그지없는
일상적인 대화와
웃음소리
당연한 일인데도
자꾸 낯설고 야속하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토록 낯설어진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할까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잊으면서 산다지만
다른 이들의 슬픔에
깊이 귀기울일 줄 모르는
오늘의 무심함을
조금은 원망하면서
서운하게
쓸쓸하게
달을 바라보다가
달빛 속에 잠이 드네
- 이 해인 시 ‘ 낯설어진 세상에서‘
내 생애가 한 번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빈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 이 해인 시 ‘ 해바라기 연가’
한 해의 시작하는 날인 오늘
차분히 심호흡을 하는 오늘
해 아래 살아 있는 기쁨을 감사드리며
우리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밤새 뉘우침의 눈물로 빚어낸 하얀 평화가
새해 아침을 더욱 아름답게 해 주십시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으로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았음을 용서하십시오
나라와 겨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나라와 겨레가 있는 고마움을
소중한 축복으로 헤아리기보다는
비난과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했으며
큰일이 일어나 힘들 때마다 기도하기보다는
“형편없는 나라” “형편없는 국민”이라고
습관적으로 푸념하며 스스로 비하시켰음을 용서하십시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사랑으로 다하지 못하고 소홀히 했습니다
바쁜 것을 핑계삼아 가까운 이들에게도
이기적이고 무관심하게 행동했으며
시간을 내어주는 일엔 늘 인색했습니다
깊은 대화가 필요할 때조차
겉도는 말로 지나친 적이 많았고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말로 상처를 입히고도
용서 청하지 않는 무례함을 거듭했습니다
연로한 이들에 대한 존경이 부족했고
젊은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병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부족했음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의 존재와 일에 대해
정성과 애정을 쏟아붓지 못했습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공허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일상생활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고집, 열등감, 우울함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남에게 부담을 준 적이 많았습니다
맡은 일에 책임과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성급한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깨어 있지 못한 실수로 인해
많은 이에게 피해를 주고도 사과하기보다는
비겁한 변명에만 급급했음을 용서하십시오
잘못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이가 아니되도록
오늘도 우리를 조용히 흔들어 주십시오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이들에게
첫눈처럼 새하얀 축복을 주십시오
이제 우리도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뻐하고 싶습니다
희망에 물든 새 옷을 겸허히 차려 입고
우리 모두 새해의 문으로 웃으며 들어서는
희망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해인 시 ‘ 1월의 詩 ‘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 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 이 해인 시 ‘*상사화’
*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는 애틋한 사랑
하늘에서 별똥별 한 개 떨어지듯
나뭇잎에 바람 한번 스치듯
빨리왔던 시간들은 빨리도 지나가지요?
나이들수록 시간들은 더 빨리간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어서 잊을 건 잊고
용서할 건 용서하며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어요
목숨까지 떨어지기 전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눈길은 고요하게
마음은 따뜻하게
아름다운 삶을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충실히 살다보면
첫 새벽의 기쁨이 새해에도
우리 길을 밝혀 주겠지요
- 이 해인 시 ‘ 送年의 詩‘
아플 땐 누구라도
외로운 섬이 되지
하루종일 누워지내면
문득 그리워지는
일상의 바쁜 걸음
무작정 부럽기만 한
이웃의 웃음소리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水草)처럼 뜰 뿐
마음 깊이 뿌리내리진 못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지네
남들 보기엔
별 것 아닌 아픔이어도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보며
혼자 누워 있는 외딴섬
무너지진 말아야지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나는 철음으로
삶을 껴안는 너그러움과
겸허한 사랑을 배우리
- 이해인 시 ‘ 병상일기‘
* 다시 바다에서
숲의 향기 가득히 밴
나무 책상을 하나 갖고 싶다.
편히 엎디어 공상도 하고
나무 냄새나는 종이를 꺼내
그림도 그리고 편지도 쓰고
시의 꽃도 피우면서
선뜻 나를 내려놓아도 좋을
부담없는 친구같은 책상을
곁에 두고 싶다.
동서남북 네 귀퉁이엔
비밀스런 꿈도 심어야지
외롭다고 느낄 때마다
살짝 웃어보는 나를
어진 마음으로 받아주는 그
평범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깊이로
나를 제자리에 앉히는
향기로운 나무책상을 하나 갖고 싶다.
- 이 해인 시 ‘나무책상’
시를 쓸 때는
아까운 말들도
곧잘 버리면서
삶에선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
열매를 위해
꽃자리를 비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아파도 아름답게
마음을 넓히며
열매를 맺어야 하리
종이에 적지 않아도
나의 삶이 내 안에서
시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맑은 날이 온다면
나는 비로소
살아 있는 시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
- 이 해인 시 ‘ 삶과 시‘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불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 이 해인 시 ‘봄 편지‘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와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 이 해인 ‘너에게 띄우는 글 ‘
금빛 번쩍이는 욕망의 비늘을 털고
당신께 가겠습니다
밤새 침몰했던 죽음들이
흰 거품 물고 일어서는 부활의 바다
황홀한 아침을
전신全身으로 쏟아 내는 당신 앞에
나는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숙명의 파도입니다
승리의 기를 흔들며 오실 당신을 위해
빈 배로 닻을 내린 나의 생애
수평선을 가르며
춤추는 갈매기로 가겠습니다
내력을 묻지 않고
보채는 내 마음을 안아 주는 바다
영원이 흰 포말泡沫로 일어서는
바다로 가겠습니다
- 이해인 시 ‘아침 바다에서‘
* 시집:내 魂에 불을 놓아/분도출판사
사랑하면 될텐데
- 박완서 선생님께
방바닥에 내려 앉은 아침 햇살을
아기는 손으로 집어 듭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햇살을 잡다가
아이는 그만 울음이 터집니다
울음 소리에 놀란 햇살은
슬그머니 문큼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봄햇살 속에 사랑스런 손녀를 안고 계실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 보며 강원도 초등학교 분교의 어느 친지가 보내 준 동시 한편을 적어 봅니다. 얼마전 따님을 통해 보내주신 선생남의 새 작품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영행길에서 사다 주신 검은 목도리도 감사히 받았습니다. 언젠가 영국을 다녀오시며 선물로 주신 워즈워드의 '수선화'란 시와 그림이 새겨진 갸름한 접시에 저는 향나무 연필들을 담아 두었답니다.
신경숙 씨의 <외딴방>을 읽을 무렵 선생님의 책을 읽었는데 다른 시대를 살아온 두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을 통해서 제가 배운 것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삶은 아름답고 그 삶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다 따뜻하고 사랑스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체험적 진실, 웃음과 눈물 속에 그대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작가들의 그 빼어난 모사력에 탄복하지 않은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 좋은 글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어느새 봄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저희 수녀원 정원에도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이젠 천리향, 수선화가 얼굴을 보이겠지요. "슬픔 가득할 땐 꽃핀 걸 봐도 힘들기만 하다"고 어느 날 조영히 말씀하시던 선생님과 저의 첫만남은 수년전,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중의 두 사람과 사별을 해야 했던 고통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졌기에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가슴 한 켠이 아려 오곤 합니다. 오즘 매주 <<서울주소>>에 글을 쓰시느라 얼마나 힘드실까 싶어 선생님의 애독자이며, 자매들인 저희는 좋은 글감이 많이 생기실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기도하기로 했답니다.
3월은 제가 수녀원에 입회했던 달이기에 더욱 새롭게 느껴집니다. 30년 전 제가 공부하던 강의실에 함참 어린 후배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 많은 세월 동안 사랑과 기도의 종소리에 제대로 깨어 살지 못한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함없이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연중 피정 강론에서 듣게 된 신부님의 말씀이 계속 제 안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 많은 경우에는 수도자들은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어떤 누구도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십시오. 그리고 석고상 같이 경직되어 있지 말고 실수해도 좋으니 좀 웃는 얼굴로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고 기뻐할 수 있도록..."
서 신부님의 그 말씀은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한다고 늘상 말로만 거듭했을 뿐 진정한 사랑의 길에선 멀리 있는 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늘 조금씩 겁먹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고 몸과 마음을 사려 온 자신을 들어다보며 저는 요즘 계속 스스로에게 타이르곤 합니다. '이봐, 뭐가 두렵지? 사랑하면 될텐데' 하고 말입니다.
행동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늘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때문에 '그립다''보고 싶다''사랑한다'등의 말을 접어 두었고, 어줍잖은 체면 때문에 인색하고 차갑게 군 적도 많습니다.한 번은 다른 수녀원에 계신 수녀님과 함께 교도소엘 가서 반가운 이들을 만났는데도 제가 너무 굳어 있었는지 저와의 첫만남을 설레며 고대하던 어떤 형제는 후에 편지로 '저는 수녀님을 보긴 했지만 느끼진 못한 것 같다'고 적어 보냈습니다. 작별하는 순간에도 수인들에게 따스한 미소와 함께 스스럼없이 포옹해 주던 옆의 수녀님과, 어색한 몸짓으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저의 냉랭한 모습이 비교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에 필요한 용기, 인내, 겸손도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모든 이를 살아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애쓰는 이 연습생을 선생님도 기도중에 기억해 주세요. 어느 때보다도 저의 사랑 없음을 절감하는 요즘은 항상 넉넉하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부럽습니다.
사소한 일들로 우울했던 마음을 털고 흙냄새 가득한 정원으로 꽃삽을 들고 나가야겠습니다. 봄까지 꽃이 가득한 길을 선생님과 봄햇살 소겡 산책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항상 미풍처럼 은은하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거 깊이 감사드립니다. 천리향 향기 속에 띄우는 남쪽의 봄을 먼저 받아 주십시오.
(1995)
‘이봐, 뭐가 두렵지? 사랑하면 될텐데'
" 많은 경우에는 수도자들은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어떤 누구도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십시오. 그리고 석고상 같이 경직되어 있지 말고 실수해도 좋으니 좀 웃는 얼굴로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고 기뻐할 수 있도록..."
기쁨아, 너는
맑게 흘러왔다
맑게 흘러나가는
물의 모임이구나
모든 맑은 물이 그러하듯
기쁨아, 누구도 너를
혼자만 간직할 수 없음을
세상은 안다
그래서
흐르는 생명으로 네가 오면
나도 너처럼
멀리 흘러야 한다
메마른 세상을 적시며 흐르는
웃지 않는 세상에 노래를 주는
한 방울의 기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 이 해인 시 ‘기쁨에게’
나무가 내게
걸어오지 않고서도
많은 말을 건네 주듯이
보고 싶은 친구야
그토록 먼 곳에 있으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너
겨울을 잘 견디었기에
새 봄을 맞는 나무처럼
슬기로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 주는 너에게
오늘은 나도
편지를 써야겠구나
네가 잎이 무성한 나무일 때
나는 그 가슴에 둥지를 트는
한 마리 새가 되는 이야기를
네가 하늘만큼
나를 보고 싶어할 때
나는 바다만큼
너를 향해 출렁이는 그리움임을
한 편의 시로 엮어 보내면
너는 나를 보듯이
나를 생각하고
나는 나를 보듯이
너를 생각하겠지?
보고 싶은 친구야!
- 이 해인 ‘친구에게’
몸과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을 때마다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벼워야 자유롭고
힘이 있음을 알고 있는 새야
먼데서도 가끔은
나를 눈여겨보는 새야
나에게 너의 비밀을
한가지만 알려주겠니?
모든 이를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끈끈하게 매이지 않는 서늘한 슬기를
멀고 낯선 곳이라도 겁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담백한 용기를
가르쳐 주겠니?
- 이 해인 시 ‘새에게 쓰는 편지’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 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고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 이 해인 시 ‘나를 위로하는 말‘
1
내 안에 흐르는
피와 물처럼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둔
생명의 말들
어느날
시(詩)가 되어 쏟아지면
밖으로 쏟아진 만큼
나는 아프고
이로 인해 후유증이 심해도
나는 늘 행복하고
2
내 마음의 바다 위에
해초(海草)처럼 떠 다니는
푸른 시상(詩想)들
힘껏 건져 올리고 나면
이미 퇴색하는 그 빛깔
끝내
햇볕을 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언어들이
하도 많아서
나는
가난하게 살아도
항상 넉넉하구나
- 이 해인 시 ‘내 안에 흐르는 시 詩‘
* 제 4시집 [시간의 얼굴]
당신은
나를 바로 보게하는
거울입니다
가장 가까운 벗들이
나의 약점을 미워하며
나를 비켜갈 때
노여워하거나
울지않도록
나를 손잡아준 당신
쓰라린 소금을 삼키듯
절망을 삼길 수 있어야
하얗게 승화될 수 있음을
진정 겸손해야만
삶이 빛날 수 있음을
조심스레 일러준 당신
오늘은 당신에게
감사의 들꽃 한 묶음
꼭 바치렵니다
제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아름다운 얼음 공주님......
- 이 해인 시 ‘고독에게 2‘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 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갓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 이 해인 시 ‘다시 겨울 아침에‘
* 시선집 [ 여행길에서 ]
한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 이 해인 시 ‘봉숭아’
떠나가는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이별은
그냥 이별인 게 좋습니다
남은 정 때문에
주저앉지 않고
갈 길을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움도
너무 깊으면 병이 되듯이
너무 많은 눈물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됩니다
차고 맑은 호수처럼
미련 없이 잎을 버린
개뜻한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이별하는 연습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 이해인 시 ‘이별 노래’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싶은 얼굴이여.
- 이해인 시 ‘ 민들레의 영토‘모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1980. 4 . '나눔'
- 이 해인 시 ‘ 말을 위한 기도’
*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분도출판사
지금껏 제가 만나왔던 사람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통해
만남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 주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하고 싶지만 꼭 해야 할 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슬기를
주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밖에 없는 것처럼 투신하는
아름다운 열정이 제안에 항상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제가 다른 이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사랑의 거울 앞에 저를 다시 비추어 보게 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남과 비교 하느라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오늘을 묶어 두진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에
어느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나직이 외우는 저의 기도가
하얀 치자꽃 향기로
오늘의 잠을 덮게 하소서
- 이 해인 시 ‘ 그해 여름의 생각의 씨앗을‘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시 ‘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 해인 수녀: 1945 강원도 양구에서 이대영, 김순옥의 1남3녀 중 셋째로 출생
본명; 이명숙, 1945년 6월 7일(78세)양구읍 동수리 출생.
◆ 서울 청파동에 살 무렵(6세) 한국 전쟁발발. 9월에 부친이 납북 됨
◆ 1952 부산 피난시절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입학
◆ 1958 서울 창경초등학교 졸업
◆ 1958 무시험으로 서울 풍문여중 입학
(특활반 문예반에 들어 임영무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삶에 영향을 주는 친구들을 사귐)
◆ 부산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언니의 권유로 중3때 학교를 동래여중으로 옮김
(프랑스 유학을 염두에 두고 한 학년 월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행하지 않음)
◆ 1961 부산 동래여중 졸업
◆ 1964 김천 성의여고 졸업 1963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시 장원
◆ 1964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원 입회
◆ 1968 첫서원
◆ 1968~70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근무
◆ 1970 <소년>지에 동시 '하늘',' 아침'등으로 추천 완료
◆ 1975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 졸업
◆ 1976 종신서원과 더불어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
◆ 1976~78 부산 성분도 병원 근무
◆ 1978~82 수녀원 교육팀에서 일함(80~82:지원자 담당)
◆ 1985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 1985~87 수녀원 자료실 담당
◆ 1988~90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신심분과에 근무
◆ 1990~91 수녀회 설립 60주년 준비위원으로 일함
◆ 1992~97 수녀회 총비서로 근무
◆ 1997~2000 현재 수녀원 내 문서선교실 근무
◆ 1998~99 부산 신라대학 사범대학에서 시감상 교양 강좌
◆ 2000.3~ 부산 가톨릭대학 지산 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
1981 제9회 새싹 문학상
1985 제2회 여성동아 대상
1998 제6회 부산여성 문학상
*** 李海仁 異變 - 김승희: 80년대 초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점가에서는 작지만 결코 무시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조용한 파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시집은 결코 팔릴 수 없다'는 터부를 조용히 깨뜨리면서 지속적인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녀시인 이해인의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1976년 처음 출판되었을 때,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녀가 서점가의 異變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제2시집 <내 혼이 불을 놓아>(1979)와 제3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가 계속 출간되어 나오는 동안 그녀의 시집은 일반적인 시집 판매부수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版을 거듭했고 막대한 판매부수를 올렸다. 그러는 동안 비소설류 베스트 셀러 목록에 그녀의 시집이 두 권이나 연속 올라 있는 등, 우리의 시단 풍토에서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부수가 팔려나갔다는 등의 말이 전해지자 비로소 그녀의 시집은 '읽히는 시집' 혹은 '팔리는 시집'이라는 각도에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급속도로 사회문제화되기 시작하였다.
수도자로서 사회의 눈길을 끈다는 자체가 늘 죄송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세 권의 시집은 판배부수 22만 이상이라는 경이적인 최고기록을 올렸고, 그리하여 그녀는 사회에 공헌이 큰 여성에게 주어지는 여성동아대상의 1985년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수여연설에서 '이수녀의 시는 각박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기도같은 마음을 회복시켜주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청소년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기여했기 때문에' 이 상을 수여한다고 말해졌듯이, 그녀의 시는 황폐하고 고갈된 현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몫을 해냈음이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문학적인 관심과는 상관없이 오직 인간적인 관심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사건들이 쏟아지듯이 발생하였다. 여성지, 학생잡지들엔 그녀에 관한 기사가 매달 빠지지 않고 게재되기 시작하였고 그녀가 단호히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직접 인터뷰를 한 것처럼 꾸민 유령 인터뷰기사가 실려 나오기도 하였다. 주간지에까지 그녀의 수녀복을 입은 사진이 게재되었고 그런 와중에 휩쓸려 그녀는 수도자로서의 사생활을 위협하는 갖가지 상업주의적인 호기심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
수도원 내부에서의 오해조차 싹틀 기미가 보였고 그녀에게서 청순한 이미지를 보고 있던 어떤 독자들은 그녀의 그런 '매스컴타기'에 염증을 내며 항의하기조차 했다. 그것은 이해인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상업주의적 과대광고 내지는 광고적 각색이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선 오해의 여지조차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각종 잡지들은 경쟁하다시피 '수녀시인'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상품화하려고 했으며 심지어 어떤 여성지는 결코 웃어넘기지 못할 해프닝을 벌임으로써 수도원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의 사생활을 위협해 왔다. 그것은 문인의 상품화 내지는 어떤 문인의 이미지를 시장화하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저널리즘적 욕구라고 수긍하기 이전에 출판인의 윤리를 의심해 보게 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여성지는 수습기자를 뽑는 입사시험의 실기(?)테스트에서 지금은 가요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70년대 대학가의 우상이었던 가수 K씨와 시인 이해인을 어떤 방법을 써서든 취재해 오라는 것이었다. 기자의식을 왕성하게 해주려는 의도에서였든 지금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극기훈련을 시험해 보려는 고용주의 욕심에서였든지 간에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음엔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갈월동에 있는 성분도병원에 몸담고 있던 그녀를 취재하기 위하여 수 명의 젊은 기자후보생들이 끼니조차 거르며 분도병원 앞에서 대기상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든지 간에 과업을 완수하여 취직을 해야한다는 조바심과 남보다 앞서 특종을 점유해야 한다는 젊은이 다운 패기에서 분도병원을 출입하는 수녀들 마다를 붙들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으며 "아무개 수녀님이시죠?" "맞죠?"를 연발하였다. 수도원은 한때 그 입사시험문제 관계로 소동을 겪어야 했으며 이해인수녀는 상당히 개인적인 불편을 겪어야했다. 보다 서글픈 작전을 쓰는 분도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자신을 가톨릭 신도라고 소개하면서 간곡히 만나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꼭 취직해야만 하는데 어머니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서 꼭 도움을 주기를 호소해오는 분도 계셨다고 한다.
그녀는 이제 외로운 수도생활 중에 시를 쓰는 한 외로운 수녀가 아니라 어느새 '특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그 문제는 희미하게 끝나게 되었지만 그 일로 인해 이해인 개인이 받은 상처와 고통은 세속에 사는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것은 '인기'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것의 속성이었다. 인기란 반드시 허망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시인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창작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인기를 얻은 대상 자체를 끊임없이 노출시키려 하고 한 이미지로 우상화시키려 하고 더우기 오늘날과 갈은 출판물의 시장경제화가 치열한 시대에선, 개인을 상품화시켜 그 개인의 내면을 황폐화시킬 위해적인 힘 까지를 가진다고 하겠다. 더구나 그녀는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지극히 은밀하고 조용한 생활패턴을 가지고 사는 수녀라는 신분이 아닌가.
이해인 수녀는 전국 각지에서 오는 열혈한 독자들의 사랑이 담긴 편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매스컴에서 보이는 지나친 호의에선 피해를 느낀다고 한다. 수녀의 시에 曲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 보내는 독자, 진심어린 편지를 보내주는 방황하는 영혼들, 수녀의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간직하고 싶다고 출판사측에 사진을 부탁하는 소년(?) 독자들을 모두 사랑하고 그들 개개인을 위하여 기도를 잊지 않는다. 여성동아 대상 시상식에서, 그녀는 자신의 '시가 기도시이며 바로 그런 아름답고 고통스런 이웃들을 위한 감사와 기도의 노래' 라고 겸허하게 말했다.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 숨쉬는 나의 매일이
읽을수록 맛드는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때로는 아까운 말도
용기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
한 편의 시처럼 살게 하소서
이것이 그녀의 소박한 시론인지도 모른다. 소박한 울림을 가진 시, 쉬운 언어와 투명한 표현으로(쉽다는 것이 안이하다는 것과는 달라야 하리라) 보통 사람이 가진 간절한 정서를 맑게 울리는 시, 현대시인들이 필연적으로 직면해 있고 강박적으로 빠져 있는 무신론적 '패시미즘이라는 심연을 넘어서' 청순하리만큼 깨끗한 신앙을 보여주는 그녀의 시는 놀랄 만큼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시단의 관심을 요한다.
그동안 독자의 공감에 대해서는 거의 포기한 상태로 시를 써온 한국의 현대시가 70년대의 사회적 격변과 80년대의 현실적 미궁을 거쳐오면서 역사인식과 사회비판의식이 강한 목청이 소박한 시를 써서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끌었다. 그러나 이해인 수녀의 목소리는 그들의 목청과도 다르다. 具常 선생은 그녀의 시를 '산골의 샘물같은 시'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시가 고갈되고 혼탁한 오늘의 우리들의 영혼들을 추켜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기를 합장한다'고 시집 서문에서 쓰고 있거니와 그녀의 시가 감당하고 있는 몫은, 사회참여의식이 강한 시들이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 비리를 통렬하게 해부하고 파헤침으로써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것에 비하여, 그 모순으로 짓찢겨진 인간존재의 환부와 상처를 '붕대를 매듯이' 감싸주고 '기도의 聖水'로 닦아준다는 데서 따뜻한 공감을 얻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잔잔하고 평이한 언어로 이루어진 그녀의 밝은 노래가 모순과 패러독스와 변태적 슬픔으로 가득찬 우리 시대의 어두운 魂을 넓고 깊게 울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李海仁 異變에 대해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녀의 경우 한국에 시독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오해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니까.
문학사상 1985년 6월
김승희(시인)
* 다른 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 가셨지만,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우정은 각별했다. 그분들의 편지 한편씩을 덧붙인다..
-법정스님의 편지-
이해인 수녀님께
수녀님!
광안리 바닷가의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잡았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 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뜰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 도취에 빠지기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 차릴 수만 있다면
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 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의 조영안에서 볼때
모든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 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이번 길에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일을 무엇보다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뜰에까지 울려왔습니다.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
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淸安)을 빕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편지-
법정 스님께
스님!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 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며칠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나서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은 향기로운 빛과 여운을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의 표현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 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
어느해 여름,
노란 달맞이 꽃이 바람 속에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 데다가 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못마땅해 하시고
나무라실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 두고 지냈지요.
스님, 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곳 여러 자매들과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 대조' 도 하시고,
스님께서 펼치시는 '맑고 향기롭게' 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봅니다.
이곳은 바다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물미역도 많이 드릴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