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염화미소
제 34교시 수행의 진행단계 (1)
안녕하십니까?
행복하십시오.
붇ㄷ하빠-라입니다.
제 15기 근본불교학교 사이버 수행교실,
12월 1일 월요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수행의 진행과정입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해서 부처에 이르는 전과정을
하나하나 도표를 그려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수행의 진도가 나가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는 특정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진도가 나가다 보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복합적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그 현상들을 알아차림하고
수행을 진척시킬 것인지 - 그것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수행을 시작하면
수행의 진도가 쭉 나가서 어느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
갑자기 의식이 소멸되는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잠자는 것처럼 의식이 전개되다가 딱 소멸되는 이 지점을 -
부처님은 magga 라고 그랬고, 한문으로 道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치 잠자는 것처럼 의식이 소멸되는데 -
여러분들이 이것을 직접 체험하고 싶으면 수행을 열심히 하면 됩니다.
수행을 해서 도에 들어가면 직접 체험이 되는데요.
그게 잘 안되거든 싱크대나 목욕탕에 물을 가득 부어놓고,
밑에 있는 마개뚜껑을 제거해 보세요. 물이 빠져나갈 거예요.
거기다 손을 한번 넣어보면,
그 빠져나가는 물에 손이 쑥 딸려가는 그런 느낌을 받을 겁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의식이 끊어지고 몸이 어딘가에 쑥 빨려 들어갑니다.
아니면 2층은 좀 높고, 창틀에서 탁 굴러 떨어져보십시오.
그렇게 몸이 쑥 빨려 들어가면서 의식이 딱 단절되는 지점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지점을 일반적으로 道라고 합니다.
따라서 도는 터지는 게 아니라, 도에 들어가는 거다 - 이렇게 이해하세요.
그러다가 어느 지점이 지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의식이 다시 살아 나오는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 지점을 Pali어로 팔라 phala 라고 했으며,
한문으로 果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두 개념을 한 단어로 만들어서 道果, magga-pahala 라 합니다.
그래서 흔히 “도과를 체험하고 운운” 하는 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는 의식이 끊어졌다가, 의식이 살아나오는 이 사이를 -
일반적으로 닙바-나 Nibbana 라고 합니다.
의식이 단절되어 있는 과정이죠. 바로 이것을 닙바-나 라 하고,
한문으로 번역할 때에 열반涅槃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개 스님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열반이라고 이해하실 텐데요.
원래 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최상의 행복감 -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모든 욕망의 불,
번뇌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닙바-나라고 했습니다.
도에 들어가서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가,
어느 정도 지나서 의식이 살아 나오는 - 이 의식이 단절되어 있는 -
이 상태를 ‘닙바-나의 상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상태를 거치면서,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모든 번뇌의 뿌리가 뽑혀 나온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거죠.
시중에서 보면,
도나 과를 거창하게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만 -
그러나 부처님이 사용한 도라는 개념은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의 크기를 측정하는 단위로서 도를 썼습니다.
여러분들이 무게를 잴 때,
그램이나, 톤으로도 측정하는데, 모두 무게의 단위를 나타내는 거죠.
마찬가지로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의 크기를 측정하는데
어느 정도의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의 크기를 도라고 하자라고 설정한 거죠.
시중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도가 거창한 게 아니고,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의 크기를 측정하는 단위가 道이다 - 라는
아주 간단한 개념이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도에 이르는 전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번뇌가 깨지는 과정이며,
또 다르게 보면, 지혜가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지혜가 성장하게 되면, 번뇌는 깨지는 것이고 -
번뇌가 소멸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지혜는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서
지혜는 우리가 감지하는 상태로 - <꽃이 열린다>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처음 시작할 경우,
좌선이나 행선을 시작하면, 암만해도 편차가 다소 나게 됩니다.
가령 좌선을 좀 많이 한다든지, 아니면 행선을 많이 한다든지,
좌선이 잘된다든지, 또는 행선이 좀더 잘된다든지,
대개 수행을 처음 하는 분들이나 초보자일 경우에는
자기가 잘되는 쪽으로 집중해서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면 음식을 편식하는 것처럼 -
알아차림과 마음집중도 어느 한쪽으로만 커져버리게 되고
균형 있게 커지지를 않습니다.
처음 수행을 하는 이들이 가장 주의하고 신경써야 하는 것은
좌선과 행선의 균형을 잡는다 - 정과 동의 균형을 잡는다 -
또는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의 균형을 잡는 쪽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 억지로라도 - 만들어가는 방법이
행선과 좌선의 균형을 1:1로 잡아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좌선을 1시간 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행선을 1시간하고
좀더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다시 좌선을 1시간하고, 행선을 1시간 하는 이런 식으로 -
좌선을 2시간하고, 행선을 1시간 하는 이런 쪽보다는,
1:1로 균형을 잡아가면서
수행을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행의 진도가 좀더 나가게 되면
수행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가며 -
삼매나 알아차림이 커지게 되면 행선을 좀 늘릴 수도 있고 ,
좌선을 2시간, 3시간까지 늘려가면서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처음 해보면,
맨 처음 여러분들한테 나타나는 현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30분 정도 앉아 있기가 무척 힘들다는 거죠.
갑갑증이 나기도 하고, 좀 지루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잠이 아주 많이 쏟아지거나 -
또는 몸에 통증이 많이 일어납니다.
잠이 많이 오거나, 통증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는
우리가 수행할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수행의 초기에 수행이 퇴보하는 게 아니라
수행이 진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많이 잠이 많이 나타 날거예요.
선방에 와서 수행을 할 경우는
- 3일에서 5일, 때로는 1주일 정도 -
사회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1시간씩, 50분씩 수행을 하는 분들은
- 1달, 2달 정도까지 -
앉기만 하면 비몽사몽간에 졸음이 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것은 수행이 잘못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정상적으로 진도가 나가는 과정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설명해 보죠.
우리 몸과 마음에 쌓여 있는 피로들이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 시작하니까 -
우리 몸에서 생각의 거품들이 - 피로의 거품들이 - 빠져나가게 되죠.
수행자의 자각능력과 집중력 수준으로는 -
이렇게 거품이 확 빠져나가는 것을,
아직은 제대로 알아차림하고 마음집중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분명히 깨어서 현상을 보고 있지만 -
이 현상들이 빠져나가는 힘이 워낙 크기 때문에
현상을 제대로 잡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런 까닭이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표면적으로 느끼기에는
마치 道로 들어간 것같이 느끼게 되기도 하는 거죠.
그러다가 30 - 40분 정도 꾸벅꾸벅 졸면서 좌선을 하고서,
일어나 보면, 몸과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짐을 느낄 수가 있을 겁니다.
이것은 수행이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우리 몸과 마음에 쌓여있던
생각의 거품이나 삶의 거품, 또는 피로가 빠져나갔다]
-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쑥 빠져나가고 나면,
- 2주, 3주나 한달 정도 지나고 나면 -
몸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면서,
생각이 그렇게 다발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소멸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거품이 빠져나가는 걸 볼 수 있다는 거죠.
좌선을 시작해서 20 - 30분 정신없이 졸다가 조금 지나고 나면,
의식이 선명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곧 수행을 마치는 경우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죠.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좌선을 시작한 후 20 - 30분동안 마음이 선명하게 깬 상태로
배를 잘 잡아 알아차림하고 있다가,
30 - 40분 지나고 나서 슬쩍 졸음이 오거나, 혼침에 빠진다든지,
배가 잘 안 보인다든지 - 이런 것은 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행에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수행자의 알아차림과 마음 집중력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좌선을 처음 시작할 때 망상이나, 졸음이 많이 오다가,
20 - 30분 정도 지나고 나서,
마음집중도 제대로 되고 의식이 깨어나면, 이건 정상적인 상태인 것이고 -
그렇지 않고 좌선을 처음 할 적에는 수행이 제대로 되다가,
20 - 30분 지나서 망상이나 졸음에 휘둘리는 것은
수행자가 게을러졌다 - 이리 보시면 됩니다.
두 번째로는
수행을 처음 시작하면
몸에 통증이 엄청나게 많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의 진도가 나가면 나갈수록,
통증은 계속 커지면서 증가하게 됩니다.
이것도 수행을 처음 하는 분들은
수행이 잘못 되고 있는 게 아닌가 - 이렇게 이해하기가 쉬운데 -
이것도 수행이 정상적으로 잘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 그렇느냐 - 두 가지 이유가 있죠.
뇌는 우리가 서있는 상태를 계속하고 있으면,
뇌의 입장에서는 서있는 자세가 정상인 것으로 인식을 하고서
이 상황에 맞추어서 신경에 명령을 내려 보낸다는 거죠.
늘 서있던 사람이 이제 자리에 폼을 잡고 앉게 되면,
뇌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비정상으로 오히려 인식을 하게 된다는 거죠.
이렇게 뇌가 <평소 하던 대로 서 있으시오!> 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
좌선을 하는 수행자들은 좌선을 하는 쪽으로 버티려고 하죠.
뇌에서 내려오는 명령과 나의 의지력이 충돌하는 겁니다.
이것이 신경망에서 서로 힘으로 부딪히게 되고 -
수행자로서는 이것을 통증으로 인식하게 되는 거죠.
이런 경우에 뇌를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뇌에서 내려오는 명령과 나의 의지력이 부딪혀 통증을 발생했을 때 -
그 통증을 못 이기고 몸의 자세를 풀어버리면,
뇌의 입장으로는
<그것 봐라, 서있는 자세가 정상이잖아?> - 라고 인식을 하고서,
그 다음에 좀더 강한 명령을 내리게 되면
통증은 더욱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통증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뇌를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뇌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절대로 따르지 않고 -
꼼짝도 하지 않고, 좌선하는 자세를 꼭 견지해야 합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뇌에서도
<아! 좌선하는 저 자세가 올바른 자세이고, 정상적인 자세인가보다>
라고 뇌가 인식하게 되면서, 더 이상 명령을 내리지 않게 됩니다.
이에 따라 통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뇌를 훈련시켜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
수행을 처음 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통증이 집중해서 느껴지는 곳 - 엉덩이 끝의 원숭이 꼬리뼈를
조금 움직여 보거나, 허리를 살짝 움직여 봅니다.
병아리 눈물만큼 움직였는데도 통증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제 다시 수행자들은 배를 잡습니다.
하지만 배를 잡음과 동시에 삼매력이 조금만 커지면,
또다시 그와 같은 통증이 다가오게 되죠.
수행자들의 생각에는 살짝 움직였는데 그게 뭐 문제가 될까 싶겠지만,
뇌의 입장에서는 이미 움직였다는 그 자체가
비정상이었다는 의미로 인식하게 되면서,
뇌는 더 강력한 명령을 내리게 되고 -
수행자는 통증이 더욱 증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제일 올바른 것은 전혀 꼼짝하지 않고 버티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무식하게 버티는지와
얼마나 빨리 통증을 극복 할 수 있느냐는 비례해서 전개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축적된 피로,
또는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들, 특히 정신적인 흔적들, 기억들이
무게를 가지고 신경망에 착상하게 됩니다.
이때 무게를 갖고 신경망에 착상하게 된다는 것은
- 기억이 많은 질량을 가지고 신경에 착상했기 때문에 -
신경의 단위면적당 질량이 커지며, 이에 따라 신경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
신경이 수축을 하게 되는 거죠.
수행을 통해서 자각과 마음집중이 커지게 되면,
신경망에 축적되어 있던 기억의 무게들, 삶의 무게들이
자각력과 삼매력으로 인하여 해체되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신경은 수축해 있는데 -
여기에 흡수되어 있던 에너지가 해체되면서 신경이 이완되려고 한다면,
수축하는 힘과 이완되는 힘이 부딪히게 되는 거죠.
이것을 수행자가 느끼기에는 통증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초기에는 거친 번뇌들이 깨지기 때문에 -
통증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개 여러분들이 앉아서 수행을 하게 되면,
- 발목에서 무릎으로 그리고 고관절이라고 합니까? -
허벅지, 줄기있는 쪽으로 우리하게 통증이 올 겁니다.
심한 사람들은 이빨이 마치 풍치증세처럼 떨리면서 통증이 오기도 하고,
좀더 심하면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옵니다.
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진단을 해버리세요.
<통증의 크기만큼 삼매력이 커진다. 통증의 크기만큼 번뇌는 깨어진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통증도 좋은 친구로 삼아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에 진도가 쭉쭉 나가다가,
도에 이르는 1/3지점쯤 도달하게 되면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통증이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대개는 - 죄송스런 표현입니다만 - 사타구니 사이를 회음부라고 합니까?
그쪽이 쩍 벌어지며 연골부위가 쭉 늘어나면서
통증이 눈 녹듯이 싹- 사라져 버리고
물파스 바르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오면서 통증이 싹 소멸되어 버립니다.
이 정도에 오면,
도에 이르는 1/3지점까지 도달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계속하다가
1/3지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첫 번째 싸인이 어떻게 오느냐?
여러분이 좌선을 하거나 행선을 할 때,
눈앞에서 불빛이 번쩍번쩍 나타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오바사obhasa , 發光이라고 하는데 -
때로는 눈을 감고 좌선을 하다 보면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거나, 눈이 자꾸 떠지게 됩니다.
때로는 눈앞에서 파랗거나, 노랗거나, 빨간 불빛이 오거나,
불덩이가 보이거나, 자동차 불빛처럼 번쩍번쩍하기도 하죠.
그래서 배나 발을 보는 경우에도 무척 불편하게 되는 등,
수행에 방해를 많이 받게 되죠.
이게 좀더 심해지면, 우리가 <放光한다.> - 그럽니까!
[몸에서 빛이 난다] - 이런 표현을 쓰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죠.
때로는 수행자들이 이런 현상을 직면하게 되면
수행에 많은 방해를 받는다고 호소를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되죠.
이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내 수행이 <도에 이르는 1/3지점까지 왔다> 라는 매우 좋은 징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쪽으로 계속 따라가게 되면,
도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렵에는 나타나는 가장 주된 특징은 -
[자극이 매우 진하게 일어난다]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가령 수행을 하고 싶어하는 의욕도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수행을 1시간 넘기기도 쉽지 않은데 -
갑자기 5시간씩 해도 잘 되고 합니다.
평소에는 신심이나,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병아리눈물만큼도 잘 일어나지도 않는데도 -
이 무렵쯤 되면, 갑자기 자비심이 샘솟듯 발동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마음이 지나치게 많이 일어난다든지,
때때로 갑자기 절에 시주를 많이 하고 싶은 -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또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라는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도,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지구수비대가 되기도 하고 -
이 우주에 있는 선행을 모조리 다해보고 싶거나,
때로는 지혜가 갑자기 솟아나면서,
수행을 지도해 주는 스승이나,
시중에서 가르침을 전해주는 그런 스승들이 시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런 스승 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죠.
수행교재 <불교수행의 이론과 실제> 7장의
10종 통찰장애 -
그것이 이 언저리에서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수행이 잘못 되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수행이 정상적으로 진도가 나가서 도의 1/3지점에 이르렀다는 싸인이죠.
문제는 수행이 잘 되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인데도 -
가장 큰 단점은 자극이 너무 진하다는 게 문제인 거죠.
그렇게 수행이 성숙된 단계는 아직 아닌 거죠.
그러다 보니,
자극이 진한 쪽으로 알아차림하는 마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극이 진한 쪽으로 마음이 가버린다면,
도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극이 진하더라도 알아차림하고 즉각 배로 돌아오게 되면 -
도로 들어가는 길로 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단계를 도로 갈 것이냐, 도로 못 갈 것이냐?
- 도의 기로의 갈림길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도 수행을 하다가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수행지침서의 7장이나 3장, 4장을 보면
수행의 진행단계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진한 자극이 일어나더라도
알아차림하고는 즉각 배나 발의 기준점으로 돌아오십시오.
기준점으로 돌아와서
그 기준점을 딱 붙들고 있으면, 도로 가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등산을 하다가,
주변 단풍이나, 폭포가 좋아서, 그 쪽으로 기웃기웃 하다보면 -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잃어버리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주변 경치가 아무리 좋더라도 내려 올 때 감상하고,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만 따라서 쭉 가는 것이,
정상으로 등산할 경우에 가장 효과적이듯이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이 쭉 진행되는 과정에서
1/3지점에 이르게 되면, 무척 많은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모두가 처음 보는 현상들이며, 상당히 자극이 진하게 옵니다.
그렇게 자극이 진한 쪽으로 따라가게 되면,
수행이 재미없게 되면서, 길을 잃어버리고, 도와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배나 발, 또는 화두 - 기준점을 잡고 쭉 나아가게 되면,
도로 가는 길이 점차 가까워지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1/3지점에 이르게 되면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나는데 바로 神通力입니다.
- 대개 五神通, 六神通 하는 것으로 -
이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오신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멀리서 하는 이야기가 아주 가까이 들린다든지 이게 天耳通.
어떤 사람을 보면 어제 어떻게 잤는지가 보이는 것처럼 天眼通.
등산이나 길을 갈 때, 몸이 무척 가벼워 굉장히 빠르게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재주 - 神足通이라고 표현하죠. 등등.
그런데 간혹 참선을 하거나 수행을 하는 이들이,
이런 것을 굉장한 현상이라고 부추깁니다.
아무에게나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부추기기도 하죠.
그러나 부처님의 수행법에서 보면
최소한 1/3언저리에서 나타나는 아주 저차원적인 현상인 거죠.
따라서 주변에서 그런 말을 하면, 이미 옆길로 샜다 - 이리 보시면 됩니다.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아는 소리하는 무당들이 있을 거예요,
그 무당들은 1/3지점에서 옆길로 샌 사람들이다 - 이렇게 보면 됩니다.
따라서 수행을 할 때, 저 사람이 어제 뭘 했는지 - 이런 감이 온다든가,
선방에서 좌선을 해보면, 갑자기 고막이 찢어지는 것처럼
‘찌지직’ 하면서 개미 기어가는 발자국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청각이 열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天耳通이라 부르죠.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도 합니다.
대개 좋은 소리는 안 들리고, 꼭 내 욕하는 소리만 들립니다.
이런 것들을 모아서 - 神通術이 열렸다라고 하는 거죠.
이런 현상이 오더라도 <열림> 하면서 기준점으로 돌아오십시오.
그 자극을 쫒아서 가버리면,
수행은 길을 잃어버리고, 도와는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요 지점에서 나타나는 세 번째 주된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피티 piti 라고 하는데요,
歡喜라고 한문번역하는(기쁠 희) 단계입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쌓여있던 거친 막이 깨어지고 나니 -
일어나는 신경망이 굉장히 즐거워집니다.
마치 소주 한잔먹은 뒤 약간 기분이 들뜬 상태와 비슷한 즐거움의 형태죠.
이걸 피티, 한문으로 歡喜라고 번역 -
우리 수행교실에서는 이걸 기쁨으로 번역합니다.
행복의 수준이
기쁨의 형태로 나타났다 -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때는 이 기쁨이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몸으로 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아! 즐거워> -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
몸이 즐거울 때 - 신경망이 즐거울 때 -
즐겁다는 것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형태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간혹, 차를 타고 가다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메스껍거나 토악증이 옵니다.
또는, 머리가 어지럽기도 하고,
음식은 전혀 상관이 없는데 갑자기 설사가 온다든지
또는 눈물이 줄줄 흐른다든지, 좌선을 할 때 하품이 자꾸 온다든지 -
이렇게 수백 가지 종류들이 있는데
조금 전에 이야기한 서너 가지가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즐거우면, 즐거움을 감지하지만 -
몸이 즐거워서 나타나는 현상은 통상 이런 형태로 나타납니다.
현상은 이런 것이지만, 실제로는 몸이 즐거워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때 나온 즐거움은 소주 한잔 먹은 것처럼 들뜸을 동반을 합니다.
이런 즐거움을 따라서 가게 되면
수행은 퇴보하게 되고, 도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힘이 다소 들더라도 그런 현상을 알아차림하고 -
배나 발에 알아차림 하는 마음을 강력하게 집중하면,
이런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살펴보면,
수행자들이 통증이나 망상이 많아졌다가 싹- 없어지면서,
이런 들뜸을 동반하는 기쁨이 오게 되면 -
“아따! 인자 수행은 이 정도로 끝내도 되겠구먼!” 이렇게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여기에서 오는 즐거움에는
분명이 행복감이 있긴 있지만, 좀 질이 낮은 행복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극이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오는 거죠.
그래서 자극이 더욱 진한 것이죠.
그 즐거움을 좇아서 따라 가면, 도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깨달음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이런 즐거움이 오더라도 마음속으로 갈무리하고,
배나 발, 또는 화두에다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을 계속해서 나가게 되면 -
머지않아 도로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좀더 집중적으로 수행을 해서,
무사히 1/3지점을 통과하게 되면 -
어떤 수행자는 1주일, 어떤 분들은 3주일 정도 걸리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처럼 직장을 다니면서, 세속에 있으면서 -
또는 스님들이 절일을 보면서 하루에 한두시간씩 수행하게 되면,
서너달씩 걸리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게 되면,
언젠가부터 기쁨은 서서히 줄어들게 되고 -
몸과 마음에 매우 부정적인 생각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거의 즐거움은 찾아 볼 수가 없고요.
좀 심해지면 수행을 하기 싫어집니다.
그 전에는 1시간이나 2시간 정도는 거뜬하게 수행하던 수행자들이
이제 5 -10분만 앉아 있어도 조갑증이 나서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죠.
또한 집중이 거의 안되고요.
다른 사람을 봐도 무척 짜증스럽다는 마음이 일어나고,
누구를 봐도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기간은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부터 시작해서 1/3지점까지 오는 시간보다 -
훨씬 더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어느 지점까지 돌이켜 보면,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 기간이,
처음부터 이 기간까지 오는 기간만큼 길다. 이리 보시면 되겠죠.
도까지의 2/3지점에 여러분들이 도달하게 되면,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들이 싹없어져 버리면서,
매우 더울 때 시원한 냉수 한 컵을 들이키는 것처럼
아주 맑으면서 상쾌한 느낌이 찾아오게 됩니다.(淸涼感)
이걸 불교에서는 슈카sukha 라고 이름했으며,
한문으로는 즐거울 락으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극락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죠.
이때는 몸과 마음이 들뜨는 형태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상쾌함이 수반되는 - 그런 질 높은 행복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까지 - 즉, 1/3지점에서 2/3지점까지 이르는데 까지 -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현상은,
나타나는 현상자체는 부정적인 생각이지만,
실제는 우리 신경망의 저 깊은 곳, 우리 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좀 무거운 번뇌들이 깨져 나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심층의식 또는 잠재의식이 정화되는 과정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청바지나 이불 같은 것을 빨래하려고 물에 담가놓고 좀 지나면,
그 속에 있는 때들이 불어서 빠져 나오게 되죠.
얼핏 생각하면 물위에 때가 떠 있으니까, 세탁이 되지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세탁물 속에서부터 때가 빠져 나오고 있음이죠.
현상으로서는 때가 나오는 것이지만(부정적 생각)
사실은 그 속에서는 세탁물이 정화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집중적으로 표출되고 있지만,
우리의식 깊은 곳에는 맑음이 끊임없이 샘솟아온다 -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과정에서는 무척 힘이 들지만,
그러나 배나 발을 집중적으로 알아차림을 계속해 나가면,
머지않아 이 과정을 쑥 통과하면서,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있는
매우 무거운 기억들의 무게가 모두 날아가고 나면 -
정말 상쾌하고, 맑은 -그러한 행복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마 초입에 접어들면,
어떤 때는 몸에서 하수구 썩는 냄새가 날수도 있죠.
아주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부정적인 생각들만 들락거리죠.
배나 발을 잡아도 도무지 상쾌하지도 맑지도 않고, 찝찝합니다.
그러다가 하루에 한 두 번씩
매우 상쾌하고 맑음이 병아리 눈물만큼 왔다가도,
또 부정적인 생각이 나타나고 -
수행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나면,
그런 맑음이 조금씩,조금씩, 차츰 차츰 많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을 지나게 되면,
몸에서 기가 막힌 향기가 납니다. 누구든지 경험하는 거죠.
아! 내가 이 터널을 완전히 통과했구나! - 하는 인식이 들면서
정말 상쾌함, 날아갈 것 같은 즐거움이 찾아오는 거죠.
이것을 통상 우리가 슈카라 하고
한문으로 번역할 때, 極樂으로 일컫는 즐거울 樂 번역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1/3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피티 - 환희심이 들뜸을 동반하는 즐거움이라면,
2/3지점을 통과 슈카 -상쾌함을 동반하는 즐거움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