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용택 원장에 대한 동기생들의 평가는 대체로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전략적 사고로 모아진다.
천용택 전국정원장(62)은 전남 완도 태생으로 완도중학교와 목포 문태고를 졸업했다. 완도중을 1등으로 졸업한 가난한 수재였던 천원장이 공립 목포고가 아닌 사립 문태고를 다닌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중학 졸업 후 ‘연습삼아’ 먼저 응시해본 문태고 입학시험에서 덜컥 수석을 해버린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장학금을 내걸고 수석 입학생이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막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 천원장은 교사들의 설득에 못 이겨 문태고에 남았다. 집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에서 면서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숙식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4년제 대학인 육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청운의 꿈을 품고 간 육사 입교 초기에 그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과묵한 성격 탓도 있지만, 당시 육사는 세칭 명문고 출신들이 주류를 이뤄 ‘완도 촌놈’이 행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56년에 입교한 16기 생도는 225명이었는데 그중 서울의 5대 공립(경기·경복·경동·서울·용산고) 출신이 절반을 넘었고, 나머지도 태반이 지방 명문고 출신이었다. 그런만큼 우수한 학생이 많았다. 그러니 서울에 기반도 없고 선후배도 없었던 그로서는 조용히 학과 공부나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동기생 사이에서 사리 분별력이 특히 뛰어나고 매우 열성으로 후배들을 훈육했던 성실한 생도로 기억되고 있다.”(이필섭 장군) “당연히 그는 고학년이 될수록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잠재력이 발휘된 것이다.”(정인균 회장)
이필섭·정인균 장군은 중대 단위로 훈육활동이 이뤄지는 육사 교육과정 3년 동안 제4생도중대에서 함께 생활했다. 두 사람에 따르면, 포병 소위로 군문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 장교 천용택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그로서는 첫 해외여행이었던 이스라엘 시찰이었다. 다음은 정인균·이필섭 장군의 회고다.
“천장군이 그때 이스라엘 시찰 장교단에 낀 것은 동기생의 자랑거리였다. 그가 동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에 시찰 장교단에 선발된 것도 그의 전략적 식견이 탁월한 덕분이었다. 이스라엘 다녀와 그 분야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많이 했다.”(정인균)
“청년 장교 시절에 이스라엘에 다녀와 깊은 감명과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중에 합참에서 함께 근무할 때도 이스라엘 군대의 장점을 도입한 강군 육성 방안을 모색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군대 모델은 요즘 말로 하면 ‘투명성이 제고된 군대’이고 ‘간편한 군대’이다. 천장군은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았다.”(이필섭)
[출처] 장군들의 파워게임 3 (稷山 趙氏 사람들) |작성자 달무리
첫댓글 잘 살고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