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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는 서문 첫머리에서 저술 동기를 밝힌다.
“이 책은 표제가 암시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 하나의 시도이다.
곧, 나는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전체로서 조망해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1972년까지의 역사를 조망해 본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것을 전 세계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는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그 속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의 특정한 국가나 문명 또는 종교를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환영에서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종래의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과 문명관을 초월해 세계의 모든 지역의 역사와 문명을 동등한 가치로 바라보는 시도로서 가치가 있다.
『역사의 연구』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는가?
『역사의 연구』는 구상에서 완결까지 40년,
집필에만 27년(1934~1961년)이 걸린 토인비의 대표 저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34년에 『역사의 연구』 제1권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4년에 제10권이 출간되었다.
이 열 권이 『역사의 연구』 본문에 해당하며, 1959년에는 역사 지도를 담은
제11권이 완성되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출간되자마자 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열렬한 찬사와 호응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격렬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면서 반론을 편 책이
제12권으로 1961년에 출간되었다.
이로써 『역사의 연구』는 총 12권의 방대한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어떤 배경에서 태어난 책인가?
19세기까지 동서고금의 역사가들은 민족, 가문, 왕조, 사회,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했다.
20세기 들어서서 개별민족이나 왕조나 국가가 아닌
‘문명’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아놀드 J. 토인비(1889-1975)의 『역사의 연구』가 가장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를 휩쓴
종말론적, 비관적 분위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이를 계기로 문명의 역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재앙은, 힘겹게 이룩해온 근대화의 정신이
전혀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전쟁을 겪으며
지식인들은 미래에 대해 아무런 전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년 5월 29일~1936년 5월 8일)는
1920년에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나타난
현대문명의 병리적 징후들을 비관적으로 그려낸 책이다.
이 책은 문명이 유기체로서
탄생 - 생장 - 사망의 필연적 과정을 밟게 된다는 점을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했다.
이 책을 본 토인비는 슈펭글러의 생각은 독단적이고 결정론에 기울어 있고,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논증이 부족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토인비는 선험적인 방법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법을 채용해서
스승의 이론적 공백을 보강한 산물이 『역사의 연구』였다.
그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대상으로
과연 어떤 일반 법칙이 존재하는지를 찾아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서구 문명의 미래를 예언하고자 했다.
서구 문명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집필 동기가 되었다.
사멸했던 로마 문명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서구 문명도 결국 몰락하는 길만이
역사의 법칙상 주어진 운명인지 아닌지를 밝혀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역사의 연구』 는 이 같은 숙명론에서 벗어나
창조적 소수에 의해 진보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전개한다.
이러한 낙관적 역사관을 피력하기 위해 『역사의 연구』는 역사를
민족이나 국가 중심으로 파악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문화적 실체,
즉 문명을 역사의 단위로 설정한다.
또 문명이란 개인들 사이에서 관계의 결과이며
인간의 정신적 결정체로 본 점은 문명을 단순한 유기체로 이해한
슈펭글러와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연구』 는 인종이나 환경 등
결정론적 요인도 도전을 제기하는 범위 내에서만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타성에 젖은 한 사회집단 속에서 이 소수가 창조적 의지를 갖고 반응하게 됨으로써
문명이 도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명의 성장과 소멸과정을 보면 성장기에는
사회의 다수가 창조적 소수를 기꺼이 모방해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도전에 성공한 소수가 자신과 자신이 창조한 제도를 우상화함으로써
창조성과 지도력을 잃게 되면서 문명의 쇠퇴에 들어서게 된다.
창조적 소수가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소수와 다수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의 자기 결정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고전에서는 매우 많은 역사철학적 주제들이 쟁점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류사회에 그 공헌도가 매우 크다.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역사의 연구』는 단순한 세계사 책이 아니다.
‘문명의 백과사전’이다. 소멸했거나 살아있는 모든 문명을 탐사했다.
인명, 지명, 색인을 별책으로 출판할 정도로 양이 방대하다.
내용은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서술과 분석이고,
철학이나 이론을 펼치는 데 쓴 지면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의 가장 큰 약점은 분량이 너무 방대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문 연구자들 말고는 원본을 읽는 이가 거의 없고
일반 독자들은 주로 축약본을 읽는다.
제1부 ‘역사의 모습’에서,
먼저 그는 역사 연구의 단위를 탐색하는 것부터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토인비는 역사를 국민, 국가라는 입장에서 연구하는 통상적 방법을 피하고 있다.
이는 크게 보면 국민, 국가란 보다 큰 ‘문명’ 속의 한 단편에 지나지 않고,
문명이라는 큰 단위 쪽이 국민 국가라는 작은 단위보다
역사적 왜곡이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이처럼 역사 단위를 정의하고 문명 이전의 각 사회를 살펴본 뒤
그리스와 중국, 유대의 역사 과정을 길잡이로 각 문명의 역사 ‘모델’을 정립하고자 했다.
제2부에서는 문명의 탄생을 논하고 있다.
문명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토인비는 인종이나 환경은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생명을 통해 이를 설명하며
그 해답을 신화와 종교에 대한 통찰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는 만남의 결과이며,
그 만남의 과정이 도전과 응전으로 묘사된다.
또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은 실제로 효과적 창조를 가져올 수 있는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한 문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극이 필요하고,
그 도전은 창조성을 질식시킬 정도로 심각한 것이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3부는 ‘문명의 성장’에 대해 논한 부분이다.
순조롭게 태어난 문명은 탄생 자체가 최초의 높은 장애를 뛰어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후 저절로 발전의 동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반드시 자동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탄생 직후에 성장을 멈추어 버린 몇몇 사회가 그 증거이다.
이들 사회의 성장에 관한 특질을 조사해 보면,
이곳에서는 어떤 도전에 대한 응전이 성공하고, 그것이 또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으킨다는 단순한 동작이 시리즈로 진행될 때,
그것을 사회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도전과 응전이 연속해 일어나고 있을 때,
그 움직임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제4부는 ‘문명의 쇠퇴’를 다루고 있다. 왜 과거에 존재했던 문명들이 쇠퇴했는가.
그는 문명은 쇠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토인비는 결정론에 빠지기보다 문명이 성장을 유지하는 과정 속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 사회를 이끄는 창조적 지도력은 창조력이 없는 대중을 이끌어가기 위해
그들을 사회적으로 ‘훈련’ 시키는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도자가 창조적 영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의도와는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제5부는 ‘문명의 해체’이다.
문명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지만, 그 쇠퇴는 불가피한 것이며,
대체로 방치된 채 해체로 이어지는 동일한 형태를 밟고 있다.
대중의 힘이 지도자에게서 분리되면 지도자는 과거의 견인력과는 성질이 다른 폭력을
사용해 그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소수의 지배자와 내부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그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야만족으로 구성된
외부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들 집단이 해체의 시련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떤 대응을 보이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제6부에서는 ‘세계국가’를 논하고 있다.
사회가 분열 과정에 들어가면 대체로 세 개의 분파로 분열되며,
각자 나름대로 제도를 만들어 낸다.
소수의 지배자는 적대적 국민을 통합해
세계국가를 만들고 그를 통해 위험하게 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세계국가는 세계 전체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한 문명의 전체 영역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토인비는, 세계국가는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그를 초월하는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인가를 자문한다.
세계국가는 불멸한다는 깊은 믿음을 갖게 되는 근거로
로마 제국이 신성로마 제국과
그리스 정교 권의 동로마 제국
그리고 ‘제3의 로마’로 모스크바 대공국 및 러시아 제국으로 부활했고,
중국에서도 진과 한 제국이 수와 당 제국으로 부활한 데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제7부는 ‘세계교회’이다.
토인비에 의하면,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의 출현은 인간 역사에 중대한 한 획을 그은 것이므로 이를 문명으로 취급해 충분히 논할 만한 것이라고 했다.
토인비는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란, 그 자체로 구성되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적 열망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 목표는 인간과 우주의 저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직접적 인격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에 있었다.
제8부에서는 ‘영웅시대’를 논하고 있다.
토인비는, 문명은 항상 그 자신의 결함과 실패 때문에 파산해 온 것일 뿐,
외부로부터의 작용으로 인해 파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회가 스스로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해 사멸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
그 사회의 경계 외부에 있던 야만족들의 침입을 받아
결정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야만족들은 성벽을 굳건히 한 문명에 비해 자유롭게 행동하며 결국 승리를 얻는다.
그들은 황폐해진 과거의 문명의 본거지를 차지하고 잠깐 ‘영웅시대’를 즐긴다.
그러나 영웅시대는 고도로 수준 높은 종교와는 달리
문명의 역사에 그 어떤 새로운 장도 열지 못한다.
야만족들이란 역사의 무대에서 죽은 문명의 기와 조각을 긁어내는 빗자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제9부는 ‘문명들의 공간적 접촉’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같은 시대에 한두 문명이 빈번히 문화적으로 접촉할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 같은 형태의 접촉이 특히 중요시되는 점은, 고도의 수준 높은 대부분 종교는 문명이 서로 엇갈려 있는 장소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문명은 그 희생자에게 문화적이자 종교적인 것은 물론, 인종적으로도 열등자라는 낙인을 찍는 경향을 지닌다. 그 희생자인 공격을 받는 쪽은 이질적 문화에 자기 자신을 강제로 동화시키려고 노력하든가 과도한 방어적 자세로서 이에 대응하게 된다. 제9부는 동시대의 문명 접촉이 가져온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많은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제10부는 ‘문명들의 시간적 접촉’을 테마로 삼고 있다.
동시대의 문명 접촉만이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마주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현존하는 문명이 죽은 문명을 르네상스라는 형태로 살려내며 그와 접촉한다.
토인비가 사용한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문명을 재생시킨 사실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넓은 의미에서 다른 많은 사회에서도 르네상스적 현상은 공통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12부는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경과를 조사한 뒤, 스스로 ‘역사는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하여 역사가 쓰이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면
내 역사연구는 완전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토인비는 결코 모든 사실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역사 기술 역시 이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역사가는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관찰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고방식은 역사가가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라는 연속적 판단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역사가는 이를 위해 모든 사실의 연구를 개관하며 분류,
비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역사의 서사, 도전과 응전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저술과 강연에서 청어 이야기를 자주 인용했다.
자신의 역사이론인 '도전과 응전'의 법칙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청어(靑魚)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급 어종이다.
하지만 청어가 잡히는 곳은 북해나 베링해협 같은 먼 바다였기에 싱싱한 청어를 먹기가 쉽지 않았다. 배에 싣고 오는 동안에 대부분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살아있는 청어가 런던 수산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그 비결은 청어를 운반해오는 수조에 청어의 천적인 물메기 몇 마리를 함께 넣는 것이었다. 청어가 물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힘껏 도망 다니다 보니,
그런 긴장이 청어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토인비가 청어 이야기를 자주 인용했던 것은
가혹한 환경이 문명을 낳고 인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자신의 역사이론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①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②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③갑작스런 외부의 공격,
④외부의 계속적인 압박, ⑤그리고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압제이다.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폴리네시아,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이 성장을 멈추고 만다.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를 말하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은 수준의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큰 자극을 준다.
역사를 봐도 그러하다. 자연조건이 지나치게 좋은 환경에서는 문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토인비는 문명을 일으킨 자연환경은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대부분 가혹한 환경이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자연환경이 좋은 나라는 늘 발전에서 뒤처졌다는 지적이다.
고대문명과 세계 종교의 발상지가 모두 척박한 땅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집트 문명을 예로 들어보면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원래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수렵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5,000~6,000년 전 아프리카 북부를 걸치고 있던 강우 전선이 북유럽 쪽으로 이동해 가자 아프리카 북부와 남아시아 지역은 빠르게
건조, 사막지대로 변해갔다.
이들에게는 이론상 세 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었다.
그곳에 남아 기존의 수렵 생활을 영위하면서 연명하거나,
그 자리에 남아있으되 수렵 생활 대신 유목이나 농경 생활로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거나, 거주지역과 생활방식을 모두 바꾸는 것, 이 셋 중 하나였다.
세 가지 응전 중 어느 것을 택했느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갈렸다.
그 자리에 남아 조상들의 방식대로 수렵 생활을 계속했던 부족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생활방식을 바꾼 부족은 아프리카 초원 지역의 유목민이 되었다,
그리고 독사가 우글거리는 나일강 변 밀림 지역으로 옮겨 가 농경과 목축을 선택한 부족들은 마침내 찬란한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을 일구었다.
문명의 교차로, 한반도
그렇다면 문명은 왜 응전에 성공하거나 실행하는가? 응전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토인비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한다.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했다. 여기에서 개인은 모든 개인이 아니다.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이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인 천재가 있다. 그들은 비창조적인 다수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에만 사회적 창조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비창조적인 다수자가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하고 따르는 현상을 ‘미메시스(mimesis)’라 한다. 그리스어 ‘미메시스’는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뜻이다.
『역사의 연구』는 분명히 세계적인 문명의 비교연구를 노린 것이지만, 그 핵심의 요약인 ‘서양 문명의 앞날’이라는 집필 동기, 나아가 인류 존속 조건으로서 생각해낸 ‘세계국가’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요청에 호응한 것이었다. 토인비는 자신의 민족적 체험이나 이해에만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깊이와 눈으로 문제의 본질과 무게를 가늠하려 했다. 예를 들어 토인비가 복잡하게 움직이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를 분석하여 세계사의 나아갈 길을 이야기할 때, 또는 인류의 지혜를 걸고 해결해야 할 핵전쟁의 위협이나 남북문제를 생각할 때, 중동전쟁을 지켜볼 때, 확대되어가는 도시문제나 공해문제 등을 생각해볼 때, 전반적인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발언은 그 어느 것이나 세계사적인 배경에서 해명되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교차로(crossroad)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문명의 교차로'란 다름 아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길목인 전쟁터를 말한다. 토인비가 세계 3대 문명의 교차로를 말할 때 그 첫 번째는 지금의 팔레스틴 지방이요, 두 번째는 실크로드(silk road)가 지나가는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지역, 그리고 세 번째 문명의 교차로를 우리의 조국 한반도로 꼽았다.
우리의 조국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문명의 교차로이기 때문에
그만큼 전쟁이 빈발했다는 뜻이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으로부터
크고 작은 도전과 전쟁들이 수없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의 조국은 외세에 의해 남과 북이 갈라져 있고,
여전히 전쟁의 위협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험성을 안고 반만년을 살아왔다.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적으로 유대인과 한국인이 우수하다는 평가는
수 없는 도전이 빚어낸 결과이다.
이러한 탁월함은 생물학적 우수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세의 도전 가운데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성공적인 응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역사의 연구』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는가?
『역사의 연구』는 구상에서 완결까지 40년, 집필에만 27년(1934~1961년)이 걸린
토인비의 대표 저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34년에 『역사의 연구』 제1권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4년에 제10권이 출간되었다.
이 열 권이 『역사의 연구』 본문에 해당하며,
1959년에는 역사 지도를 담은 제11권이 완성되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출간되자마자
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열렬한 찬사와 호응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격렬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면서 반론을 편 책이 제12권으로 1961년에 출간되었다. 이로써 『역사의 연구』는 총 12권의 방대한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어떤 배경에서 태어난 책인가?
19세기까지 동서고금의 역사가들은 민족, 가문, 왕조, 사회,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했다.
20세기 들어서서 개별민족이나 왕조나 국가가 아닌 ‘문명’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아놀드 J. 토인비(1889-1975)의 『역사의 연구』가 가장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를 휩쓴 종말론적, 비관적 분위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이를 계기로 문명의 역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재앙은, 힘겹게 이룩해온 근대화의 정신이 전혀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전쟁을 겪으며 지식인들은 미래에 대해 아무런 전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년 5월 29일~1936년 5월 8일)는
1920년에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나타난 현대문명의 병리적 징후들을 비관적으로 그려낸 책이다. 이 책은 문명이 유기체로서 탄생 - 생장 - 사망의 필연적 과정을 밟게 된다는 점을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했다. 이 책을 본 토인비는 슈펭글러의 생각은 독단적이고 결정론에 기울어 있고,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논증이 부족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토인비는 선험적인 방법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법을 채용해서 스승의 이론적 공백을 보강한 산물이 『역사의 연구』였다. 그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대상으로 과연 어떤 일반 법칙이 존재하는지를 찾아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서구 문명의 미래를 예언하고자 했다.
서구 문명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집필 동기가 되었다.
사멸했던 로마 문명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서구 문명도 결국 몰락하는 길만이
역사의 법칙상 주어진 운명인지 아닌지를 밝혀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역사의 연구』 는 이 같은 숙명론에서 벗어나 창조적 소수에 의해 진보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전개한다. 이러한 낙관적 역사관을 피력하기 위해 『역사의 연구』는 역사를 민족이나 국가 중심으로 파악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문화적 실체, 즉 문명을 역사의 단위로 설정한다. 또 문명이란 개인들 사이에서 관계의 결과이며 인간의 정신적 결정체로 본 점은 문명을 단순한 유기체로 이해한 슈펭글러와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연구』 는 인종이나 환경 등 결정론적 요인도 도전을 제기하는 범위 내에서만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타성에 젖은 한 사회집단 속에서 이 소수가 창조적 의지를 갖고 반응하게 됨으로써
문명이 도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명의 성장과 소멸과정을 보면 성장기에는 사회의 다수가
창조적 소수를 기꺼이 모방해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도전에 성공한 소수가 자신과 자신이 창조한 제도를 우상화함으로써
창조성과 지도력을 잃게 되면서 문명의 쇠퇴에 들어서게 된다.
창조적 소수가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소수와 다수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의 자기 결정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고전에서는 매우 많은 역사철학적 주제들이
쟁점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류사회에 그 공헌도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