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10호
호박풀떼
이태관
낡아가는 것과 삭아가는 것
천년의 사랑도 순간에 지나네
해가 짧아질수록 네게 가는 길이 마냥
섭섭하지는 않겠다
낡은 몸들이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양파를 들이고 감자를 캐고 오이와 가지를 지나
참깨는 털어도 털어도 언제나 부족했다
자라나는 호박잎이 담장을 덮고
그 잎 헤치며 어머니는 예쁜 애호박을 찾았다
가을이 오기 전에 꼭꼭 숨어라
술래에게 이긴 아이가
늙은 호박이 된다
담장에 기대 천천히 낡아가다가
눈 내리는 오후가 멈칫, 힘에 겨울 때
몸을 풀어 천천히 삭아가는 맛
아내는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현대시, 2023)
***
어제 비를 쫄딱 맞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가을비가 장맛비처럼 내립니다. 어제는 모처럼 최승호 형과 최성각 형 두 분 모시고 문단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시절 말입니다....
오늘의 시편지는 이태관 형의 신작 시집에서 하나 띄우려고 합니다. 이태 전인가 김규성 시인이 운영하는 담양의 거 뭐라더라 "글을 낳는 집"이라던가 "혀를 씻는 집"(洗舌園)이라던가 암튼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던 이태관 형을 만났더랬는데, 알고 보니 음식가게를 준비하고 있던 거였습니다.
이번에 나온 이태관 시인의 시집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은 음식으로 시작해서 음식으로 끝납니다. 세상에 모든 음식과 요리법과 그리고 음식 먹는 방법을 펼쳐 보입니다.
그중에 한 편을 골랐습니다.
- 호박풀떼
호박풀떼는 호박풀떼기라고도 하지요. 호박에다 잡곡 가루를 풀어 쑨 건데 범벅보다는 묽고 죽보다는 좀 되지요. 이 호박풀떼기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도 나옵니다.
"냠냠해서 호박풀떼기를 좀 쑤었다."
"호박풀떼기요?"
귀녀의 눈이 번쩍하더니 방문을 열고 침을 뱉는다. 김 서방댁은 아랫목에 포대기를 덮어놓은 사기(沙器)를 끄집어낸다.
"금년에는 호박오가리가 우찌나 달든지 생청 겉더라. 그래서 팥하고 찹쌀하고 넣어서 고았더니 세가 설설 녹게 달더고나."
귀녀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새 배탈이 났는지 영 음식을 못 묵었는데."
"가만 있거라이. 나 정기에 가서 숟가락하고 그릇 가지올 기니."
김 서방댁은 치마를 반허리에 걸치고 참나무 같은 맨발에 짚세기를 끼며 부엌으로 간다. 귀녀는 입맛이 동하여 사기 뚜껑을 열었다. 호박오가리를 넣고 쑨 죽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다. 치마를 펄럭이며 김 서방댁이 들어왔다. 시금치나물 한 보시기. 그릇과 숟가락을 방바닥에 놓고 사기에 걸쳐둔 국자로 사발 가득히 죽을 떠서 귀녀 앞에 놓는다.
- 박경리, 『토지』 2권, 134쪽
사실, 시집 전반에 걸쳐서 음식 얘기를 늘어놓지만, 이 시에서도 음식 얘기를 펼쳐 보이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정작 시인이 하고 싶은 얘기는 다른 것이지요. 음식은 단지 빙자한 것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정작 시인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뭘까요?
그것을 찾아내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시 읽기의 참 재미입니다.
가을을 타나요. 비가 저리 내려서 그런가요.
태관이 형 만나서 탁주 한 사발 걸쭉허니 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2023. 11. 6.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