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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 석(釋-불도) 의상(義湘). 속성(俗姓)은 박(朴)이오 계림부(雞林府) 사람이다. 나서부터 마못 영기(英奇-영특하고 호걸다움)가 있었다. 커서는 출리(出離-세상과 인연을 끊음)하고 소요입도(逍遙入道)하니 성분(性分-성질)은 천연(天然)이었다. 년림약관(年臨弱冠-약관의 나이에 임함)에 당토(唐土-당나라 땅)에 교종(敎宗)이 정성(鼎盛-왕성함)함을 듣고。원효법사(元曉法師)와 더불어 동지서유(同志西遊-같은 뜻으로 서쪽 유람을 함)했다. 행(行)이 본국해문(本國海門-자신의 나라 항구 관문) 당주계(唐州界)에 이르러, 거함(巨艦-큰 배)을 계구(計求-구하려 도모함)하여 장차 창파(滄波)를 넘으려 했다. 중도(中塗-진흙길)를 재촉하며 그 고우(苦雨)를 만나 곧 길 곁 토감(土龕) 사이에 의지해 은신(隱身)했다. 표습(飄濕-비바람)을 피(避)하려했는데 명단(明旦-다음날 아침)에 이르러서야 상시(相視-서로 봄)하여 고 고분해골(古墳骸骨-옛 무덤의 해골)이 곁에 있다. 하늘은 맥목(霢霂-가랑비) 같고 땅은 니도(泥塗-진흙탕)와 같았다. 척촌(尺寸-한치)도 난전(難前-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움)하여 두류(逗留-한동안 머뭄)해 부진(不進-나아가지 못함)하고 또 연벽(埏甓-두덤 벽)에 기대는 중에 |
내용 요약을 해보자.
여기서 해골물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럼 관련 논문도 찾아보자.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원효는 특히 그의 행적에 있어서 사전(史傳) 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사실로 엉뚱하게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적지가 않다. 예를 든다면 그의 아명(兒名) 서당(誓幢)이 신라 군호(軍號) 중의 서당(誓幢)과 글자가 같다고 해서 그를 군직자(軍職者)나 군출신으로 본다든가, 그의 출가를 29세때의 일이라고 한다거나, 그가 입당(入唐) 구법(求法)길의 도중 고총(古塚)속에서 해골 물[髑髏水]을 마셨다는 것이나, 또는 소설 등 문학작품상의 내용을 역사사실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 등이라고 할 것이다. 김영태, 「전기와 설화를 통한 원효연구」, 불교학보 17, 1980, pp. 1-2 한 마디로 말해 임간록소재 원효 이야기는 그 집록(集錄)의 연대나 내용의 성격및 역사성에 있어서 송승전(宋僧傳) 소수(所收)의 그것과 비교할 때 사적(史的)으로는 전혀 취할 바가 못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이르러 해골물 마신 이야기가 정설처럼 쓰고 있는 현상은, 분명히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사료의 무비판(無批判)과 역사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김영태, pp. 20-2 |
이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최근에 <온라인 텍스트 독해에 대한 고찰 만화>에서 해당 부분을 언급한적이 있는데 곰곰히 생각하면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도서관에 가면 축약본을 살 수 있고, 심지어 온라인 상으로는 번역본을 볼 수 있게 되어있다.
그 사이에도 논문 검색 사이트를 이용해서 관련 내용에 대한 팩트를 체크할 수 있다.
잘못된 통설을 사실인양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글 몇개 쓴다고 깨지진 않겠지만..
아직까지 나무위키로 역사 배우는 사람들이 이 글보고 1000분의 1 정도는 양심가책 느끼겠지 싶어서 쓴것임을 알린다.
첫댓글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셨다는게 와전된 것이라니, 새로운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원전(?)과 오늘날까지의 그 중간의 시대에서, 가장 먼저 해골물 드립이 나오는 역사서,위인집이 범인(?)이겠군요.
개인적으로 조선시대때 '안시성주 = 양만춘'의 패악질(?)이 있으니 이 시대때 합리적 의심이 들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