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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강원 고성신문 http://www.goseongnews.com/default/index.php
교육/문화 - 황연옥의 연재소설 <화진포의 성>
화진포의 성[1]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1월 21일(화) 14:43 [강원고성신문]
1893년 11월, 구한말 조선의 서울에서 한 서양 아기가 태어났다. 당시는 조선이 고립정책에서 벗어나 국제 대열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던 시기였다. 20여 년 전 조선은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며 이 땅을 침략한 외국 오랑캐들과는 천 년간 평화는 없을 것이란 척화비를 세웠다. 그리고 외국인이 한반도, 특히 북쪽 땅에 들어오는 것을 살벌하게 경계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아기의 아버지 닥터 월리엄 제임스 홀과 어머니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 소속인 의료선교단 일원으로 조선으로 와서 봉사하게 되었고 아기 셔우드 홀은 의료봉사 하러 온 홀 가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백인 아이로 조선에서 태어난 아기는 셔우드가 첫아이였다. 사람들은 눈이 파랗고 코가 오뚝한 아기를 보며 신기해하였다. 진료실 밖에 조그만 나무 침대를 만들어 아이를 눕혀 놓았는데 진료 받으러 온 사람들보다 아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나 강아지 같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팔을 살짝 꼬집어보고 아이가 ‘으앙’하고 울면 “음~ 사람 새끼가 맞는구먼…….” 하며 돌아갔다.
이렇게 은둔의 나라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어렵게 시작한 아기 아버지 제임스 홀은 1860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뷰엘의 한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사려 깊은 소년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중단하고 목수 수습공으로 취업을 했는데 건강이 나빠져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극도로 허약해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19살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와 간호로 놀랍게 건강이 회복되었다.
다시 살아난 그는 통나무집의 조그만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을 보며 이렇게 기도하였다.
“이제 나에게 다시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가장 뜻있게 보낼 수 있을까요?”
그는 세상에서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렌뷰엘의 시골 학교에 돌아와 다시 학업에 몰두했다.
3년 후 아덴스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집 옆집에 병든 퀘이커할머니가 계셨는데 가끔 문병을 갔고 할머니가 부탁하는 대로 약초를 달여서 갖다 드리곤 했다. 그 할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 그에게 이 같은 말을 자주 하였다.
“월리엄 제임스, 그대는 인간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거야. 그래서 죽을병도 고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대를 의사로 만들 것일세. 그대는 육체와 정신을 고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과 퀘이커 할머니의 기도 때문이었는지 제임스 홀은 스믈 다섯 살에 온타리아주 킹스턴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대학 2학년이던 1887년 봄학기는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해외 선교 학생자원 운동(SVM)’의 인도 지역 책임자 존 포먼 목사가 퀸즈대학을 방문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22명의 학생이 해외여행에 참여하겠다고 서명을 했고 월리엄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여름 방학에 조지 다우넛 박사를 만나 뉴욕의 국제 의료선교회에서 의료선교사를 양성하고 훈련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의과대학 3, 4학년을 뉴욕 벨레뷰 병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29살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자격을 취득하여 닥터 홀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닥터 홀은 자애로운 의사였다. 불쌍한 사람들이나 병들어 죽어가는 뉴욕 거리의 사람들을 형제처럼 여기며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았다. 상대가 살인자건, 도둑이건, 어떠한 범죄자라도 가리지 않았고 의사로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그 사명을 다했다”고 당시 의료선교회 간부였던 닥터 서머스톤이 그를 회상하는 글을 남겼다.
닥터 홀은 뉴 로셀이 있는 닥터 스톤의 저택에 기거하면서 날마다 뉴욕의 빈민가로 출근했다. 감리교 선교위원회 간부였던 닥터 스톤 내외는 닥터 홀을 사랑하였고 아들처럼 대하였다 닥터 스톤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는 날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낫게 해 주고 걱정을 덜어주며 눈물을 닦아주고 밝고 더 나은 생활로 인도하는데 몰두했다. 그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이론을 캐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친절하고 자상한 의사로 사랑을 나누어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서른 살이 되던 어느 날, 간호사 젠킨스가 진료실로 들어오며 새 소식을 전했다.
“닥터 홀, 새 의사가 오셨어요. 로제타 셔우드라고 선생님을 도울 여성 의사예요.”
닥터 홀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젊은 여의사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고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계속>
※이 소설은 2003년 ‘좋은씨앗’에서 발간된 <닥터 홀의 전기(조선회상)>를 참고하였습니다
새해부터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
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초계 출신 황연옥 작가 집필… 윤광자 화가 삽화
2020년 01월 07일(화) 09:07 [강원고성신문]
↑↑ 새해부터 본지에‘화진포의 성’을 연재하는 황연옥 작가가 작품의 배경인 ‘화진포의 성’을 찾았다.ⓒ 강원고성신문
본지는 새해 1월 20일부터 초계리 출신 황연옥 작가(사진)의 전기소설 ‘화진포의 성’을 연재합니다. 삽화는 춘천 출신으로 15년간 간성초교 등 고성지역 5개 학교에서 근무한 교사 출신 윤광자 화가(사진)가 맡아주셨습니다.
‘닥터 홀 가족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조선시대 말 의료봉사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학교를 지어 문맹을 퇴치하고, 서구의 문화와 사상을 전해준 선교사 가족의 헌신과 봉사의 삶을 재조명합니다.
특히 닥터 홀 가의 아들 셔우드 홀은 해주에서 결핵요양원을 짓고 결핵퇴치 의료선교를 하며 원산에 휴양지를 지었는데, 1938년 원산휴양지를 일제가 폐쇄하자 화진포로 강제 이주해 ‘화진포의 성’을 짓고 고성을 사랑하며 살다가 일본 헌병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추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 소설삽화를 맡게 될 윤광자 화가.ⓒ 강원고성신문
황연옥 작가는 “‘김일성별장’이라고 부르는 ‘화진포 성’ 그 이름을 다시 찾아주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숨은 이야기를 통해 고성이 관광지로 더 알려져 경제 활성화에 다소나마 기여하게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집필을 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윤광자 화가는 “작품 활동은 많이 했는데, 신문연재 소설의 삽화는 처음”이라며 “고성군과의 인연으로 참여하기로 했는데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데 부족함이 있을까 걱정이지만,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화진포의 성[2]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2월 11일(화) 14:45 [강원고성신문]
진료실에 들어온 로제타는 닥터 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저는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스테이튼 섬의 어린이 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쳤습니다.”
벨레뷰 의과대학의 어스틴 플린트 학장이 써 준 추천서를 들고 있었다. 닥터 홀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연하게 서류를 차근차근 읽으며 위엄 있는 표정으로 인터뷰를 했지만 그녀와 함께 근무하게 된 일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는 1865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의대에 들어가기 전에 체스넛 릿지 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했다. 어느 날 인도의 의료선교사였던 닥터 로번 여사로부터 해외 여성의료선교사가 많이 필요하다는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시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가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감리교 주관사업의 하나인 뉴욕 빈민가 시료원을 찾아왔다가 닥터 홀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힘을 모아 헌신적으로 빈민가의 어려운 시료원 일도 잘 해냈다. 그들은 해외선교사 일원으로 중국으로 파견될 선교사 후보들이었다.
그해 성탄절, 닥터 홀은 청혼을 했으나 로제타는 망설이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래 그녀는 결혼 계획이 없었고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규정에도 의료선교사는 최소 5년은 결혼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시절 목에 결핵성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는데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일 결혼하여 건강이 좋지 않게 된다면 닥터 홀에게 큰 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이미 미국 감리고 여성 해외선교회에 선교사 신청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닥터 홀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로제타, 둘이 힘을 합쳐 의료선교를 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요. 먼저 약혼이라도 해요. 약혼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당신이 어디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돕고 당신을 기다릴 거요.
닥터 홀은 로제타를 설득하였고 그 이듬해 부활절에 다시 청혼을 하였다. 셔우드는 닥터 홀의 진실한 사랑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마음을 열었고 두 사람은 약혼을 하였다.
얼마 후 로제타 셔우드는 해외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녀의 임지는 당초 희망했던 중국이 아니라 새로운 선교 대상지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이었다.
1890년 8월, 닥터 로제타는 많은 생각을 잠재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조선으로 가기 위해 리버티 집을 떠났다. 닥터 홀은 약혼녀를 당분간 못 만난다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또 다른 차원 깊은 사랑이 그들 마음에 솟아났다. 셔우드가 배를 타고 떠나자 배웅을 하고 돌아온 닥터 홀은 그녀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를 띄웠다.
“당신은 지금쯤 태평양 위에 있겠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이 탄 배는 내게서 멀어져 가지만 내 마음은 전보다 당신과 가까이 있음을 느낍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은 느낄 수 있을 런지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지배하는 전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고 커집니다. 더없이 소중한 당신, 사랑하는 당신이 멀고 먼 낯선 땅에서 홀로 험난한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빈민가, 연인들이 만나기에는 부적당한 그곳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로제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고 지켜주실 줄 믿고 기도합니다.”
닥터 홀은 마음을 다잡고 시료원 업무와 빈민가의 환자 돌보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는 뉴욕 선교사 임기가 끝나는 대로 중국 의료선교사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선교위원회에서 닥터 홀을 중국으로 파견할 자금을 모으지 못하였다. 조선에서도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닥터 홀은 중국보다는 로제타가 있는 조선으로 파견되기를 원했으나 선교사에게는 선택의 자유 보다는 오직 순종만 있을 뿐이었다.
“주님 길을 열어 주소서. 저는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중국으로 파견되는 캐나다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으로 가기 위해 짐을 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약혼자 로제타를 중국 상해로 올 수 있도록 선교위원회에 허락을 받아서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중국의 서부임지로 가서 의료선교를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온지 두어 달 후 로제타는 닥터 홀에게서 믿기지 않는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그가 조선 의료선교사로 가도록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의 임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로제타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아, 하나님 어떻게 된 일일까요? 기도한 대로 정말 그를 만나게 되나 봐요!’
<다음 호에 계속>
화진포의 성[3]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5월 26일(화) 10:10 [강원고성신문]
로제타는 닥터 홀의 편지를 받고 기뻤다.
중국 선교사로 갈 짐을 싸고 있다는 지난번 편지를 받고는 두 마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중국으로 가서 제임스 홀과 결혼해서 함께 의료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과 여성 해외선교회와 약속한 5년이라는 의무기간을 조선에서 채워야 한다는 갈림길에서 고심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 감리교선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던 닥터 스크랜턴과 볼드윈은 성실하고 사명감이 강한 닥터 홀을 캐나다 선교회에 다시 보낸다는 것은 미국선교위원회로서는 큰 손실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캐나다 선교위원회를 설득하여 그를 미국선교회 의료선교사로 약혼녀가 있는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닥터 홀은 로제타에게 편지를 보냈다.
“로제타, 나는 방금 조선 의료 선교사로 임명하겠다는 놀라운 소식을 통보받았소. 조선에서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의료 선교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오. 나는 주님께 중국이든 어디든 주님 뜻대로 따르겠다고 기도드렸소.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디든지 주님을 위해 갈 것이라는 점을 아셨소. 나는 지금 의과 대학원 과정을 좀 더 공부하고 있소. 이 학업이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귀하게 쓰이길 바랄 뿐이요. 만날 때까지 건강하길 기도하오.” (1891. 9. 19. 당신을 사랑하는 제임스)
편지를 읽던 로제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랑하던 약혼자를 혼자 미국에 두고 기약 없이 떠나오던 날이 생각났다. 결혼하여 남편과 같이 중국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조선으로 파견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고, 당시 은둔 왕국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에서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약혼자 제임스가 조선으로 온다고 하니 꿈만 같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로제타는 문득 일 년 전 조선에 처음 왔을 때의 첫인상이 기억났다. 그녀는 1890년 10월, 부산항에 첫발을 디뎠다. 언더우드 박사는 5년 먼저 조선으로 왔다. 미국 감리교단이 조선에서 선교 활동 시작한 것은 1885년이다. 조선의 선교는 현지의 관습과 풍습, 미신,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 등을 고려하여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시작해야 했다.
당시 조선은 이씨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여성은 낮에 함부로 외출할 수도 없었고 가급적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는 관습이 불문율처럼 되어있었다. 여성들은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였고 부모 뜻대로 결혼한 뒤에도 남편 집에서 일하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풍속 때문에 병이 든 여자를 치료하려면 여의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닥터 스크랜턴(감리교단의 대표)은 여성 해외선교회에 여자와 아이들만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했다. 이 요청이 수락되어 1887년 여의사 닥터 메타 하워드를 조선에 파견하였고 처음으로 여성 전용 병원이 세워졌다.
이 병원은 메리 피치 스크랜턴 여사가 조선에 처음 세운 여학교와 한 장소에 있었다. 이 학교의 이름을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최초의 여의사 닥터 하워드는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다가 무리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그 뒤를 잇기 위해 로제타 셔우드가 조선에 온 것이다.
부산항에 도착하던 날 로제타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조선 해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육지에 가까워지면서 당분간 내가 살아갈 이 나라를 비상한 관심으로 바라보았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려고 오는 나를 이 나라 사람들은 별로 환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언덕과 산들이 매우 가파르고 암석이 많고 나무가 없어 삭막해 보였다.
부산항에서 24시간을 체류했다. 나룻배를 타고 육지에 올라 제일 먼저 전신국에 가서 서울 스크랜턴 여사(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선교사)에게 부산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쳤다. 이 전신국은 부산과 서울을 이어주는 조선에서 유일한 전신국이다.
마을을 둘러보니 산 근처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왕래하는 조선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 위아래 하얀 옷을 입고 있어 그림 같았다. 대부분이 남자였고 여자는 남자가 집에 들어온 뒤 해가 진 다음에야 밖에 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미국 남자들이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신기해하고 좋아할지 궁금하다.”
그녀는 조선에 와서 처음 본 인상 깊은 낯선 풍경들을 폭 15cm, 길이 31m가 되는 아주 긴 종이 두루마리에 써서 뉴욕 리버티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다. 그 내용 중에는 구한말 조선의 풍경들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차나 철도도 없고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큰길도 없고 먼 길을 가려면 걸어서 가던지 가마나 말을 타야 했다. 남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머리를 길러 가르마를 타서 땋아서 뒤로 늘어뜨린다. 쉰 살이 지나도 총각이면 소년 취급을 했다. 중국인들은 정수리 부분을 면도하여 깎는데 조선 남자들은 이 부분을 길러 머리를 위쪽으로 틀어 올려 머리 중심 앞쪽에 상투를 만든다. 나무나 은으로 만든 핀을 꼽고 말총으로 만든 망건을 써서 머리털이 빠져나오는 것을 막는다. 또 한 그 위에 장신구 비슷한 챙이 넓고 관처럼 생긴 모자를 쓴다. 상투가 관에 들어가게 되어 있고 양쪽에 끈이 달려 턱 밑에 묶는다. 모자는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 만든 뼈대에 얇은 천을 씌워서 만들지만, 고급품들은 말총으로 만들고 색깔은 대부분 검은색이다.”
조선의 남녀 복식을 비롯하여 풍물 생활습관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그녀가 조선에 와서 제일 눈길을 끈 것은 ‘지게’이다. 나무로 만든 이젤 같이 생긴 것으로 조선인들은 그것을 등에 지고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였다.
부산에서 제물포항으로 왔다. 환영 나온 게일 선교사와 미국에서 한배를 타고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마거리트 벵겔 양과 또 다른 한 사람과 4인 1조가 되어 가마를 탔다.
가마 한 대에는 8명의 가마꾼이 따랐다. 한 시간에 평균 6km의 속도로 빠르게 걷는데 교대할 때는 가마를 내리지 않고 멜빵을 한쪽 어깨에 걸치면서 들어왔다. 이때 다른 편은 물러나는 식으로 민첩하게 교대하는데 걸음이 멈추거나 늦어지지 않았다.
거리에 바퀴 달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가끔 양쪽에 짐을 지고 가는 작은 말이나 소가 끄는 작은 달구지는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여행 트렁크는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장장 45km를 짐꾼들이 지게에 져서 날랐다.
지게꾼들의 어깨가 얼마나 아플까? 두꺼운 가죽이나 천을 대면 덜 아플 것 같다고 했더니 함께 한 게일 선교사가 몇 번을 권해도 자신들의 방법만 고수 할 뿐 절대 듣지 않는다고 한다.
앞으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 풍습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료를 하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까? 마음의 각오를 하고 오긴 했지만 로제타의 마음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들을 진심으로 치료해 주고 섬기면 언젠가는 마음이 열리겠지….’
로제타의 마음이 숙연해졌다.
화진포의 성 [4]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4]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5월 26일(화) 10:13 [강원고성신문]
로제타는 한강에서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한강에 닿기 전에 모래밭을 지났는데 모래가 많아 마치 사막을 가는 거 같았다. 성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길고 높은 성벽을 보았는데 이 성벽은 1396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길이는 20Km, 높이는 6에서 12m까지인데 어떤 부분은 도시 밖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인 곳도 있었다.
서대문이라 불리는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여성 해외선교회 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지대가 높아 도시의 전경과 둘레의 산들이 잘 보였다. 이 지대에 학교, 병원, 닥터 스크랜턴댁, 아펜젤러 올링거 목사 댁이 한쪽에 있고 로제타가 기거할 집과 여선교회의 학교(이화학당)가 있었다. 목사님들의 집과 소년들의 학교(배재학당)는 벽돌로 지은 미국식 건물이고 그 밖의 건물은 모두 단층 기와지붕인 조선식 건물이었다.
로제타는 본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집에 숙소를 정했다. 햇빛이 잘 드는 남쪽의 방에 짐을 풀어 정리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방에는 침대와 세면대가 있었는데 조선 돈을 넣어 두는 구리로 장식된 큰 궤가 있었다. 먼저 살던 사람들이 두고 간 것 같다. 얼마나 돈이 많았기에 저렇게 큰 금고에다 돈을 넣을까 신기했다. 그러나 조선은 금화 1달러어치에 해당하는 돈이 25센트만 한 크기의 엽전 1천 개 정도 되었으므로 적은 액수의 돈을 보관하려 해도 큰 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사람들을 돈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줄을 꿰어 등에 메고 다니든지 액수가 많으면 지게에 지거나 말 등에 지우고 다녔다.
로제타가 서울에 도착한 때는 1890년 10월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곧 병원 일을 시작했다. 여성 해외선교회 병원을 돌아보는 로제타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설이 훌륭하네!”
병원은 구조를 고친 조선집이었지만 진찰실, 환자 대기실 약국, 입원환자들을 위한 방도 5개나 있었고 약품도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선교회 병원의 최초의 여의사 닥터 하워드가 병을 얻어 귀국한 뒤 닥터 스크랜턴은 여의사가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성 전용 병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다. 로제타가 두 번째 여의사로 이 병원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을 이 작은 병원을 보구여관保救女館(여성들을 보호하고 구제하는 집, 사진)이라 불렀다.
“아! 주님, 감사합니다.” 로제타 입에서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로제타는 남아 있는 돈을 다 털어 부족한 의약품을 주문했다. 병원의 감독 겸 간호사인 봉선이 엄마(사라)의 도움으로 진료를 시작한 첫날은 4명, 다음 날은 9명을 진료했다. 그 후 석 달 동안 549명의 환자가 와서 진료를 받았다. 눈병, 귓병, 기생충이나 회충, 매독, 연주창(경부 림프에 생기는 결핵) 등이 가장 많았다. 8명의 환자를 보는데 무려 21가지 전문적인 병을 치료해야 했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료를 하였다. 3년 동안 무려 14,000가지나 되는 병을 진료하였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진료하게 되자 서양 의사에 대한 편견도 줄어들고 대부분의 조선인이 호의적이었다. 동양 의술로 할 수 없는 수술 환자들을 치료해서 완치시켰기 때문이다.
‘의사가 한 명 더 파견되어 오면 더 많은 환자를 고쳐줄 수 있을 텐데…’
로제타의 마음은 찾아오는 환자들을 시간에 쫓겨 더 자상하게 돌보지 못해 늘 안타까웠다. 진료소에 오는 환자들은 “많이 고맙소”하고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상류층의 여성들은 가끔 가마를 타고 오거나 가마를 보내와 집으로 왕진을 청하기도 한다. 한 번은 민 씨라는 집에 왕진을 하러 갔는데 그 집은 조선식의 아주 큰 건물로 궁궐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아 훌륭한 가문의 한 집인 것 같다. 그 집에서 무려 여섯 사람의 환자를 진료했다. 마치 작은 이동 진료소를 차린 것 같았다.
어느 날, 열여섯 살 난 소녀를 가마에 태우고 그녀의 오빠가 병원을 찾아왔다.
“동생이 오래전에 화상을 입어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어요. 선생님 고칠 수 있을까요?”
소녀를 데리고 온 오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둡게 말했다. 조선에서는 여자가 16세가 될 때까지 결혼을 못 하면 집안의 큰 흉이 되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가족들은 손 때문에 시집을 못 간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로제타는 그 소녀를 입원시켜서 수술하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손에 흉터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피부 이식 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데 피부가 부족했다.
로제타는 깊은 생각 끝에 자신의 몸에서 피부를 떼어 내어 수술하기로 했다. 그러나 로제타의 피부만으로 환자의 흉터를 다 가릴 수는 없었다. 통역을 통해 피부 이식 수술에 대한 설명을 들은 환자의 가족들과 주변의 사람들까지 나서서 자신들의 피부를 제공했다. 모두 30개의 피부 이식 수술을 했는데 그중 6개 이식한 피부가 성공하여 흉터가 거의 가려졌고 상처가 다 아물었다.
그 소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밝은 얼굴로 퇴원을 하였고 가족들도 기뻐하였다.
“이제 손도 예뻐졌으니 좋은 남편한테 시집가서 잘 살길 바래요!”
로제타는 웃으며 소녀를 배웅하였다.
서양인 처녀 의사가 조선 소녀를 위하여 자신의 피부를 떼어 주었다는 소문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구한말 조선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기 되었다. 가난한 여성들에게는 거의 돈을 받지 않았다.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여자들은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고 대부분 굿이나 미신적인 방법에 의존하였다. 보구 여관은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실로 진맥을 받던 여성들이, 근대의학의 혜택을 누리게 되고 조선 여성들의 건강과 자기의식을 높여 주는 빛 같은 역할을 하였다.
비가 오는 날 캄캄한 밤중에 난산으로 생명이 위독한 여인을 찾아가 아기와 산모를 구하는 등 로제타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보고 사람들은 그녀를 높이 칭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칭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미력한 자신이 이렇게 조선의 여성 환자들을 위해 의료봉사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병원 옆에 있는 여학교(이화학당)에는 7세부터 17세까지 26명의 소녀가 있었다. 교과 과목으로 한문, 조선어 읽기, 쓰기, 작문, 지리, 산수, 성경, 영어와 미용체조도 가르쳤다. 저학년은 조선어로 가르쳤고 고학년은 영어로 가르쳤다.
로제타는 총명한 두 소녀에게 진료실에서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가르쳤다. 열세 살 된 이 소녀들은 3년 동안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인데 한 소녀는 조선인이고 다른 소녀는 부모가 서울에 사는 일본 소녀이다.
조선 소녀 이름은 ‘점동’이인데 영어를 잘해 좋은 통역사였고, 일본 소녀의 이름을 ‘오와끼’이며 약제사 일을 좋아해서 꼬마약제사라 불렀다. 점동이는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오와끼는 일본인이라 대낮에도 거리를 다닐 수 있어 심부름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두 소녀는 로제타의 진료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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