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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정 희성 시 ‘ 길’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 정 희성 시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보느니
물새 몇 마리 끼룩대며 날아간
어두운 하늘 저 끝에
붉은 해가 솟는다
이상도 해라
해가 해로 보이지 않고
구멍으로 보이느니
저 세상 어드메서
새들은 찬란한 빛무리가 되어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 정 희성 시 ‘ 새 그리고 햇빛‘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궁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 정 희성 시 ‘ 태백산행‘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집 잃은 시민들이 시위하다 불타 죽은 아침
억울해 울면서 항복하듯 다리를 들고
팔목이 시도록 맨손으로 우리는
이 땅을 디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난이 제 탓만도 아닌데
우리들의 시대는 집이 헐린 채
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 사람들한테 쫓겨 가자지구로 간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요르단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소년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난감 총을 들고 전사의 꿈을 키우고 있고
아마 머지않아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이상한 나라의
황혼이 짙어지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기 시작하고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죄를 지어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촛불을 들고 어두운 감옥으로 가리라
감옥 밖이 차라리 감옥인 세상이기에
- 정 희성 시 ‘ 물구나무서서 보다‘
* 하이네의 시 「거꾸로 된 세상」의 첫 구절
* 시집<그리운 나무>, 2013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 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 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 정 희성 시 ‘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 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정 희성 시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 정 희성 시 ‘산’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 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면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정희성 시 '숲' 모두.
조선새는 모두가 운다
웃거나 노래하는 새는 한 마리도 없다
고, 권정생은 노래한다
아니,운다
까치가 운다
까마귀가 울고 꾀꼬리도 울고 참새도 운다
이것이 반만년을 살아온 우리나라 농민들의 정직한 감정
이라고 쓴 선생은
1937년 토오꾜오 혼마찌 헌옷장수 집 뒷방에서
청소부 아버지와 삯바느질꾼 어머니한테서 태어나
빌어먹을! 조선에 돌아와 유랑걸식 끝에
아이들 읽으라고
글 몇줄 남기고
어메 어메 여러번 외치다가 돌아갔다
조선새는 모두가 운다
웃거나 노래하는 새는 한 마리도 없다
- 정 희성 시 ‘ *권정생’
*권정생은 일본 토오꾜오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귀국했다. 빈곤으로 가족들과 헤어져 어렸을 때부터 유랑걸식을 하다가 아동문학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 『무명저고리와 엄마』『몽실언니』 등 좋은작품으로 명성을 얻지만, 오랜 지병 끝에 2007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달라"는 유언과 함게, 자신을 위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적지 않은 인세를 세상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남기고 눈물겨운 삶을 마감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문을 낮게 낸 것일까
무심코 열고 들어서다
이마받이하고 눈물이 핑 돌다
낮게 더 낮게
키를 낮춰 변기에 앉으니
수평선이 눈썹에 와 걸린다
한때 김명수 시인이 내려와 산 적이 있다는
포항 바닷가 해돋이 마을
물이 들면 언제고 떠나갈
한 척의 배 같은
하얀 집
내가 처음 이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눈썹에 걸린 수평선이
출렁거릴 따름이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창을 낸 것일까
머물다 기약 없이 가야 할 자들이
엉덩이 까고 몸 낮춰 앉아
진듯이 세상을 내다보게 함일까
- 정 희성 시 ‘ 언덕 위의 집‘
아, 제발 그대가 내게 입맞춰주었으면!*
깃털처럼 가벼이 날아가 그대의 젖가슴에 닿을 수 있다면
스완의 목같이 늘씬한 그대 허리에 손을 얹고
건반에 뛰노는 손가락이 되어 그대를 연주할 수 있다면
오 하느님, 딱 한번 해봤으면!
꿈에라도
벌거벗은 이 꿈 들키지 말았으면!
- 정 희성 시 ‘ 아가(雅歌)‘
* 성경 <아가서>의 앞부분
무슨 야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마음 이렇게 무거운 것이냐
벗은 나더러 이념을 그만 내려놓으라 한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도 하나하나
버려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고
아무 생각 없이 거드렁거리며 놀다 가자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청문회에 불려나가
재산이 몇푼 안된다는 게 들통나서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냐고 추궁당할까봐
걱정인 나더러 별걱정 다한다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더러
무엇을 더 내려놓으라고
그것이 팔자고 자기 몫의 십자가라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하며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천상병 시인만큼 가볍지는 않은 걸 보면
무언가 내 마음에서 더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기는 있는지도 모르지만
- 정 희성 시 ‘ 야망‘
* 돌아다보면 문득, 창비.
평생 아이들 자라는 것만 보다가
퇴임하고 들어앉은 나에게
허구한 날 방구들만 지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아내가 불쑥 내민 호미 한 자루
하느님, 나는 손톱 밑에 흙을 묻어본 적 없고
상추 한잎 이웃과 나눈 일이 없습니다
아내가 얻어놓은 작은 밭이랑에
어떻게 아이들을 심을까요
내 서툰 호미질이
어린 상추싹을 다치게 할까 걱정입니다.
- 정 희성 ‘ 작은 밭‘
사람들이 나보고
집 안에 틀어박혀
말도 안되는 시만 쓰지 말고
비타민 디를 먹고
햇볕을 많이 쬐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아득한 전생에 상추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 정 희성 시 ‘우울증’
[ 돌아다보면 문득 ]창비,2008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 정 희성 시 ‘ 흔적‘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간 제자를 찾아 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 보다 큰 물뿌리게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는거니?
꽃이야..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정 희성 시 ‘민지의 꽃’
1. 송(松)-완당의 그림을 그리며
참솔가지 몇 개로 견디고 있다
완당(阮堂)이여
붓까지 얼었던가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추위가 이 속에도 있고
누구나 마른 소나무 한 그루로
이 겨울을 서 있어야 한다
2. 죽(竹)
참대 한 줄기
수식어도 사양했다
겨울이여 생각할수록
주어는 외롭고
아아, 외쳐 불러
느낌표가 되어 있다
- 정 희성 시 ‘ 세한도(歲寒圖) ‘
*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의 곧고 시들지 않음을 잘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글귀 中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을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 정 희성 시 ‘ 첫 고백‘
* 정희성 시집《詩를 찾아서》에서. 창작과비평사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날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 정 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법정에 서 있는 친구를 보고 돌아온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하늘은 유난히 맑아서
나는 새장의 새를 풀어놓았다
하늘을 알아버린 탓일
그 작은 눈에 고인 햇빛이 너무 맑아
새는 외로와 보였다
모든 걸 알아버린 탓일까
아직도 하늘이 푸르냐고 묻던
그 친구 눈에 패인 그늘이 생각나
하늘을 보다 자리에 누운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
햇빛이 너무 맑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정희성 시 ‘하늘을 보다 잠든 날은‘
* 시집 :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보느니
물새 몇 마리 끼룩대며 날아간
어두운 하늘 저 끝에
붉은 해가 솟는다
이상도 해라
해가 해로 보이지 않고
구멍으로 보이느니
저 세상 어드메서
새들은 찬란한 빛무리가 되어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 정 희성 시 ‘ 새 그리고 햇빛’
< 샘터.1991 >
가여운 입술이나 손끝으로 매만질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더러는 우리가 어둑한 심장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몰라 오늘 따라 어설피 흰 살점의 눈 내리고 이 겨울 우리네 마음같이 어두울 뽕나무 스산한 가지 설운 표정을 목로에서 나 달래는 심정으로 훼훼 탁한 술잔을 흔들다가는 시나브로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보지마는 언제 우리네 겨울이 인정같이야 따뜻한 것가 어두운 나무에서 반짝이는 눈빛 같이야 어짜피 반짝일 수 없는 우리네 마음이 아닌것가 미쳐간 누이의 치마폭에 환히 빛난던 싸리꽃 등속의 그 꾀죄죄한 웃음결만치도 밝게 웃을 수 없다면야 순네의 슬픔에 맞는 가락지 우리 모두가 우리네 슬픔에 맞는 사랑을 찾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볼 일이다
- 정희성 ‘ 사랑 辭說‘
* 시집<답청(踏靑)>.문학동네.1997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 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에서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이렇다 하게 사는 애비 친구들도
평생을 살 붙이고 살아온 늙은 네 에미까지도
이젠 이 애비의 무능한 경제를
대놓고 비웃을 줄 알고 더 이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구나
그렇다 아들아, 실패한 애비로서
다 늙어 여기저기 공사판을 기웃대며
자식새끼들 벌어 먹이느라 눈치보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래도 나는 할말은 해야겠다
아들아, 행여 가난에 주눅들지 말고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부디 네 불행을 운명으로 알지 마라
가난하고 떳떳하게 사는 이웃과
네가 언제나 한몸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힘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
아직도 돌을 들고
피흘리는 내 아들아
- 정 희성 시 ‘ 아버님 말씀 ‘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 정희성 시 ‘ 이곳에 살기 위하여‘
바람에게 그리고 긴 긴 겨울밤이 오면 내 스스로 걸어 나가리라 흰 눈 덮인 들숲의 가막새 까욱대던 거기 바람을 찾아 가고 또 가리라 뼈로서 겨울밤을 지새우리니 뼈와 바람만이 서식(棲息)하는 그곳을 나는 믿는다 어디서 괴벗은 바람이 골수에 사무쳐서 외오곰 죽은 혼이 내는 목소리도 아주 잘 들려오는구나 나는 믿는다 바람을 바람이 내는 곧은 소리를 거기 흰 눈뿐인 들판을 내 가고야 말리니 말 탄 바람이여 이 밤에 나를 태워 아프게 아프게 채찍을 쳐라
- 정 희성 시 ‘ 바람에게‘
* 시집<답청踏靑>.문학동네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다 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울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 정희성 시 ‘ 우리들의 그리움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1991 창작과비평사,
수업이 끝나기 전에
시간을 주어도 아이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이 없는 교실로
낙엽은 날아들고
누구의 입에선가 새어나온
짧은 탄성 한마디로
눈시울이 붉어진 가을
가을만이 확실한
우리들의 감동이다
메마른 몇 개의 낱말과
눈먼 문법으로 어떻게
우리들의 삶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으랴
만약에 침묵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유일한 대답이라면
비본질적인 질문으로 더 이상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으리라
아아 말 못할 우리들의 시대
이루지 못한 꿈의 빛깔로
낙엽은 저렇게 떨어져
가을은 차라리
우리들의 감동이다.
- 정희성 ‘침묵’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1991 창작과비평사
만약에 여자들이 새로 옷을 해 입을 때
부끄러운 데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안 가려도 좋을 곳만 가린다면
세상의 남자들은 미쳐 날뛸 것이다
천지가 뒤집힐 듯이
거리에 활기가 넘칠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민주시민 여러분!
만약에 이런 시대가 온다면
당신의 성감대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말하리라
"나는 당신의 팔꿈치가 보고 싶어요"
혹은
"당신의 뒤통수만 봐도 나는 느껴요"라고
- 정 희성 시 ’ 자본주의식 신사고‘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꺼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정희성 시 ‘ 얼은 강을 건너며‘
시집"답청",문학동네.1997.
** 정희성, 시인. 전 중고등학교 교사. 출생, 1945년 2월 21일, 경남 창원시. 78세, ~1968.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4. 용산고등학교 졸업. 2014.12. 제5회 구상문학상 본상. 2003. 제8회 현대불교문학상. 2001. 제16회 만해 문학상. 1997. 제2회 시와 시학상. 1981.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