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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10강 장엄정토분/설우스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제 10분 장엄정토분입니다.
본문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실제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게 장엄정토분의 첫 분장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교학적으로 배울 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석가모니라는 호를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았기 때문에 과거 보장왕시절에 선애라는 비구가 연등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그 달려가서 그 법문을 듣고. 그리고 연등부처님께서 먼 훗날 어느 때 선애비구는 사바세계에 석가모니라는 불호로서 그렇게 부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수기를 받았거든요.
그러니 그런 것을 볼 적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그대 생각이 어떻는가? 석가모니라는 그 부처님의 불호를 연등부처님에게로부터 받았는데. 연등부처님에게 내가 법을 받은 것이 있느냐? 이렇게 묻는 거에요.
여러분들 생각에 어떻습니까? 당연히 받았죠.
그 오늘 이 법문을 잘 이해를 하시려면은 먼저 7분에서 무득무설분이라는 과가 여러분들 잘 배웠죠?
얻은 것도 없고 설한 것도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 내용을 볼 때는 부처님이 연등부처님에게 법을 전해 받았다 이 말이오. 그런데 수보리가 부처님께 이야기 하기를 세존이시여 연등부처님으로부터 한 법도 전해 받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요. 이해하기가 어렵죠?
자 연등불에게 제 2등불을 이었다고는 하나, 전한 것은 무슨 법이며, 얻은 것은 또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이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잘 설명을 해 드려야 되는 거에요.
부처님이 이렇게 물었을 때 수보리는 벌써 알아챘어요.
이게 소위 말해서 선기라고 그러는데. 지혜가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죠.
우리가 세속에서도 댓글 배워가지고 말글로 써먹는 사람이 있고. 말글 배워가지고도 댓글도 잘 못 쓰는 사람도 있어.
그건 어디에 있느냐? 소견에 있어. 소견이 복이라 그러잖아. 이 소견이 확 튀어야 된다는 말은 이 법문을 들어도 이 법의 이치를, 진리를 잘 여러분들이 빨리 알아 채야 되는 거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법을 얻은 것이 있느냐? 하니까 수보리가 벌써 알아채고 척하면 삼척이라고 없습니다. 왜 없느냐? 왜 없을까요? 부처님께서 사실은 모든 법을 죽 말씀을 하시고 하셨지만은, 사실은 법을 줄래야 줄 수도 없고, 받을래야 받을 수도 없는 게 법이에요.
그래서 법화경에 보면은 이런 내용이 있지.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것은 일대사 인연을 위해서 오셨다 그런 말을 하거든.
그럼 일대사 인연이라는 것이 뭐냐? 그것은 開示悟入개시오입이다. (열 開개, 보일 示시) 열어 보인다.
무엇을 열어 보이는가? 진리. 그 부처님의 진실된 그 법을 잘 열어 보인다 이 말이오.
열어 보일 뿐이지, 줄 수는 없고, 받을 수는 없는 거요. 그래서 열어 보인 것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가 잘 교화를 입어서,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본래 청정한 자성자리, 본래 그 오염되지 아니하고 본래 부족함이 없는 내 맑은 밝은 성품자리를 내가 깨달을 뿐이지, 부처님이 어떻게 법을 줘서 깨닫게 되는 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작은 티끌 법 하나라도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외도야.
왜 외도냐? 연등부처님에게 법을 내가 받았다고 할 때는 그것은 연등부처님의 법이지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렇죠?
내 법이 아니야. 밖에서 들어온 거는.
그래서 이 정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을 전했다고 하기는 해도 사실은 전한 법은 없는 거에요.
본래 내 안에 있는, 나의 본래 밝은 반야지혜를 내가 스스로 밝히고, 스스로 내가 그것을 깨달아 알 뿐이지.
무엇을 주고 받는 것은 없다. 이해가 갑니까? 그래서 선가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知無生死지무생사 또는 契無生死계무생사. 體無生死체무생사. 用無生死용무생사 이러거든.
이 知無지무라는 것은 (알 知지, 없을 無무) 생사가 없는 도리를 잘 알아야 된다.
여기서 생사라 할 때는 육신이 죽고 사는 생사를 말하기 보다는 마음에 생멸심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없는 도리를 먼저 알아야 된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항상 이야기 하지만은 기도를 열심히 하나, 염불을 하나, 참선,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나, 우리가 항상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야 되요.
이걸 타력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데. 선을 이야기 하시면서 스님이 어째 타력을 이야기 하시고 가피를 이야기 하시나.
스님이 가피라고 그러고 타력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지 잘 들어봐요.
생멸심이 없는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제가 모든 금강경을 설해오면서 모든 것은 다 인연에 의해가지고 연생연멸이라는 것을 알아가지고. 색이 그대로 공한 도리를 이해를 시켰고. 공이 그대로 색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해서 제가 자상하게 말씀을 드렸잖아.
그러면 이러한 이치를 밝히고 법을 밝히는 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부처님께서 대승경전에 깊이 깊이 뜻을 드러낸 거거든. 그럼 이건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 말이야.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라는 것은 생한 것도 멸한 것도 다 연생연멸이고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허공에 하나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그것은 생해도 생한 것이 아니오. 멸해도 멸한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제가 뭐라 그랬죠? 무생이라고 그런다.
그래서 바탕을 죽 깔아 왔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다 부처님이 대승경전에서 다 법을 설하고 가르친 거에요.
그러면 그 생멸법이 없는 것을 알았으면은 그 다음에는 뭡니까?
체무생사라. 알았으니까 그것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나, 염불을 하든 또는 참선을 하든. 그 경지를 체험을 하기 위해서 체험을 해야 된다는 거지.
그래서 체험을 해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된다.
그래서 체무생사라 그러고. 그러면 체험을 했으면은 체험된 그 경지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일심의 세계 번뇌 망념이 일체 아무것도 없고 텅 빈 공적영지한. 공적 영지라고 그럴 때는 마음의 본래 일심세계를 그렇게 표현하는거에요.
공공적적하다. 공공적적한것은 아무 번뇌망념이 없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영지라는 것은 번뇌 망념이 없는 그 경지에서 모든 일상생활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평등하게 그대로 잘 보는 것을 신령스럽게 잘 아는 것이 있다 해서 영지라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 공적영지된 그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심의 세계. 그 일심의 세계를 우리가 개합이 되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계무생사라 그러는 거요. 그러면 그 계무생사가 됐을 때 거기에서 멈추고 우리가 있어야 되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거기서 다시 용무생사가 되야 된다.
그래서 (쓸 用용, 없을 無무) 생사 없는 도리를 이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잘 활용을 해야 되고. 불법을 잘 응용을 해야 되고.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불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반야지혜가 자기에게 잘 갖추어진 것을 용무생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그렇다고 볼진대는 제가 항상 여러분에게 본래 우리 자성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그 일심의 세계가 부처님의 일심의 세계나 우리 일심의 세계나 본 자리는 똑같다.
그래서 부처님이 쓰시는 기능이나 우리가 쓰는 기능이나 기능은 똑같다. 똑같은데 그것을 드러내는 그 효과면에 있어서는 부처님은 그 자리를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매이지 아니하고.
아주 일체 중생, 생명 세계를 위해서 잘 보살행을 하시고. 그리고 이타행을 잘 하시고. 그리고 생명세계를 항상 평등하게 평화롭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을 효과를 드러내는데. 중생은 기능은 똑같은데 그 효과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그 일심의 자리, 평등한 자리. 그 생사가 없는 그 자리를 우리는 체험도 못했고 계합도 아니 됬고.
그러니까 그것을 쓸 수 있는 활용과 응용이 안되기 때문에 항상 대승경전을 통해서 이것을 잘 이해하고 알아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금강경이 제 10분이 들어왔으니까 금강경 전체를 볼 때는 1/3에 해당하는 거요.
그래서 제가 항상 대승 경전의 좋은 말씀들을 바탕을 깔고 들어온 거에요.
무소득이라든지, 무염이라든지. 제가 계속 그런 대승경전에서나 선가에서 쓰는 좋은 이야기들을 그렇게 깔아온 거에요.
이해하시라고.
왜 그러냐? 이것을 알아야 불교가 어떤 것이라는것을 이해하게 되고, 알게 되고. 불교가 무엇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고 알았을 때. 그때 비로서 여러분들이 그 마음이라는 것이 불교에서 어떻게 드러냈다는 것도 이해하기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공부가 진취가 있는 거에요.
그렇다고 볼진대는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봐야 되는 거에요.
부처님께서 하신 대승의 경전의 말씀을 여러분들은 가피를 입은 거에요.
가피를 입어야 만이 공부가 되는 거에요. 그 대승경전의 깊은 뜻을 모르고 그냥 자기 혼자만이 그렇게 불교를 이해하고 안다고 할 때는 그건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라.
그래서 선가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선에서는 인연법이라든지 인과법이라든지 또는 그 중생의 번뇌라든지 이런 이야기들을 선에서는 잘 안 합니다.
그래서 선이라고 할 때는 이미 내가 본래 부족함이 없고 조금도 중생심이 없는 본래 불심, 부처의 입장에서 부처의 그 반야 지혜를 드러내는 것을 바로 가리키는 것을 선이라 그러거든요.
그래서 선에서는 直指人心직지인심이라 그러는 거요. 손가락을 가리키듯이 마음자리를 바로 가리킨다 이 말이오.
그 마음자리를 바로 가르키는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무슨 마음이냐? 일심의 자리를 말하는 거요.
이것을 진여라고도 그러고. 이것을 법계라고도 그러고.
또 이것을 원각경에서는 원각이라 그러고. 또 이러한 자리에서 법문을 하는 것을 心地法門심지법문이다. (마음 心심, 따 地지) 마음 밭이라는 이야기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일심의 자리를 바로 가리켜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자기 성품을 알아 듣게끔 한다고 해서 見性成佛견성성불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선이라는 것은 이미 이러한 교학적이고 대승의 깊은 뜻을 바탕을 기본적으로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바로 마음 법문에 들어간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대승의 깊은 뜻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법문으로 바로 들어가면은. 그것이 대단히 불교가 어려워 여기에 되고 어렵다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기본바탕은 항상 대승경전의 깊은 뜻을 항상 이 법문을 통해서 많이 듣고 이해를 할 수 있을 때 여러분들은 이것이 뭡니까?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지.
부처님의 가피를 어떻게 여러분들은 이해합니까?
부처님이 대승경전을 통해서 이렇게 불교를 알게 되는 이것이 대단한 큰 타력이고 가피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선에서는 항상 교학은 기본으로 갖추어져 있고, 대승의 깊은 뜻을 기본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선 법문으로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선이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전에 첫 강의 시간에 선은 무엇이냐? 선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선이라 그런다.
그러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그 사실이 뭐냐? 우리가 본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다. 내가 그렇게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믿기가 어려우니까 믿게끔 계속 대승의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자꾸 설명하는 거에요.
그래서 선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우리가 여러분들이 법문을 들으면은 오늘도 법문을 들으니까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또 몰랐던 것도 느끼게 되고. 오늘 법문도 얻은 바가 있고, 느낀 바가 있다 그러지만은, 사실은 그건 얻은바 라든지 느낀바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얻은 것이 아니요.
제가 여러분에게 그냥 열어서 이해 시키려고 들어 보인 것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본래 다 갖추어져 있는 그 항하수의 모래 수 같은 많은 공덕성을 여러분 스스로가 발현시키고.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을 발견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다 갖추어져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은 아~ 수보리가 부처님이시여 연등불 처소에서 한 법도 얻은 법이 없습니다 하는 것을 이해하시게 됩니다. 그러죠?
그 다음에는 또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미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한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므로 아름답게 꾸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우리가 장엄이라고 이야기를 할 때 그 장엄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꾸미는 거에요.
뭘 아름답게 잘 꾸미지 않습니까? 이 사바세계를 우리가 할 때 큰 가람을 짖고 사찰을, 불사도하고.
또 부처님의 역경사업도 하고.
또 우리가 많은 거기에 맞게끔 장엄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장엄들을 우리가 하는데. 자~ 여기서는 장엄이 장엄이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장엄이 장엄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는가. 마음의 여기서 말하는 장엄이라는 것은 장엄이 장엄이 아니라고 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그 분별심으로나, 이해하면서 생각하는 여러 가지 생각의 상이라는 것은 그것은 일심의 세계에서 볼 때는 그것은 다 허공의 아지랑이 와 같은 것이지.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엄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는 거에요.
왜 장엄이 아니냐?
지금까지 금강경을 쭉 설해오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마는 제일 중요한 대목이 뭐냐 하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무엇입니까? 했을 때 그것은 무유정법이다. 이렇게 강의를 들었죠. 그러면 정한법 있음이 없다 이 말이거든요.
정한법 있음이 없다. 정한 법 있음이 없다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이냐?
그것은 정한 법이 있음이 없다는 것은 전부 다 그것이 방편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방편은 그때 그 때 일기일회로. 한 기회에 한 번 쓰는 것으로 일회용으로, 부처님이 방편으로 쓴 것뿐이지. 그것이 법이라고 딱! 정해놓고 이것을 진리고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는 법은 없었다는 거에요.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 장엄이라는 말은 마음의 장엄을 말하는데 이 마음의 장엄은 어떤 것이 마음의 장엄이냐 하면은 중생은 뭘 많이 꾸미고, 뭘 많이 도우고, 보태고. 이렇게 하는 것을 장엄이라 하는데.
이 일심의 자리에는 본래 일심이 부족함이 없고, 청정하고, 본래 원만하고, 본래 청정하다고 그랬잖아요.
그 그대로 두라는 거에요. 거기에 다 뭘 조금 이라도 보태고 조금이라도 거기다가 보완을 시킨다면은 그것을 오히려 어지럽다는 거요.
비유를 하자면은 마음을 제가 심지라고 그랬잖아요. 마음 밭이다. 이 마음 밭을 우리가 가꾸지도 아니하고. 또 그것을 청정하게 제대로 수행을 안 해가지고. 황무지로 묵밭으로 만들어 놨어요. 묵밭으로. 묵밭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길가는 사람이 여기다 쓰레기를 갔다 버리고. 저기다도 쓰레기를 갔다 버리고. 그 마음 밭에 쓰레기가 가득 차 버린 거요.
나는 그 처음에 창원에 선 센터를 한다고. 그래서 주차장이 없어가지고 이렇게 보니까. 도심 속에 묵밭이 하나 있는데. 그 묵밭이 말이죠. 그 본래는 채소 가꾸어먹을 수 있는 밭이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대도 갔다 버려놓고, 타이어도 갔다 버려놓고, 너무너무 거기가 엉망이 되더라고. 그런데 그것을 치우는데도 돈이 많이 들더구만.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도 본래 본성에서 벗어나가지고 이 사바세계에 이 중생살이를 하다 보니까. 필요 없는 것들을 자꾸 마음 밭에다 갔다 버린 거에요.
그러니 농부가 부지런한 농부가 그걸 밭을 만들려면은 거기에 들어가 있는 필요 없는 것을 드러내야 되겠죠.
돌도 드러내야 되고, 쓰레기도 드러내고 다 드러나야 된다 이 말이야.
여기에서 금강경에서 말하는 장엄이라는 것은 오히려 번뇌, 망념이라든지. 또는 우리가 집착이라든지. 또는 서로가 차별하고 비교하는 마음이라든지. 대립하는 마음이라든지. 이런 그 중생심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을 자꾸 자꾸 드러내는 거에요. 드러내는 것을 장엄이라 그래.
그래서 다 드러내고, 드러내고, 드러낼 것이 더 없을 때. 그것이야 말로 비로서 참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의 우리가 본성을 잘 장엄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것을 육조단경에서 제가 강의 할 때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가 일상 생활하면서 경계가 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경계가 오면은 그 경계를 볼 적에 항상 대승의 가르침인 부처님의 진리를 잘 배웠으면은. 아~ 그 경계는 인연에 의해서 오는 것이니까.
그 경계를 딱 당했을 때. 그 경계를 당하는 그 순간에. 그 순간에 우리가 올라오는 당념이 있어요.
그 경계를 당하는 생각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 생각이 대승경전의 가르침의 가피를 못 입었으면. 그 경계에 욕심이 일어나고, 그 경계에 우리가 어둡게 되고, 그 경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집착하는 마음이나 욕심이 일어나면은 그 경계와 하나가 되어가지고, 그 경계에 어두워져 가지고, 중생에 그러한 욕심의 세계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경계가 왔을 때. 아~ 이 경계는 인연에 의해서 오는 것이니까.
다 이것은 인연이 없으면 이것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은 그것은 그 경계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그 경계에 매이지도 아니하고, 그 경계에 속지를 않는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잖아. 이게 참 중요한 말이거든.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대승경전을 통해서 이런 금강경을 통해서 그 경계를 우리가 잘 활용하는 거에요.
아까 제가 뭐라 그랬죠? 용무생사라 그랬잖아. 생사없는 도리를 잘 응용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된다. 어디서? 생활에서. 그렇죠?
그러니까 이것을 매버리면은 그걸 누구라 그러냐 하면은 중생이라 그러고. 그 경계에서. 그 경계에서 매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뭐라 그러냐? 부처라 그런다.
부처와 중생이 어려울 게 없어요. 경계가 일어나는 데서 속아가지고 그 경계와 하나가 되어가지고. 그냥 화도 내고, 욕심도 내고, 그리고 남에게 상처 주는 소리를 한다든지. 그리고 또 일어난 마음을 자기가 계속 분한 생각이 있다고 자기가 붙들고 있다든지. 이런 것들은 다 경계에 매한 거에요.
매한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생이라 그러고. 경계가 왔는데도, 그 경계를 딱 보면서. 아~ 이것은 다 무상한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잠깐 일어난 것이니까.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되겠다 하면은 이것은 부처다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부처와 중생이 그리 어려운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것을 잘 알아서 마음에 차별하는 마음이나. 비교하는 마음이나. 집착하는 마음이나. 성내는 마음이나. 욕심 내는 마음이나 이런 것들을 내 마음속에 있으면은 이것은 穢土예옛토라 그러고(더러울 穢예) 더러운 땅이 되 버리고.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지면은 뭐라고요? 그렇죠. 정토라 그러는 거야.
그러면 그 정토를 여기서는 장엄했다고 그러는 거요. 마음의 정토를 잘 장엄했다.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보살은 그러면은 정토를 어떻게 장엄하는가? 보살은 정토를 어떻게 장엄할까요?
수보리와 같은 이런 보살은 이미 정토를 장엄한 것이 장엄이 장엄이 아니기 때문에 장엄이라고 말씀을 했다는 것은 뭘 말하냐 하면은. 우리의 본래 청정한 자리는 장엄을 하고 싶어도 장엄이 될 수가 없는 자리에요.
예를 들자면 태양의 그 열도가 있지 않습니까? 수천 만도가, 열도가 있는데 그 태양자리에다가 어떻게 장엄을 하겠습니까?
뭘 장엄을 하면 다 타버려요. 장엄할 수가 없어. 우리의 일심의 세계라는 것은 그 불타는 태양과 같아요.
그것을 반야지혜라 그러거든. 그 반야 지혜는 무엇으로도 거기에는 장엄을 할 수가 없어요.
중생의 욕심에 그런 찌꺼기를 갔다 부우면 거기는 그대로 타버리기 때문에 장엄이 안되는거에요.
그래서 선가에서는 비유를 할 때 파리가 부처님 맞이에도 앉고, 임금 의상에도 파리는 가서 앉아요.
앉는데 파리가 앉지 못하는 자리는 불구덩이에는 파리가 앉지를 못한다 말이야.
반야지혜의 장엄 된 일심의 우리의 본성자리에는 우리가 다만 욕심으로 그것을 착각했을 뿐이지.
거기는 장엄이 될래야 장엄이 될 수가 없고. 거기에는 한 법도 세울래야 세울 수도 없고. 그거는 본래 청정하고 본래 그렇게 원만하고 본래 부족함이 없고. 본래 그런 기능과 능력과 그런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을 믿어야 된다.
믿는 자만이 아주 상근기라고 그런다. 불교를 30년 50년 믿었다고 해서 상근기가 아니고. 법을 정법을 바로 믿는자가 상근기다 이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보살은 이런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법이 다 적멸했다.
법이라고 할 때는 인과 연에 의해가지고 생한 것을 법이라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인과 연은 다 허망한 것이고. 연생연멸이기 때문에 법이 적멸했다고 그러는 거에요. 집착할게 없죠.
그리고 또 번뇌 망념이 다 거기에는 붙을 자격이 없으니까 번뇌 망념도 다 고요해져 버렸다 이 말이야.
그러니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은 욕계, 색계, 무색계, 이 삼계 중생세계를 다 벗어난 사람을 보살이라 그러거든.
그런데 이 보살은 다시 삼계에 들어오는 거에요.
왜 들어옵니까? 이 중생세계를 장엄하기 위해서 들어오는데 보살이 하는 장엄은 무슨 장엄이냐 하면은. 중생을 전부 다 제도 해 주는 거에요.
중생을 제도하는 자체가 보살의 성불하는 길이고 보살의 마음에 장엄이고. 또 중생을 다 제도하는 그것이 보살이 성불 하는 길이고 보살의 장엄일 뿐 아니라. 장엄 그 자체가 또 보살이 그대로 법을 피는 자리다 이 말이야.
그래서 보살은 항상 삼계를 벗어났지마는 다시 삼계의 저작거리 나와가지고. 중생과 똑같이 번뇌를 일으키는 모습도 보이고. 업을 분별하는 모습도 보이고. 중생처럼 똑같이 하되 보살은 조금도 매하거나, 거기에 집착하거나, 물들지를 않기 때문에. 보살의 장엄은 장엄이 아니고 아니기 때문에 장엄이라 그런다.
그러니까 이 장엄이라는 말은 거짓이름이다 이 말이오. 거짓이름이다.
자 이게 여기에 그 다음에 뭐라고 나오냐 하면은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 냄새 향기 맛.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집착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면 요것은 소리나 또는 맛이나 향기나. 이런데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된다 이 말은. 조금 전에 제가 말했듯이 보살이 사바세계를 장엄 하는데 사바세계 장엄이 뭐냐 하면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장엄이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바로 보살이 성불하는 자리고 그렇다 이 말이오.
반야심경에선 이걸 뭐라 그러냐 하면은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乃至무안계내지 無意識무의식계. 생각의 의식계까지 다 무의식계. 다 없다 이 말이오.
없기 때문에 무지 역무득이다. 이렇게 반야심경은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제가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하루에도 수천만 가지 경계가 오지 않습니까?
많은 인간관계나 물질 관계나 다 경계가 온다 이 말이야.
그 경계가 오는 것은 무엇을 봅니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맛을 혀로 보고, 몸으로 촉감 느끼고 다 이 속에 있는 거 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없다는 거요.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고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고. 이게 없다고 반야심경은 이야기 하잖아요.
이게 없다는 건 뭐냐 하면은 그것에 매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속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쓰면서도 그것이 그대로 지나가게끔 만들어 주고, 그것을 잘 응용하고 활용하는 사람을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다. 거기서 무라는 것에서는 속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이걸 말하는 거요.
우리가 반야심경을 만날 외우면서도 무색성향미촉법이 뭐고 무안이비설신의가 뭐냐? 뭐 다 있는데 왜 없다 하느냐? 거기에만 매달리지 말란 말이요.
그 경계에 속지 않는 것을 없다 그런 거에요.
요것을 선가에서 공부를 많이 하는 스님네들은 선에서는 이것을 좀 어렵게 표현을 해요
선에서는. 선에서는 달마스님이후로 혜가대사라든지, 성찬대사, 그 다음에 도신대사. 이렇게 죽~ 내려오는데 육조스님까지. 그런데 도신대사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4조죠.
그 그분이 어는 날 길을 지나가다 이렇게 보니까. 그 산중에서 아주 귀이한 방광이 일어나는 거요. 빛이 일어나는 거요. 그래서 시자 보고 물었어요.
저 우두산에 누가 있길래 저래 밤에 아주 귀이한 빛이 나느냐? 하니까 거기에 우두 법륭선사 라는 스님이 그 산중에 들어간 지 오래돼서 공부하신 지가 됐는데. 그런데 그분이 공부를 잘 하시기 때문에. 그 분이 앉아서 참선을 할 때는 그냥 모든 산중에 있는 날 짐승들이 과일을 물어다가 그 스님 앞에 갖다 놓고. 호랑이도 거기 와서 절을 하고. 밤이 되면 그 스님 몸에서 그렇게 방광이 나고 그런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도신대사가 아 참 대단한 선승이 있구나. 그래서 그 도신대사가 그 옷을 바지를 하나 챙겨가지고 승복이죠. 그래서 우두 법륭선사에게 승복을 건 내 줬어요. 승복을 건 내 주니까 법륭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어머니가 나에게 준 바지도 금생에 다 떨구지도 못하고, 다 쓰지도 못 하는데. 이 옷 필요 없다는거에요.
이 무슨 말일까?
선에서는 이런 말들을 참 어렵게 합니다. 왜 어렵게 하느냐 하면은 어렵게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 소리를 듣고 여러분들이 사유하고 생각하고 뭔가 공부하라고 공부거리를 던져 주는 거에요.
어머니가 준 옷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사유하라는 거에요.
그런데 사실은 어머니가 준 옷이라는 것에는 뭐냐 하면은 우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는 우리의 본, 청정한 본성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일심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그건 바로 진여의 자리를 말하는 거에요.
선에서는 표현방법이 조금 달라. 그래서 그 어머니가 준 바지다. 어머니가 준 옷이다. 본래 나에게 있던 옷이다 이 말이오.
그래서 도신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어머니가 본래 준 옷을 저 사람이 이해는 하는데. 그런데 저 사람을 깨닫게끔 만들어 줘야 되기 때문에. 도신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은 어머니가 그 바지를 주기 전에는 어떤 옷을 입었는고? 이렇게 물은 거에요. 또 어렵죠?
사실 이게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이야기 입니다.
저는 가급적이면 이 어려운 이야기는 안하고 쉽게 쉽게. 왜?
이 불교 TV라는 거는 무차별로 다 방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은 좀 어렵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은. 어머니가 준 옷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두법융스님이 본래 나에게 본성이 청정하고, 본래 부족함이 없고, 본래 일심의 자리를 자기가 아는 거에요.
그걸 하나 믿는 거죠.
그런데 어머니가 바지를 주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느냐 할 때는 그거는 생각으로서는 미칠 수가 없는 자리고, 말로서는 다가 갈 수가 없는 자리고, 도저히 그릴래야 그릴수도 없고, 본뜰래야 본뜰 수도 없는 그런 자리다 이 말이오.
이미 언어가 도단하고 마음 가는 길이 끊긴 자리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도신스님이 물었을 때는 왜 물었냐 하면은. 그 사람을 깨치게끔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도신스님의 그 말씀을 듣고 법융스님은 깨쳐버린 거에요.
그럼 그 깨친 자리가 뭐냐 하면은 깨친 자리가 금강경에서 말하는 이게 제대로 된 장엄의 세계다 이 말이오.
중생이 생각하는 장엄의 세계가 아니에요 이것은. 오히려 공공적적하게 텅 빈 것을 금강경에서는 장엄이라고 얘기를 한 거에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우두법륭선사는 그로부터 그 우두산에서 공부를 하는데. 그 이후로는 날라오던 그 날짐승이 한번도 날라오질 안하고. 호랑이도 안 찾아오고. 몸에서 방광이 나던 방광도 안 나오는 거에요.
그럼 이 공부가 잘 못 되는 거죠. 예? 공부를 잘 했을 때는 날짐승이 날라오고 호랑이도 찾아오고 몸에서 빛도 나고 그랬는데. 이게 깨치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그런 게 안 온다 이 말이오.
그래서 우리나라 태고 보우선사라는 참 훌륭한 선사가 계셨는데. 그 스님에게 어떤 학인이 우두법융선사가 도신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날 짐승들이 그렇게 과일을 물어다가 공양을 올리고 호랑이도 오고, 몸에서 방광의 빛도 나고 그랬는데. 도신스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왜? 날짐승도 안 오고 방광도 안하고 그럽니까?
그러니까 태고 보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비가 부자면 자식이 찾아오고 아비가 가난하면 오던 자식도 안 오느니라 그러거든요.
선에서는 이런 말들이 참 멋스럽게 재미있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걸 대승경전의 뜻을 잘 알면은 이게 어려운 말들이 아니에요. 그냥 구름잡고 안개 먹는 소리로, 혼자만 아는 소리로, 저리 지껄인다고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지만은. 이게 선을 아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를 않아요.
정말 맞는 말을 하는 것이고. 정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사실을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건 뭐냐?
아비가 부자면 자식이 찾아오는 것이고 또 아비가 가난하면은 오던 자식도 안 온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우두 법륭선사가 도신선사를 만나기 전 까지는 선을 제대로 몰랐던 거에요. 선이라는 것은 티끌만큼도 그 일심의 자리에는 장엄할 것이 없고, 거기에 보탤 것이 없고, 밖에서 들어와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야.
그래서 법을 전한 것도 없다 그런 것이고. 여기에서 장엄을 했다고는 하지만은 장엄이 장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 자리는 장엄할 자리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뭔가를 고요한 적정의 세계에 들어가 있으니까 들어가 있다는 자기의 그 상이 공상이 우두법륭 스님에게는 있었기 때문에 그 기운을 생명세계들이 알았던 거에요. 그래서 찾아오는 거에요.
제가 이 TV무상사. 지금 법문 한지가 벌써 금강경 1/3이 되었는데. 사실 이 TV, 이 법회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이 있다면은. 우리가 큰 법회를 한번 하는데. 그 신도님들이 모인다는 게 만명 모이기가 힘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이 무상사 TV법회에 이 법문이라든지 이 강의가 아주 인기 있는 프로는 45분 동안 하는 이 방영시간에. 50만 명 내지 60만 명이 이걸 청취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TV에서 방영하는 이 포교에 효과라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어떤 누가 45분 동안에 50~60만 명을 동원해서 이것을 포교를 하겠습니까?
저는 이건 정말 불가사의 하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포교 일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법문하는 동안에는 TV를 보고 계시는 분들이 정말 이 어려운 TV포교에 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게끔 ARS전화 한 통이라도 좀 돌렸으면 좋겠다. 오늘 법문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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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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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대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