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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11강 무위복승분- 존중정교분/설우스님
안녕하십니까? 금강경 오늘은 제 11과 무위복승분입니다.
무위복에 상대되는 용어가 뭐겠습니까? 유위복이겠죠.
그럼 유위복과 무위복에 그 차이점을 제가 말씀을 드리면은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겠습니다. 유위복이라고 하는 것에는 글자 그대로 우리가 복을 짓기 위해서 많이 애를 쓰는 것이죠.
오늘도 선행공덕을 많이 쌓고, 내일도 또 선행공덕을 많이 배풀고. 본인의 생각에 따라서 나를 위해서 복을 짓든지, 저 자손을 위해서 공덕을 짓든지, 많은 복을 소리 소문 없이 애를 많이 써서 닦는 거죠.
그게 유위복인데. 그 유위복이라는 것에는 광주리에다 과일을 담아서 과일이 담기는 것만큼 복이 쌓이고, 또 그 광주리에 과일을 하나씩 드러내서 쓰다 보면 광주리가 비겠죠.
마치 화살을 저 허공에다 대고 쏘면, 그 짓는 복이 있는 만큼 화살이 올라가다가, 또 그 기운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땅에 떨어지겠죠.
그래서 이것을 인과에 일어나는 복이다 해서, 다함이 있다고 해서 유위복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거요.
선인선과, 악인악과. 지은만큼 자업자득으로 그렇게 인과가 분명하게 드러나는것을 유위복이다 그러는거죠.
사실 유위복이 별 것 아닌 것 같애도, 이 유위복이 대단히 중요해요. 유위복이 없이 무위복이라는 것은 불가능해요.
이 금강경을 여러분들이 잘못 이해하면은 보통 강의를 할 때, 그 유위복 지은 거 별거 아니야.
이 금강경 사구게 하나만 잘 외우면은, 이해하면은, 그 보다도 복이 수승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자칫 잘못 들으면은 금강경을 크게 오해하는 거야.
여기에서 보면은, 항하의 모래수 만큼 항하가 있다면은, 항하강이 라는 것이 그 모래가 우리나라 모래하고 좀 달라요. 굉장히 밀가루처럼 부드럽습니다.
그렇게 많은 모래수가 한량이 없는데. 그 모래 수도 한량이 없는데. 그 모래 수만큼 또 항하강이 있어가지고, 그 항하강의 모래 수 같으면 얼마나 많겠느냐?
이것 참 부처님이 비유를 해도 참 스케일이 너무 커가지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오.
이 그것을 또 말씀하시기를, 삼천대천 세계에 비유를 또 하셨거든.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한 그 칠보를 가지고, 그 항하의 모래수 만큼 보시를 해도, 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이 사구게 하나 제대로 이해하는거, 수지독송하는것만 못하다 이렇게 하니까.
참 이거 금강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무위법에 대한 사상을 드러내시려고 지금 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걸 잘못 들어가지고는 큰 오해가 생긴다 이 말이오.
그래서 오늘 제가 이것을 잘 좀 설명을 해 드려야 되는데. 무위법에 대해서 먼저 설명이 들어가지 전에, 이 유위법에 우리가 공덕을 조금 전에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오늘 재미있게 설명이 될까?
장자 외편에 보면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걸 내 한 구절 소개를 해 드리면 싶어.
기승자라는 사람이 닭 싸움을 잘 시키는 아주 그 유명한 사람이야. 그래서 그 나라 임금이 닭싸움을 좋아하니까, 기승자에게 아주 싸움을 잘하는 닭 한 마리를 길들여서 싸움 구경을 좀 하려고, 장닭을 한 마리 길러 줬어요.
그래 기승자가 훈련을 시키는데, 어느 날 임금이 와서, ‘오늘쯤은 닭싸움을 볼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까 기승자가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저 놈이 그냥 자기의 기운만 믿고, 허세를 부리고, 교만을 부리고, 아주 안하무인 격으로 설치고, 그냥 천방지축이고, 그 기운을 못써가지고, 지금 상대가 앞에 나타나면은 금방 달려 들어서 상대를 피를 흘리게끔 그런 기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듣고는 ‘그럼 때가 적절할 때가 아니냐?’ 기승자가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조금 더 기다리세요.'
한 열흘 있다가 또 와서 ‘지금쯤은 싸움을 붙이면 되겠느냐?’ ‘아닙니다. 저 놈이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깃을 세우고, 눈에서 불이 떨어지고, 싸울 태세를 하면서 아직도 저놈이 기운이 펄펄하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럼 언제 끔 하냐?’ ‘조금 더 기다리세요.’
그래 얼마를 있다가 와서 지금 즘은 닭싸움을 볼 수 있겠냐? 그러니까. 지금은 싸움을 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닭 울음 소리를 들어도 전혀 상관을 안 합니디. 닭이 앞에 와서 기세를 부리고 닭기슭을 올리고 그래도 전혀 동요가 없습니다.
눈동자에 싸울 그 승부욕이 대한 것이 전혀 기운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임금이 볼 때 그래가지고 무슨 싸움을 하냐? 그러니까 기승자가 하는 말이 천하의 닭이 다 몰려온다 하더라도, 이 닭을 어찌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이 닭은 나무 닭이 되었습니다. 나무 닭이 되었다는 말은 그 닭이 무심한 자기 마음의 경지를 이루었다 이 말이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느냐 하면은, 우리가 두 가지로 볼 수가 있겠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사업을 좀 성공을 했다 그러면은, 사업에는 성공을 했겠죠.
사업에는 성공을 해도 가족관계나, 자기 내면의 인생, 자기 인격문제는 다 성공했다고도 볼 수가 없잖아.
물질적으로 좀 많이 자기고 있으면 그냥 허세를 부리고, 그냥 오만이 많고, 그리고 그냥 사람을 업신여기고, 천방지축으로 인격을 못 갖춘 사람도 우리가 보잖아. 그렇죠?
그러면 또 우리가 절에 다니면서 공부한다고 하는 이를 이렇게 보면은, 염불을 많이 해서 천일 기도를 마쳤다든지. 또는 몇 년간 봉사를 했다든지. 또는 내가 참선을 했다고 하는 사람도 보면은 그 참선을 내가 몇 년을 공부를 했다, 기도를 천일기도를 했다 하는 그 했다는 것이 처음에 꽉차 있으면, 그것이 자기의 어떤 그 하나의 큰 아만의 아상의 업이 되어가지고, 그것이 처음에 닭이 기운을 삭히지를 못하듯이, 이 공부도 열심히 자꾸 하다 보면은, 그 공부하는 기운이 자꾸자꾸 삭아야 돼.
그래서 쉽게 말해서 그 빳빳하게 풀 들여 놓은 물을 좀 빼야된다 이 말입니다.
차분하니 빠져야 돼.
우리가 이 무위법을 제대로 알면은 아~ 무위법이라는것이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삼천대천 세계의 그 넒이 만큼 칠보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시를 했는데도, 무위법을 아는 것만 못하다고 한 소리는, 무위법이 이 뭔지를 알아야만이, 왜 삼천대천 세계만큼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했는데도, 그 보시가 무위법을 아는 것만 못하다고 이렇게 경에다 이야기를 했느냐? 그러면 우리가 물질 보시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우고, 복을 짓고 하는 것이, 거기에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냐? 이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는 거요.
사실은 우리가 복을 아까 처음에도 말했지만은 참 나름대로 뜻을 세워서, 원을 세워서 복을 많이 짓는 것이, 그 복을 짓는 것이 항하수 모래수만큼 복을 짓고, 삼천대천세계 칠보를 가지고 보시 하는 것 만큼 내가 보시를 많이 하는 그것이, 결국은 유위법이지만도 그 유위법을 많이 자꾸 여러분들이 해야, 그것을 하는 것이 하나의 나에게 크나큰 그 업이 형성이 됐을 때, 마지막에 그것을 하더라도 한 바가 없고, 그것을 하더라도 구하는 바가 없고, 그것을 하더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는 계기는, 사구게를 잘 들으므로서, 그 마음이 한 바탕 돌아선다는 이야기거든.
그런데 그것을 하지는 안하고, 사구게만 잘 이해를 하면 된다, 금강경만 잘 읽으면 된다 그러면, 여기서 벌써 한 생각 욕심이 앞서 버린 거야.
욕심이 앞서면 뭐가 되죠? 마음이 급해져요. 마음이 바빠져요. 자꾸 불안해지고, 긴장해지고, 공부 잘 못하는 거지.
마음 급한 시어머니가 섣달에 아들 장가보내놓고, 정월 달이 되니까, 일년이 넘었는데 와 손자 안 보내주느냐고 마음이 급해진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유위법이 허망한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우리가 복을 짓고 하는데. 그런데 복 짓는 그것이, 왜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이 그것을 무위법에다 견주어 가지고, 유위법을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은, 무위법이라는 자리에는 무슨 자리냐 하면은, 그 자리는 부처님 마음자리입니다.
무위법은. 무위라는 말은, 뜻을 제가 말씀을 드릴께.
첫째, 조작이 없는 자리를 무위라 그래. 두 번째, 집착이 없는 자리를 무위라 그런다. 그렇죠?
조작이 없고 집착이 없고. 그러면 또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아주 천진한 자리다.
그래서 그 자리는 무슨 자리냐? 부처님 마음자리이기 때문에 불심이라고도 그러고, 그 자리를 청정한 자리라고도 그러고, 그 자리를 무심리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요거 뜻부터 알아야 되겠죠. 그렇죠?
무위라는 자리가 그런 자리라는 거요.
그러면 그 무위라는 자리를 다른 말로 조금 비교를 하면은, 일심이라는 말로도 우리가 이야기가 되는 거야.
그러면 일심을 내가 뭐라고 비유를 해 드릴까? 일심을 저 바다에다 내가 비유를 해 볼까요? 바다. 바다가 말이지 전체가 바다야. 전체가 바다인데 거기에 파도가 이렇게 일어났다. 파도가 일어나면은 바다가 파도가 일어날 때, 그 파도가 바다에서 그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까?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파도가 일어난다고, 그 파도가 바닷물의 대상으로서 설 수가 있느냐 이 말이야. 설 수가 없어요.
그 파도도 바다인데, 바다가 뭡니까? 물이잖아. 파도도 물이잖아요. 그러면 바다라는 것은 내가 말할 때 일심을 말하는 거에요. 일심이고 그걸 마음이라 그런다 이 말이야. 마음. 그렇죠?
그것을 우리는 뭐라 그럽니까? 부처님의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요.
그러면 부처님의 마음에서 예을 들어서, 파도가 모난파도가 일어나고, 둥근 파도가 일어나고, 여러 가지 파도가 경계로 인해 가지고, 바람으로 인해가지고, 많이 많이 일어 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뭡니까? 물이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 마음자리에는 복이다, 또는 공덕이다, 뭐가 많이 많이 일어 났다 하더라도, 불심의 자리에서 볼 때는 공덕이 공덕이 아니고, 복이 복이 아니다 이 말이야. 왜?
공덕과 복을 다 떠난 자리가 부처님 마음자리 이기 때문에 그런거야.
그러니까 이 금강경이 여기에서 무위복이다 할 때는 복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은, 그 자리는 무위라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제가 지금까지 죽 말씀을 해 왔듯이,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자리다. 볼래야 볼 수가 없는 자리다. 왜 그러냐?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볼까?
조금 어렵나요? 눈동자가 눈동자를 볼 수가 있을까? 거울이 있으니까 거울보면 눈동자를 보겠지만은, 눈동자 눈 자체는 눈동자를 볼 수가 없어요. 마음이 마음을 볼 수가 없어. 왜?
전체가 마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불심이라 그러고, 일심이라 그러고, 그것을 뭐라 그런다? 무생이라고도 그러는 거요. 말만 여러 가지로 달라졌지.
여기서 말하는 무위라는 거는, 그대로 모든 경계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저 생한것도 없고 멸한것도 없는 불생불멸의 자리를 무위라고 그런 거야.
그러니 이 무위를 무엇으로 서 표현을 했냐하면은 부처님은 사구게를 가지고 표현을 한 거야.
사구게를 가지고 무위를 이해를 좀 해야 되겠죠.
무위를 이해를 잘 해야 유위복에 대하서 우리가 유위복의 평가를 할 수가 있는거에요. 그렇죠?
그러면 사구게에 불적에,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라 그랬잖아.
凡所有相범소유상이라 하면은 모든 이 현상들은 다 제가 뭐라 그랬죠?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인연에 의해서 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생연멸이다. 이렇게 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인연에 의해서 인연에 의해서 다 생하고 멸하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절대적인 자성이 없고 체가 없기 때문에, 고정 불변한 체가 없기 때문에, 그냥 그것은 일어났다가 멸하는 것이, 마치 바다에 바람이 와서 불어가지고 파도가 일어 났다가 파도가 멸하는 거와 같이,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게 생한 것이냐? 파도가 멸한다 그래서 멸한것이냐? 이 말이야.
다 그게 물이잖아. 바다잖아. 마음 바다에서 마음에서 일심에서 뭐가 선한 것이 일어나고, 악한 것이 일어나고, 복이 일어나고, 복 아닌 것이 일어난다고 해서, 일어나고 멸하고 하는 것이 없다 이 말이야. 다 마음이잖아.
그러니까 마음에서 마음을 대상으로 세우려고 한다고 해서, 대상이 되 주느냐 이 말이야.
자 눈을 감고 지금 잠깐 자기 마음을 한 번 보세요.
이게 이런 것을 들어야 되. 마음을 딱 볼 때, 전체가 다 마음인데, 마음을 가지고 또 마음을 대상으로 뭘 만들려 하면은, 마음이 대상이 되느냐 이 말이야. 대상이 안되.
그대도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마음이고, 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마음이고, 다 마음이야.
그러니까 이 자리를 우리는 여기서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일어난 바가 없기 때문에, 무생이라 그랬고, 그것이 또 그 자체가 어떤 하나의 모양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양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무슨 말을 했냐 하면은, 땅에서 넘어진 자는 어떻게 할까요? 땅을 짚고 일어나지요. 또 넘어지면 어디 넘어집니까? 땅에 넘어지죠.
다른 말로 뒤집어 말하면은,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났다. 뭐가 일어났을까? 중생심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 중생심이 일어났어도, 그것이 욕심이든지, 탐심이든지, 어리석음이든지, 일어났어도, 그게 마음에서 일어났잖아요.
본래 불심에서 일어나온 거다 이 말이야.
그런데 불심에서 일어났는데, 또 넘어져도 어디로 넘어집니까?
마음에 넘어지겠지.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탐.진.치.라 그러잖아 그렇죠?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그렇다 이 말이야.
그럼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데 성이 왜 날까요? 성이 왜 날까?
우리가 생활을 하는데, 순경계가 있고 역경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죠.
그러면 역경계를 부딪칠 때는, 역경계가 탁 왔을 때는, 마음이 어떻습니까?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오는 것을 역경계라 그러잖아. 어려움이 오는 것을 역경계라 그러잖아.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어떤 경계가 왔을 때, 그것을 대할 때, 내가 화가 나지요. 성이 나잖아. 그게 진심내는거지.
그러면 왜 화가 났을까? 왜 화가 났을까? 내가 그것이 화나는 이유가, 내가 원하지도 안하고, 내가 바라지도 안하고, 내가 그것을 만들지도 안하고, 내 하고 상관없는 것이 오니까, 내가 그것이 화가 난다 이 말이야.
그러면 그 이면에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있고, 내가 바라는 것이 있고,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이 있는 거야.
그러면 그 틀이라는 것을 갔다가 내가 만들어 놓고, 틀 안에 들어오면 좋은데, 틀 안에 안 들어 오니까, 이거는 역경계가 되가지고 싫다 이 말이야. 싫은 거야.
그러니까 화가 나는 것이지. 그건 역경계에서 화가 나잖아.
그러면 순경계가 될 때는, 순경계가 될 때는,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돌아가니까, 또 그것이 좋죠.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니까. 좋은데 거기 뭐가 붙을까? 욕심이 붙잖아. 자꾸 자꾸 욕심이 붙잖아.
그래서 성나는 것은 역경계에서 성나니까 진심이 되고. 순경계에 가니까, 욕심이 자꾸 붙으니까 탐심이 되고. 욕심이나 성내는 마음이나 이런 것들이 다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마음에서 나왔는데, 바다에다 비유를 하면은 거기 일어난 게, 하나는 모난 파도고 하나는 둥근 파도라고 비유해도 될까요?
그렇겠죠? 그러면 그거 일어난 거 그거 어디로 갑니까? 바닷물이죠.
그럼 그게 또 일어났다가 멸했다고 해도 흔적이 있습니까? 흔적 없죠. 흔적 없는데 왜 화가 날까? 왜 화가 날까?
또 그거 일어난 거, 그거 욕심 낼만한 상대가 됩니까? 안되죠.
욕심 낼만한 상대도 안되잖아. 가지고 싶다고 해서 파도 가질 수 있어요?
그것도 계속 유지하고 싶다고 일어난 파도가 유지가 되나요? 안되죠.
그래서 사구게에서 그걸 뭐라 그랬죠? 凡所有相범소유상이다. 모두가 허망하다고 그랬잖아.
일어난상이 다 허망하다고 그랬잖아. 그렇죠?
허망한 줄 아는 자리를 무슨 자리라 그랬지? 그게 여래라는 자리야. 이 부처님이라는 자리요.
그 허망한 줄 아는 자리를 뭐라 그러느냐? 무위라는 자리야. 그 무위를 아니까 모난 파도가 일어나든, 둥근 파도가 일어나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든, 그게 다 파도 같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근본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내 마음자리에는 그것이 일어나고 멸하고 일어나고 멸해도, 그것은 다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고 멸하고, 일어나고 멸한 거니까,
거기에 내가 탐하기 위해서 탐욕이 성취 안되니까 화나고, 이런 것들은 다 어리석음이죠.
이것을 아는 것을 뭐라 그런다? 이런 법문을 心地法門심지법문이라 그러는 거야.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생활 법문도 많이 듣잖아 그렇죠?
그런데 금강경을 통해서 이런 心地法門심지법문을 들어놔야 돼.
이런 것을 들어 놓을 때.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거를 일상 생활에서 내가 어떻게 활용하고 쓰겠습니까? 하는 두려움도 생기죠.
그러나 이거 쓸 데가 있어요. 언제 쓰느냐?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내 생명과도 같은 가까운 인연이 죽었다든지. 그러잖아?
내가 살다 보면은 도리 킬 수 없이 아주 어려운 병에 들었다든지. 그럴 때는 어떨까? 마음이. 감당이 안되겠죠.
가장 어려운 일들이 생겼을 때는 경계가 왔을 때는 감당이 안되겠죠.
그거는 옆에서 위로해 주는 마음, 생활법문 가지고는 그게 감당이 안 된단 말이야.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이 心地法門심지법문. 이걸 비상으로 끼어놨던 것을 드러내야 되는 거야.
아~ 이게 마음 밭 바탕에서 다 일어나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뭐냐 하면은, 그 마음이라는 것에는 생멸이 있겠습니까? 생멸이 있습니까?
파도는 일어나고 멸하는 것은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있는 거 같은데, 그 바닷물 자체는 죽고 사는 게 아니죠.
마음이라는 그 자체는 죽고 사는 게 아니죠. 이거를 아는 거야. 이거 알면 부처 되는 거요.
요것을 한문으로 말하면 뭐라 그러냐 하면은, 자심소연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거요.
자심소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自자, 마음 心심) 자기 마음에서 다 만가지 천 가지가 다 일어난 거다 이 말이오.
그렇게 본다는 거요.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뭐라 그러냐 하면은, 화엄경에 사구게가 다 있거든.
화엄경에선 뭐라 그러냐 하면은 일체가 一切唯心造유심조라 그런 거야. 그래서 다 마음이 지가 짓고, 지가 받고 하는데.
요것을 심지법문을 잘 들으면 무위법을 잘 들은 사람은, 아~ 마음이 짓고 일어나고 하는 것이, 다 그것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에서 멸하고 하는 거니까. 마음 법을 잘 알면은 거기에 속지 않으면, 내가 나를 괴롭히고, 내가 나를 그렇게 상처 주고, 내가 나를 학대하고, 내가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까? 그걸 벗어 날 수 있는 거요.
그래서 불법은 뭐냐?
불법은 심법이라 그러는 거요. 불법은 어려운 게 아니고, 마음 다스리는 마음 심법이다.
반야심경에서 뭐라 그랬습니까?
마하반야바라밀다 심경이라 그랬잖아. 팔만사천법이 심법으로 돌아간다 그랬잖아.
그래서 요것을 금강경에서는 뭐라 그랬냐? 하면은, 요 마음의 원리를 잘 아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그랬거든.
언어가 조금 교리적으로 그런 거지.
나는 언어를 여러분들이 자꾸 하면은 외우기도 힘들고 하니까, 이치만 가르쳐주는 거야.
그러니까 암기는 떨어지는 나이고, 이해는 쉽고. 그러니까 이치로 가지고 들어가는 거지.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또 뭡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삼계가 유심이다.
오로지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은 다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다 삼계가 유심인데, 何處求心하처구심이오.
마음을 그러면 어디 가서 찾을꼬? 전체가 마음인데, 마음을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있냐 이 말이야.
마음이 마음을 볼 수가 없죠.
그러면 그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있을려면은 어떻게 해야 될까?
생활 속에서 우리가 천가지 만가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잖아요. 그게 마음이야.
그게 또. 볼래야 볼 수 없는데 미운 거 보면은 미운 생각나고. 고운 거 보면 고운 생각나고. 불쌍한 사람 보면 불쌍한 대로 도와주고 싶은 연민의 생각이 나고. 그게 또 마음이야. 또. 그렇잖아?
그러니까 이게 요것을 잘 알면은 뭡니까?
무심을 잘 아는 것이고, 무위라는 것을, 무위복을 잘 아는 것인데, 여기에서 또 볼래야 볼 수가 없잖아.
무위세계에 들어가면은 부처세계에 들어가면은 부처가 부처를 볼 수가 없는 세계야.
요런 말은 선가에서 참 귀하게 쓰는 말들인데. 좀 어려운 말이라.
그래서 그 어려운 거면 모르고 넘어가도 되요.
그런데 뜻은 뭐냐 하면은, 모든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없는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잘 알면은 그것이 또 마음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야.
금방 쉬워.
불쌍한 사람 보면은 옷 한 벌주는 것도 내 마음을 보는 자리요.
배고픈 사람보고 라면 하나 끓여주는 것도 내 마음 보는 자리야. 이것이 뭐냐 하면은 유위법이라는 거요. 아시겠습니까?
계속 그 마음 바탕을 해가지고 무심의 자리를 알아 가지고, 내가 계속 이렇게 삼천대천 칠보로 가지고 세상사람들을 다 보시해주고, 봉사해주고, 공덕을 짓고 하는 이 것이.
이 무위법을 알고 하면은 그 유위법이 무위법이 된다는 거에요.
이게 잘못 들어 놓으면은, 그 세상에 아무리 복 많이 짓고 공덕 짓고 천하 없는 좋은 일을 많이 해도, 금강경 사구게만 외우고 잘 이해 하면은 수지독송하면은 그게 그거보다 낫다 하니까. 그거는 너무 황당한 소리지.
내가 실제로 제가 서울에 아는 신도님이 한 분 계셨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조계사 밑에 찻집에서 우연히 잠깐 만났어요.
그래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하니까. 요즘 어떤 스님 법문 하시는데 법문도 듣고 제가 참선도 하고 합니다. 그래요.
아이고 참 열심히 부부지간에 같이 다니시는 거 보기 좋습니다.
스님 요즘 제가 공부하는 것이 많이 공부가 돼서 재미가 좋습니다. 전에는 몰라가지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그 마음이라는 게 별것도 아닙디다. 그 마음속에 그 법문을 들어보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제도 공하고, 업도 공하고, 아무것도 복 짓는 것도 그것이 부질없는 일입디다. 그래. 요즘은 마음자리 하나 알아 놓으니까 모든 것이 다 편안합니다. 업이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이 사람이 벌써 그 법문하는 스님의 법문을 탁 듣고서는 벌써 상이 자리가 붙들어버린 거야.
그래서 나는 이야기 해본들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될 거 같더라고. 믿음을 안 가질 거 같더라고요.
그러면 업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고통도 없고, 다 마음의 일인데. 그리고 몇 년이 지났어요.
또 부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어디갔다 오시냐니까, 제주도 갔다 오신다고 그러는데. 얼굴을 보니까, 부부지간에 너무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그래 왜 그래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까 하니까. 아~ 스님 요즘 집안에 좀 어려운 일이 있어가지고. 그래서 요즘은 신경이 예민해지고, 밤에 잠을 못 자고, 많이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그래요.
아니 몇 년전만해도 괴로움도 없고, 고통도 없고, 업도 없고, 죄도 없고 말이야 그랬는데.
이 법문이라는 심지법문이라는 거는 잘 들어야 되요. 이걸 잘못 들으면은 사람이 그렇게 잘못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 그게 마음자리를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고, 근본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지만은 이것을 우리가 체험을 해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잘 쓰는 사람을 뭐라 그런다? 도인이라 그러고. 부처라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런 원리가 그렇고, 근본이 그렇고, 그 바탕이 그렇다는 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 것이지.
여러분이나 저나 지금 그렇게 체험이 되가지고, 부처의 모습으로 그렇게 사는 거는 아니잖아. 아니면은 어떻게 해야 될까?
유위법으로서 들어가야 돼.
자꾸자꾸 불쌍한 사람보면은 공덕도 베풀고, 복도 짓고. 마음속으로도 가서 자꾸 이런 법문을 해주고. 또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주고, 그렇게 해서 봉사도 하고, 자꾸 복도 짓고 해야 되는 거요.
그게 자꾸 쌓여지면서 =, =, 어느 날 어떻게 될까? 이 무위복이라는 이 법문을 들으면서 거기서 좋이 한 장 차이에요.
눈 깜빡하는거 하고 똑같아요. 그냥 돌아 서버리는 거라.
그런데 이 무위복을 조금 더, 그 유위복을 조금도 짓지 안하고, 욕심만 앞서 버리는 거야.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야. 송판이 있는데, 이 송판 안에 불이 있다 하면은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할까? 믿을까? 이 송판이 불이라 하면은 믿겠습니까? 중생심이 불심이고, 번뇌가 보리다 하는 소리는 믿지요.
그런데 이 송판이 불이다 하는데 왜 못 믿을까? 송판이 불이다 하는 거는 왜 못 믿을까?
번뇌가 보리심이고, 중생심이 불심이고,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다 하는 거는 믿는데. 송판이 불이다 하는 거는 못 믿잖아.
그러면 믿게끔 만들어 드려야지. 송판이 불이라는 거는, 불이라는 거는 송판의 원리가 그렇고 근본이 그렇고 바탕이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지금은 송판이 맞지요. 그러면 이 송판이 불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계속 송판을 가지고 비벼야 되. 계속 비벼야 되. 비비고 비비면 여기에 뭐가 나올까? 불이 일어나는 거야.
이거는 과학적으로나 물라적으로나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맞잖아요. 스님 여기 앉아서 거짓말하면 안되죠. 맞는 말이야 이거. 송판 가지고 오늘 당장 비벼봐. 비비면 여기에 불이 나와요. 그래서 송판이 불이라 하는 거에요. 알겠습니까?
그와 같이 유위복이 무위복이라고 말한 것은 송판을 가지고 계속 비비는 것은 뭘까? 유위복이야 유위복.
유위복을 많이 지어야 무위복도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은 무위복이 되었을 때 그 무위복에서 나오는 것은 또 뭐로 나올까? 결국은 복 짓는 일로 생활 속에서 복짓는 일로 나오는 거에요.
나오는데 무위복 자리를 몰랐을 때 유위복을 지었을 때는 왜 그럴까?
바라는 마음이 있고, 구하는 마음이 있고, 대가를 바라고, 자기라는 어떤 틀을 짜 놓고, 모두 틀 속에 들어오기를 바라고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그게 붙어있으니까 그게 유위복인데, 무위복이라는 자리를 무위라는 자리를 내가 가르쳐 드리면서 그 마음이 일심이라 그랬잖아요. 일심이고 그 자리는 무심이라 그랬잖아.
그 자리를 가리켜 드리니까, 그 자리 바탕을 아니까, 거시서는 유위복으로 나와도 뭐가 없어졌을까? 바라는 마음이나, 생색내는 마음이나, 기다리는 마음이나, 구하는 마음이나, 차별하는 마음이나, 비교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졌죠.
비교하고 차별하고 이런 거는 다 뭡니까?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죠. 그렇죠?
파도는 생 해본들 그게 생이 아니야. 물이지. 그러니까 그것을 아는 자리가 무슨 자리다?
그거 아는 자리가 바로 사구게를 아는 자리다 이 말이오. 그렇죠?
사구게라는것은 글자 4구절이 잘 연결되어 있다 해서 사구게라는게 아니에요.
스님이 지금 말씀을 드렸듯이 이런 원리와 뜻이 담겨져 있으면 사구게라 그러는 거요.
그래서 생하고 생한 것이 아니고, 멸해도 멸한 것이 아니고, 그 자리가 무생이라는걸 잘 알 때, 그게 무위자리다 이 말이야.
무심자리고. 부처님 불심자리야. 그걸 부처라 그러는 거요. 그걸 여래가 그러고. 그걸 여래 공덕성이라 그러고.
그럼 무위에 대해서 이해가 갑니까?
사구게를 잘 이해를 하는 사람은 뭐라 그랬습니까?
이 사람은 모든 세상의 천신이나 인간이나 아수라가 육도 중생들이 다 이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고 공경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지금 말씀 드린 무위의 자리. 일심의 자리. 또 무심이라는 이 자리, 지금 말씀 드렸죠.
이 자리를 잘 아는 사람은 그대로가 부처기 때문에, 내가 부처다 이 말이야. 그대로 부처인 거야.
부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모든 이 생명 세계에서 공양을 받을만하고, 공경을 받을 만 하고, 그대로 부처로서 존경을 받는 분이 될 수가 있다는 거에요.
요것을 뭐라 그런다? 요것을 수지독송이라 그러는 거요. 이렇게 된 사람을 수지독송이라 그러는 거에요.
그냥 수지 독송이라고 하니까. 유위복은 아무것도 아니고. 이 금강경을 3천독을 하든 만독을 하든 많이 해가지고 자꾸 독송하면은, 그 유위복 짓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거 아니에요.
금강경 한편을 읽어도 이러한 법의 이치를 배우고 알고 그러면서, 아~ 내가 이 마음에 속아서는 안되겠구나. 마음이라는 자리에는 본래 차별하고 비교하고 미워하고 이런 증오하고. 이런 것들이 거기에는 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고, 파도와 같은 것인데, 거기 속아서는 안되겠구나. 본래 마음은 평등하고 일심이고 편안한 자리구나. 요것을 아는 것이 뭐냐? 요걸 알고 그대로 체험을 하고, 그대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을 수지독송이라 그러는 거에요.
요거는 반드시 스승에게 배워야 돼.
수지라는 말은 스승으로부터 배운다는 말이야.
독송이라는 말은, 그 경계를 체험을 해가지고 생활화 되어가지고 인격이 그리 갖추어 진 것을 독송이라 그랬고.
수지라는 말은 선지식으로부터 이런 정견을 바로 배운다. 수지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수지독송하고 스님이 말한 거 하고 다르죠. 조금 달라.
그러니까 욕심 앞세우지 말란 말이에요. 욕심만 앞세워 가지고, 부처가 욕심이 대상이 되면 안되.
그래서 이걸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잘 보세요.
요것이 무심한 자리에 들어 갔을 때는 중생도 부처도 일체 모든 것도, 미움과 사랑과 집착과 비교 차이 하는 마음은, 그 무심자리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 그렇죠?
없는 거에요. 다 허상이고, 착각이다 이 말이야. 없는 거에요. 그렇죠?
없는 거니까 이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은, 선가에서는 眞如法界진여법계는 한 법도 不隨一法불수일법이라. 한 법도 세울 수가 없다. 그래서 제가 그때 뭐라 그랬죠?
무소유다. 무소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죠.
이런 걸 잘 들으셔야 되. 그리고는 다시 그러면 없는 것이면은 아주 무상하고 허망하고 허구하잖아요. 그렇잖아요.
너무 허망하잖아. 마음이라는 게 너무 의지할 데도 없고. 너무 허망하잖아. 그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 바탕자리를 잘 알면은 일상생활에 나와서는 보살만행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보살 만행이라고 얘기를 하죠?
그건 뭐냐 하면은 자원봉사하고 복 짓고 공덕 짓고 음덕 쌓고. 음덕도 많이 쌓아야 되잖아.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 이리 복을 선인선과 악인악과로 나오는 거에요.
선한 일을 하면은 선한 공덕 받고. 악한 일을 하면은 악한 과보 받고. 이게 나오는 거에요.
이게 보살행으로 나오는 거에요.
나왔을 때는 그 때는 만가지 뭐도 버릴 것이 없어. 다 챙기는 거요. 다 챙기는 거요.
챙기는 걸 잘 하는 사람을 뭐라 하느냐 하면은 일상 생활 속에서 그 불법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야. 무위법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요것을 간단하게 줄여가지고 내가 뭐라고 했냐 하면은 무심 속에서 평등심으로, 그 무심과 평상심으로 나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거에요.
무심은 이해를 하죠. 그 무심을 바탕으로 해서 평상심이 이루어져야 된다. 그러면 평상심하고 무심하고 둘이냐? 둘이 아니죠. 뭡니까? 일심이잖아. 마음뿐이다 이 말이야. 마음바탕에서 무심도 나오고, 평상심도 나오고, 작용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아시겠죠?
오늘 법문이 좀 어땠어요? 어려웠나요? 쉬웠나요? 좋았어요?
성불하입시다.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선업 공덕을 많이 쌓고
불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