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시인은 가도 가도 왕십리, 노래하며 울었습니다
노래는 노래이고 울음은 울음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때로
원치 않는 주특기는 사절할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그럼에
도 돌려주지 못한 낱말 하나가 목에 걸려 있는 것도 같습
니다 출처 없는, 목에 걸린 그 무엇은 둥글고 향기로워서
주머니 속 열매를 닮기도 했습니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보다, 새콤한 해질 녘입니다 함께 읽었던 서사에서는 한
알의 귤이 탱자가 되는 이치를 환경으로 보았습니다 서로
의 환경이 되어주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그림자조차 밤
의 웅덩이로 사라지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귤이 탱자가
되는 동안만 한 사람을 생각하기로 다짐합니다 단호하게
약속을 약속해봅니다 어기는 것으로 다짐하며 왕십리를
걷습니다 문득 예기치 않은 모퉁이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해 질 녘 산책을 산뜻하게 마칠 예정입니다 문득
너는 내게 물을 수 있습니다 주머니에 든 게 무엇이니, 나
는 무해한 신발코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나눠 먹던 귤의 표정으로 말입니다 출처 없
이 흩날리는 낱말이 밤공기 속으로 스며듭니다 후드득, 어
디선가 가시 돋친 탱자 한 알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겠습니
다 지구는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던 길 계속 가겠습니다 가도 가도 왕십리, 노래하며 우
는 방향 쪽으로 한 뼘 더
[무해한 복숭아],아침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