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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몸살점 홈 페이지 입니다. 어째 정리한다고 정리 해오긴 했는데, 읽기 복잡하게 되버렸군요,그점에서는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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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바이칼[Baikal=배할=배달(밝은 땅)=붉은=밝안=불간] 역사
칸 경제 공동체(Khaan Union:KU)의 건설과 궁극적인 통일 연방국 재건을 위하여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작성, 고구려, 백제, 신라의 천문 관측지점도]
위 지도는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고 나대일 교수가 1994년에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천문 관측 기록들을 천체 역학 계산을 통하여 정밀 검사한 결과를 지도로 표시한 것인데, 삼국사기 기록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발표하였다.
주목할만한 것은 "특히 일식 기록이란 건 지구 상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일어나므로 여러 차례 일어난 일식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최적지가 대부분 일식 관측지가 되며, 고대 농경의 높은 자연 의존도를 고려할 때, 일식을 관측하는 관청 또한 수도 근처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식 최적 관측지는 그 나라의 수도 위치까지 대략 알려준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창범 교수와 고 나대일 교수는 일식의 식분을 평균내 보고, 일식 식분이 강한 집중도를 보임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분석 결과, 놀랍게도 초기 신라(대륙 절강성/복건성 시대의 신라; AD 201년 이전)는 중국 남부인 양자강 유역(AD 787년 이후의 천문관측 기록들은 예상대로 한반도 남부)에, 백제는 북경 근처(산동성 발해만 일대)에, 고구려는 비록 일식 개수가 많지 않아 오차가 크지만 바이칼 호 부근의 고위도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천문관측 기록은 남중국과 인도차이나 부근이 최적 관측지로 나타나 일본 역시 대륙 신라의 변방, 즉 절강성, 복건성 이남의 중국 남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사서에서 위 일식기록들을 혹 베껴서 최적 관측지가 나라마다 다를 확률은 채 0.03%도 안된다고 하면서 위 천문관측 기록들이 단군시대 및 삼국시대 때, 우리 고유의 천문기록들임에 틀림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천문 과학자들의 발표는 그 동안 타당한 이유없이 막무가내로 위서로 매도당해 왔던 여러 고역사서들, 즉 729년(발해 천통 31년)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 의해 편찬된 <단기고사>, 1350년경 고려 이암에 의해 편찬된 <단군세기>[<환단고기>;/1911년 계연수 합본서의 구성본], 1675년 숙종2년 북애에 의해 편찬된 <규원사화>, 김교헌에 의해 편찬된 <신단실기> 등이 원저자가 편찬한 진본이 아닐지는 몰라도, 거의 대부분 과거의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임에 틀림없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이런 증거외에도 중국의 많은 사료에는 <환단고기>의 내용서 즉<태백일사>등이 설령 첨삭/윤색됐다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료임을 입증하는 많은 사료들이 들어 있는데, 위 천문학계의 발표는 그런 많은 증거들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의 실체가 이러하거늘! 젊은 바이칼(=배달)의 청년들이여! 마른 가을 들불처럼 훨훨 일어납세다..... 우리는 어찌하여 날조/과장은 커녕하고 우리의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마저 저버리며 애써 굴욕된 삶을 살려고 하는 겁네까? 오늘의 우리 모습은 노예나 다름 없으니 개방적 민족주의에 따라 세계사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되는 거 아닙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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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역사
[백제의 첫수도 하남 위례성은 산동반도에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어디를 찾아 보아도, 백제, 신라가 중국 대륙 동안에서 건국되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삼국사기의 편찬 책임자였던 김부식의 극심한 사대적 반도사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인간과 우주"라는 저서에 발표된 삼국의 천문관측지도로 보면, 백제와 신라의 수도가 당연히 대륙에 있어야 하고(그렇지 않으면 삼국사기는 위서 혹은 날조서로 전락하므로) 중국의 이른바 주요사서들에서 나타나는 여러 기사를 종합해 볼 때, 백제와 신라가 대륙에서 건국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사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태백일사> 등의 여러 기록들을 보더라도 백제와 신라의 수도는 대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을 바탕으로 위 지도를 작성해 본 것인데 위 지도가 비록 상당한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코 완전한 지도가 아니다. 더욱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바이칼 청년들의 분발을 촉하는 바이다 위 지도를 보면 우리 옛조상의 활동영역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을 부끄러워해야 할 명백한 거울이 된다고 하겠다. 꿈이 없는 현실주의는 비굴과의 타협일 뿐이다.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 진조선을 고조선이라 불렀는 데 바로 그 고조선에는 진조선의 왕인 단군이외에 2명의 비왕이 더 있었다. 그 하나가 번한이고 다른 하나는 마한이었다. 번한이 다스린 조선을 번조선(불조선), 마한이 다스린 조선을 마조선(말조선)이라 했으며 연나라 사람 위만이 멸망시킨 고조선은 삼조선 가운데 최후의 왕 기준이 다스린 번조선에 불과했다.
번조선의 위치는 오늘날 산동반도에서 난하 유역, 북경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으로 알려진 덕흥리 고분의 벽화와 유물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한무제가 번조선(=번진)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4군이라는 것도 실은 만리장성 이남지역에 불과하고 한반도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요동과도 무관한 것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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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시대의 백제]
뿐만 아니라 번한 조선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동 쪽이 아닌 서쪽으로 이동하여 타클라마한, 토번등의 후서삼한을 건설하였는 데 김부식은 그의 졸저 <삼국사기>에서 후서삼한의 마한과 온조 27년에 백제에 의해 멸망당한 후동삼한의 마한을 구분하지 못하고 햇갈리는 추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후동삼한의 마한은 원삼한의 마조선과 동일한 마한임은 틀림 없다. 그러므로 백제는 중국 사서의 기록대로 기원전 3세기경에 이미 <구대 백제>로서 산동반도 일대에서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륙 백제는 AD 503년에 요서, 진평군 등의 산동반도 일대를 고구려에게 내준 다음, 한반도의 서남단으로 천도하였고,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방이라는 지방정부 형태로 일정기간 신라에 의해 지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른바 후기 신라(속칭 통일신라) 사람으로 출생지가 분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 해상왕 장보고 역시 옛 백제땅의 신라방 사람이다.
신라 역시 대륙 남동안에서 건국되었고 한반도의 남단을 겸병하다가 중화족에 점차 밀리면서 한반도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부식은 사대적 합리주의 발상에 따라 반도사관을 고수하며, 삼국의 대륙역사를 모두 부정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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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시 절강성에서 건국되었다]
신라에서는 나라를 "방"이라 한다는 중국사서의 기록에 유념하자. 특히 중화족은 예컨대 "고구려현"의 경우에서처럼 엄연히 고구려라는 국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네들 멋대로 일개 현으로 격하시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아 왔는데 산동성의 백제와 절강성의 신라 역시 엄연히 국가로 존속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주, 군, 현 쯤으로 치부하여 버리고 의도적으로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의 역사를 삭제시켜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한반도의 청년들이여! 현실에 기초하되 결코 꿈을 잃지말고,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반도의 미래를 내다볼 줄 몰랐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은폐날조/유린당한 우리의 옛 역사를 정신사적으로나마, 있었던 그대로 다 물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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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할 역사
[산 자여 따르라! 위대한 선조들의 뒤를....]
위의 고구려의 강역을 보면 우리 옛조상의 기상을 가히 엿볼 수 있다. 이런 자랑스런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축소하기에 급급했던 멸족 신라, 반홍익 고려, 사대 조선이 있었으니 민족기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를 다시 살릴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한웅천제가 가르친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정신만이 우리를 옛영광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리라....
바이칼 역사
[고구려 멸망 후, 발해 건국전의 광활한 신라 영토]
신라는 현재의 평양도 못찾았으니 가히 멸족적,노예적인 사대주의라]
백두산 동이족은 드넓은 대륙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좁은 반도로 옮겨 사니까 삶이 구차해진 것이다.우리 안방을 반드시 도로 찾아와야 한다. 도로 찾는 방법은 고려의 충신이었던 상무문신 서희의 역사담판식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백두산 동이족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돈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최근 들어 젊은 청년들이 우리의 축소은폐된 상고사 부분에 대해 산불이 일듯 열정을 보이고 있는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다만 우리의 옛 역사를 되찾으려는 과정에서 일부러 미화 과장하거나 과대포장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칫 허망한 역사 낭만주의에 그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달 역사
[부리아트(=북부여)
한민족 공화국의 국기]
[오! 민족의 고향! 이르쿠츠크의 바이칼 호수!]
금나라의 건국시조인 아골타는 그 조상이 고려사람 김함보로서 사실상 금나라는 우리 백두산 동이족이 세운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짱한 소중화를 내세우면서 같은 동족을 외면하며 오랑캐네 뭐네 하면서 중국의 장난질에 부화뇌동했던 한심한 고려, 조선의 관리들을 생각하면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기가 어렵다.
두 번 다시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되리라. 앞으로 반드시 역사담판 싸움시대가 도래한다. 미래을 꿰뚫는 예지가 없는 민족은 결코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고 고래싸움에 등이 터질 뿐이다. 그동안 당해 왔으면 됐지 뭘 얼마나 더 당하겠다고 세계주의를 앞세워 민족의 정체성를 경시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단고기가 정확한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김부식이 지었다는 삼국사기보다는 더 올바르고 거짓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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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대학, 북부여 대학, 고구려 대학
부여[Burte(부텨) or Bured(부려ㄷ)]는
"늑대"라는 뜻을 가진 부리아트 방언
1880년에 재발견된 광개토경 호태왕비
위 호태왕비는 태왕의 勳績을 기리기 위해 태왕이 붕어하신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長壽王3년 9월에 태왕의 능과 함께 국내성 동쪽 언덕(지금의 中國 吉林城 集安市 太王鄕 大碑街)에 세워진 사면석비로서, 너비 1.35 ~2.0m 높이 6.39m에 달하는 동양 최대 크기의 기념비이다.
능비는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방 방향으로 서 있는 데, 臺石과 碑身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대석은 약 20cm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으로 길이 3.35m 너비 2.75m의 크기인 데,현재 3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고 한다.
특히,호태왕비는 우리 고대사가 당대의 문헌 사료를 갖고 있지 못해 미해결의 문제들로 산적해 있다는 점(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2차적 사료에 불과함)을 고려할 때, 고구려사는 물론 한국고대사의 실체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위 陵碑는 멸족신라의 민족 배반에 따른 고구려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광활한 만주의 상실과 더불어 역사의 비밀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후 능비의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麗末鮮初 때인데 세종대에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39,註解)}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우라산성(于羅山城:지금의 오녀산성)공략을 칭송한 노래에서 집안지방에 皇城이 있으며 그 북쪽 7리되는 곳에 비가 있다고 기록하여 처음으로 능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이후 {芝峰類說}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들에 능비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으나,여진족의 유적으로 오인하였을 뿐 이를 광개토대왕의 기념비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같이 오랬동안 잊혀졌던 능비의 재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보고가 엇갈려 있어 정설이 없으나,대체로 청나라가 만주지역의 封禁을 풀고 이지역에 懷仁縣을 설치한 직후인 1880년경이다.
당시의 지사였던 章洱이 개간에 종사하던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된 비를 關月山을 시켜 조사하게 한 뒤 비의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비의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일대는 농민들이 이주하여 막 개간이 시작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능비는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서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에 만주를 정탐여행중이던 일본군 參謀本部의 밀정 포병중위 酒勾景信(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하여 비문의 일부문자가 변조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 1887년경부터 李雲從(大龍)을 비롯한 北京과 천진의 탁공들에 의해 정교한 원석 탁본이 만들어 지자 비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원석 정탁본도 이미 비문 일부가 손상된 이후에 만들어 졌을 뿐만아니라 해석문 대부분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석문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이후의 능비연구가 일본에 의해 주도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뒤 1899년경부터는 일,청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 하거나 고가매매를 하기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문자가 오독되기에 이르렀다.오늘날 남아 있는 탁본의 대부분이 이른바 石灰加工拓本으로 이경우 文字의 誤讀과 교란이 불가피하여 많은 논쟁이 되어 왔던 것이다.
이와같이 淸,日양국에 의해 주도된 碑文의 초기연구가 國內에도 알려져 {增補文獻備考}(1908)에 그 釋文이 수록되고 [皇城新聞]등에 碑文의 내용에 대한 소개 기사가 실리고 있는 것을 보아 舊韓末에 이미 碑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식민 사학자들은 한단고기가 1911년에 편찬된 사실에 착안하여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 대훈적비가 있다"는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의 기록도 위조됐다고 주장하는데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겠다.왜냐하면 한단고기는 원래 1898년 계연수 선생에 의해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의 합본으로 이미 성립되었다가 1911년에 다시 안함로의 <삼성기>와 원동중의 <삼성기> 그리고 <북부여기 상.하> 및 <가섭원 부여기>가 합본되어1948년에 필사본 초판이 나온후 1979년에 재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만주 일대를 방랑하면서 고구려유적을 답사하던 申采浩의 측량 기구가 없어 자신의 팔로써 능묘의 둘레와 비의 길이,넓이를 재어서 몇발 몇뼘이라고 기록했을 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형편상 비문에 대한 우리학계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은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두산의 동이족의 정기는 멸족신라이래, 반홍익 고려, 사대조선으로 인해 무참히 망가지고 말았다. 망가진 민족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한웅정신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바이칼국과 고구려국을 본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뜻을 같이하는 우리 성통광명의 바이칼의 한몸살점들은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바이칼 대학과 고구려 대학을 설립코자 한다.
단군의 노래(작사: 최동환 선생, 작곡: 김진호 선생, 노래 변근수 선생)
현묘지도의 노래(작사: 변근수 선생, 작곡: 김진호 선생, 노래 변근수 선생)
한편 아래와 같이 바이칼 대학과 북부여 대학 그리고 고구려 대학, 거란 대학, 몽고 대학, 만주 대학, 위구르 대학의 교가를 하늘을 찔러 공모합니다.
1. 바이칼 대학의 교가
2. 북부여 대학의 교가
3. 고구려 대학의 교가
4. 거란 대학의 교가
5. 몽고 대학의 교가
6. 만주 대학의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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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탈 역사
[신라의 초기 중심지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의 동남방이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공히 삼한 조선의 후예로서 중국 대륙 동북, 동남방 지역에서 건국 활동었으며, 한반도의 각 분점지는 각국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이는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고 나대일 교수의 연구 결과에 의해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도사관, 식민사관에 안주하여 고대 삼국의 세력 중심지가 한반도 내라고 우기는 것은 단지 억지에 불과하다 하겠다.
다시 말해,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의 서해(황해)를 내륙의 한 개 호수로 삼으며 동이족의 활동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후기 신라후 점차 대륙 지방을 중국에 내주면서 한반도로 축소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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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옛 동해)는 삼국의 내해였다]
말도 안되는 주장 이군요 그럼 삼국지에 나오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 할겁니까 ? 지명이 겹치는데 그럼 삼국지 이야기는 모조리나 꾸며낸 소설이란 말입니까 그럼 그이전의 중국 고서는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물론 하나의 주장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것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뮤 대륙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군요
첫댓글 흠... 이건 임승국 교수님 주해의 한단고기를 읽으면 아주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점점 대단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어차피 쓸모 없는거 아닙니까...멸족 신라, 반홍익 고려, 사대 조선이 ...하 이런게 있어서 기상이 살아 젔다고요 없었으면...이땅에 태어나지도 못했을겁니다..쩝...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지.. --;
푸핫..사대주의자들은 한방 갈겨주고싶을정도로 싫어하지만 위와 같은 주장은 또한 오버가 심하다고 생각하네요...만약에 저런식의 주장이 100%옳은 거라면 중국의 사서들은 모두 100%구라일까요?? 참나..위의 주장은 거의 국수주의 급이 아니오-_-;;
음.. 꼭 옳다는 것만은 아니라, 하나의 가설이죠 ^-^;
말도 안되는 주장 이군요 그럼 삼국지에 나오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 할겁니까 ? 지명이 겹치는데 그럼 삼국지 이야기는 모조리나 꾸며낸 소설이란 말입니까 그럼 그이전의 중국 고서는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물론 하나의 주장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것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뮤 대륙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