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6:1-8)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는 뜻은? / 박신 목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의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민6:1-8) 또 다른 구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에 당신의 살아계심과 모든 족속을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제사장 나라로 구별했습니다. 또 레위 지파를 자기들을 포함하여 이스라엘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어서 그 소명을 잘 준행하게 이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별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호와가 나실 인의 서약을 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사항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지시하는 내용입니다. ‘나실’은 구별하다, 분리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나지르’의 파생어입니다. 결국 제사장 나라와 제사장 지파 외에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구별된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최고로 경건하고 신령한 영적 지도자를 세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서원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결단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시키거나 따로 불러낸 것이 아닙니다. 또 남자와 여자가(2절) 즉, 지파 구분 없이 성인이라면 누구나 서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항들이 언뜻 전근대적이다 못해 미개해 보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구원과 믿음에 직접 관련이 없고 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머리는 불결하지 않고 남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은 범위 내에서 각자 개성대로 가꾸면 됩니다. 시체는 전문 장의사가 있으므로 접촉할 기회도 없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 구원을 완성함으로써 율법이 은혜의 시대로 바뀜으로써 제사법과 정결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실 인의 서약은 신약 성도들에게 해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아무 영적 구속력이나 의미가 없어서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서원이 더 비성경적이며 더 미숙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현대의 신자들도 나실 인의 서원을 언제 어떻게 준행해야 하는지 온전히 알고 그대로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설령 특별히 서원할 일도 없고 예수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쳤어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했지 서원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맹세와 서원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여 주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도 본문의 나실 인의 서원에 대해 정확히 배워야 합니다. 서원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먼저 서원은 스스로 기꺼이 자발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순전한 의지와 진정한 열심히 수반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으로 따져서 자신의 의나 믿음을 하나님과 교회 성도들 앞에 자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열흘 금식 기도나 새벽 기도에서 천일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영적인 훈장처럼 달고 다녀선 안 됩니다. 밖으로 자랑은 하지 않더라도 혼자 속으로라도 자부심을 가져선 안 됩니다. 또 하나님과 주고받는 거래처럼 서원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의 사업을 더 번창케 해주시면 십일조도 성실히 내면서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더 잘 섬기겠습니다는 전혀 잘못된 서원입니다. 처음 믿음이 연약할 때에 멋모르고 한두 번 순진하게 그럴 수 있으나 계속 그러면 큰일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금식 기도를 하거나 십일조를 성실히 내면 기도 응답 잘 받고 고난도 해결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 또한 너무나 틀린 것입니다. 서원에서 자발적 결단 헌신 실천을 넘어서 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서원에 상급이 반드시 따른다는 법도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면 응답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직 당신의 주권에 따라 응답될 뿐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것 자체가 신자의 축복이자 권능입니다. 마찬가지로 서원한 내용대로 행하고 본문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지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추가적인 보너스가 없다는 철저한 인식이 없다면 아예 서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그 대신 하나님에게 오직 예와 아니오만 하고 그것에 지나치면 악이라고 했습니다.(마5:33-37) 장래의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현재 나에게 허락된 여건, 사건, 하나님의 일 등에 순종 헌신만 하면 됩니다. 미래의 일을 인간이 확정적으로 장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는 악이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십일조를 성실히 하면 기도가 응답이 된다고 가르치면 장래 일을 목사가 보장하는 꼴입니다. 십일조 자체가 능력이 되어서 심지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는 꼴이 됩니다. 십일조는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지 미래의 복을 받아 내려는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 신앙에서만큼은 신자의 행위 실적 즉, 투입(input)과 일치 혹은 비례해서 보상 열매 즉, 산출(output)이 따르는 그런 기계적인 은혜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은 만큼 보상을 주는 것 같은 기계적인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신자를 개인별로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십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같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과 섭리에 따를 뿐이지만 그분이 신자에게 베푸는 은혜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으며 반대로 징벌도 도무지 예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여자도 서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2절) 고대에는 여자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는데 반해 성경의 진술은 엄청난 것입니다. 민수기의 끝 36장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여 년 전인데도 딸에게도 동등한 상속권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여성도 나실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남성과 동등한 신분과 자격과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선교사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바로 서야 하고 따로 불려 나온 세상을 향한 제사장이라는 철저한 인식과 성실한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나실 인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의무 나실 인으로 서원을 하면 지켜야 할 사항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포도주나 독주를 완전히 금해야 합니다. 술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데 장애가 되고 쉽게 육신의 정욕으로 타락하게 만듭니다. 포도초, 포도즙, 포도씨 등도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부유층의 향락 문화를 대표하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에는 기쁨, 풍요, 축체 같은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어쨌든 모든 세상적 유혹과 쾌락을 끊으라는 뜻입니다.(3,4절) 둘째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고 합니다.(5절) 머리는 알다시피 여호와께로부터 받는 생명과 힘을 상징합니다. 머리는 한 인간을 주관하는 기관인데 머리를 자르지 않음으로써 정말로 자기를 주관하는 자로 자기 머리 위에 하나님이 따로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뜻합니다. 또 삭도 즉, 면도칼을 머리에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우상숭배 제사장이나 고관들이 머리를 완전히 밀었는데 그런 이방 족속들의 관습을 절대로 쫓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규정은 한마디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합니다.(6절) 정결법의 다른 규정들도 당연히 준수해야 하는데 시체를 강조한 것은 창세기의 선악과 금령 이래로 죄의 삯인 죽음이 바로 시체이기 때문입니다. 일절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성결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서원하는 동안에는 가족의 시신도 만져선 안 된다고 합니다.(7절) 성결 기간에는 단 한치의 더러움과 추함에 오염되지 말고 완전하게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가족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습니다.(레21:10) 살아있는 성결 자체를 상징하는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중보하여 용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 평생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나실 인으로 서원하면 그와 같은 위치에 서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도피성에서 살인자마저 죽을 때까지 품고 중보 해주듯이 다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 용서받기 위해서 서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규정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신자도 그 거룩에 완전히 동참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규정을 간단히 살펴봤는데 우리가 서원하는 차원과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각자가 스스로 자문(自問)해 보십시오. 세상 죄악과 유혹과 완전히 단절하겠다고 서원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거나, 세상의 더러움 죄악에 전혀 오염되지 않고 완전한 성결을 소원한 적이 있습니까? 특별히 다른 이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대신에 다른 이의 잘못과 허물을 지적 비방하기 바빴던 것 아닙니까? 나를 싫어하고 심지어 잘못한 자의 죄까지 눈물로 주님 앞에 들고나가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나실인 서원이 전임 사역자의 특수한 사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평생을 나실 인으로 살았던 자들도 구약에 삼손과 사무엘, 신약에 침례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특별한 사명을 맡기려고 당신께서 택하시고 명했습니다. 이 셋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부모가 아이를 갖지 못해 하나님이 태를 열어줘서 얻은 아들들입니다. 갖지 못했던 아이를 하나님이 공짜로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쓰신 것입니다. 그들은 또 동정녀로 탄생하실 주님을, 참된 나실 인이자 완전한 나실인으로 사셨던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일반 신자는 평생을 두고 나실 인으로 행동할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미 전임 사역자입니다. 일정 기간을 서원하고 그 기간에만 본 규정대로 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의 관례로 최하 한 달은 서원했습니다. 그럼 일 년 12달의 겨우 1/12에 불과합니다. 무슨 일로 왜 서원해야 하는가? 그럼 일반 신자는 무엇 때문에 왜 나실 인 서원을 해야 합니까? 꼭 거창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본문에서 구체적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그 답은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서두인 2절에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이라고 했고, 결론 격인 8절에서 또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라고 했습니다. 몸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다는 점을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몸은 육체(body)가 아니라 인격체로서 한 개인의 전부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와 삶고 인생 전부를 온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서약 기간에 행할 세 가지 금지 사항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그러지 못했거나 부족 불완전한 관계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따로 기간을 정해서 그런 영적 훈련을 하고 재충전하라는 것이 나실 인의 서역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새롭게 하려거나 이왕에 하고 있는 그분의 일을 더 잘하겠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주님이 맡긴 소명에 더욱 헌신 충성하려는 목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목적과 의미로 종종 서원합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엄격한 규정을 자신에게 부과합니다. 완전 금주하겠다, 십일조를 드리겠다, 올 한해는 성경을 꼭 통독하겠다, 새벽 기도에 빠짐없이 참석하겠다 등등 일종의 공약을 겁니다. 그것만 걸고 서원하는 것이라면 참 서원이고 잘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실행을 하면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세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혹시 서원을 어겼다고 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습니다. 아들이 서울 대학교 들어가겠다고 부모 앞에서 서약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조금 못한 대학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부모가 아들을 야단치지 않습니다. 만약 야단치면 그 부모가 나쁩니다. 그 결심대로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어쩌다 가끔 지켰다 쳐도 어쨌든 그 지킨 만큼은 본인에게도 성장이 있고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급한 일이 생겨야만 기도해도 됩니다. 어쨌든 그만큼이라도 기도했으니 전혀 안 하는 것보다 백배 좋은 일입니다. 반면에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도덕적 종교적 의무사항을 고리로 연결해서 다른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면 서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서원할 때에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의 계획 소망을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포장하여서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금식 혹은 새벽 기도를 얼마 동안 하라는 식의 서원을 하게 합니다. 또 그러는 것이 뜨거운 믿음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같은 목사로서 설교 중에 막 말은 못하겠고 참으로 잘못하는 일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문제나 고난이 닥치면, 또는 어떤 이루고 싶은 소망을 주님께 나와서 간절히 뜨겁게 아뢰어야 합니다. 그냥 아무 조건 걸지 말고 진솔하게 그런 뜻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 중에 성경 말씀 유창하게 동원하지 않아도, 신학이나 교리 몰라도 됩니다. 어떤 과장 가식 위선 없이 특별히 하나님과 이해타산을 생각하지 말고 정말로 힘들다는 사정을 그대로 실토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예 혹은 아니오 둘 중 하나만 말하라고 한 것이 순종뿐 아니라 신앙생활 모든 측면에 다 적용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언제 어디서나 아무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맞는 것은 맞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 됩니다. 아닌 것의 대표가 바로 회개 아닙니까? 기도를 통해 잘못한 것 혹은 모든 어려운 사정을 그대로 진솔하게 털어놓으십시오. 기도할 힘이 없으면 주여, 주여 외치기만 해도 됩니다. 신앙이 가장 신앙다운 모습은 하나님께 하나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또 그분만을 정말로 온전히 신뢰하고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목사와 성도의 종이 되거나 눈치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종이 되어서 그분만을 순전한 경외함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나실인 서약 바울이 삼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방문했던 각 성의 장로들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큰 위험이 기다리니 가지 말라고 만류합니다.(행20장) 그럼에도 기어이 올라갑니다. 성령의 경고를 받고도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거역 행위라고 볼 수 있으므로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첫째 이유는 바로 그가 나실인의 서약을 했고 기한이 차서 성전에서 결례를 마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같은 서약을 한 유대인 네 명과 함께 성전에서 그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행21:24) 앞뒤의 문맥을 살피면 그는 십자가 복음을 강조했기에 율법을 무시하고 안 지킨다는 오해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율법이 구원과 믿음에는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유대인 공동체와 그 전통을 존경한다는 뜻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가 나실인의 서약을 한 이유를 성경의 기록들을 통해서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 당시로는 땅끝인 그곳까지 가서 마지막 선교를 하려 했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일을 계획했으므로 영적인 재충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삼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방문한 교회나 교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하나님께 대신해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나아가 로마서 7장에서 본인이 고백한 대로 위대한 사도임에도 세번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엘리야처럼 정서적으로 피로하고 영적으로 침체되었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개인의 형통과 풍요를 위한 목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고난을 해결해달라는 기대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 당해 큰 고초를 겪을 것이라고 분명한 계시를 받고도 올라갔지 않습니까? 이런 바울의 예에서 보거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의미로 따지면 현대의 신자들이 나실 인의 서원을 해야 합니까? 이미 페지된 율법의 규정이니 무시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따져도 더 많이, 더 자주, 더 오래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구태여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영적 침체와 나태에 빠진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 “내가 이래선 안 되지, 이러다 하나님께 벌을 받지!”라고 두려워진 적도 있지 않습니까? 서원은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약간 양보하면 하나님과 좀 더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바꿔 말해 내 삶에 뭔가 신자답지 못한 점들이 있음을 인식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가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온전한 은혜를 받지 못해서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비뚤어졌다는 것은 쉽게 설명하자면 삶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서를 바로잡아보려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런데 현실 삶에 무게에 짓눌려서 그 분주한 일정에 파묻혀선 바로 잡지 못합니다. 특별히 시간을 따로 구별해 내어서 정말로 하나님과만 일대일로 씨름해야 합니다. 부부끼리 아니면 혼자서라도 기도원에 들어가거나 관련된 신앙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경 한 권만 들고 혼자서 여행이라도 떠나야 합니다.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특별한 주제를 묵상하며 일정 기간을 정해서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으려면? 그럼 하나님과 씨름하여 어떻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까? 예수 님이 이미 산상수훈에서 정답을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많은 신자가 이 말씀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꾸만 어떤 확실한 방안 길을 모색하려 듭니다. 오늘 본문에도 답이 나와 있습니다. 자기 몸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온전히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보호와 인도라는 두 측면으로 크게 나눠집니다. 또 그에 따라 신자들도 여러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만 구하는 자, 보호가 우선이고 보호가 잘 되면 그때 가서 인도도 받겠다는 자, 먼저 그분의 인도에 따르면 보호가 풍성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 인도만 따르면 보호는 자동으로 반드시 보장된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보호와 인도가 어떻게 다릅니까? 보호는 현재 상태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고난과 문제에서 구출되어져야 합니다. 현재 상태의 대부분이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이룬 것입니다. 주로 현실의 먹고 마시는 것들 즉 자신과 가족의 문제에 국한됩니다. 보호만 구하는 것은 단순히 현실에 안주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인도는 하나님이 신자보다 앞서서 먼저 가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나에 대한 영광스런 계획이 마련되어 있고 그에 따라 나에게 소명을 부여해주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따로 구별되어 세움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제사장 지파로서 살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분의 뜻을 위해서 내 뜻과 계획을 언제든 수정 포기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이 구체적 비전을 받고 여러 현실적 대체 방안 중에서 분명한 그분의 계획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영적 분별력이나 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무리 기도해도 직통으로 계시해주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그분의 인도만 먼저 구하는 자가 되는 것이며 그럼 보호는 반드시 보장해준다는 확신 가운데 안심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하신 단락의 결론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마6:34) 한 것입니다. 그 전에 주님은 신자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이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이 다 아신다.(마6:31,32)고 했습니다. 보호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만 따르는 것이 사실상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말씀의 가장 첫째가고 근본적인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와 말씀에 게을러서가 절대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되 관심이 오직 그분의 보호에만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업의 형통이나 교회의 외적 성장 큰 예배당 건물 같은 현실의 풍요가 그분의 일로 둔갑이 됩니다. 주님은 그런 일은 불신자들도 행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신자는 인도만 구하든지 최소한 그 순서를 바꾸어 보호보다 인도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아니 이미 바뀐 자가 신자입니다.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로 불려 나왔습니다. 사실상 평생을 나실 인으로 살아야 하고 참 나실 인으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처음 예수 믿어 침례 받을 때에 다 그렇게 고백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체질과 믿음이 연약하니까 자꾸만 현실여건의 방해를 받고 자신의 세속적 욕심 때문에 자꾸만 보호 쪽으로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 확정되었고 그대로 실천 중인 자들은 하나님의 비전이나 그분의 나라와 의에 대해 묻지도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이니 그분의 나라와 의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인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평생 나실인이 되어있습니다. 평생을 본문이 말하는 바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그분이 맡기신 일을 하면 그분의 보호는 무조건 보장된다는 확신 가운데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고 어려운 요구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자 정의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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