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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01] 수요공부방_ 법마상전급 7,8조_ 김제원 교무님 설법.hwp
<원기 100. 4. 1. 수요공부방>
법마상전급 십계문 7, 8조
김제원 교무님 설법
반갑습니다.
오늘이 정전 수행편 11장 계문 상전급 계문 7, 8조입니다.
상전급도 아닌 사람들이 상전급 공부하려니 좀 그런가요? 겨우 보통급인 사람이 상전급 공부하려면 넘어지거나 계교심이 늘어나거나, ‘나는 저것까지는 못하겠다’ 생각하고, 불필요한 잣대 판단만 늘어나고 분별심 주착심만 늘어날수도 있는데 여러분은 그러시지 않겠죠?
어차피 마음공부니까, 현실에서 써먹기만 하면 돼요. 보통급이든 특신급이든 상전급 법문을 이해해서 경계따라 써먹으면 됩니다. 써먹으면 손실이 없습니다. 복이 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하니까, 서비스로
일원상을 보시지요. 일원상은 무엇입니까? 신앙의 대상이고 수행의 표본입니다. 그것을 내용적으로 보자면, 신앙의 대상은 사은의 본원이라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수행의 표본은 여래의 불성, 제불제성의 심인, 내 본래 성질 인격이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본래성질이 어떻죠?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선하냐, 악하냐, 선도 없냐 악도 없냐, 선하고 악하고가 섞여있는가 이야기할 수도 있고요, 본래 성격이 원만하냐, 본래 욕심이 있느냐, 여러 가지 있는데 수행의 표본 부분에 있어서 일원상과 둘이 아닌 성질이 있는데 그것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본래 성품은 원만합니다. 본래 성질은 텅 비어 있고 두렷하면서 바르더라. 그게 부처님, 여러분, 제 본래 마음이더라.
수행을 통해서 그 본래자리에 합일해 들어가는 진입해 가는 것 그것이 본래자리요 체성에 합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보면 본래 성질을 어릴 적엔 좀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커 나가면서 오염이 되고 상처를 입고 욕심이 동하면서 (욕심이 동하는 건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욕심이 과하다는 거죠. 그리고 마치 나라는 것이 있고, 내 밖에 대타라는 것이 따로 있는 양,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어요. 사은의 본원이다 하면 뭐에요? 사은의 본원인 일원상에서 천지 기운을 받아 부모로부터 태어나 동포 기운을 입고 법률 보호 속에 살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서 나왔어요? 본원의 뿌리는 일원상에서 나옵니다. 결국, 사은은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 사은이지만 그 낱개 각각이 사실은 사은의 기운과 영향을 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정은’이 하나가 사은 전체의 은혜를 받고 있다-> 이게 전체 신앙입니다. ‘안정은’은 하나의 낱개이다 -> 이렇게 생각하면 부분 신앙입니다. 원불교는 전체 신앙이지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나와 내 대타의 관계에서 나도 사은의 전체 기운을 받은 사람, 너도 사은의 전체 기운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죠? 그래서 일원입니다. 하나가 다 엮여 있습니다. 사은 전체 속에서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존재 한 존재가 처처불상이라고 하는데, 처처 어떤 대상도 전체로서의 위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 이야기를 왜하나? 탐심 시기심 진심은 전체에서 벗어날 때 이들의 노예가 됩니다. 시기심은 상대심 이거든요. 부분, 낱개로 보는 것이에요. 너 같은 것 너 잘났다... 하는 ‘낱개‘의 마음입니다. 이는 일원상을 벗어난 마음이이에요.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그렇게 나누는 마음이 참 본래 내 마음인가? 그렇지 않다. 본래 마음은 원만구족한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마음만 있나? 하나이면서 둘이에요.
근데 그 둘의 이면을 보면 하나이더라. 시기심이 나는 이유는 하나가 빠져버리고 둘만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하나의 존재가 나와 어떤 영향을 주고 받을지 모릅니다. 뚝 떨어진 존재에요. 아만심도 그래서 나오고 시기심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온전함을 잃어버릴 때, 상대의 세계에 진입해 가서 분별 집착의 과거습관과 업력에 속아 버려요.
여러분들이 그 온전함의 본래자리에 합일하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결국 중생놀음이에요. 결국 상대적 세계에서 전부 시소 타는 것이에요. 그냥 번뇌 속에서 사는 그냥 그런 삶일 수밖에 없어요. 온전함이라는 것은 번뇌, 분별, 주착, 상대심이 없는 것, 아만심도 시기심도 그 안에는 없는 것이에요. 그 온전함을 잃어버릴 때 우리가 자꾸 아만에 빠지거나 시기에 빠지거나 해요. 아만은 뭐에요? 내가 위에 서는 것. 시기 질투는? 내가 밑에서서 위를 쳐다보며 배아픈 것이 시기, 질투, 약자가 갖는 거지요. 아만은 사실은 약자인데 자기가 강자라고 생각하는 약자입니다. 제 마음이나 여러분의 마음 본래 성질은 원만 구족해요. 즉, 온전함이 본래 갖춰져 있는 존재에요. 그럴 때 위력이 나옵니다. 그럴 때 체성과 하나가 됩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아서 있습니다. 근데 그 나무도 사실 땅이 뿌리가 아니에요. 그 뿌리는 일원상 사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사실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삽니다. 동물은 하늘에 뿌리 박고 살아요. 그래서 기도 하고 천도재를 지낼 수 있는 거에요. 식물에게는 해당이 없어요. 땅에 거름 많은 것이 중요하지요. 사람은 기도하거나 영혼에 영양을 보충하는 것 바로 기도 수양 하는 것이 중요해요.
여러분 마음이 온전하면서 분별을 나타내는데 이때 사람마다 난리가 나요. 본래는 다 똑같이 온전한데 경계를 대했을 때 나타나는 건 천차만별이에요. 어떤 사람은 거칠게, 어떤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어떤 사람은 욕심을 많이 내고, 어떤 사람은 시기심, 아만심, 질투심 많이 내요.
심지는 원래 온전하죠. 마음은 원래 온전해요. 그러나 경계 따라서 마구 달리 나타나요. 어떻게요? 사람마다 모두 달리 나타나요. 똑같은 경계에 어떤 이는 부드럽고 은혜롭게 법으로 처리하는 사람, 어떤 이는 욕심, 자기합리화하며 그것을 꼬아 놓습니다.
예전에 부자였던 사람이 영세민이 된 예가 있습니다. 이유는 여기 저기 투자를 했던 것입니다. 재주는 많았답니다. 어떤 사람은 멍청해서 가난하고, 어떤이는 영리해서 가난합니다. 영리해서 경거망동한거죠.
원만이라는 것은 뭘까요?
일원상은 원만이잖아요.
원만하다가 찍히면 원만이라고 하지 않죠.
‘정각 정행’이라고 하는데.. 정각 전에 정견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찍힌데가 어디인지 봐야합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게 ‘색 수 상 행 식’ 입니다.
이게 우리 몸 안에 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로 물질계입니다.
범부는 물질계에 종속됩니다. 집착하죠. 몸, 먹는 것, 재산, 유형의 집착. 이런 데에 본래의 텅빈 것을 놓쳐 버립니다.
고급 중생은 ‘수’ 감정세계에 집착합니다. 뭐니 뭐니해도 한번 감정이 상하면 팩 돌아서지요.
그다음에 ‘생각’ 분별세계. 니 말이 맞냐 틀렸냐. 번뇌가 많죠 여기는. 너무 어중간한 지식과 지혜가 많아지면 상이 많아져서 오히려 화가 많이 나서 아웃사이가 됩니다.
그다음 ‘행’의 행위. 마지막 ‘식’ 여기도 넘어서야 합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일원상의 공 세계입니다.
시기, 질투심 -->‘상’에 해당하죠
주로 탐심은 -->‘색’ 이에요
진심은 --> ‘수’입니다.
치심은 --> ‘식’ 이죠
사람마다 걸리는 데가 다릅니다. 감정, 분별 (따지는 것) 등, 걸리는 데가 다릅니다. 관념 전쟁이죠.
종교 – 집안에 다른 종교인 생기면 싸움이 벌어지죠. 그래서 멀어집니다. 이것이 다 상이죠.
그래서 본래 심지는 ‘공’ 세계에서는 원만구족해서 이 자리에는 탐진치, 시기 질투가 본래 없어요. 근데 이 안에서 그것들끼리 일종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데 이걸 이숙이라고 합니다. 달리 익었다는 뜻이에요. 사람마다 자기가 길들인대로 그쪽 분야가 유난히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유난히 감정 심해, 어떤 이는 유난히 예리해, ...) 그 분야가 계속 그 안에서 축적되어 나가서 그 안에서 익어나가서 그런 것이에요. 그럼. 이걸 녹이려면, 공세계가 확 빛을 발해야 하고, 밖으로도 법문 타력을 통해서 들어가고, 자력을 통해서 밝혀 내야 합니다. 그래서 수양, 연구, 취사 삼학 공부법이 이 것입니다. 삼학을 통해 수양을 통해서 본래 없는 자리, 집착 없는 자리로 가서 여유 생기고 맑아져야 해요. 그 맑은 마음에 욕심 아만심 시기 질투 없습니다. 그리고 지혜를 통해서 이것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본래 그런 것인가? 아, 내가 지금 집착했구나. 이것이 연구입니다. 거기서 끝나면 안 되고 어떻게 할 것인가? 법문에 보면 시기심을 ‘내지’ 말며 라고 되어 있죠? ‘나지’ 말며가 아니죠.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건 ‘나는’ 겁니다. 왜 나냐? 공적 영지가 있어서.. 생각이 분별을 통해 동하면 나게 되어 있어요. 일차적으로. 근데 그 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냐? 자성자리로 돌이켜서 그것을 계속 단련을 해 줘야 합니다. 훈련을 해 줘야 합니다. 보통 사람은 어떻게 훈련 하냐? 자성반조를 통해서 자기 본래 공, 원, 정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처님 마음을 연습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탐심 시기심 아만심 나태심 진심을 축적시킵니다. 연습하는 대로 되지요. 똑같이 경계를 대했을 때 경계에 넘어가는 여부가 다르다. 중생은 그것을 합리화 합니다. ‘사람이 욕심은 있어야지’하며, 그러나 그 욕심이 도에 맞냐? 또는 과하냐? 진리에 맞냐? 은혜가 생산되냐? 아닙니다.
- 제 7조 시기심을 내지말며 -
자, 이제 시기심입니다.
시기할 시(猜)자에, 기 자는 꺼릴 기(棄)입니다. 즉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언제 그렇죠? 첫째. 남이 잘할 때, 꺼려져요. 아까 성조 교도가 예화를 잘 들었죠? 죽이기도 하고 입학 취소도 시키고... 남이 잘한 것은 싫어하고 남이 잘 풀리면 싫어하죠.
또 하나, 잘못되면 겁나게 기뻐해 버립니다. 잘못됐을 때 엄청 스트레스 풀리고 속이 시원해지죠 –이게 다 상대심, 시기심이에요. 근데 그게 내 본래 마음은 아니에요. 상대심입니다.
내가 잘났다는 마음이 아만심이고,
내가 못났다는 마음이 있어, 남 잘되는 것 싫어하는 게 시기심이에요.
근데 상대가 너무 높으면 시기심 안 나요. 어중간하게 나이가 비슷한데, 동네 비슷한데, 같은 집단에 있는데, 특히 내가 예전에 그 보다 공부를 잘했다거나 내가 더 잘하는 부분이 있는 경우, 그 사람이 뭔가 조금 잘 나가면 안에서 ‘꺼리는 마음’이 쭉 올라와요. 그러다가 그 사람이 잘못됐다고 하면 속이 시원해지는, 이게 시기심입니다.
저는 시기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면 아만심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간사일때 한번 죽 올라옵디다. 처음으로 이게 시기심인가 싶었습니다. 저는 간사 시설 관리를 아주 힘들게 하고 있는데, 교구장님과 은자 관계인 나보다 나이어린 친구가 와서 하나도 도와주지 않고, 편하게 생활하더라고요. 이 때 상대심이 속에서 쑥 올라왔어요.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이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시기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같이 둔하고 아만심이 많으면 시기심이 늦게 발견됩니다. 그런데 여자분들, 예민한 사람들은 더 시기심을 잘 내는 편입니다. 여자들이 동창회 갔다 오면 갑자기 남편이 미워져요. 예전에 나보다 못했던 친구가 지금 잘 되어 있는 걸 보고서는 속에서 확 올라옵니다. 저는 그런 것 잘 몰랐는데요. 그리고 상담하면서 느낀 것이 형제 ,자매, 남매간이 또 보통이 아닙니다. 자매 둘에게 선물 한 개 갖다 주면 전쟁입니다. 차라리 안 주는 것이 나아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마음, 자기가 잘났다 하는 마음, 내가 못났다는 말도 사실은 내가 잘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지요. 사실은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습니다. 근데 자기 혼자 잘났다 하는 만큼 못났다는 생각이 또 들어요. 그러니 시험 떨어지고 우울증, 자살, 연락 두절이 있죠. 이게 모두 자기를 보호하려는, 또는 자기 본래 마음이 아닌 속아버린 마음입니다. 샘이 나는 것은 나는 거지, 샘이 안나면 말이 안됩니다. 샘이 안나는 것은 둘 중 하나죠 돌이거나 진짜 도인이죠. 경계 따라 시기심은 날 수 있다. 얼마든지 나요. 나는 것 자체는 문제 삼을 것 없어요. 근데 그 때 어떻게 내 본래 마음으로 갈 거냐? 잘났다는 마음 못났다는 마음을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시기심을 어떻게 텅 비어서 잘나고 못난 거 없는 온전한 마음으로 갈 건가입니다.
또 하나는 인과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만큼 이룬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 했다는 것이에요. 근데 내가 볼 때는 그것이 가볍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은 대충 사는 것 같고 나는 유난히 힘들게 열심히 사는 것 같기 때문에 괴롭다. 이게 다 착각이에요. 에누리 없이 자기가 연습한 만큼 마음도 단련되고, 자기가 한만큼 잘살고 못사는 겁니다. 그래서 남이 잘되고 못된 건 다 받을 만하니 받는 거에요. 근데 그걸 갖고 혼자 상대심으로 부글부글 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상담해 보면, 같이 뭐 했는데 다른 친구가 혼자 유학가거나 혼자 장학금 받으면 속에서 부글부글 해요.
그래서 이 시기심은 동등하게 같이 주변에 있던 사람이 내 위로 올라섰을 때 주로 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장군 승진할 때 투서가 엄청 나오는데 이 투서는 모두 동기들이 넣은거에요. ‘저놈은 여러분이 모르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하고 투서를 넣습니다. 왜? 도저히 배 아파서. 나는 못하는데 너만? 직장 내에서도 그래요. 여러분, 지자본위를 하지 않으면 그 직장은 깨집니다. 일도 안한 놈을 직급 올려주고, 일 열심히 한 놈 안올려주면 누가 거기 다닙니까? 그럼 한순간에 평화가 깨어집니다. 그래서 요즘엔 어지간하면 노력한 만큼 됩니다 . 그런데도 시기심 배 아픈건 여전해요. 그냥 시기 질투심 작렬합니다. 이 마음은 일원상의 내 본래 마음이 아니에요. 속지 맙시다. 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부족할수록 시기질투심이 나는데 더 많이 나는 경향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허준 보세요. 주변에서 시기 질투 많지요. 허준 보면서 엄청 울었습니다. 저사람 인생이 나하고 같구나 하고요. 주변에서 모함과 시기 질투가 많습니다. 내가 교무해도 장난 아닙니다. 한번은 시비가 너무 많아 힘들다고 영산대 총장님 찾아갔습니다. ‘제가 시비가 많아 힘듭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자네가 대산종사보다 시비 많이 들었는가?’ 해서, 제가 아무말도 못하고 ‘아니요’ 하고 나왔습니다. 그 시기 질투 에너지 쓸 것 – 모두 무관사입니다. 무관사에 동하는 거에요. 그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잘되거나 안 된건데.. 안되면 안됐으니 도와주고, 잘되면 칭찬을 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칭찬과 박수가 안되나요? 공덕 중에 적은 투자로 가장 빠른 공덕 효과 얻을 수 있는 것이 남 잘됐을 때 칭찬하고 박수 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수희(따를 수 기쁠 희)공덕입니다. 같이 기뻐해 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공덕이 그사람과 같아진답니다. 무섭죠?
특히 우리나라는 지자본위가 안됩니다. 자꾸 남녀 출신 지역 따지죠. 미국보면 그렇지 않아요. 거기도 은근히 있긴 합니다. 부시 가문 등. 그렇지만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누가하나 좀 잘되면 어떻게든 뭉게 버립니다. 남자들은 주로 명예 때문에 그래요. 여자들은 좀 다릅니다 - 주로 상대심이죠. 남자는 독점욕이에요. 그래서 ‘미생’ 보면 갑자기 꼻아서 술먹고 하는 거 보면 거의 이유가 시기 질투심입니다. 누가 보너스 받았다, 승진 했다 하면 갑자기 한사람이 담배피고 술마시며 시기 질투 합니다. 그 시간에 자기 실력 양성하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박수를 쳐 줘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양 많이 하거나, 법강항마위 올라가거나, 희사를 많이 하면, 교당의 경사잖아요.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공양했을 때 기쁘면 되어요. 거기에 온갖 꼬투리를 달아요- 잘 보이려고 하는 거겠지 등등. 이는 온전한 생각이 아니죠. 번뇌의 생각입니다.
남자들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게 한편으로는 독점욕, 명예심, 시기심이에요. 이는 아만심과 맞물려 있어요. 시기심은 이왕이면 박수치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때로는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고, 스승으로 삼아 분발심 내거나 합력할지언정, 그걸 배아파서 음해하고 그건 잘하는데 이건 못해, 이렇게 말하고 다니지요. 중생들은 전화비를 거기에 다씁니다. 장시간 통화 보면 시기 질투, 남의 과실 말하는 것입니다. 그 돈 학사에나 내 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걸 우리 법으로 설명 드리자면, 보십시오.
아까 살짝 말했는데 다 닦은바가 다르고 연습한 바, 정성 들인바가 다르죠.
그만큼 차이가 나죠.
근데 요즘 평등 의식이 많아요.
평등 vs 구별(다른 것) (불평등)
기회 / 성적 능력 성과 성격 기능
인권 / 능력
존엄 / 성과
평등과 구별 둘 모두 있는게 이 세상입니다.
성적, 능력, 성과, 성격, 기능 다 다릅니다. 왜 이 다른 것을 신앙하지 못하나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악평등이라고 합니다. 돈 있는 사람을 저주 하지요. 여기서 경계 똑같이 줘도 다 다릅니다. 즉 기능적 불평등, 기능적 차이 있지요. 이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공정입니다. 공평한 사회와 공정한 사회는 다릅니다. 이번 훈련 갔을 때 청년들은 배우셨죠. 왜 다름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뒤로 거리끼고 미워하나요. 인정하세요. 인정만 해도 사은에 의해 나와 둘이 아닌 하나가 됩니다. 고맙잖아요. 그런데 ‘지가 많으면 다야?’ 상을 냅니다. 그래서 먼저 본인 스스로가 이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대를 대할 때는 평등으로 대하는 것이 좋지만, 본인에 대해 생각할 때는 자기가 부족한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부족한 점이 자기 노력하면 바뀔 수 있잖아요.
드라마 여주인공은 왜 그렇게 예쁠까요? 저는 그걸 보며 두 가지 생각합니다. 무슨 복을 지었길래 저리 예쁠까? 또하나는 ‘그것이 꼭 복은 아닌 수 있겠다’ 는 생각입니다. 코메디 프로에서도 저축왕인 못생긴 제자와 성질이 안 좋은 김태희 중 누구를 선택할래? 하는 프로가 있다 합니다. 중생들은 김태희 선택합니다. 불보살은 둘 중에 저울을 달아서 봅니다. 중생은 얼굴 또는 돈만 보지만 불보살은 복과 혜를 둘 다 봅니다. 보면, 다른 사람 과실 말하는 것이 이 계문과 연결 되어 있죠. 중상, 모략, 음해, 음모, 시기, 질투 엄청 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시기심이 나거든 분발심으로 전환시키고 그 대상에 진심으로 박수치는 넓은 마음, 일원상 마음으로 전환시켜 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용기요, 그게 신앙입니다. 그거 어렵겠죠? 근데 그거 자꾸 길들이다 보면 알면서도 당합니다. 시기심이 진도를 나가면 자꾸 합리화 합니다. 마음이 자라기 전에 초천박살 해야 해요. 시기심 난게 사실 내 안에서 올라온 ‘내 마음’인데 시기심이 진도를 나가버리면 자꾸 저쪽에다 문제 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 업이 정말 큽니다. 못났으면 못난대로 다른 사람 갑갑하게 해서, 좀 잘났으면 더 잘난 사람 못 봐주어서 업이 생깁니다. 업이 정말 큽니다. 박수치는 것을 그리 시기 질투 내며 어려워합니다.
남녀 간에 사귀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 전에 사귄 남자에게 새로운 남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 마음 이해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저 사람이 시기 낼 수 있으니 나는 하심하고, 때로 말 하지 말고, 때로 모른 척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지 있는 자입니다. ‘사실인데 뭐?’ 하는 그것도 공부가 부족한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 중에도 보면, 자기가 아는 것을 자랑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못난 마음, 그 마음이 아만심이 잖아요. 그 마음이 나는 순간 다른 사람은 무시 받는 대상이 되는 거죠.
우리가 알고 보면 사은의 은혜 없어서는 살수 없으며, 시기 질투 대상이 아닙니다. ‘내 본래 마음은 경계따라 시기 질투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건 내 본래 마음이 아니다’ 라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소견이 좁은 사람은 잘 안됩니다. 마음을 툭 트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수양 없이는 어려운거에요. ‘시기, 질투 내면 내가 왕따 당하니까 안해야 겠다’ 이러면 안 됩니다. 본래 시기 질투 없는 마음, 본래 둘이 아닌 관계, 이렇게 공부가 들어가야지 근원적으로 해결 가능합니다.
보면, 스승으로부터 자기만 예쁨 받으려는 사람 있지요. 대종경에 그런 말씀 있지요. 그 사람도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되지요.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커플이 되면 시기심 안나던가요? ‘품절남’ 이라는 단어 참 안 좋습니다. 그런 단어 쓰지 마세요. 비아냥 거리는 소리 잖아요. 내가 너를 좋아할 수도 있는데 너는 누군가 데려가서 품절되어 버렸다는 뜻이잖아요. 사실 시기 질투 많이 하면 내가 꼭 그렇게 받습니다. 신기합니다. 하근기들이 하근기끼리 서로 시기질투하고 중근기도 마찬가지죠. 둘이 친구로 원불교 3-40년 다녔는데 한사람은 사업성적과 심법도 좋고 희사도 많은데, 다른 사람은 심법이 안 좋고 사업성적 안 좋았습니다. 전자가 먼저 법보를 받았을 때 후자가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교무님이 알아채고 둘이 법보 같이 주었는데 같이 법보 받을 땐 좋았으나, 한명이 더 나아가서 항마위 받게 되자, 다른 한명이 기분 상해서 교당 안 나와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을 맘껏 잣대로 잴 수 있습니다. 원불교 다닌 사람이 공부 많이 하다 보니 아닌 사람보다 더 시비 남 평가 잘 할 수도 있다. 스승을 함부로 시비하고 미워하죠.
- 제 8조 탐심을 내지말며, -
그다음.
다음주 탐진치 할 때 같이 더 할겁니다.
오늘은 탐심입니다.
탐심이 뭐죠? 욕심이죠. 탐욕심의 준말입니다.
욕심은 누구나 있고, ‘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나는’ 마음을 어떻게 중도를 지킬 것이냐. 특히 우리 인간은 욕심이 더 많아요.
정신 수양에 나오죠. 사람은 배우지 않아도 알아지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십배 이상이라 했습니다. 사람만큼 욕심 많은 존재가 없습니다. 탐심앞에 ‘과’ 자를 붙입니다. 과식, 과음, 과색, 과속, 과욕, 모두 ‘과 ’ 자죠.
이것이 욕심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탁 집착하죠. 그럼 어떻게 되요? 그럼 딱 가려요. 그리고 염치가 없어 집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의식주 생활하니 여러 가지 욕심 있죠. 그것은 욕심이지 탐욕심, 과욕이라고 하지 않아요. 문제는 그것을 자기가 지은대로 받지 않고 과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입니다. 사실, 욕심은 두 가지로 설명 합니다. 하나는 ‘큰 욕심을 내라’, 다른 하나는 ‘중도의 욕심을 내라’. 큰 욕심을 내면 작은 욕심은 잠을 자요. 반비례 곡선 그래프 설명 드렸죠? 서원 클수록 작은 욕심 작아지고, 작은 욕심 많이 내면 서원, 도심 줄어들어요. 인심(작은 욕심) vs 도심(큰 욕심) 서로 반비례합니다. 우리는 도심이 증장되자는 것이지, 인심 증장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처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은 것은 없으면서 받으려고 하죠. 가만 보세요. 복 지은 사람이 많아요? 복 받으려는 사람이 많아요? 받으려는 사람만 많고 짓는 사람은 적죠. 복이 없는 사람은 지지리도 없어요. 왜? 받으려고만 하고 짓지 않고 탐을 내니까요. 그러면서 탐을 내요. 쉽게 말해 자기 처치에 안분하지 못하고 계속 과한 욕심 내는 것, 그것이 탐심이에요. 이게 잘못 변곡 되면 적당 주의 (즉 나태심) 가 자기는 욕심 없다고 착각 할 수 있습니다. 나태심은 욕심 없는 게 아니라, 치심이에요. 원력이 크면 탐심은 줄어듭니다. 제일 대비되는 항목입니다. 여러분이 큰 원력만 한번 세워보세요. 그러면 ‘사자와 범 잡으러간 포수가 토끼에게 총을 쏘겠는가’, 그와 같이 큰 원력 세우고 욕심 줄어들고 비워질수록 마음 편해져요. 그러면 맑아지고 밝아져요. 그러니 그 욕심을 채울 수 있어요. 알아서 명예, 돈, 사랑이 다 옵니다. 그런데 욕심 낼수록 더 도망 갑니다.
여기서 조금 깊이있게 이야기 할게요. 탐에 대해서, 수도인의 탐이랄까요.
제가 좀 그런데요. ‘형태’ 에 대한 탐이 있습니다. 청소 정리정돈이 안 되있으면 요란합니다. 꼭 정리정돈 되어 있어야 하는 탐입니다.
그다음이 ‘형색’ 색깔에 대한 탐입니다. 옷 살 때 집지을 때 등이요.
그 다음, ‘묘촉’ 탐이 있어요. 부드러운 감촉 찾는 탐이에요. 초콜렛 등이요.러운 감촉을 계속 찾는 탐.
그리고, 대접받고 싶은 승사 탐입니다. 어디가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대우받고 싶은 마음이 모두 탐입니다. 가슴에 회사 마크 크게 달고 다니는 것도 그렇죠. ‘나 메이커 입었다. 싼 것 안 입었다’ 보여주려는 마음입니다. 유럽 가면 메이커 없습니다. 그게 진짜 좋은 상품입니다. 나는 옷만 사면 뜯느라 바쁩니다. 내가 왜 회사 선전해줘요. 이게 승사 탐입니다. 가방을 사서 ‘나 명품 들었다.’ 하는 것도 다 탐욕입니다. 명품 아니면 어때요? 인격이 달라지나요? 탐심이 많은 사람은 딱 보면 기운이 탁해요. 수양을 마니 한 사람은 기운이 맑습니다. 피부가 아니라, 기운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법당 가면 대종사님 영정 있는데 이거 똑바로 안쳐다 보는 사람 – 탐심 많은 사람이다. 안에 ‘양지’ (양심)가 있어, 정당한 것을 똑바로 못 보고, 피합니다. 신기하게요.
기본적으로 물질에 대한 탐심
그중 제일 하근기 탐심이 식, 수 바로 먹고 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 조금 고급이, 젊을 때 색에 탐하고요,
그 다음 재인데요. 형제간 화합 못하는 98% 이유 재에 대한 탐심 때문입니다. 재산분할, 같이 행사에 돈 낼 때, ‘나는사정이 있어 적게 낼테니 네가 더 내라.’ 그래서 탐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안으로는 본래 내가 비었다는 것을 보고, 밖으로는 보시를 하라는 겁니다. 두 가지가 겸해져야 해요. 근데 안으로 수양 안하고 밖으로 보시도 안하지요.
탐심을 ‘갈애’라고 표현해요. 계속 갈증을 일으키죠. 끝없는 갈증입니다. 인생이 끝없는 욕망의 갈증입니다. 이것만 하면. 이것만 하면. 계속 그래요. 끝없이 바닷물 마시는 것처럼, 절대 시원함을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그것만 한번 해 보세요. 진짜 그것만인가. 그것 해보세요. 그럼 그다음 만이에요. 그거 하면 또 그다음, 계속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몸 건강해서 요가 해요. 요가 하면 또 새로운 탐심 올라와요. 건강해져서, 저녁에 별 생각나고, 더 맛있는 것 먹고 싶고, 건강에 대한 집착 (착이 탐욕임)이 생기는데 그것도 탐욕입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약이 저만치 쌓여 있어요. 다 탐욕입니다. 여러분 태어날 때 뭐 갖고 나왔어요? 지갑? 집? 차?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죠? 빈손으로 왔다 갈 인생 뭘 그렇게 (바랍니까). 근데 옛날 중국에선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죽으면 삶과 죽음이 동일하다고 생각했어요. 죽어서도 똑같이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진시황이 13세부터 죽어서도 똑같은 곳에 살기 위해 작업했다고 하죠. 그것도 욕심이죠. 나는 죽어서도 이 병마 거느리고 기막히게 살겠다, 욕심이죠.
여러분, 저번에 사육에 대해서 했죠? 탐욕이 탁 들면 탁 합리화 합니다. 고기? ‘영양 흡수 해야지’ 합니다. 다 탐심입니다. 특신급 까지는 드세요. 그런다고 해서 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업은 있습니다. 상전급부터는 사육에 대해서 좀 조심해야 합니다. 찾아서 먹지 말고, 맛으로 먹지 말고, 어쩔 수 없는 경우 드세요. 그런데 탐심이 들면 다 합리화 합니다. 탐심이 들면 서원이 알아서 없어져요. 신기해요.
탐심이 들면, 사람으로 태어나면 빈천보를 받고, 동물로 태어나면 구렁이보를 받고, 그리고 몸 못 받는 육도 세계를 받으면 아귀보로 받습니다. 탐심 많을수록 가난해요. 그 가난을 누가 만들었나? 자기가 만들었어요. 탐심이 많으면 염치없고 뻔뻔해져요. 부처님은 탐심이 다 녹아나서 백호 광명이 나옵니다. 탐심 나올수록 기운이 탁합니다. 장사를 해도 잘 안 됩니다. 시장후보, 대통령 후보 보면 그 가운데 탐심이 덕지 덕지 묻은 사람 있어요. 원불교 좀 다니면, 보면 알아요. 원불교 수양한 할머니들은 기운이 다릅니다. 아침에 선하지, 저녁에 염불하지, 기운이 다릅니다. 탐심 많으면 늙어서 초췌해 집니다. 탐심이 많으면 대개 죽어서도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어차피 가시죠? 자기 혼자 잘살려는 탐심, 자기 혼자 배부르겠다는, 편하겠다는 탐심 (내지 맙시다).
-설법 후-
문 :
_ 시기심을 받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답 :
_ 받는 것은 인과의 이치입니다. 시기심을 받을 때는 일단은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인을 분석해야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비워야합니다.
첫댓글 타이핑 감사드립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