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이교축제와 크리스마스의 상관성
윤종훈 · 총신대 신학과 교수
11월 중순에 접어들면 전 세계를 비롯해 미국 도심지는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형형색색 장식한 네온사인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특히 영국에선 한 달 앞서 10월 중반부터 크리스마스 준비에 들어간다. 전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크리스마스.
지구촌 사람들이 열광하는 매력을 지녔음에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는 무관하다. 크리스마스 제정의 출발점이 대체로 이 땅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배경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음에도 실상 그에 따른 탄생 연월일은 정확하지 않다.
로마 농경신 섬긴 사투르누스 축제
크리스마스 제정은 성경에 근거하기보다 로마에서 행해진 3대 이교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농경시대를 맞던 로마는 평화와 풍작을 가져다주는 농경신 사투르누스(Saturnus)를 섬겼다. 그 이름은 ‘씨를 뿌리는 자’라는 뜻으로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크로노스와 동일하다. 크로노스가 제우스에게 쫓겨 이탈리아로 도망가 농업기술을 보급함으로써 로마에 황금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로마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투르누스의 축제를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고 명명하고 12월 17일에서 19일까지 지켰다. 그러나 나중에 23일까지 연장하여 7일간이나 계속됐다. 처음 그 해의 풍작을 비는 제사였으나 차후 로마 시(市) 전체의 축제로 변했다.
고대 문헌에도 사투르날리아 축제 때 로마 전체가 분위기에 들떠 왁자지껄, 떠들썩하게 보낸 걸로 기록되어 있다. 이 날은 모든 공공업무가 중단되고, 온 시민이 환락으로 밤과 낮을 보냈다. 그 기간 중에는 연령, 성별, 계급의 구별 없이 각종 연회나 경기 행렬이 펼쳐졌다. 지금도 그 이름의 원형을 별자리 토성(Saturn)에서 찾을 수 있다.
12월 하순에 들어서면 시길라리아(Sigillalia)라는 축제가 있다. 이 절기 기간에는 어린아이에게 인형을 주어 즐기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부르말리아(Brumalia)는 ‘가장 짧은 날’이란 뜻으로 태양의 떠오름을 축하하는 동지제였다. 봄의 광명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태양이 가장 작아지는 날, 새로 탄생하는 것이라 믿어 ‘태양의 소생일’ 곧 ‘태양 탄생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이처럼 초기 로마는 민간에 퍼진 이교관습 태양신 축제가 깊이 물들어 있었다. 이 시기는 당대 페르시아에서 널리 행하던 ‘의의 태양(Sun of Righteousness)’ 미트라스(Mithras)의 축제도 성대히 지키던 시절이다. 이는 정복 전쟁에 나간 로마 군병이 두려움 없이 싸우고 돌아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로마의 이교축제는 기독교가 전파되고 난 후 교회 안에 유입되었다. 당시 교회는 핍박의 종식과 함께 전래된 태양신의 탄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로 바꾸어 지키는데 대해 방법을 모색했다. A.D. 274년경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탄생일’로 12월 25일에 이교적인 축제를 가졌다.
이는 로마 황제 아우렐리안(Aurelian, 재위 269/70~75)이 시리아의 태양신인 에메사(Emesa)를 경외하기 위해 조성된 축제였다. 그 후 A.D. 336년과 A.D. 354년 로마에서 태양신의 날을 성탄절로 바꾸어 지킨 기록이 남게 되었고, A.D. 379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축하행사가 있었다. 이 시기 성탄절 풍습이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전파되었다.
예수 탄생일로 제시되는 날짜 논란
사도시대 이후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 교부들은 다양한 논리로 그리스도 탄생일을 추측했다. 그들은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추정하되, 누가복음 1장에 등장하는 사가랴의 직무에 근거하여 날짜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사가랴 사건과 마리아 수태 고지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누가복음 1장 24절)란 구절을 상호 연결지어 이를 규명코자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임의로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추정되는 날짜를 정했다. 그 결과 1월 2일, 3월 25일, 4월 18일, 4월 19일, 5월 28일, 11월 17일, 11월 19일 등 다양한 날짜를 제시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는 축일을 파콘월 25일 즉 5월 20일로 정하였고 이는 거의 4세기 후반부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A.D. 243년 한 라틴어 논문에 성탄일을 3월 21일이라고 추측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태양을 창조한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12월 25일에 대한 월력 기록은 A.D. 354년에 편집된 필로칼루스역에 최초로 제시된다(25 Dec, natus Chrristus in Betleem Judeae).
이 월력에 의하면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선포했다. 그 후 A.D. 336년에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게 되었다.
당시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세례 받은 날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이날을 주현절(主顯節)로 기념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가 탄생하므로 동방박사들이 선물과 예물을 가지고 찾아와 경배한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3세기에 들어서 각 도시에서 성대하게 성탄절이 지켜졌다. A.D. 379년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A.D. 432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성탄절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4세기 중엽까지 1월 6일을 고수하여 예수의 출생과 세례를 동일한 날로 규정했다. 이날 출생은 베들레헴에서, 세례식은 요단강에서 기념하도록 했다.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는 서방교회에 널리 퍼져있던 전승을 언급하면서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주장했다. 실제적으로 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동·서방교회 모두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게 되었다. 다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주현절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성탄일로 지켰다.
크리스마스와 이교축제 관련성
로마와 페르시아에서 행해진 각종 축제가 크리스마스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을까? 사실 이러한 점은 추측에 기초한 매우 미약한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초대교회 교부들과 감독들은 이교도뿐만 아니라 당대의 이단들까지 철저하게 배격하며 기독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순교를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로마의 이교의식인 태양신 숭배와 로마의 농경신인 사툰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축제를 빌어다가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일치시켰다고 판단하기에는 상당히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당시 로마에 행해진 각종 다양한 종교적 축제를 지켜봐야 했다. 기독교의 구심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즉 크리스마스 지키는 시기를 결정해야 했다.
기독교적 시각으로 볼 때 이교도 의식은 단순한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12월에 행해진 로마 3대 축제는 모든 사람을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기쁨의 한마당이었다. 따라서 페르시아에서 12월에 펼쳐진 행사 중 미트라(Mitrra) 축제는 ‘의로운 해’로 지목되었는데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에 접목시키고자 했다.
구약성경 말라기 4장 2절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라는 구절 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로운 해’와 미트라 축제의 ‘의로운 해’를 접목해 예수의 탄생을 이교의 축제일과 동일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추측은 A.D. 320년의 기록에서 더욱 굳어진다. “우리는 이 날(크리스마스)을 이교도들처럼 태양의 탄생일이라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태양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기독교인들은 서방교회에서 이교도 축제일과 결부시킨 크리스마스 지키는 것을 반대했다. 이들은 서방교회의 성탄일은 우상숭배와 태양숭배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 시대까지 전통적인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심지어 종교개혁 당시에도 12월 25일 성탄일은 존속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영국의 청교도들은 삶의 신앙과 신학을 제창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축일을 이교도와 결부시켜 지키는 문제점을 꼬집고 나섰다. 철저하게 성탄절 폐지론을 들고 나왔다. A.D. 1642년 영국 청교도는 12월 25일 행해지는 예배와 축하 행사를 전면 거부했다.
A.D. 1647년 영국 의회는 12월 25일 성탄일과 휴일을 법적으로 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A.D.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등극하여 군주제로 복귀하고 이를 기점으로 다시 12월 25일이 성탄일로 지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일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2월 25일아 성탄일로 지정된 배경은 로마와 페르시아의 각종 축제와 상당히 관련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앞서 살핀 바처럼 크리스마스의 공식적인 출발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장 아래 시작되었음을 볼 때, 이러한 결정은 당대 신학자나 교부들의 의지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의 혼합주의를 우려했던 초대교회 감독들이 이교도의 축제일과 동일한 날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일을 제정했다는 주장은 그러한 차원에서 더욱 연구해볼 신학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