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창은 방장산을 긴 노령산맥을 등허리에 안고, 서해에 연해지면서 자리한 고을터이다. 특히 고창은 전북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여맥이 이어져 일으켜 세운 곳이다. 방장산이 좌우로 펼쳐져 고창군 일대를 광할한 대지로 만든다.
고창은 풍수지리학상, 오행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드문 지역으로 동쪽과 남쪽이 높은 반면 서북쪽이 낮게 형성되어 통풍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농작물 재배는 물론 인간의 두뇌 형성에도 아주 좋은 인맥의 고장이자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기도 하다.
고창의 산야는 전라북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낮은 야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비산비야 지역이다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군 단위로는 최대의 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고창읍성(모양성)과 선운사, 그리고 동리 신재효와 미당 서정주의 고장인 고창은 삼한시대인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열리기 시작,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래 "고창현"으로 불렸다.
고창읍성은 평산성(平山城) 형태로 산성(山城)이 주는 시원한 조망과 평지성(平地城)이 주는 아기자기함까지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읍성이다.
고창읍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성곽위로 올라 1.7km에 달하는 성곽을 따라 여유롭게 거닐며 북으로 방장산과 서쪽으로 고창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쾌한 경관을 즐겨야 한다.
웬만한 산성 못지않게 조망이 빼어나다.
고창읍성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시대 : 조선 초기
고창읍성은 사적 제145호. 둘레 1,684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백제 때 모량부리였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계유년이 1453년, 1513년, 1573년, 1633년 중 어느 해인지 알 수 없으나, 성벽 형태로 보아 대략 1573년인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도움으로 8년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다.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 ·서 ·북의 3문과 치(雉) 6곳, 수구문(水口門) 2곳, 옹성(甕城)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육축(陸築)에 홍예문(虹門)을 열고 초루(樓)를 세우는 방식과 달라,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북문은 2층처럼 생긴 다락집이고, 아래층 어간(御間)에 문짝 둔테구멍이 있다.
서문터는 1976년 발굴되어 기둥초석과 문짝 달던 위치가 확인되고, 동문터도 기둥초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문 구성은 다른 유구(遺構)에서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성벽과 문루(門樓)와의 접합에 대하여 밝히지 못하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썼는데, 초석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고창의 성벽 밟는 놀이는 아마 성가퀴 뒤의 성로(城路)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최고 정점은 해발 108고지 장대봉이고, 최저 지점은 해발 60m의 서문수구, 북문수구 근처이다.
동은 진산인 방등산과 서는 성원평을 건너 서산에 남은 봉맥을 넘어 취령산 북은 전면의 자연방어물인 고창천을 건너 성산이 있어 흥덕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노령산맥에 이른 호남 내륙의 루트를 차단하는 길목이 되고 있다.
자연경관 또한 참으로 아름다워 하늘을 뒤덮는 노송과 빽빽하게 들어선 맹종죽은 운치를 더하여 준다.
모양성제
고창읍성에는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는 전설과 독특한 성밟기 풍속이 전해온다.
이 성밟기는 겨우내 얼 어부푼 성을 다지고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슬기가 배어있는 풍습이다.
요즘에는 주로 음력 9월9일에 열리는 모양성제라한다.
▶ 답성(성밟기)놀이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 수문장 재현
조선시대 관군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하여 고창읍성의 성곽 주위에 수십개의 옛 진영 깃발을 꽂아 고을수령(현감)이 재임하던 시절 관아의 위엄을 갖춰놓고 형형색색의 멋진 조선시대 관군복에 칼을 든 수문장과 흑백색의 순라복장에 창을 든 포졸을 공북루에 배치했다.
특히, 스스로 관군이 되어보기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관군복을 비치해 놓고 이를 빌려줌으로써 사진촬영을 통해 관군으로서의 체험도 직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마련 해 놓고 있다.
▶ 척화비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 진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뜻이다.
이 비문은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우 신미년에는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 관아건물
읍성 내에는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1976년부터 지금까지 동헌과 객사 등 12동의 관아건물을 복원 완료하였고 나머지 10동도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
주 차 장 : 200대 수용
개관시간 : 봄.가을(05:30-19:00), 여름(05:30-20:00), 겨울(06:00-18:00) 휴관일 - 없음
"'고창(高敞)'을 거꾸로 부르면 '창고(倉庫)'라는 어느 향토사학자의 우스갯 소리 만큼이나 전북 고창은 실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고창은 고찰 선운사며, 모양성, 지석묘 군락지 등 다양한 볼거리에 풍천장어와 복분자주 등 고장의 특미, 그리고 동리 신재효에서 김소희로 이어지는 판소리 풍류와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 등 문학적 체취까지 가득한 곳이다.
특히 사계절 어느 한철 빠짐 없는 산과 바다의 빼어난 풍광은 최고의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홍빛 고운 자태를 자랑하는 선운사 동백숲이 '고창의 봄'을 대표하는 명물이라면, 초가을 붉은 상사화와 수만평 대지에 넘실대는 하얀 메밀밭,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수북히 쌓여 있는 천일제염의 모습은 '고창의 가을'을 대별하는 목가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 국내 최대 규모 천일제염 생산지 유명( 바닷물 5일간 20단계 염판 거쳐 완성,창고서 수분 빼기 거쳐야 귀한 대접 )
서해바다와 맞닿은 심원면 고전리 염전부락은 국내 최대 규모의 천일제염을 생산하는 곳이다.
'삼양사 염전'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천일제염이 성할 때에는 110만평의 광활한 규모였지만 값싼 수입 소금 등에 밀려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최근에는 16만평으로 줄어든 형편이다.
▶ 고창읍 공음면 선동라 학원농장 (17만평 농장 MT-야유회 장소로도 이용, 4만평 메밀꽃 바다 )
- 고창 학원농장 메밀밭
메밀밭은 가을철 고창의 또다른 명물이다. 흔히 메밀밭은 강원도 평창의 것을 제일로 쳤지만 올가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고창읍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을 찾으면 4만여평 대지에 펼쳐진 하얀 메밀꽃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툭트인 들녘에 하얀 소금을 뿌려 놓기라도 한듯 장대한 스케일의 꽃물결이 가을바람에 일렁인다.
9월초부터 하얀 망울을 맺기 시작한 메밀꽃은 잦은 비바람으로 개화기가 불규칙했지만 이번 주말 최고의 절정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7만여평의 농장 한켠에 자리한 메밀밭은 곳곳에 사진 촬영 포인트만 지정해뒀을 뿐 장승, 솟대, 옹기 등 군더더기 없이 그저 광활한 꽃밭이 이어진다. 때문에 지평선까지 펼쳐진 메밀밭에서 공짜 꽃구경을 실컷 할 수 있다.
학원농장은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인 진영호(55)-나란희씨(52) 부부가 지난 92년 귀농해 터를 일구고 보리와 카네이션 등을 재배하고 있다.
첫해에는 12만평 대지에 코스모스만 심어 파란 가을하늘 아래 파스텔톤 코스모스가 꽃물결을 이뤘다.
이후 보리를 파종해 초봄부터 수확기 초여름까지 초록과 황금의 물결이 번갈아 대지를 채색했으며, 보리 걷이를 끝낸 자리에 메밀을 심어 고창의 명물로 탄생했다.
학원농장은 MT나 야유회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넓은 잔디밭에는 축구장, 족구장, 실내 탁구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농장길은 하이킹, 산책로로 제격이다. 욕실을 갖춘 3~4인용 방 4개, 30명 수용의 단체룸 등을 갖추고 있으며, 취사시설도 있다.
농장 내 진의종 총리의 유품등을 전시한 '백민기념관'도 볼거리. (063)564-9897
그밖의 여행지
고창의 대표적 볼거리로는 청동기시대 유적, 지석묘 군락지를 들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 규모의 지석묘 군락 등 곳곳에 장구한 세월의 자취가 산재해 있다. 특히 섬틀봉과 고창천이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 고창읍 죽림리 산기슭에는 400여기 이상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인근 도산마을에는 칼도마 형태의 국내 대표적 북방식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다.
의식이 흡족하면 풍류를 생각케 된다. 고창은 곡창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문화가 꽃핀 곳이다. 고을 곳곳에 천석꾼, 만석꾼이 있어 이들의 풍류가 가풍(家風)을 낳고, 이것이 서민 문화와 결합, 독특한 문화를 형성시켜 왔다.
동리 신재효에서 김소희로 이어지는 판소리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의 대문호 미당 서정주가 나고 자란 곳 또한 고창이다. 신재효의 풍류가 '한국의 보들레르' 서정주에 이르러 선운사의 화려한 동백꽃처럼 활짝 꽃을 피우게 된 셈이다. 부안면 선운리 미당의 생가마을에는 유년기 고향 마을 사람과 풍속을 산문 양식의 글에 담아낸 시집 '질마재 신화'의 추억도 더듬을 수 있다.
수년 전 선운리 폐교에 건축가 김원씨가 설계해 마련한 미당문학관 전망대가 회상의 명소이다.
꽃무릇(상사화)가 만발한 선운사도 운치 있는 곳. 특히 선운사~도솔암에 이르는 산책로는 고운 단풍이 압권으로 산사의 고적함을 한껏 맛볼 수 있다.
▶ 맛집 = 선운사 어귀에 장어구이집이 밀집해 있다. 그중 선운사 공원에 자리한 38년 전통의 산장회관도 맛집으로 꼽힌다. 시어머니에게 손맛을 대물림 받았다는 주인 유민자씨(44)의 "양식장어를 팔고 있다"는 솔직함이 돋보인다.
이 집 맛의 비결은 양념장을 무려 7~8회씩 발라 굽고, 소금은 2~3년 묵은 천일염을, 그리고 간장, 고추장, 된장 등 모든 양념을 직접 집에서 담가 쓴다는 점이다. 장어구이 375g 1만4000원, 장어정식 250g 1만2000원. (063)562-1563
▶ 복분자주 = 고창의 또다른 맛으로는 '복분자주'를 꼽을 수 있다. 본래 '산딸기'라고 부르는 빨간 복분자 열매를 6개월~1년 이상 숙성시켜 술을 빚는다. 일반적으로 피로회복, 강장효과 등이 있어 풍천장어와 함께 스태미너식으로 애용되고 있다. 고창 고인돌 복분자주(063-562-6007) 등 전문 제조사에서 전국적으로 보급하고 있다.
1)서해안고속도로 고창나들목 -> 고창읍내 -> 고창읍성
2)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 -> 고창 방면 15번 지방도 -> 양고살재 -> 고창읍내 -> 고창읍성
고창읍내에서 도보로 쉽게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