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추천소설 고통/전경린

[문워커]

고통

버스는 작은 파출소를 지나 교차로에서 정지 신호를 받고 섰다. 여자는 자신
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여자의 야윈 뺨이 한순간 음화처럼 어
두워지고, 메마른 두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오래된 고통이 기억에 균열을 일으
키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여자는 몸을 오른편으로 돌렸다. 버스는 느린 속도로 거리를
지나갔다. 여자는 모든 것이 천천히 지나가는 차창에 한 손을 댄 체, 황량하게
열린 눈으로 차창 밖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서서 승강장으로
나갔다. 버스가 정지하자 여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 내려섰다.
여자는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잠시 두리번거렸다. 레몬빛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였다.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무성한 잎사귀는 밝은 연두빛
과 짙은 오렌지색과 검은 갈색으로 차차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색은 너무 선명
해서 흡사 사각형의 색종이를 푸른 잎 사이사이에 끼워놓은 것처럼 보였다.건드
리면 툭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우리가 명백하게 꿈꾸는 것들은 모두 이루어져. 우리가 꿈꾸지 않는 것들에
대해 명백하게 무관심하기만 하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여동생이었다. 동생은 그 말을 한 뒤에 언니에게 실망했
다고 덧붙였다.
“누구도 언니 자신을 대신 구원해주지 않아. 언닌 누군가에게 자신의 황폐한
생을 시위하는 것 같아. 언닌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거야?”
바로 아래 여동생은 결혼하자마자 남편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4년 만에
돌아왔다. 그들 부부는 시의 끝에 있는 대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여동
생의 남편은 학교에 강의를 나가게 될 것이고 그녀는 당분간 몇 군데 웨딩 전문
사진관과 시내 미용실에서 메이크업 담당자로 일할 것이라고 했다. 여동생은 아
이를 낳지 않았고, 생에 대해 여전히 생생한 식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정오에 친정 식구들, 요컨대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을 초대했다. 여동
생은 가족들에게, 특히 어린 시절 내내 자신을 보잘것 없이 취급해온 엄마에게
자신이 품고 돌아온 원대한 비젼을 보여줄 것이다.
여자는 아파트의 위치를 성명 듣고 직행 버스를 탈 때에도 이 거리를 지나게
될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여자는 근처에 올 때까지도 둔감하게 더러운 차창
바깥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자각의 과정은 갑작스럽고 당혹스럽게 왔다. 여자
는 버스가, 이제는 기차도 지나다니지 않는 굴다리를 통과할 때에야 자신이 이
거리를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자가 내린 곳은 옛날 러시아 관공서였던 컴컴한 석조 건물 앞이었다. 맞은
편에는 전에 보건소로 사용했던 일본 관공서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흉하게 낡
은 목조 건물은 지금은 여러 사람의 화실로 쓰이고 있는 듯 이런저런 아틀리에
간판들이 붙어 있었다. 그 인근은 1900년 초 러시아 조차지였다가 러일 전쟁으
로 일본의 손에 넘어간 구역이라 러시아식 석조 건물과 일본식 목조집들이 뒤섞
인 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여자는 버스가 지나온 길을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거리 바닥에는 짙은 갈색
과 아직 촉촉한 노란색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더러 떨어져 있었다. 헌책방이
있던 자리쯤에 현대식 대형 서점이 들어서 있었고 그 곁에는 문과 벽이 온통 초
록색인 예쁜 빵 가게가 있었다. 이제 막 빵을 구워냈는지, 그 앞을 지나자 신선
하고 따스한 빵 냄새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 곁엔 지나치게 환한 편의점이
있었고, 부피가 큰 이불들이 쟁여 있는 침구 가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맥주
나 비스킷, 계란과 김을 사기 위해 드나들었던 허름한 구멍가게 같은 건 어디에
도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살았던 이층 방이 사라진 것을 버스 속에서 보았다. 일층의
<마리> 화실도, 곁에 있었던 <원> 화방과 관에 옻칠을 해 거리에 내놓고 말리
던 <낙원> 장의사와 <칠성> 간판집도 없었다. 왜식 목조집이 사라진 자리에 삼
층 건물인 큰 상가가 세워져있었다. 맞은편에 그녀의 이층 창문에서 보이던 화
실과 옷가게와 식당과 지점토 장식 가게가 들어 있던 건물과 한의원을 하던 낡
은 한옥집은 그대로 있었다. 여자는 외장을 노란 인조식으로 마감한 삼층 상가
앞에 우두커니 섰다. 여자는 사라진다는 것은 잊혀진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 집이 훌쩍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
다고 가슴 속의 방이 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슴 속에 있는 환히 불 켜진
방...
여자의 등을 안고 있던 낯선 남자의 지나치게 흰 팔, 방바닥에 내던져진 샛노
란 해바라기꽃, 급정거하는 트럭의 바퀴 소리, 모든 것을 희미하게 감싼 안개,
전신주를 박고 선 대형 트럭, 뒤차를 향해 비상등을 켜고 길게 경적을 울리며
늘어선 몇 대의 자동차 행렬, 오랜 뒤에야 도착한 구급차 소리, 게슈타포처럼 묵
묵히 움직이던 긴 우의를 입은 경찰들...

십년 전 여자는 근처 여자 중학교의 국어 교사였다. 유월 말경의 어느 월요일
아침, 교장 선생이 교무실로 직접 들어와 그녀 앞에 섰다. 이마에는 마른 지렁이
같은 힘줄이 튀어올랐고, 두 눈에 노골적인 질책과 경멸이 박혀 있었다. 그녀와
관계된 불쾌한 어떤 일로 사오 년은 족히 애를 태운 것 같은 원한 서린 늙은 얼
굴이었다.
“내 방으로 따라오시오.”
여자는 시간이 없었다. 곧 학급 조례 시간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녀가 시계에
눈길을 준 뒤 난처한 얼굴로 마주 보자 교장의 눈속에 날카로운 적의가 스쳐갔
다. 여자는 곁에 앉은 교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교장 선생을 뒤따라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교장은 커다란 검은색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대뜸 말했다.
“애인 이름이 박상희 맞나?”
그녀는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발각된 자의 병목적인 죄의식
과 모멸감으로 굳어졌다. `애인`이라는 단어는 그 어감의 신랄함 때문에 그들의
관계와는 큰 거리가 있는 단어였다. 그런데도 아니라고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
들은 사랑하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이였다. 여자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부의 기관원이 왔다가 갔소. 학교에. 이 교장실에...”
교장은 참으로 가관이 아니냐는 듯이 교장실을 한바퀴 둘러보더니, 담배에 불
을 붙였다. 창 밖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커튼이 흡사
물에 푹 젖은 것처럼 유리창에 들러붙어 있었다.
“헤어져요. 김가언 선생, 당신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요. 경찰서를 제 집
드나들 듯하는 불순분자와 숨어서 연애를 하다니, 교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헤어지겠소, 아니면 학교를 그만두겠소?”
여자는 아연한 얼굴로 버티고 서 있었다. 여자가 전체적인 사태를 잘 모르고
있거나 교장이 사태를 과장하고 있었다. 박상희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그토록 사
적인 일이 어째서 교사직을 걸어야 하는 비장한 사건인지, 여자는 납득할 수 없
었다. 교장은 몸 전체를 여자 쪽으로 휙 돌리더니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대체 김 선생 아버지는 알고 계신가?”
당시 아버지는 시골 초등학교 교감으로 계셨다. 물론 까마득히 모르는 일이었
다. 아버지와 함께 교장을 찾아왔던 지난 해 칠월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의 작
은 손을 벌에 쏘여 검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적지 않은 돈
도 이미 재단 쪽에 건너간 상태였다. 아버지는 교장 선생 앞에서 두 손을 공손
하게 모아 잡았다. 그런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교사직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자
리가 아니었다. 사범 대학을 나오고도 친구들 거의 모두가 두해째 실업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날 교문을 나설 때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교정을 둘러보
며 말했다.
“교사는 좋은 일이야. 천직으로 여기고 일해라. 일을 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단다. 여자라고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교장은 자칫하면 아버지까지 불러 올릴 기세였다. 여자는 아버지가 다시 교장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쥐는 모습만은 피하고 싶었다. 여자는 의미없이 고개를 끄
떡였다.
“헤어지겠다는 뜻이오?”
여자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떡였다.
“나와 약속한 거요. 기관원은 모든 것을 알고 있소. 앞으로의 일도 물론이고.
”
여자는 그날 학급 조례 시간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날 점심 시간에 여자는 열병 오른 사람처럼 붉은 얼굴로 경찰서까지 단숨에
걸어갔다. 낮이 되면서 검은 구름이 걷히고 뜨거운 해가 나왔다. 경찰서의 높은
뒷담엔 푸른색 담요들이 반듯반듯하게 널려 그 불볕을 받고 있었다. 모두 열다
섯 장이었다. 여자는 경찰서 뒷담을 빙빙 돌면서 담요들의 숫자를 세고 또 세었
다. 해는 불타는 바퀴처럼 여자의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다. 상희는 교내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류 이십구 일을 받고 육 일째 그 속에 갇혀있었다.
그 전 해의 겨울, 여자는 역시 구류를 받은 그를 면회한 적이 있었다. 면회 신
청서에 약혼녀와 아내라고 써야 허가가 떨어졌다. 여자는 약혼녀라고 썼다. 면회
신청실은 삼층에 있었는데, 창살을 사이에 두고 그를 만난 곳은 반지하였다. 여
자는 담당 경찰을 따라 오랫동안 계단을 내려갔다. 불길하게 느껴지는 계단이었
다. 면회실은 거대한 반지하 사무실 한 구석에 있었다. 경찰복을 입은 사람과 전
경들이 뒤섞여 있었고 두꺼운 서류 뭉치들이 책상들 위에 쌓여 있었다. 휑하고
퀴퀴하고 천장에서 끈을 늘어뜨린 알전구들마다 노란 불이 켜져 있었으나 침침
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회색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겨울에 입기에는 지나
치게 얇은 옷이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회색의 방에 등장한 그는 여자를 발견
하자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하, 하고 웃었다. 그는 웃음을 지우지 못해 난처
해하며 그녀를 외면했다. 잠시 후 웃음이 수습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왜 왔니?”
상희의 얼굴은 추위로 인해 푸르게 질려 있었다. 손도 푸르스름해서 남루해
보였다.
“책은 받았니?”
여자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다시 웃기 시작했다.
“너를, 이런데서 보니까, 왜 이렇게 우습니?”
그는 멈출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실소를 했다. 그가 계속 웃어댔기 때문에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은 너무 오랫동안 웃질 않았거든. 그래서 탈이 난 거 같아.”
추위에 질린 얼굴에 희미한 분홍빛 온기가 어렸다. 여자는 희미한 분홍빛이
소중했다. 면회 시간이 끝나 되돌아가면서도 그는 웃었다.
“다신 오지마. 이런 곳엔 보러 오는 게 아니야. 정말이야. 또 오면 안 돼.”
그는 일 년 내내 한 번도 웃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늘 긴장하고
있었고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었던 것이다. 여자는
상희의 추운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자신의 존재가 기뻤다.
여자는 삼층의 상자 같은 방에서 면회 신청 서류에 약혼녀라고 쓰고, 지하로
내려가 다시 그를 웃겨주고 싶었다. 그는 오랫동안 웃지 못했을 것이었다. 여자
는 열다섯 장의 푸른 담요가 널린 경찰서 뒷담을 손톱을 물어뜯으며 빙빙 돌았
다.하늘엔 불 붙은 바퀴 같은 해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다.
“기관원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소. 앞으로의 일도 물론이고.”
그녀는 평범한 여자였다. 여자는 자신이 싫었다.

여자는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그 시절 여자는 검은 먼지
가 잔뜩 낀 레이스가 걸린 이층 부엌 창가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거리를 지나
는 행인들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곤 했다. 그 길을 지나는 행인들은 대부분 혼자
였고, 지쳐 보였고 우울하고 영양이 부족한, 야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점퍼 차
림에 서른 여덟 살에서 마흔다섯 정도로 보이는 남자들은 자주 몸을 돌려 자신
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곤 했다. 무언가를 잊었다기보다는 상대편에게 꺼내놓기
어려운 부탁을 가슴에 품은 채 오락가락하며 망설이는 사람, 집에 가면 변변한
우산 하나도 없을,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긴 우기가 시작되었다. 비가 쏟아지자 왜식 목조집은 괴괴해졌다. 눅눅해질수
록 벽과 다다미를 깐 방바닥에서는 짙은 건초 냄새가 베어나왔다. 여자는 열한
시쯤 불을 켠 체 자리에 누웠지만, 이층의 비어 있는 방들과 주인 할머니의 동
생 영감이 잠들어 있는 복도 가운데 방에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푸른 배추처럼
파득파득 깨어났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창가로 가 거리로 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검고 굵은 빗줄기가 사선을 그으며 세차게 안으로 들어왔다. 비릿
하고 따뜻하고 울고 난 뒤처럼 개운하고 쓸쓸한 냄새.
여자는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거리의 양쪽 끝을 내다보았다. 건물들은 컴
컴하고 금속성의 가로등 빛이 젖은 포도 위에 엎질러져 도로가 거대한 바다 짐
승의 등처럼 반뜩거렸다. 창 바로 앞의 플라타너스 나무가 비바람에 뒤채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마나 외로운가, 여자는 문득 중얼거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젖은 얼굴을 닦으며 잠긴 방문을 바라보았다.
“가언씨, 마리예요.”
밝은 주홍색 슈미즈 차림의 마리는 베개와 <플레이 보이>지와 담배와 맥주병
을 안고 들어왔다. <플레이 보이>지는 마리가 애독하는 잡지였다. 납득하기 어
렵지만, 누드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마리의 주장이었다.
“나 여기 좀 재워주어요.”
머리카락을 검은 털실처럼 꼬불꼬불 늘어뜨린 마리는 얼른 납득하지 못하는
여자를 향해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플라타너스 나뭇가지 그림자 때문에 잘 수가 없어요. 나뭇가지 그림자가 자
꾸만 화실 창에 너울너울거려.”
그날따라 하필 그 많은 애인도 한 명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고 오자 마리가 창백한 얼굴로 샐쭉 웃었다.
“어디 나갔다 왔어요?”
여자는 고재를 저었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마리는 부
엌으로 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지붕 위에서 내려온 사람 같아요.”
마리는 안정되지 못한 채 성급하게 담배를 빨았다. 마리는 일층 <마리 화실>
의 주인으로 여자와 동갑이었다. 검은 털실처럼 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과 티
하나 없는 흰 얼굴, 쏘아보는 듯한 뇌쇄적인 눈빛을 가진 여자였다. 화실을 들락
거리는 남자들로 보아 애인이 네댓 명은 될 것 같았다. 마리는 그 많은 애인들
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교통 정리를 아주 잘 하고 있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시
고 여자가 깎은 생당근을 씹던 마리가 갑자기 무릎을 껴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아아, 너무 무서워. 가언씨, 미안해.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말이야. 하지
만 말해야겠어. 난 지금 너무 무섭거든.”
여자가 맥주를 마시며 눈으로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화방 아줌마가 그러는데, 지금 내가 사는 방에서, 그 방에서 전에 어떤 남자
가 목을 매달고 죽었대요... 너무해. 그런 걸 숨기고 방을 세놓는 법이 어디 있
어?”
마리가 무릎을 싸안은 채로 발을 당당당 굴렀다.
“내가 화실을 열기 전엔 다리를 저는 남자가 양복점을 했대요. 오 년이나 했
는데, 나중엔 아주아주 손님이 없었나봐. 그래서 헌양복 칼라를 고치거나 바짓단
따위나 수선하면서 살았는데 몹시 궁핍했대요. 그러다보니 함께 살던 여자가 어
느날 새벽에 떠나버렸대.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 남자도 목을 맸다는 거야... 무
서워. 내가 그 방에서 혼자 잤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너무 끔찍해...”
그때부터 마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쇼크 상태인 것 같았다. 여자는 아래층에 내려가 잠든 주인 할머
니를 깨워 마리의 상태를 설명했다. 밀감 크기만한 혹이 뒷목에 달린 주인 할머
니는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원> 화방 아줌마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뒤따
라 올라왔다. 마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떨고 있었다.

“계약 없었던 걸로 하고 방 빼줘요. 할머니가, 나빠요.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잖아.”
마리는 울고 딸꾹질하며 항의했다.
“그런 건 원래 말하는 법이 아니야. 말을 한 화방 여편네가 나빠.”
할머니는 느릿느릿 말하며 마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두려움이 사라지도록 기도해줄게.”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잡은 뒤 눈을 감았다. 천주여, 지붕 위에
서 마루 끝까지 이 집 안에 평화를 주소서, 로 시작해 온갖 어린 수호신들이 등
장하는 몹시 길고 복잡한 기도였다. 할머니는 여자와 마리가 완전히 잠들었을
때까지 로마로 성지 순례 했던 이야기와 천주의 은혜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
다.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그 유명한 비탄 상을 직접 보았지. 미켈란젤로가 예
술을 위해 진실을 버리고, 마리아를 예수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고 안내원이 설
명했어. 마리아의 슬픔을 더욱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 이 늙은이 눈에서도 눈물
이 흘렀어. 그 비탄 상은 누구라도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하지...”
여자는 그날 무서운 꿈을 꾸었다. 여자의 방에 있는 벽장에서 울긋불긋한 옷
을 입은 일본 무사가 자신의 배를 긴 칼로 갈랐다. 일본 무사의 뱃속에서 붉은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여자가 깨어서 보니 환하게 불 켜진 방에 할머니는 가고
없고 마리는 곁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비가 한결같이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비가 계속해서 저렇게 많이 오면 빗물이 지하 감옥에 고이지나 않을까... 한여름
인데도 상희는 추울 것만 같았다. 상희의 푸른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
다. 여자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대고 조금 울었다.
마리는 다음 날이 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명랑한 얼굴로 우산을 쓰고 아침
마다 그랬듯이 피아노를 배우고 돌아왔다. 여자는 출근길에 언덕을 내려오는 마
리와 만났다.
“가언 씨, 우리 오늘 밤에 좋은 데 놀러가요...”
여자가 우산을 뒤로 기울이자, 마리가 바짝 다가와 소리쳤다. 그 바람에 마리
의 빨간색 우산에서 쏟아진 빗물이 여자의 무릎을 적셨다. 여자는 쓸쓸하게 웃
었다. 어디서나 조용필과 마이클 잭슨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단순했
다. 좋은 곳조차도.
여자는 골목이 갈리는 곳마다 조금씩 망설이며 더 좁고, 더 어둡고, 더 높은
담벼락 아래 길로만 걸었다. 그런데도 몇 번인가 담장을 넘고 나온 넝쿨 장미꽃
들을 마주쳤다. 커다란 종류의 연한 노란색 장미, 가운데 분홍빛을 띤 백장미,
단순하고 흔한 자그마한 붉은색 장미꽃들... 여자는 인적조차 드문 고요한 주택
가의 담장에 핀 풍성한 꽃들과 마주칠 때면 알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두려워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그시 기다려지기도 하는 겹겹이 둘러싸인
쓰라림. 여자는 꽃들 속에서 자신의 어두운 운명을 예감했다. 그녀는 어느 날 생
을 놓아버리고, 그런 적요한 꽃들 속에 숨어서 가볍게, 아무 가치도 없이 평생을
살아버리게 될 것 같았다. 술래가 마지막까지 찾지 못한, 벽장 속에서 잠들어 버
린 꼬마 아이처럼... 빗물에 젖은 꽃잎들은 더욱 나른하고 묵직해 보였다. 아무런
고통도 없이, 아무런 가치도 없이 몇 번의 비가 더 내린 뒤엔 산산이 흩어질 것
들이었다.
여자는 그날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선을 볼 날짜와 시간을
알려준 뒤, 이제 놀기나 하는 아이가 아니다. 넌 달라져야 돼, 하고는 수화기를
놓았다. 아버지의 음성은 나무라는 듯 서늘했다. 교장이 결국 전화를 해버렸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말한 바와는 달리, 교사 일이 천직 같지가
않았다. 여자는 지그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누구나 여자에게 넌, 이제
어른이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천직을 가졌고, 국가에 세금을 내어야 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두 명쯤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어른들과 아이들의 생일을
차려주고, 제사를 지내야 하며,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여자는 가
슴이 짓눌리는 고통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교장에게 사직서를 던지고 홀연히 떠
나버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천직을 위해 교장 앞에 두 손을 모았던 것이
다. 여자는 누군가 자신을 빼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도, 교장 선생도, 상
희도, 어느 누구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빠져나가버릴 수 있기를.
여자는 꽃들의 운명이 두려웠다.

여자는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삼류 극장이 있던 자리에 은행
을 신축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몇 번쯤 영화를 보았던 것 같았다. 아마도 마리와
보았을 것이다. 영화는 생각나지 않고 오히려 화장실 벽의 낙서가 또렷하게 떠
올랐다. 상스럽고 지독하게 사실적이고, 충격적이었던 낙서였다. 여자는 아무 생
각 없이 길을 꺾어 시장으로 들어갔다. 이상할 정도로 시장은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신발 가게였던 자리엔 신발 가게가, 벽지 가게였던 자리는 여전히
벽지 가게가, 불고기집이었던 자리는 예전처럼 불고기집을 하고 있었다. 시장의
규모도 그때와 비슷했다. 여자는 변하지 않은 것이 더 아뜩하게 느껴지는 이유
를 알 수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언제나 시장에 왔었다. 목욕을 하고, 술과 찬거리를 사고,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부엌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상추를 씻고, 딸기나 토
마토를 씻으며 저녁 식사 준비를 했었다. 아직 환한 늦은 오후부터...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차마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그러나 그 모든 기다림이 자주 허
사가 되곤 했던 토요일이었다.
열 시가 되어도 그가 오지 않으면 속이 까맣게 마르는 것만 같았다. 음식들도
검게 마르고, 누렇게 불어버리거나 천천히 식어갔다. 열두 시를 넘어서면 도로엔
차가 뜸했고, 검은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술꾼들을 실어 나르는 택시가 간혹 지
나가고, 이따금 밤새워 달려 먼 곳으로 가야 하는 대형 트럭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무서운 속력으로 지나갔다. 여자는 부엌 창가에 의자를 놓고 창틀에 턱을
고인 채 하염없이 길 끝을 바라보았었다.
길 끝은 이제 막 영화가 끝난 거대하고 검은 영사막 같았다. 여자는 그 검은
영사막을 바라보며 헛것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엇인가가 나타나기를, 자동차가
나타나면 그것이 트럭이 아닌 택시이기를, 그것이 집 앞에 멈추고 꿈속에서처럼
그가 도로에 내려서서 놀란 눈으로 창문을 올려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장님처럼, 벙어리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비정상적인 집착이었다. 얼굴
엔 먼지와 검은 매연이 버석거리고, 팔엔 깊은 창틀 자국이 상처처럼 패었으며,
목이 뻗뻗하게 굳었다. 더러워진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흘렀다. 몹시 슬픈 영화를
본 기분이었다.
그 시절의 유일한 진실은 그런 기다림이었다. 검은 먼지가 잔뜩 낀 레이스가
걸린 창가에서 보낸 그 많은 기다림의 시간들, 그 아래로 지나가던 우울하고 기
운 없던 행인들, 맞은편 상점에서 느닷없이 문을 밀고 출몰하던 사람들, 비틀거
리던 취객들, 달리는 자동차들, 마지막 버스에 실려가던 잠에 어린 승객들... 그
들은 여자의 마음 속에 사는 사람들처럼 친숙해져갔다.

우기는 계속되었고, 밤마다 플라타너스 가지의 그림자는 광기에 찬 듯 너울거
렸다. 할머니의 남동생은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길고 어둑한 낭하의 방들 중
가운데 방에 문을 활짝 열어두고 누워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약간 대머리인 오
십 대 남자로, 부도를 내고 숨어다니는 중이었다.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방문
앞에 서면, 언제나 잠자고 있는 늙은 남자가 보였다. 그날 밤 이후 마리와 여자
는 매일 밤 함께 외출을 했고, 마리의 화실 안방이나 여자의 방에서 둘이 함께
잠을 잤다.
그날 밤 마리는 방송국에서 디스크 자키로 일한다는 남자와 두 시간 동안 계
속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었다. 디스크 자키라는 남자는 매력적인 얼굴이긴 했으
나, 중간에 못 미치는 키에 엉거주춤한 오리 궁둥이를 갖고 있었다. 그는 땀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약간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었다.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순하게 춤추며 서로 깊게 얽혀들었다. 자극적인 조명 때문에 그들의 모
습은 공중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혼자 앉아 있었던 여자는 별안간 일
어섰다. 그리고 어두운 출구를 빠져나갔다. 한줄기 바람과 함께 서늘한 비냄새가
휙 몰아쳐왔다. 푸른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빠져나올 때 여자는 누군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은 국수가락처럼 줄기차게 내렸던 비는 어느 사이
그쳐 있었다. 여자는 빠르게 길을 건넌 뒤 택시를 잡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이야기 좀, 나눌 수...”
여자는 소리난 곳으로 돌아보았다. 검은 티셔츠를 입은 커다랗고 나이 어린
남자가 자신의 짧은 머리를 쓱 쓰다듬으며 얼굴을 디밀었다. 그는 어깨에 작은
여행 가방을 멨는데,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여자는 남자애의
둥근 얼굴과 작은 눈 속에서도 과포화 상태의 욕망을 보았다. 그것은 순진한 것
인 만큼 더욱 병적이고 위험해 보였다. 여자는 두려웠다. 열한 시를 좀 넘겼을
뿐인데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거리는 몹시 어두웠고 인적이 뜸했다. 여자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남자애를 스쳐 택시가 달려올 길 저편을 응시했다. 다
행히 택시 한 대가 길 끝에 나타나 다가오기 시작했다.
“잠시만, 이야기만 좀 나누...”
여자가 차도로 내려서자 어린 남자는 날쌘 동작으로 여자의 겨드랑이를 낚아
챘다. 여자가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다. 어린 남자는 한순간 다른 손으로 여자의
가슴을 쥐었다. 여자는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놓쳤다. 여자는 남자
애를 뿌리치고 택시를 향해 팔을 내뻗었다. 얼마간 미끄러져갔던 택시가 뒤로
후진해 다가왔다. 이미 다른 승객이 타고 있는 택시였다. 여자는 택시에 올라 문
을 꽝 닫았다. 흘깃 쳐다보니 남자애는 여자의 우산을 손에 쥐고 택시를 노려보
고 있었다. 기사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여자의 눈에 눈물이 번쩍거렸다. 압착기 같던 금속성의 힘이 여전히 가슴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빵이나 두부처럼 누군가가 훼손시킬 수 있는
물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마리 화실 앞에서 택시에서 내린
여자는 그와 동시에 다가온 택시에 탄 검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애를 보았다. 여
자는 구두굽 소리를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화실 곁 샛문을 지나쳐 좁
은 골목으로 들어가 시궁창 냄새와 분뇨 냄새가 나는, 내장처럼 컴컴한 뒷길을
따라 화장실로 통하는 뒷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계단에 불을 켜지 않고 더듬거리며 올랐다. 다행히 주인 할머니의 동
생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 방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열쇠를 꺼내 간신히 방문을 열었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문득 간밤 꿈이 생각난
여자는 갑자기 일어나 벽장 문을 활짝 열었다. 벽장 속엔 겨울 옷이 든 박스와,
작은 선풍기, 낡은 책들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부엌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뒤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심한 얼굴로 커다란 눈을 조용히
뜬 채, 건너편에서 창문을 노려보고 있는 어린 남자를 보았다.
여자는 납득하지 못한 채 멍하니 마주 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휘는 듯한 잔인
한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었다. 여자는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는 전부터 여자
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부터 길 건너편에서 창가에 다가서곤 했던, 그녀를 구
경했던 것이다. 그는 여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여자는 그 주의 토요일에 선을 보았다. 약속 장소인 호텔 커피숍엔 아버지가
먼저 나와 있었다. 여자는 푸른색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를 입었다. 그녀가 자
리에 앉아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자, 저편에 앉아 있었던 중년 부인과 노부부가
일어서서 다가왔다. 중년 부인이 중간에 앉아 인사를 시켰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노부부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들은 동화 속에서 나온 사람들 같았
다. 그처럼 자그마하고, 곱고, 포근하고,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는 굳건한
편견과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
“처녀, 영어를 잘 하는가?”
영감 쪽에서 물었다.
“잘 못합니다.”
대체 누가 영어를 잘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안됐네. 우리 아들은 유학을 갈지도 모르는데...”
이번에는 세월을 아끼며, 한없이 주저하며 늙어온 고운 할머니가 말했다. 아버
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의 비어 있는 틈을 보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들어와 두리번거리더니 그들 쪽으로 왔다. 의외로 키가 크고 부드럽게
보이는 남자였다.
거리를 거닐다가 이른 식사를 하고, 택시를 기다릴 때 남자가 물었다.
“결혼 후에도 학교에 나가실 건가요?”
여자는 약간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여자는 생을 놓아버리고, 겹
겹의 꽃잎으로 둘러싸인 장미꽃들 중에 하나의 장미꽃처럼 살아버리고 싶었다.
가시 속에서도 아픔 모르고, 술래가 끝내 찾지 못한, 벽장 속에서 잠든 아이처럼
살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자는 그렇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치 뜨거워하면서도 한 발씩 다가가게 되는 탐닉처럼.
“그럼, 무슨 다른 계획이라도?”
“담 밑에 장미꽃을 키울 거예요. 그 외엔 아무것도 정한 게 없어요.”
남자는 웃었다.
“우리 결혼하는 거 어때요? 나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장미를 심을 담벼
락쯤은 자신 있어요.”
남자는 하잘것없는 말장난을 하듯 가볍게 말했다. 여자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당신은 유학을 가게 되나요?”
“유학이 아니라 회사에서 보내주는 해외 연수죠. 길어도 일 년쯤이에요. 우린
주로 독일로 가죠. 가는 것이 좋지만 안 갈 수도 있어요. 서로 가려고 야단이니
까, 안 가긴 쉽죠.”
택시가 왔고 남자는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남자가 손을 흔들자 여자도 손을 흔
들었다.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자 여자는 기사에게 “경찰서에서 내려주세요”라고 말
했다. 택시에서 내린 여자는 어두운 경찰서 정문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여
자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아버지 말대로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한 시절에 이
별을 고해야 할 나이가 충분히 된 것이었다. 때가 되면, 사랑도 저 홀로 흘러가
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말이 사랑을 위로하고, 저 혼자 흘러가게 해 줄 것
인지, 그런 말이 있기나 한 것인지, 여자는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생각해보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런 말들이
무슨 소용일까, 결국엔 안녕, 이라고 하게 되겠지... 여자는 안녕, 이라고 소리를
내어 보았다. 그러자 너무 많은 물을 마신 기분이 되었다. 그 말은 여자의 마음
에 들지 않았다. 무장한 경관이 그녀를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여자는 흐르는 물
살 속에서 버티는 사람처럼 경찰서를 향해 빳빳하게 서 있었다.
여자는 집 앞에서 검은 티셔츠를 입은 어린 남자와 마주쳤다. 여자는 분노했
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 이야기 좀 해요.”
남자애가 말하자 여자가 불쑥 물었다.
“넌 어디서 사니?”
남자애가 손으로 맞은편 건물을 가리켰다. 이층 화실이었다.
“거기서 자니?”
남자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니?”
남자애가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더니 한차례 후드득 떨었다.
“... 한 번만 해요.”
남자애의 눈이 짐승처럼 단순하게 빛났다.
“너를 경찰에 넘길 수도 있어.”
여자가 이빨을 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허락을 구하고 있잖아요.”
“난 약혼자가 있어.”
“그게 이유가 되나요?”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여자예요.”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네가 싫어. 너하고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
“온갖 놈하고 다 하면서... 난 널 알아. 이 문으로 드나드는 놈들도 다 알아.
”
작은 남자애가 격정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미친 놈! 넌 다른 여자와 나를 혼동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애를 밀치고 마리 화실 곁 샛문을 열었다. 남자애는 어쩌다 그렇
게 되어버렸는지 모르지만 화실문과 샛문을 혼동하고, 마리와 여자를 혼동한 것
같았다. 여자는 어쨌든 주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해 일 년 계약을 파기하고라도
이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여자는 철물점 앞에서 공중 전화 부스를 발견하고 들어가 동생의 아파트로 전
화를 했다.
“어디야? 왜 안 오고 전화를 해?”
동생의 사무적인 음성이 들렸다.
“오다가 누굴 만났다고? 누굴 만났는데?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못 올 이유
가 돼? 다음에 만나자, 그러고 오던 길 계속해서 오면 되잖아. 조금 늦더라도
와. 엄마랑 다들 와 있으니까, 늦게라도 꼭 들러.”
“정말 안 오단 말이야? 여기 오는 게 귀찮아졌다고? 꼭 그래야 해? 이해가
안 돼... 언니 왜 그렇게 됐어?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잠깐 기다려.”
누군가 불확실한 말을 하고, 아니야, 어쩌고 하는 동생의 소리가 들리더니, 밖
에 수화기 좀 올려줘, 라는 소리 등이 들렸다.
“언닌 칙칙해. 퀴퀴하다구.”
갑자기 동생이 소리 질렀다.
“어릴 때 우리 옆집에 세 들어 살았던 여자 봤잖아. 집 안에서도 빛 바랜 스
카프를 목에 동여매고 낡은 스웨터를 껴입고 숨겨놓았던 굳은 음식을 야금야금
먹던 여자. 아무도 찾아오지도 않고, 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놓고 양은 냄비에 밥
을 지어 먹으며 혼자 살던 여자 말이야. 몸 전체에 거미줄 같은 주름살이 생겨
누가 슬쩍 손만 대어도 금 간 도자기 인형처럼 그만 파삭 부서져버릴 것 같았잖
아. 맞아 그 여잔 그렇게 부서졌어. 어느 날 부엌 바닥에서 넘어져 죽었다. 난
그 여자가 더 이상 늙을 수 없이 늙은 여잔 줄로 알았는데, 죽었을 때 겨우 쉰
일곱 살이었어. 언닌 그런 여자가 되고 싶은 거야? 왜 가족조차 피하면서 틀어
박히려고만 하는 거야? 언제까지나 우리가 숨는 언닐 찾아다녀야 하느냐구? 사
는 건 다 같은 거야. 누구나 황무지라구. 다들 끊임없이 돋아나 불쑥불쑥 키가
자라는 풀들을 맨손으로 뽑아내고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고 비를 갈망하다가,
햇빛을 갈망하다가, 하면서 사는 거야. 끊임없이 풀들과 싸우면서. 손이 발이 되
도록 말이야. 왜 유독 언니만 손가락들을 벌린 채 자신의 황폐성을 시위하는 거
야?”
동전을 다 쓴 전화는 삑-, 삑- 경고를 했다. 여자는 더 이상 동전을 넣지 않았
다. 전화는 뚝 끊겼다. 여동생도 육 개월 정도만 지나면, 다른 식구들처럼 자신
을 대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남편은 결혼한 지 이 년 만에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 같아. 내가 당신과 살고 있는 건가?”
여자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아무 죄도 없었다.
남편은 그 후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 역시 결혼한 여자였다. 그들은 육 년째 관
계를 지속시켜오고 있었다. 훌륭하고 완벽한 연인들이었다. 그들은 더 가까워질
수 없는 만큼, 더 멀어질 이유도 없었다. 통속적인 비극이 영원성을 보증한 낭만
적인 연인들. 그 여자가 주부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장미를 심을 수 있는 긴 담장도 마련해주었다. 장미꽃을 키우지
않은 건 그녀였다. 그녀에겐 이미 꽃도, 넝쿨도, 가시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혼 속에는 여자가 상상한 것보다 더한 최악이 있었다. 그녀가 삼키는 세월이
모두 가시였다.

마리와 여자는 둘 다 방을 내놓았다. 주인 할머니는 다른 사람이 들 때까지는
보증금을 내줄 수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샛문에 `셋집 있음`이라는 종이를 붙여
놓고 기다려야 했다. 여자는 선본 남자를 그 후 일 주일에 거의 한 번꼴로, 세
번 만났다. 아버지는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집안이 훌륭하고, 큰 부자는 아니지
만 사는 문제는 해결된 부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아들이었다. 남자는
상처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망도, 고독도 없는 사람같았다. 그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결핍의 심정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봄만 있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 여자는 외모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몹시도 밋밋한 그가 오히려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문이 없는 집처럼 영원히 들어설 수 없을 사람. 더
욱이 품 속에 어둡고 아늑한 벽장 같은 것은 설계조차 되어 있지 않을 사람. 여
자의 꿈 속에서는 일본 무사가 벽장 속에서 자신의 복부를 가르거나, 봄의 초원
위를 분홍색 코끼리가 쿵쿵거리며 뛰어다녔다.

그날은 구류 이십구 일이 끝난 날이었다. 열한 시가 되어도 상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거리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행인이 유난히 많았다. 주정꾼들은 창문
아래를 지나며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들은 누가 미
는 듯이 대각선을 그으며 걸었다. 한 취객은 누가 내다 던진 듯 느닷없이 화실
곁 샛문에 꿍 받치기도 했다. “염병할, 누구야? 어느 놈이...” 그 남자는 얼른
몸을 바로 세우더니, 어깨를 위로 치켜올리고, 주위를 빙 둘러보기도 했다. 여자
는 기다림이 지나쳐 목이 아파왔다. 맥주를 마시며 함께 부엌 창가에 서 있던
마리가 말했다.
“길 맞은편에서 어떤 남자애가 이 쪽을 보고 있어.”
“너한테 반했는지도 몰라.”
여자는 남자애를 노려보며 건성으로 말했다.
남자애는 창가에 서 있는 똑같이 머리가 긴 두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
었다.
“야, 망할 자식아, 멀리 안 꺼지니?”
마리는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를 꽥 지르고 창문을 꽝 소리나게 닫았다.
“지겨워, 정말 지겨워.”
마리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투덜거렸다. 검은 털실같은 긴 머리
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마리의 남자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빈털터리인 마리에
게 화실을 내도록 지원해준 사람은 산부인과 의사 아들인 동갑내기인데, 이웃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느라 토요일에만 왔다. 그는 마리에게 청혼을 하고 마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 번째 남자는 시내 빵가겟집 아들로, 빵가게 곁에
서 레코드점을 하고 있었다. 또 한 남자는 신문 기자인데 유부남이었고, 방송국
디스크 자키 역시 유부남이었다. 그들이 모두 마리와 섹스하는 사이라는 건 좀
놀라운 일이긴 했다. 마리는 색정광같이 생기지 않았고, 얼굴과 부조화적인 눈초
리만 제외하면, 오히려 인형처럼 무표정하고 귀여운 스타일이었다. 물론 그 쏘는
듯한 눈매의 위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네 남자 친구는 왜 요즘은 전혀 안 오니? 헤어진 거니?”
여자는 빤히 쳐다만 볼 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 그 사람 본 적 있어. 예술가 같더라. 그림 쪽은 아니고, 시를 쓴다든지,
연주를 한다든지 하는, 하긴 어떤 면에선 독립군 같기도 했어. 문제는 그거지.
사는 데 도움이 안 될 남자라는 거.”
여자는 이번에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너 지금 울려고 하는 거니?”
여자를 바라보던 마리는 문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영리한 애였다.
“애쓸 필요 없어. 흐르는 대로 그냥 두는 거야. 하긴 그러다보니 애인이 네
명이나 꼬여버렸지만. 오는 사람 막을 필요 없지만, 네 명쯤 가도 마찬가지야.
가는 사람은 가는 게 순리니까 가는거야. 어차피 지리멸렬해. 네 명이 있으면 뭐
하니? 하나같이 지리멸렬한 걸. 난 말이야, 실은 한 번도 진짜 사랑에 빠져보지
못했어. 모두 가짜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청춘을 견딜 수 없으니까, 그냥
노는 것뿐이야. 신문 기자 아저씨가 나하고 자기하고 먼데로 나르자고 한다. 농
담이 아니야. 그 사람 자기 아이도 포기하겠대.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난 그런 모
진 짓 하기 싫어요. 사랑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런 모진 짓 해요, 했어. 많이 실
망하더라. 하지만 내가 미쳤니? 그런 뻔뻔스러운 남자랑 살게? 그 남자는 얼굴
이 너무 두꺼워. 화실 차려 준 남자애, 걘 완전히 마마 보이지. 레코드 점 하는
애, 걘 도박꾼이야. 그거 병이야. 정말 못 고치는 병이지. 디스크 자키, 그인 완
전 날라리고. 우린 좋은 친구일 뿐이지. 지겨워. 단 한 번도 정말로 사랑에 빠지
지 못하고 누군가 한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건 얼마나 지루할까,
끔찍하겠지... 아아, 대체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이곳엔 왜 아
무도 없지? 절망적이야.”
상희는 어딘가로 함께 떠나자고 했다. 그곳은 먼 곳일 것이다. 공기 속엔 고무
타는 악취가 나고 도로에 검은 폐수가 고여 있고, 벽들은 검고, 낮의 하늘조차
어두울 것이었다. 좁은 골목에서는 양파 썩는 냄새가 나고, 작고 여윈 남자들이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술에 취해 비틀거릴 것이다. 어디선가 그릇 던지는 소리
가 나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울고, 높은 굴뚝에서는 언제나 검은 연기가 절망적
으로 치솟을 것이다. 여자는 자신이 상희를 기다리고 있는지, 거부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흐릿해져
버렸다. 어쩌면, 생각해보면 사랑한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여자는 자꾸만 맥주
를 마셨다. 그리고 아주 많이 취해버렸다. 여자는 바람에 날리는 나무처럼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미소지었다.
“내 몸 속에서 회오리 바람이 부는 거 같아. 날 좀 잡아줘. 저 문짝으로 날려
가 꿍 부딪칠 것만 같아...”
마리가 여자의 어깨를 안고 쓰러져 누웠다. 마리의 가슴에서 서늘한 물감 냄
새와 담배 냄새와 깊고 따스한 살내음이 났다.

그런 날이 있다. 아침이 턱 밑에 와 있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날이. 여자는 환
한 부엌 창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그가 오지 않고 아침이 와버렸다. 어느 사인가
그녀도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그가 오지도 않았는데...
부지런한 마리는 이미 피아노를 배우러 간 모양이었다. 여자는 부엌으로 가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날이었다. 우기 동안 플라타너스 잎들은 탐욕스럽게
자라났다. 여자는 처음으로 초록이 맹목적이고 무지하며, 잔인한 색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에게 사랑은 몇 번째 집일까... 여자는 그가
오지도 않았는데, 아침이 와버렸다는 것이 낯설어 두 눈에 눈물이 어렸다.

오랜만에 활짝 개었던 날씨가 오후부터 바뀌더니. 퇴근 시간 무렵에는 폭우로
변했다. 비는 거짓말처럼 퍼부어댔다. 흡사 폭포같은 비였다. 여자가 어둑한 교
무실에 앉아 있으니, 지나가던 교장이 문을 열고 여자를 불렀다.
“김 선생, 태워줄 테니 나갑시다.”
누군가 태워주려 하지 않는다면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비이기는 했다. 남아
있던 몇몇 교사들이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공연히 서랍을 열어 보이며, 아
직 일이 안 끝났다고 말했다. 교장은 더 이상 추근대지 않고 담백하게 지나갔다.
교장은 그 뒤로 더 이상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감과 교무주임과 교
사들이 모두 여자의 비밀스러운 애인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여자는 교장
의 차가 교문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는 학교
앞에서 택시를 탔다. 비 오는 날은 평범한 택시 안도 괜찮은 곳이었다. 여자가
괜찮다고 느끼자마자 기사가 카세트 테이프를 넣었다. 역시 조용필 노래였다. 여
자가 탄 택시가 화실 앞에 정지하자 문 앞에 서 있던 마리가 택시를 향해 달려
들었다. 마리는 장난스럽게 여자를 밀고 들어앉으며 기사에게 외쳤다.
“시내로 데려다주세요. 이 아가씨두요.”
택시는 곧바로 출발했다.
“누구, 나 찾아오지 않았니?”
“누구?”
“아니...”
여자는 아니, 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까마귀처럼 검은 옷을 입
고, 눈가도 검게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중독된 사람 같아.”
“공포 중독! 나 일 끝나자마자 튀어나온 거야. 저녁 팀들 없앴어. 어두워지면
안절부절하지. 가게 안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어떤지 알아?”
마리가 눈을 괴기스럽도록 커다랗게 치떴다. 눈 속에 푸른빛이 어렸다. 마리는
눈앞에 두 손을 들어올리고 속삭였다.
“해질녘이면, 어디선가, 미싱 소리가 들리는 거야. 들들들, 들들들들... 절름발
이 남자의 거칠고 불균형한 미싱 소리 말이야. 들들들, 들들들...”
이번에는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여자는 커다랗게 눈을 뜬 채 마주 보았다. 갑자기 마리가 깔깔깔 웃기 시
작했다. 웃음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마리는 두 팔을 커다랗게 벌려 여자의 허
리를 안고 흔들어댔다.
“오, 가언 씨 꼴 좀 봐! 정신 차려 가언 씨, 농담이야, 농담.”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호수 한가운데
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얼굴에서 손을 떼내면 몸 속에서 울음이 쏟
아져나올 것같이 슬펐다. 여자는 하루종일, 상희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
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냥 안녕, 이라고 말
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잔인한가...
마리와 여자는 비 냄새가 나는 커다란 극장 안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자판기
에서 뺀 커피를 마셨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영화가 끝난 뒤엔 디스크 자키가
일하는 커피숍으로 갔다. 디스크 자키는 그들이 가자 빈센트 반 고흐를 틀어주
었다. 마리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묘지에서,
모자 달린 망토를 입은 무리와 뒤로 걷는 춤을 추고 있었다. 입 모양으로 보아
<스릴러>같았다. 밖에는 비가 계속 퍼붓고 있었다. 어디에나 바닥이 축축하고,
사람들의 옷에서 꿉꿉한 냄새와 뿌연 김 같은 더운 체취가 풍겼다. 그리고 어디
나 적적하고 호젓했다. 디스크 자키가 일을 마치자 저녁을 먹고 칵테일을 마신
뒤 디스코테크엘 갔다. 그리고 다시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시내에서 집 쪽을
향해 걸었다.
우산도 펴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니느라 이미 옷을 거의 적셔버린
뒤였다. 여자는 하이힐과 푸른색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 차림이었다. 마리도 여
자도 디스크 자키도 비틀거렸다. 여자는 한없이 멀리까지도 걸을 수 있을 것 같
았다. 여자는 자신이 비바람에 날리는 나무처럼 어지럽게 흔들릴 뿐, 걷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한 시 삼십 분의 거리에는 비바람만 가득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말할 수 없이 피곤했고, 그런 피곤이 그들을 더욱 정답게 만들었다. 집 근
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한통속이 되었고, 당연한 것처럼 다같이 여자의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젖은 옷들을 벗어 던진 뒤 이내 잠들었다.
여자는 외장을 노란 인조석으로 마감한 삼층 상가 앞에 다시 서 있었다. 일층
엔 팬시점과 웨딩 드레스숍이 들어 있고, 이층에는 미장원이, 삼층에는 살림집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팬시점 곁 좁다란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여자는
서른다섯 살이었고, 몇 번의 비가 더 지나가면, 산산이 흩어져버릴 것 같은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불가능한
것에 속해 있기에 그것은 비할 수 없이 황폐한 것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알루미
늄 호일처럼 참혹하게 구겨져 있었다. 독같이 스민 회한은 단지 십 년 동안에,
여자의 얼굴에 칼로 저미듯, 수많은 주름살을 새겨놓았다.
십 년 동안 여자는 집 안에서 아이 키우는 여자로 살았다., 그녀는 네 번쯤 이
사를 했고, 은행에 갔고, 소아과 병원과 치과 병원에 갔고, 백화점과 아파트 상
가의 슈퍼마켓에 갔으며, 아이의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 그 외에는 언제나 집 안
에 있었다. 누가 가두어둔 듯이 꼼짝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자는 집이 있던
자리를 지나 보행 신호를 받고 길을 건너 해안 쪽으로 걸어갔다. 주택가의 좁다
란 길을 지나니 거기 아직도 폐쇄된 철길이 있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동강난
철로였다. 녹과 기름이 배어 갈색으로 변한 자갈돌, 녹슨 레일, 썩어서 부서지는
검은 침목들, 효력을 상실한 표지판들... 이젠 아무도 그 철길 가에 해바라기를
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날 새벽에... 여자는 잠결에 조용히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은 다
시 닫히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이 들렸다. 침묵은 거대한 얼음덩이가 이마를 누
르는 듯 선명하고 차가웠다. 여자는 문득 눈을 뜨고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상희
였다. 손에 샛노란 해바라기꽃을 들고 있었다. 해바라기 꽃잎에서 빗물이 뚝 떨
어졌다. 상희의 얼굴이 까마귀처럼 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어쩐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허리 부분에 얹혀있는 디스크 자키의 팔을
보았다. 마리 곁에 누었던 디스크 자키는 어찌 된 일인지 여자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두 팔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방 안엔 여전
히 불이 켜져 있고, 마리는 없었다. 부지런한 마리는 이미 피아노를 배우러 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디스크 자키의 팔을 풀고, 몸을 벌떡 일으켜 상
희에게 자초지종을 말할 수 있었다. 디스크 자키가 그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
에 대해, 디스크 자키가 그녀를 껴안고 잠들어 있는 것에 대해, 마리 화실의 마
리에 대해...
그러나 여자는 해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무력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
식으로 이별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쩌면 그 순간 여자는 속으로 안녕, 이
라고 말했는지도 몰랐다. 해바라기꽃이 방바닥에 흩어졌다. 여자는 휘청, 돌아서
는 상희의 발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저 발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해명
해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못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생각해보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계단 울리는 소리
가 아주 멀게 들렸다. 샛문이 내동댕이쳐지듯 탕, 소리를 내며 닫혔다. 거리를
내딛는 발자국 소리도 들은 듯했다. 방바닥엔 빗물에 젖은 노란 해바라기꽃이
흩어져 있었다. 여자는 긴 한숨을 쉬며, 팔을 뻗어 그 노란 꽃을 손에 쥐었다.
해바라기 줄기는 축축하고 까칠했다. 안녕, 안녕... 여자는 자신의 한숨 속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때 포도를 반으로 찢어벌리는 듯한 급정거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꽝` 하는
굉음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한순간 여자의 등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방이 흔들렸다. 여자는 간신히 몸을 수습해 부엌 창가로 다가갔다. 안개가 거리
를 감싸고 있고 보이지 않는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차 한대가 긴 경적을
울리며, 비상등을 켜고 정지했다. 거리 저편에서도 경적이 울렸다. 그리고 뒤에
달려 온 차도 경적을 길게 울리며 비상등을 켜고 급정거했다. 잠시 동안 여자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빈 상자처럼 몸 안이 텅 비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소리조차 몸을 떠나버려, 누구를 부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거리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트럭은 작은 파출소 앞쯤에서 뭔가를 들이받
고 선 것 같았다. 새벽 거리의 행인 몇이 우산을 쓰고 그쪽으로 모여들고 있었
다. “사람이 죽었어! 웬 청년이...” 아래 가게에서 나온 사람들이 팔짱을 끼며
웅성댔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길 건너편에 경찰들이 차에서 내
려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우의를 입고 있어서 비밀요원들 같았다. 어디선가
절름발이 남자의 미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들들들, 들들들들... 미싱 바늘
이 여자의 이마를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고통, 여자는 이마 위에 고통이 새겨지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여자는 구토를 느끼며 부엌 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손에
는 여전히 샛노란 해바라기꽃을 쥐고 있었다.
그해 십이월, 여자는 그 이층 방을 떠났다. 마리도 여자보다 한 달쯤 먼저 나
갔다. 그녀는 산부인과 아들과 갑자기 결혼을 해 시부모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
다. 마리는 그날 새벽 트럭에 치여 죽은 이는 길 건너편 화실에 살던, 검을 티셔
츠를 입은 남자애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날 유난히 일찍 피아노를 배우러 가고
있었고, 그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마리는 그 남자애가 화실 곁 샛문에서
튀어나와 몇 걸음 달리더니, 길을 건너 화실로 가려는 듯 도로로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안개 낀 새벽 도로를 질주하던 트럭은 브레이크를 잡았으나, 이십여 미
터나 미끄러지면서 파출소 앞 전신주를 들이받고서야 섰다고 했다. 마리는 정
말로 그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여자는 부엌 바닥에 쓰러진 뒤로 오랫동안 누워 지냈다. 온갖 무서운 것들이
모두 꿈이 되어 잠 속에서 그녀를 엿보았다. 벽장 속에서 자신의 배를 가르는
일본 무사, 초원을 쿵쿵 뛰어다니는 분홍색 코끼리, 미싱을 밟는 절름발이 남자,
계단 위에 흩어진 젖은 해바라기, 까마귀처럼 검던 하나의 얼굴... 여자는 애써
마리의 말을 믿으려 했다. 실제로 상희는 오지 않고 여름이 다 지나갔다. 여자는
팔월 말의 어느 날 새벽, 해안길을 걷다가 폐쇄된 철길 가에서 어른 키보다 큰
해바라기들을 보았다. 둥근 꽃을 하나씩 피운 해바라기 무리 속에 휑뎅하게 목
이 잘린 해바라기 줄기들이 섞여 있었다. 줄기는 다섯 개였고, 아직 푸르렀다.
여자는 그 후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처음에 선본 남자와 결혼했다. 그
녀는 원래 평범한 여자였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것도 잊지 못했다. 그 일본식 목조집이 사라진 뒤에도, 여자
는 여전히 환하게 불켜진 그 이층 방에서 살아왔다. 여자는 그곳에서 아들과 딸
을 연이어 낳고,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밤에 혼자 잠들고, 누가 가두어 둔 듯 꼼
짝도 하지 않은 채, 회한 때문에 구겨진 알루미늄 호일처럼 참혹하게 손상되어
갔다. 여자는 장미꽃 속의 장미꽃처럼 생을 놓아버리고 가볍게, 아무 가치도 없
이 살아버리게 될까봐, 술래가 마지막까지 찾지 못한 벽장 속의 잠든 아이처럼
살게 될까봐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여자는 인생의 그보다 더 최악이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가망이 없었다.

여자는 머리를 수그린 채 폐쇄된 철길을 따라 느리게 걸어갔다. 계속해서 걸
어가 굴다리를 지나고, 빈민가의 좁다란 뒷길을 지나고, 높은 축대 아랫길을 지
나면, 어딘가에서 수많은 바퀴를 구르며 기차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 기차는
벼락치듯, 순식간에 여자의 수그린 머리 위로 지나갈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 생
애가 한 순간 음화처럼 번쩍 드러날 것이다. 꽃이 꺾인 해바라기 줄기처럼, 줄곧
비어 있었던, 폐허에 불과한 생이. 여자는 긴 한숨을 쉬었다. 안녕, 안녕... 여자는
자신의 한숨 속에서 그 말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결
코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다리우스]

감사드립니다. 문 워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