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벽제동 보광로 266-1 수녀골은 기독교 동광원 수도회 벽제분원이다. 동광원 벽제분원은 1957년 3월 이현필을 떠르던 세분의 수녀들이 이곳을 찾아 터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깊은 산중이었던 이곳에 세분은 움막을 짓고 농사와 기도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뒤다라 많은 수녀들이 함께 들어와 생활하면서 이곳이 수녀들이 사는 골짜기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서 70년대에 5-60여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수도공동체를 이루었다. 주변에 나무를 심고 땅을 개간하고 옹벽을 쌓고 제방을 쌓고 그렇게 하여 논이 되고 밭이 되고 집터가 되었다. 1970년대 식량증산운동이 한창일 때는 보리농사를 잘 지었다고 경기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하였고 고양군청에서 모범상도 받았다. 1964년에 동광원을 창시하고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선생이 이곳 수녀골에서 소천하였고 현재 그의 무덤이 이 골짜기에 있다. 1970년대에는 오북환 장로께서 모든 동광원 식구들을 10여명씩 계명산으로 불러 1년 과정의 성경공부반을 운영하였다. 이들이 현재 광주 남원 도암 등에 흩어져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동광원 벽제분원(수녀골)에는 네분의 수녀들이 살고 잇다. 토지는 모두 영놀법인에서 주말농장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또한 이현필선생님을 기념하여 헌신관을 지었다. 누구나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자 하는 이들이 수녀골을 찾아 헌신관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벽제 계명산 수녀원
그러던 중 6ㆍ25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1949년 여순 반란 사건으로 고아들과 떠도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현필은 탁발 수도를 그만두고 전남 화순군 화학산 청소 마을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1950년 1월 광주에서 정인세 선생을 통해 YMCA를 중심으로 동광원(東光園)이란 이름의 고아원이 생기자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은 동광원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섬겼고 결국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 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오갈 데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하룻밤씩 재워주는 운동을 벌였다.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고 재워 보내는 이 사역은 후에 귀일원(歸一園)의 모체가 되었다. 여순 사건과 전쟁에 휘말린 민족의 역사 현장에는 고아뿐 아니라 과부, 장애인, 무의탁 노인, 나환자, 폐결핵 환자들이 들끓었다. 동광원의 고아 사역이 귀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처음 10여명을 돌보던 것이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현필 선생과 숨어서 수도하는 동광원 지체들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기도 밖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재 동광원 식구들은 전국에 약 80명 가량이며 남녀 모두 독신 생활하는 공동체 형태로 살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원에 본원이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그리고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이 있다.
말년에 이현필은 말 한마디도 못할 만큼 후두 결핵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그는 자기 건강이 오래 못갈 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 가서 혼자 죽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고 기차를 타고 그의 제자 셋째(한영우 집사)가 넝마주이하면서 살고 있는 신촌 거지 굴까지 업혀서 갔다. 그는 묘지에서 주어 온 칠성판을 깔고 누웠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서 그는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어졌고, 그 자신도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날이 새자 죽음을 넘긴 그는 필담으로 실로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저는 그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고백합니다. 제게 있어선 선행이 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귀할 뿐입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저는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위선자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은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나갈 것입니다.”그리고 무슨 고기든지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셋째는 굴비 한 마리를 사서 동냥 다닐 때 쓰는 때 묻은 깡통에 물을 붓고 끓여 가져왔다. 이현필은 그 국물을 자기 입에 떠 넣어 달라고 말했다. 셋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기 국물은 후두 결핵으로 말 못하는 이현필의 목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육식 아니 커피 한잔 마시지 않던 그가 고기 국을 마신 것이다. 그때가 바로 1955년 가을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도 못 버틴다는 후두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훗날 그는 이때의 심중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저지른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그동안 나의 금욕, 고행의 모습 때문에 따르던 사람들이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몰아 붙이며 몽둥이로 때리고 동광원에서 쫓아내도 할 수 없다는 각오로 고기를 먹었습니다.” 물론 이현필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사람 보기에 그는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보였다. 더욱이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에게 비춰진 인상이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오해될 것을 걱정하여 의도적으로 파계했던 것이다.
이현필 선생 임종하신 집
1964년 이현필은 광주 동광원에서 마지막 고별 집회를 여러 날 계속하고는 세상 떠날 때가 가까운 줄 알고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고장은 경기도 벽제 계명산 수녀원이었다. 그곳에 여 제자 정한나 수녀가 홀로 들어가 굴을 파고 살며 개척한 동광원 분원이 있고, 산수 좋은 뒷산 개울가에 현동완 총무의 별장 자리에 조그마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현 총무가 동광원에 기증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계명산 수녀원에서 줄곧 기도하면서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미리 말하며, 제자들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장래를 부탁하고 일일이 축복하였다.
최후의 순간이 왔다. 평생 영양실조로 시달린 그의 육체가 더 이상 오랜 병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수녀들이 깨끗이 빨아 두었던 선생의 누더기 바지 저고리를 수의로 입혀 드렸다. 그러나 그는 입었던 옷을 다시 벗으며 “이것은 내가 깨끗이 입은 것이니 내가 죽으면 이 옷을 없애 버리지 말고 헐벗은 사람에게 주어 입게 하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시체에 수의를 입히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또 “나는 죄인이니 내가 죽으면 관에 넣지 마시오. 죄인의 시체니까 거적대기에 싸서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길가에 평토장해 주시오. 분상을 만들어 놓는 이는 화를 받을 것이오.”하고 유언하였다.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몸은 불덩이 같이 뜨거워지고 숨은 곧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자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바로 이때 이현필에게 신기한 기쁨의 물결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기쁨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한 이현필은 또 다시 외쳤다. “아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하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꽃피고 새 우는 봄의 문턱에서 이현필은 한 알의 밀알 씨가 되어 벽제 계명산에 묻혔다. 유영모 선생은 이 사실을 한시로 읊었다. “도암서기무등등 현필이공계명치”(道岩瑞氣無等騰 賢弼李公啓明致) “도암의 상서로운 기운이 무등산에 오르고 이현필 공이 벽제 계명산에서 마치다”라는 뜻이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下, P145)
이현필의 평생 갈망과 목표는 순결과 자기완성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복음 삼덕 곧 순결은 목숨보다 소중하며, 순명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나 하나의 인격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걱정하는 이웃이 있으면 자기도 밤새 잠 못 이루고 함께 걱정했고, 형제들이 기뻐할 때는 자기도 춤출 듯이 기뻐하였다. 우리도 이현필의 길을 가자.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길이리라. 아, 제 2의 이현필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오늘 우린 맨발의 성자를 어디서 또 다시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아, 맨발의 성자여, 한국 강산에 신음하는 겨레와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 다시 오라.